경남은 원래 연회에서 서율의 신분을 공개해, 변씨 가문과 서율을 깔보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실현되기도 전에 서율이 물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율은 경남의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깊은 눈빛을 띠며 대답했다. “우리 관계에 대해서는 도혁에게 말하지 마. 지옥순은 이익에만 눈이 먼 사람이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아마 쉽게 도혁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을 거야.” 서율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이어서 말했다. “도혁은 주식 지분 때문에 나와 3년이나 결혼 생활을 이어간 사람이야. 그가 그 정도로 헌신적일 리 없지. 굳이 알릴 필요도 없어.” 경남은 최근 들려오는 소문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도혁과 서율이 아직 이혼하지도 않았는데, 지옥순은 벌써 변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혼인을 성사시키겠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지옥순의 뻔뻔한 성격을 고려하면, 서율의 진짜 신분이 밝혀질 경우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경남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율아, 밖에서는 네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아. 사람들은 네가 변씨 가문의 돈을 노리고 결혼했다고 비웃고 있어. 신분을 공개하지 않으면 그들의 비난은 계속될 거야.” 서율은 물에 빠졌을 때 사람들이 보였던 비웃음 가득한 얼굴들을 떠올렸다. “내 신분을 알게 된다고 해서 그들이 변할 것 같아? 오히려 더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겠지. 하지만 그건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그녀는 경남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육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신분 없이도 난 그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어. 오빠, 난 내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거야.” 경남은 서율의 확고한 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며칠 후, 서율의 몸 상태는 점차 회복되었다. 도혁은 의사에게 꾸지람을 듣고 나서인지, 아니면 서율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 때문인지, 거의 매일같이 병문안을 왔다
효연은 도발적인 눈빛을 번뜩이며 오만하게 말했다. “너 도혁 오빠한테 일렀겠지? 하지만 오빠가 널 믿었을까? 문서율, 넌 도혁 오빠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죽어도, 오히려 이혼 문제까지 깔끔하게 해결될 테니 상관없겠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율은 옆에 있던 물컵을 들어 힘껏 효연을 향해 던졌다. 쨍그랑! 컵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서율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고, 창백한 입술 사이로 차가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나가.” 그러나 효연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비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내가 한 말이 맞았나 보네?” 효연이 더 말을 잇기 전에,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도혁의 시선은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에 잠시 머물렀고, 그의 눈빛은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침대에 누워 있는 서율을 바라보았다. 요즘 서율은 눈에 띄게 야위었고, 혈색 없는 얼굴은 그녀를 더욱 병약해 보이게 했다. 도혁은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 거야?” 서율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변도혁, 뻔히 알면서도 묻는 거야? 누군가 날 불쾌하게 만들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도혁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이 지민을 좋아하지 않는 건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지민을 비난했으리라 짐작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효연과 지민에게 말했다. “너희는 먼저 나가 있어.” “도혁아...”“나가서 이야기하자.” 지민은 잠시 서율을 바라보고는 병실을 떠났다. 도혁은 서율을 향해 짧게 말했다. “난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병실 밖에서 효연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불평했다. “문서율이 분명 도혁 오빠에게 내가 밀었다고 고발했을 거야! 물에 빠진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저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모르겠어. 지금 연약한 척하면서 도혁 오빠의 관심을 다 끌어가고 있잖아! 정말 얄미운 여자야!” 효연은 멈추지 않
“제가 밀었다고 치면 어쩔 건데요? 그냥 장난으로 한 거잖아요! 수영장이 그렇게 얕은데, 빠졌다고 죽을 뻔했다니, 웃기지 않나요?” 효연은 뻔뻔한 태도로 도혁을 도발하듯 말했다. 도혁의 눈빛은 순식간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아까는 서율이 스스로 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더니, 이제는 장난이었다고 말을 바꾸는 거야?” 효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녀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맞아요, 제가 밀었어요. 그년이 눈에 거슬렸으니까!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거죠?” 효연은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예전에 그 여자가 꼼수를 부려서 오빠랑 지민이가 3년 동안 떨어져 지내게 만들었잖아요! 최근에도 서율이 얼마나 기고만장하게 굴었는지 몰라요? 지민이를 얼마나 괴롭혔는데! 심지어 할머니까지 화나게 해서 병원에 입원하게 만들었다고요.” 효연은 자신감이 붙은 듯 목소리를 더 높이며 말했다. “난 그냥 지민을 대신해서 그 여자를 혼내준 것뿐이에요. 이건 내 책임이니까, 지민이랑은 상관없어요. 뭐든 나한테 화풀이하세요.” 도혁의 얼굴은 서리처럼 싸늘해졌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나와 서율 사이의 일에 너는 끼어들 필요 없어.” 효연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지민은 무거운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도혁아...” 지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효연이는 아마 충동적으로 그랬을 거야.” 도혁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다. “충동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고?” 효연은 고개를 숙이며 억울한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물에 빠진 것뿐인데, 그게 죽을 일인가요?” 도혁은 더욱 차갑게 말했다. “넌 문서율이 물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 효연의 눈에 잠시 죄책감이 비쳤다. 지난번 지옥순의 생일 파티에서 서율이 아이에게 밀려 수영장에 빠졌을 때, 서율은 과장될 정도로 물을 두려워했다. 