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고 박수혁을 바라보는 소은정의 눈빛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단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헌신적이던 그 여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차에 탄 뒤에야 윤지섭은 질문을 털어놓았다.“이 담뱃대가 그렇게나 대단한 물건이에요? 왜 다들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죠?”소은정은 고풍스러운 나무상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천 년 전의 물건이에요. 누군가 궁에서 몰래 빼돌린 거죠. 박씨 가문에서 이 물건을 손에 넣은 게 아마 500년 전이던가? 어때요? 30억이면 싸게 먹힌 거죠?”소은정의 말에 윤지섭이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뭐? 천 년?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물건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국가급 보물이었다.이런 물건을 경매에 내놔?이 정도면 백 억, 아니 그 이상의 가격도 훨씬 호가할 것이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한 윤지섭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소은정의 휴대폰이 울렸다. 소은호인 걸 확인한 그녀가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재잘거렸다.“오빠, 내가 오늘...”그러자 소은호가 피식 웃었다.“다 들었어. 겨우 30억에 그 담뱃대를 샀다고? 그쪽 집안에서 화가 단단히 났겠는데?”이민혜와 박예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상상하던 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렸다.“어차피 이제 법적으로 이 물건은 내 거야. 절대 그냥 내주지 않을 거라고.”소은호도 동생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박씨 가문이라면 이제 치가 떨릴 텐데 이렇게라도 한풀이를 해야겠지. 그리고 소은호 본인도 동생이 행복하다면 상관없었다.다음 날 아침, 소은정은 여느 때처럼 출근해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오며 가며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임상의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이미 약점이 잡힌 상태라 움직이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이때 사무실로 들어온 우연준이 그녀에게 파일을 건넸다.“본부장님, 임상희 팀장에 대한 내사가 시작되었습니다.”우연준의 말에 소은정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오빠가 드디어 칼을 빼든
박수혁은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서 불쾌함을 읽을 수 있었다. 소은정은 일부러 성강희의 팔짱을 끼며 받아쳤다.“그럼요. 아주 바쁘죠. 그런데 제가 몇 명을 만나든 강서진 씨랑 무슨 상관이죠? 아, 혹시 그쪽도 나랑 데이트라도 하고 싶은 거예요?”소은정의 말에 강서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항상 이 여자 앞에만 서면 이렇게 작아지는 걸까?“뭐? 내가 뭐가 모자라서 당신 같은 여자랑 데이트를 합니까!”“뭐, 저도 사절이네요. 강서진 씨는 몸이 별로더라고요. 저는 남자 얼굴도 중요하지만 몸도 많이 보는 사람이라.”뭐? 몸매가 안 좋아?은연중에 그의 알몸 사진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강서진이 잔뜩 화가 나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감히 날 협박해?“우리 은정이 안목이야 내가 인정하지. 뭐 딱 한 번 실수하긴 했지만. 강 대표님, 다들 식사하러 오셨을 텐데 그냥 조용히 밥이나 드시죠. 괜히 서로 심기 건드리지 말고요.”성강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소은정은 박수혁의 존재는 깔끔하게 무시한 채 룸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서진이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었다.“저 여자가 감히... 뭐? 몸이 별로야? 나 정도면 준수하지.”강서진의 자뻑에 박수혁도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준수하다고? 거울이나 제대로 봐.”하지만 강서진에게 농담을 던진 박수혁의 표정은 또다시 차갑게 굳었다. 소은정과의 약속도 못 잡고 할아버지의 담뱃대를 되찾지 못한 일도 짜증 나지만 소은정이 강서진의 알몸을 봤다는 사실이 왠지 더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그의 말에 강서진은 혼자 중얼거렸다.왜 나한테 화풀이야...하긴, 오늘 점심 박수혁을 만나기 위해 태한그룹으로 향했던 강서진은 마침 그의 비서가 소은정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을 목격했었다. 그런데 단호하게 거절할 줄이야. 언짢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기로 왔더니 하필 소은정과 성강희의 데이트 현장을 마주치다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겠지.이때, 강서진이 뭔가 생각난 듯 캐어물었다.“너희
