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유명 디자이너의 인테리어 덕분에 서산 대학병원은 병원이라기보다 커다란 별장 같은 느낌이 더 크다.한옥의 스타일의 건물과 아늑한 정원까지 병원의 경치만 바라봐도 건강해질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게 바로 이곳이다.간호사들의 팬심 가득한 눈빛을 즐기며 걸어가던 소은해는 병원 복도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뭐야? 박수혁?평소 포스 넘치는 모습과 달리 오늘 박수혁의 뒷모습은 왠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소은정을 구한 게 전동하라는 점, 소찬식의 달라진 태도, 두 사람의 같은 혈액형까지...마음이 편치 않을 테지...고개를 든 박수혁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소은해를 발견했다.“박 대표님, 여기서 다 보네요.”며칠 동안 눈도 붙이지 못한 듯 눈은 빨갛게 충혈된데다 턱에는 까칠한 수염까지, 이렇게 망가진 박수혁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소은해의 입가에 실렸던 장난기 넘치는 미소는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은정이는... 괜찮나요?”역시, 은정이 때문에 왔구만?소은해는 한숨을 푹 내쉬곤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많이 좋아졌어요. 아직 걷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다른 곳은 괜찮다니까 걱정 말아요.”소은해의 말에도 박수혁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왜요? 들어가 보시지.”소은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불도저처럼 일단 들이대고 보는 게 박수혁 스타일 아니었나?소은해의 말에 박수혁이 흠칫했다.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소은정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하지만 전동하와 소은정이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이 커다란 가시처럼 박수혁의 마음에 박혀버렸고 막연한 불안함으로 다가왔다.그래서 병실 앞을 한참이나 서성이다 복도에 멍하니 앉게 된 것이었다.한참을 망설이던 박수혁이 겨우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다음에요...”말을 마친 박수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분명 몇 발자국만 걸으면 그녀의 병실인데 왠지 다른 세상에 있는 듯 멀게 느껴졌다.“하긴, 볼 면목이 없겠죠. 3년 동안 서민영인가 뭔가 하는 여자를 위해서 우리 은정이한테 어떻게 했는지
소은해의 말은 박수혁의 가장 아픈 구석을 콕콕 찔러댔다. 잊고 싶은 기억이겠지. 하지만 그럴 수록 난 더 건드릴 거야. 우리 은정이랑 다시 시작하려고? 그렇다 해도 네가 저지른 짓이니까 감당해.차가운 시선으로 소은해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좀 더 속을 뒤집어 버리고 싶었지만 주인 잃은 개처럼 시무룩한 모습을 보니 왠지 동정심이 피어올랐다.휴, 이쯤하는 게 좋겠어.“박 대표가 우리 은정이를 많이 도와준 건 알고 있어요. 아마 완전히 끊어내긴 힘들겠죠. 그런데 이거 하나는 명심해요. 은정이가 전동하 대표와 사귀기로 한다면 다시는 우리 은정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죠?”박수혁 같은 사람이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 사람에게 집착할 리가 없다는 게 소은해의 생각이었다. 하지만...소은해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요.”박수혁의 새카만 눈동자가 소은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하, 뭐가 저렇게 자신만만해?“형님, 그럼 전 은정이 보러 가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얼굴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뺨이라도 날리면 기꺼이 맞아주려고요.”자리에서 일어선 박수혁의 얼굴은 평소처러 무뚝뚝했다. 소은해의 말에 충격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투지를 불러일으킨 듯했다.전동하, 너한테 은정이를 빼앗길 수는 없어. 아니, 네가 아니라 그 누구도 안 돼.이미 지난 과거는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것, 그렇다면 손 놓고 슬퍼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견디고 이겨내는 게 바로 박수혁이었다.단호한 박수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은해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뭐? 형님? 미친 자식 아니야?박수혁이 성큼성큼 다가가 소은정의 병실 앞에 선 순간, 전동하가 병실에서 걸어나왔다.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니 박수혁의 얼굴에 다시 먹구름이 드리웠다. 역시 박수혁을 발견한 전동하가 미소를 지었다. 수혈 때문인지 왠지 모를 병약미까지 더해진 모습에 박수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박 대표님,