그때 서율이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효연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율은 이미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마침 2층에서 촬영 중이던 사람이 우연히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기 때문이다. 도혁은 그 사실을 듣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빛은 어두워졌고, 서율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정효연은 그냥 놔둬. 내가 나중에 보상해 줄게.”서율은 도혁의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나중에? 3년의 약속이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지금 와서 보상을 해주겠다고?” 도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이혼하지 않아도 돼.”서율은 놀란 눈빛으로 도혁을 응시했다. “변도혁, 그동안 계속 이혼을 서두르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혼하지 않겠다고? 고작 정효연을 감싸기 위해 이런 큰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거야?”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답했다. “지민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네가 지민을 그렇게 괴롭히지 않았다면, 나는 이혼을 고려하지 않았을 거야.”서율은 과거의 도혁을 떠올렸다. 결혼 후 도혁은 늘 차갑고 무심했지만, 한 번도 이혼을 언급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서율은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민이 돌아오자마자 그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과거라면 서율은 도혁의 이런 말을 듣고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서율은 이미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서율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변 대표님, 당신은 자극적인 걸 좋아하나 보네. 집 안에는 본처, 집 밖에는 애인, 두 여자를 동시에 두고 싶다는 말이야?” 서율의 차가운 말투에도 도혁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물에서 구해냈던 그날이 떠올랐다. 도혁은 서율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겁게 울렸다. “지민은 나를 구해 준 사람이야. 나는 서지민에게 큰 빚을 졌어.” 서율은 냉소를 띤 채 도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가 그 빚을 갚는 방식이 바로 두 여자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거야?”도
서율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변도혁,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도혁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서율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변도혁, 난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이혼은 나에게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일 거야.” 서율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경멸이 서려 있었다. “너와 서지민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나와는 상관없어. 그러나 정효연은 날 죽이려 한 살인자야. 그녀가 서지민의 친구든 부모든, 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도혁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는 더 이상 서율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문서율, 목격자가 제공한 영상은 이미 삭제했어.” 서율은 오랜 침묵 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이걸 알려주려고 온 거야?” “문서율, 너도 알잖아. 내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지민이한테 손댈 수 없어.” 서율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혁은 일어나며 말했다. “몸조리 잘해. 퇴원할 때 내가 데리러 올게.” 도혁이 병실 문을 나가려던 순간, 서율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를 멈추게 만들었다. “변도혁, 난 절대 정효연을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도혁은 잠시 멈춰 섰다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퇴원하는 날, 서율은 도혁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고 미리 육경남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돌아가는 길에 경남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변도혁이 목격자 영상을 삭제하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서율아, 오빠가 도와줄까?” 법적으로 이 일을 해결하려면 증거가 필요했다. 증거가 없으면 서율이가 소송을 걸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필요 없어.” 서율은 눈을 감고 기대어 앉았다. 차창 밖으로 스며드는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리자 차갑고도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경남은 서율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효연
정효연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너희들, 문서율 그년이 보낸 거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여자가 효연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 여자들은 모두 훈련을 거친 사람들이었기에 그 손길은 매섭고 강했다. 효연은 그 한 대에 그대로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여자들은 효연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입 조심해. 누구를 그딴 식으로 부르는 거야?” 한 번도 이런 모욕을 당해본 적 없는 효연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독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말한 건 바로 문서율 그년이야! 그년, 그년, 그년! 왜 지난번에 물에 빠졌을 때 죽지 않았던 거야!” 퍽! 또다시 뺨을 세게 맞았다. 효연은 맞은 충격으로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여자가 효연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다시 말해봐, 누가 그년이라는 거지?” 효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문서율... 그년이야!” 그러자 또다시 뺨을 맞게 되었다.이번에는 치아마저 흔들렸지만, 효연은 끝까지 입을 다물지 않았다. 바로 그때, 문 밖에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효연을 데려왔어?”서율의 목소리가 들리자, 효연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여자가 손을 풀었다. “아가씨, 이미 데려왔습니다.” 서율이 나타나자, 차가운 표정을 보이던 젊은 여자들은 마치 이웃집 소녀처럼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이들은 서율을 보호하기 위해 고용된 경호원들이었다. 서율은 도혁과 결혼한 후 경호원을 돌려보냈지만 이제 다시 불러들였다. 가장 앞에 있던 여자가 서율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가씨께서 손을 대실 필요 없어요. 증거가 절대 남지 않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효연은 그 대화를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증거조차 남기지 않겠다고?' 효연은 고개를 들고 서율을 향해 말했다. “문서율, 네가 감히 나한테 손을 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두고 봐!” 서율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어떻게 날 가만두지