말을 마친 소은정은 바로 룸으로 돌아와 성강희를 깨웠다. 차에 타려던 순간, 룸에 핸드백을 두고 온 사실을 떠올린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성강희가 그녀를 막아섰다.“내가 갈 테니까 먼저 타.”비틀거리며 들어가는 성강희가 왠지 걱정되어 뒤를 따르던 그때, 역시 레스토랑으로 나오는 강서진과 박수혁을 발견하고 분수대 뒤에 몸을 숨겼다.“민영이 곧 귀국이라면서?”강서진이 물었다.“그래.”“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민영이가 잘못한 건 맞지만 너도 너무 심했어. 이제 그만 용서해 줘. 미워도 서민영은 네 사람이잖아...”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자리를 떴다...그들의 차량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소은정의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서민영은 박수혁의 사람이다라... 소은정은 박수혁에게 어떤 의미였을까?3년 동안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었던 서민영의 이름을 듣는 순간,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이제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나 보다.얼마 전 파티에서 큰 망신을 당하고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소은정은 한동안 그 여자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출국? 그게 벌이라고? 이렇게 쉽게 용서해 준다고? 3년 동안 뜨거운 피를 바친 그녀에게는 정작 진심 어린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조차 없는 남자지만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민영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던 소은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돌아온다고? 좋아. 큰 선물을 준비해 주지.가방을 가지고 나온 성강희는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성강희의 목소리에 소은정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난 집에 가봐야겠다. 기사도 도착했대.”“내가 데려다줄게.”성강희는 억지로 그녀의 옆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의 억지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소은정을 바라보던 성강희는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고개를 숙였다.어느새
처음 보는 성강희의 진지한 모습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3년 전, 장난기 많던 소년이던 그가 왠지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 성강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은정은 표정을 감췄다. 적어도 지금은 사랑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강희야, 못 본 사이에 여자 홀리는 스킬이 많이 늘었네.”성강희는 흠칫하더니 뒤로 물러섰다.“다른 사람한테는 이렇게 안 해.”“하긴. 너 좋다는 여자애들이 한둘도 아니고. 네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겠지.”소은정은 괜히 농담을 던졌다. 뭐, 성강희의 여성 편력은 친구들은 물론 재벌 2세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다 지난 일이야. 그리고 제대로 된 연애는 해본 적도 없었다는 거 알잖아...”“그래. 오늘 위로해 줘서 고마웠어. 그런데 지금은 너무 피곤해...”그녀는 순간적인 설렘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성강희와는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던 사이, 사랑이라는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좋은 친구를 잊고 싶지 않았다.다시 기운을 차린 듯한 소은정의 모습에 성강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 푹 쉬어.”가벼움이 항상 묻어나던 행동에서 느껴지는 그녀에 대한 사랑, 여자라면 빠지지 않기 힘들었다. 이런 엉큼한 남자 같으니. 소은정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야에 아무렇게나 탁자 위에 올려둔 비취 담뱃대가 들어왔다. 입꼬리를 씩 올리던 소은정은 다가가 담뱃대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천천히, 얼굴에 핀 미소가 사라지고 소은정은 다시 아무렇게나 탁자 위에 올려두고 안방으로 들어갔다.자신의 보물 1호가 이런 대접을 당하고 있다는 걸 박대한이 안다면... 아마 화가 치밀어 쓰러질지도 모르지.이런 생각을 하며 잠에 든 소은정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어느새 저녁 10시였다. 휴대폰을 확인한 소은정은 소은호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일 때문에 며칠 동안 해외에 나가있을 거야. 회사 잘 보고 있어.오빠도 참. 이
아가씨가 외출하시는데 기사 한 명 없다는 건 집사로서 절대 용납할 수 있는 일이었다.“아니에요. 저도 이제 어른이라고요. 운전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소은정은 바로 전화를 끊고 회사로 향했다. 출근 시간임에도 차가 별로 막히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코너를 돌거나 신호등 앞에서 멈출 때도 다들 그녀에게 길을 양보해 주는 듯한 이상한 장면이 연출되었다.뭐야? 내가 여자라고 무시하는 건가?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회에 도착한 소은정은 차 키를 발렛기사에게 맡기고 또각또각 건물로 들어갔다. 이때 임상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임상희는 소은정을 향한 분노와 증오를 전혀 숨기지 않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설마 그녀가 녹음 파일을 오빠에게 넘긴 걸 알게 된 건가?그럴 리가 없을 텐데.“임 팀장, 안 올라갈 거예요?”소은정의 질문에 임상희는 코웃음을 치더니 비아냥거렸다.“대표님은 참 본부장님을 아끼시는 것 같아요. 이렇게 비싼 차까지 선물로 주시고. 2억은 넘을 것 같던데.”소은정이 자기 돈으로 포르쉐를 샀을 리가 없다고 임상희는 확신했다. 어리둥절하던 표정의 소은정은 뭔가 생각난 듯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뭘요.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내가 살 수 있어요.”수치심에 얼굴이 빨개진 임상희를 힐끗 바라보던 소은정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돈 때문에 나이 든 아저씨와 불륜 관계를 가지는 임상희는 세상 모든 여자가 다 자기 같은 줄 아나 보다.사무실 앞,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우연준이 그녀에게 오전에 열릴 회의 내용에 대해 보고했다.