박수혁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고 동요를 눈치챈 전동하가 미소를 지었다.“은정 씨 잠들었으니까 괜히 방해하지 마세요.”자고로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는 것. 박수혁의 약점은 바로 소은정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과거일로 박수혁의 속을 뒤집어 놓는 게 가장 잘 통한다는 걸 전동하는 알고 있었다.당신 같은 남자는 은정 씨 곁에 있을 자격 없어.평소 항상 젠틀해 보이는 전동하지만 비즈니스 바닥은 총알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 그리고 그곳에서 젊은 나이에 눈부신 성과를 이어낸 전동하가 정말 무른 성격일 리가 없었다.박수혁, 저번에는 예상치도 못하게 당했지만 이번에는 절대 쉽게 당해주지 않겠어...한편, 전동하의 도발에 박수혁의 분노치는 이미 한계점을 찍은 상태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전동하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네까짓 게 뭔데 감히...”박수혁의 주먹에 전동하가 힘없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수혈량이 너무 많아서일까 넘어지는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하며 정신을 차리기조차 힘들었다.전동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갑작스러운 주먹 다짐에 간호사들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이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고 휠체어에 앉은 소은정이 모습을 드러냈다.“박수혁...”다시 주먹을 치켜든 박수혁이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간호사들이 다급하게 달려와 전동하를 부축했다.창백한 얼굴빛에 터진 입가에서 흐르는 피, 병약한 모습은 모성애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하지만 그 누구도 화를 낼 수 없었다. 전동하 대표를 때린 사람은 바로 박수혁이었으니까.소은정의 목소리에 박수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곤함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벌겋게 핏발이 선 그의 눈동자가 소은정의 표정을 살폈다.깜짝 놀란 얼굴에서 분노로 바뀌는 표정... 그리고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 분노는 그를 향한 것이었다.순간, 심장이 비수에 찔린 듯한 느낌에 박수혁이 뒤로 살짝 휘청였다.박수혁의 이름을 부른 것을 마지막으로 소은정은 그에게 눈길 조차 주지 않은 채 전동하에게 다가갔다.
박수혁과 전동하... 누구의 편을 들고 말고 할 사이도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약해져 있는 전동하의 모습에 마음의 저울은 어느새 전동하를 향해 기울고 있었다.게다가 그녀를 위해 수혈을 해준 전동하를 바라보며 잊고 싶었던 기억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라 기분이 착잡하던 차였다.박수혁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그녀의 생명의 은인인 전동하까지 때려눕히고 말았다.다리가 멀쩡했다면 아마 박수혁의 정강이라도 걷어찼을지도 모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분노와 억울함을 풀 방법은 없고 소은정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고개를 숙인 채 소은정의 얼굴을 바라보던 박수혁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깁스를 한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수혁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소은정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했다.“너 만나려고 온 거야. 그리고... 저 자식 때리는데 딱히 이유가 필요한가?”하, 뭐야? 저 근거없는 자신감은...박수혁의 말에 기가 막힌 소은정이 코웃음을 치며 반박하려던 순간 박수혁이 갑자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소은정의 오른쪽 다리를 만지작거렸다.“많이 아파?”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떨리는 목소리와 조심스러운 손길에서 박수혁의 걱정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졌다.하지만 박수혁의 질문에 소은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당연히 아프지. 이 자식아!“아프겠지. 나도 다리 다쳐봐서 잘 알아. 가끔씩 통증으로 잠도 설치곤 했는데... 너도 아마 그렇겠지.”혼잣말처럼 읊조리는 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떨려왔다.박수혁도 그녀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다. 박수혁도 그녀를 살리려다 하마터면 죽을뻔한 사람이다.그래. 박수혁이 나한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건 사실이지만 몇 번이나 날 구한 것도 사실이야. 수혈이니 뭐니 어차피 다 지난 과거... 못난 기억 붙잡고 있어봤자 내 마음만 아프지...어느새 소은정의 분노는 바람에 흩날리는 구름처럼 사라져버렸지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나도