효연은 붉어진 눈을 치켜뜨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문서율, 네가 언제까지 이렇게 거만하게 굴 수 있을 것 같아? 도혁 오빠가 너랑 이혼하면, 너한테 뭐라도 떨어질 거 같아? 그때가 되면 내가 널 짓밟아 죽이는 건, 마치 개미를 밟는 것만큼이나 쉬울 거야!”서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의지할 게 없다면 스스로 일어서야지.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완전히 의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떤 사람들은 매번 일이 터질 때마다 남자에게 매달리더라. 남자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말이야.” 서율은 효연의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 “더군다나, 너 같은 사람을 혼내는 데 남자의 힘은 필요 없지.” 효연은 서율을 증오하는 눈빛으로 노려보며 무언가 떠오른 듯 웃음을 터뜨렸다. “문서율, 그날 네가 얼마나 초라했는지 알아? 물속에서 허우적대던 모습이 네가 얼마나 실패한 인간인지를 보여주고 있었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는데, 아무도 널 구하려 하지 않았지?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퍽! 또다시 뺨 소리가 울려 퍼졌고, 효연의 얼굴은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효연은 겁을 먹지 않고 더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문서율, 네가 물속에서 발버둥치던 그 모습 정말 우습더라! 그때 찍은 영상 내 핸드폰에 아직도 남아있어. 하루에 몇 번씩 그 영상을 봐. 속이 다 시원해져!”“변씨 가문의 며느리? 외딴 길거리의 들개만도 못한 주제에!” 서율이 손을 들어 효연의 뺨을 때리려 하자, 효연은 계속 도발했다. “더 때려봐! 네가 날 때리는 건 화가 났다는 증거겠지. 몇 대 맞는 거쯤이야 아무 상관없어. 돌아가서 그 영상을 몇 번 더 보면 그만이니까.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서율은 때리던 손을 멈추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지.” 이때 서율은 효연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사람을 죽이려다 만 범죄자에게는 너무 가벼운 처벌이지.” 서율은 효연을 내려다보며
서율은 화를 내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입이 너무 더럽네. 좀 깨끗하게 씻어줘야겠어.”그 말을 들은 경호원 중 한 명이 천천히 가방에서 장갑을 꺼내 끼기 시작했다. 효연은 상황을 눈치채고 두려움에 휩싸여 소리쳤다. “문서율, 넌 그저 아무나와 자는... 아악!” 경호원은 휴지통에서 사용한 휴지를 집어들어 효연의 입에 쑤셔 넣었다. 효연은 뱉어내려 했지만, 다시 머리가 변기 속으로 처박혔다. 서율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동정이나 연민은 없었다.효연이가 자신을 거의 죽일 뻔했던 일을 생각하면, 목숨을 앗아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서율은 충분히 관대했다. 시간이 지나 서율은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그만 가자.” 경호원들은 그제야 효연을 풀어주었다. 효연은 변기 옆에 축 늘어져 숨을 헐떡이며 구역질을 했다. 생전 처음 겪는 굴욕에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이건 단순한 처벌이 아닌, 잔혹한 고문이었다. ...효연을 처벌한 후 기분이 한결 나아진 서율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음식을 반쯤 먹었을 때, 문이 열리며 그림자가 그녀 앞에 드리워졌다.서율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도혁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서율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담담하게 말했다.“이혼 문제로 날 찾은 거야?”도혁의 차가운 눈빛이 서율에게 고정됐다.“내가 왜 왔는지 모르는 거야?”서율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왔는지 어떻게 알겠어?”도혁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그녀를 깊이 응시했다.“정효연이 병원에 입원했어.”서율은 전혀 놀라지 않고, 냉담하게 물었다.“그래서?”“하고 싶은 말 없어?”서율은 그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변도혁, 넌 내가 목숨을 위협했던 사람을 동정할 거라고 생각해?”도혁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정효연이 어떻게 됐는지는 궁금하지 않아?”서율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어머니로서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서율은 도혁의 ‘가식’이 정말로 불쾌했지만, 그가 사람을 달래는 데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율도 문미정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서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네가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다고 말씀드릴게.” 도혁은 외투를 벗던 중 고개를 들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는 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왜 합당하지 않지?”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니까...” 서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차분히 말을 끊었다. “문서율,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서율은 차갑게 말했다. “곧 끝날 관계야.” “문서율.”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서율은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혁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고지성, 네가 새로 만날 아니야?”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서율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네!” 서율은 차갑게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네가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처럼 결혼 중에 불륜을 저지를 만큼 뻔뻔하지 않아.”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의 턱을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성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서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혁은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꺼내 그녀에게 채워주었다. 