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은 머리를 거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소은정이 혐오하는 건 서민영뿐만 아니라 고통받았던 3년간의 시간 그 자체였으니까.입을 꾹 다문 채 소은정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박수혁의 모습에 소은정이 한숨을 내쉬었다.떨려오는 손끝을 숨기려 다시 주먹을 쥔 소은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어차피 지난 일, 다시 끄집어내지 마. 그리고 서민영 그 여자 이름도 다시 언급하지 말고. 내가 서민영 그 여자 몸에 흐르는 피를 전부 뽑아낸다고 지난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아. 그리고... 난 내 이기심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억지로 뽑아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아.”고개를 든 소은정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휠체어의 후진 버튼을 꾹 눌렀다.“나 이제 쉬고 싶어. 그리고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찾아오고 그러지 마. 진심으로 내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 바란다면 말이야.”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은정은 병실로 들어가버리고 일그러진 표정의 박수혁만 복도에 덩그러니 남고 말았다.하지만 소은정은 박수혁이 어떤 마음인지 신경 쓰고 싶지도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그냥... 박수혁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뿐이었다.참나,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때려? 하여간 성질머리 하고는...잠시 후, 의사가 병실로 들어와 전동하의 상태를 브리핑했다.“수혈량 과다로 뇌로 공급되는 혈액량이 줄어든 상태인데... 다행히 뇌 손상은 없었습니다. 아직 의식은 회복하지 못하셨고요.”읽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은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동하 대표 깨어나면 저한테도 말씀해 주세요.”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박수혁은 아마 그녀 때문에 전동하를 때렸을 것이다. 배은망덕하게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고개를 끄덕인 의사는 소은정의 상태를 살핀 뒤에야 병실을 나섰다.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소은정이 잠시 눈을 붙이려던 그때 병실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이 층에 환자는 소은정 한 명뿐, 안 봐도 그녀의 손님이 분명했다.복작거리는 소
소은정의 상태를 확인한 친구들은 다친 이유에 대해 묻기 시작했고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절대 병실을 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소은정은 모든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사고의 경위를 들은 친구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전동하 대표 덕분에 산 거네. 제대로 인사라도 해야겠어.”한유라의 말에 김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 우리 은정이 생명의 은인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야, 그렇다고 막 갑자기 전동하 대표한테 다른 마음이 생기고 그런 건 아니지?”“무슨 마음?”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유라를 바라보던 김하늘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당연히 호감이지!”누가 봐도 소은정에 대한 전동하의 호의는 단순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베푸는 호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김하늘은 소은정이 또 피에 묶여 사랑에 빠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하게 더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성강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러게... 애초에 나랑 사귀었으면 얼마나 좋아.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세 사람의 말을 듣던 소은정이 귀를 막더니 고개를 저었다.“야, 웬 김칫국 드링킹? 전동하 대표는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리고 이번 일을 빌미로 들이댈만큼 뻔뻔한 사람도 아니고.”소은정의 말에 한유라와 김하늘이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 소은해가 끙끙대며 테이블을 들고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그건 뭐야?”의심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소은정의 질문에 소은해가 고개를 으쓱했다.“그냥 수다만 떨면 심심하잖아. 우리 카드게임이라도 할래?”하, 아주 그냥 오락실을 만들지?“난 다리 불편해서 싫은데...”“너 빼고 우리 네 명이서 할 건데?”헐...말이 병실이지 넓은 팬션 같은 구조의 병실에 테이블이 들어서고 어느새 테이블 주위에 모여앉은 네 사람은 카드게임을 시작했다.그 모습에 소은정이 코웃음을 쳤다.하이고, 오늘 밤 잠은 다 잤네... 다친 친구는 내팽개