서율은 잠시 얼어붙었다. 곧 도혁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안전벨트 매야지.” 이 광경을 지켜본 문미정은 도혁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율아, 조수석에 타더라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단다. 도혁이가 참 세심하구나.” 문미정이 없었다면, 서율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하긴 세심하긴 해. 다른 여자의 물건이 당당하게 조수석에 잡을 정도로.’마치 지민이 그의 아내인 것처럼. 서율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미정은 도혁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도혁아, 예전에 너한테 첫사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최근에 돌아왔다며?” 문미정의 말에 서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혁이가 지민과 함께 어울린다는 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 도혁이가 지민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미정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반면 도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네, 지금 HS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미정이 살짝 톤을 올리며 물었다. “그 아가씨가 어쩌다 HS그룹에서 일하게 된 거지?” “지민은 원래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를 구하다 다리를 다쳐 예전처럼 무용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제가 HS그룹 내의 가벼운 일을 맡겼습니다. 지민이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아야 마땅합니다.” 도혁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문미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율 역시 그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문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혁아, S시에 네가 그 아가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직 옛 정을 못 잊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란다...” 도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와 지민은 이미 끝난 관계입니다. 제가 서율과 결혼한 이
서율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묻고 있었다고?” 도혁은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고지성 씨만큼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고지성 씨께 당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어.” 지성과 서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이니, 그들의 오랜 정은 부부 3년의 세월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혁의 말을 듣자 문미정은 도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지성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문미정은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성은 문미정의 앞에서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없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타려는 순간, 서율은 문미정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도혁이 갑자기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서율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연기 잘하네.’ 결혼한 3년 동안, 도혁은 한 번도 서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수석에 앉히지도 않았다. 한 번은 도혁과 함께 지옥순의 생신잔치에 참석할 때,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하자,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뒷좌석에 타.” 그 이후로, 서율은 도혁과 함께 외출할 때 조수석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언제나 뒷좌석에 앉았다. 이제 와서, 서율은 조수석에 앉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로 인해 문미정의 마음은 점차 도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도 문미정은 서율에게 도혁과 다투지 말라고 계속해서 타일렀다. 문미정이 있는 자리에서 도혁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이상, 서율은 그의 체면을 깎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서율의 눈에 문 앞에 붙은 ‘전용 좌석’이라는 스티커가 들어왔다. 순간 멍하니
문미정은 서율을 쳐다보며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혁을 데리고 온 건 사실 네가 아닌 도혁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잘 말하지 않잖니. 그래서 네가 도혁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지 의심스러웠거든.” “지성이는 참 괜찮은 아이야. 그동안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부모님께서 아무리 결혼하라고 재촉해도 따르지 않았대. 그건 아마 아직 네가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야.” “도혁이가 너에게 진심이라면, 지성의 마음을 일찍 정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도 지난번 지성과의 만남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율은 그를 오빠처럼만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혁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혁과 이혼한다고 해도, 지성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성의 마음을 빨리 정리해주는 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 지성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뒤에 서 있는 도혁을 발견했다. 지성은 도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건 서율과 문미정 앞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과는 달랐다. “변도혁 씨, 아주머니와 서율이랑 함께 있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요?” 도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고지성 씨가 서율을 대접했다는 얘길 듣고, 이번에는 고지성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더러 계산하라고 하셨어요.” 도혁의 말에 담긴 도발을 느낀 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도혁 씨, 아무리 연기가 완벽해도 결국엔 연기일 뿐이죠. 아주머니를 속이는 건 몰라도, 나한테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나요?” 지성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라도 고지성 씨는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저는 부를 수
서율은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순간 당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멍하니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도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메뉴를 주문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짓에 온 신경이 쏠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더 세게 쥐었고 서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도혁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더욱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서율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고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성은 서율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율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운 거야? 에어컨 온도를 좀 더 낮춰줄까?” 서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온도가 딱 좋아.” 지성은 그녀가 거절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도혁도 서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듯, 메뉴를 다 고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율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물컵을 들어 도혁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문미정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듯, 최근의 일상이나 업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도혁의 손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메뉴 주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율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이제 문미정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을 본 순간, 서율은 할 말을
지성은 문미정과 서율을 보자마자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했다. “아주머니, 서율아.” 곧이어 그의 시선이 함께 온 도혁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지성은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변도혁 씨, 반갑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지성 씨, 오랜 만이네요.” 지난번 만남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서율은 지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지성과 도혁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마주치자 머리가 아팠다. 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는데, 엄마가 혹시 아직도 지성 오빠와 나를 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왜 변도혁까지 데리고 온 걸까?’서율은 무심코 문미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문미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문미정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성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문미정은 먼저 지성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물었고, 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이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 주문을 부탁했다. 문미정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도혁에게 건넸다. “엄마랑 서율이 입맛이 비슷하니까, 서율이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몇 가지 골라주면 돼.” 서율은 단번에 문미정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문미정은 그들이 연기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쉽사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도혁이가 서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른다면,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서율은 지난번 식사 때 도혁이가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를 것이라 생각
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도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혁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둘은 묵묵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LJ그룹 건물에 도착하자, 서율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한 서율은 바로 육경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S시에 온 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나도 어제 알았어. 엄마가 너 혼자 지내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 네가 혹시 힘들어하고 있진 않은지 보러 오신 거래.]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오빠, 나랑 변도혁이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경남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이혼 후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율은 그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다시 물었다. “오빠 말은, 지금 이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가 반대할 거라는 뜻이야?” 경남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완고한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보시겠지.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네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널 혼낼 거야. 반대로 도혁의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게다가 변도혁이 이혼에 동의할지도 의문이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야. 변도혁이 진지하게 나오면 너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경남의 말에 서율은 아침에 도혁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이미 엄마랑 통화했어. 변도혁은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그 문제로 싸울까 봐 당분간 나서지 말자고 하시더라.] S시에 오기 전까지 경남은 부모와 함께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