어느새 전동하의 병실에 도착하고 모두들 무의식적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조용한 병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리고 전동하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뭐, 다행인 건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이 어느 정도 컨디션을 회복한 건 분명해 보였다.다섯 방문객에 의사까지 전동하의 병실 침대를 비잉 둘러싼 채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관찰하기 시작했다.자세히 보니 전동하 대표도 잘생겼네...라고 말하고 싶은 한유라였지만 왠지 무거운 분위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이목구비는 박수혁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성격이 좋잖아. 성격이!이때 전동하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숨을 죽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모르는 얼굴들에 적잖게 놀란 듯 전동하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묘한 정적이 감돌던 그때, 먼저 이성을 되찾은 한유라, 김하늘, 성강희가 허리를 굽혔다.“우리 은정이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이구동성으로 내뱉은 세 사람의 대사에 전동하는 더 놀란 듯 낯빛까지 더 창백해지고 말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은정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좀 해. 전 대표님 놀라셨잖아.”그제야 소은정에게로 시선이 닿은 전동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어색하게 굳은 몸도 긴장이 풀린 듯 자연스레 풀어졌다.“은정 씨?”전동하가 의식을 회복한 걸 확인한 소은정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소개할게요. 이쪽은 제 친구들이에요. 한유라, 김하늘, 성강희요.”“안녕하세요...”전동하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우리 은정이를 구해 주셨단 말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뵀습니다. 그럼 인사드렸으니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기회 되면 함께 식사라도 해요.”김하늘의 말에 한유라와 성강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로의 눈치를 보던 세 사람은 다시 살금살금 병실을 나섰다.시끄러운 세 사람이 나가고 그제야 소은정도, 전동하도, 의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소은정도 병실을 나서려던 순간,
하지만 소은정이 말한 걱정은 말 그대로 걱정 그뿐이었다.지금까지 그녀가 좋다고 다가오는 남자는 수없이 많았지만 소은정은 항상 보이지 않는 벽을 두르며 그들을 밀어냈었다.하지만 이번 교통사고로 인해 전동하에게는 왠지 더 이상 벽을 두를 수 없게 된 소은정이었다.두 사람의 사이는 분명 묘하게 달라졌다.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순수한 소은정의 미소에 전동하는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지금 소은정에게 대시하는 건 전동하였으니 아쉬워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걱정해줬다니 기쁘네요. 다친 게 다행이라고 느껴질만큼.”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 소은정이 뭔가 말하려던 그때 전동하가 말을 이어갔다.“박수혁 대표가 왜 절 때렸는지 이유는 말해 줬나요?”박수혁이 뭐라고 해명했는지 꽤 궁금한 전동하였다.“아니요.”“때릴만 해서 때렸다”라는 말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으니 소은정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이때 전동하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렸다.“절 질투했기 때문이에요.”누군가에게 맞고서도 이렇게 기쁘기는 처음이었다. 박수혁의 분노와 그의 주먹에서 자신의 존재가 박수혁에게 정말 위협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의아한 표정의 소은정을 바라보던 전동하가 말을 이어갔다.“다행이에요. 이번 사고 덕분에 은정 씨한테 저도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요. 그리고... 박수혁 대표보다 제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아서요.”소은정은 넓은 우주의 블랙홀처럼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전동하의 눈동자를 멍하니 보았다.“사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희소한 혈액형 때문에 귀하게 컸어요. 그래서 더 이기적인 성격으로 컸는지도 모르죠. 그리고 언젠가 이 특별한 혈액형 때문에 객사라도 하면 어쩌나 불안한 적도 많았어요. 처음이에요. 이 혈액형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된 거요. 은정 씨, 나 그렇게 비겁한 사람 아니에요. 이번 사고를 빌미로 은정 씨 죄책감을 자극하고 싶은 생각은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