소은정은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상석에 앉아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쭉 훑어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시작하죠.”거성그룹과의 협력은 이미 확실시된 상태, 이제 남은 디테일 조절뿐이었다. 본디 계약이란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목적, 작은 디테일 하나 때문에 거액의 금액이 차이 날 수도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1분 남짓 회의실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편, 순식간에 주도권을 다시 가져간 소은정의 모습에 장한명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그게...”하지만 소은정은 그에게 눈빛도 주지 않은 채 바로 말을 가로챘다.“다들 메일로 소식을 들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표님께서는 자리를 비운 사이에 회사의 업무의 결정권을 전부 저에게 일임하셨습니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제가 담당하고 있는 거기도 하고요. 절 따르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사직서 제출하세요. 대표님께는 제가 알아서 보고드리겠습니다.”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들 입사한 뒤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들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지금 그만둔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 아닌가?낙하산으로 갑자기 본부장이 된 소은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소은호 대표의 태도와 강력한 서포트만 봐도 그가 얼마나 소은정을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괜히 장한명의 말에 넘어가 소은정에게 텃세를 부렸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다.차갑게 식은 회의실 분위기, 그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장한명은 소은정과의 기싸움에서 완전히 밀린 상태, 지금에 와서 그의 편을 들 수는 없었다.“기획부 심 부장, 오늘 안으로 기획안 작성할 수 있겠어요?”갑작스레 이름을 불린 심동석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아, 네, 네. 가능합니다. 회의가 끝나면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회사를 위해 최고의 기획안을 작성하겠습니다.”다들 십 년 이상 직장을 다닌 베테랑들, 그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부장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소은정이 한 발 물러서 기회를 줄 때 잡아야 했다.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소은정은 조금 가벼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다른 부서들은요?”“저희도 바로 진행하겠습니다.”“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오늘 야근
소은정은 바로 탁자를 지나쳐 책상으로 다가가더니 파일을 책상 위에 던져주고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켰다. 무시를 당한 박대한은 더 분노했다.“소은정, 내가 널 과소평가한 것 같더구나. 먼저 이혼을 제안했다는 말에 놀라긴 했다만. 다른 남자를 이미 찾아뒀던 거야? 이혼하고 바로 SC그룹의 본부장이 되다니. 소은호 대표가 널 많이 아끼는 모양이야.”컴퓨터로 메일을 확인하던 소은정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당한 게 있었던 박예리는 겁먹은 표정으로 한 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박대한은 아니었다.“제가 이혼을 결심한 건 박씨 집안사람들에게 질려서예요. 회장님께서도 매주 절 본가로 부르셔서 트집을 잡으셨죠. 저처럼 비천한 출신이 고고한 박씨 집안 며느리가 된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말씀해 주시면서요. 어쨌든 회장님 소원대로 이혼해 드렸으니 기뻐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직접 찾아오셨어요?”이혼 전, 박대한은 매주 그녀를 본가로 불러들였다. 가족끼리 자주 만나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사실은 이민혜와 박예리가 그녀를 마음껏 괴롭히도록 기회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박씨 집안과 그녀는 근본부터가 다른 존재임을 각인시켜주기 위해서였겠지.박대한의 암묵적인 허락 덕분에 이민혜와 박예리는 더 거리낌 없이 그녀를 괴롭힐 수 있었고 집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조차 그녀에게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그렇게 눈에 가시였던 손자며느리가 알아서 물러났으면 샴페인이라도 터트려야 하는 거 아닌가?“지금 왜 옛날 얘기를 꺼내는 거냐?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거냐? 어른한테 지금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소은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박대한이 바로 호통쳤다.그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던 여자가 감히 말대답을 해? 건방진 것.이에 소은정은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회장님, 여긴 회사입니다. 경력보다 더 중요한 건 직급이죠. 태한그룹의 회장님께서 오셨으니 저도 물론 예의를 갖출 겁니다. 그러니 회장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 회장님
소은정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이 아끼는 물건을 일부러 담보로 잠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박예리 말이 맞았다. 그녀는 박씨 집안을 증오했고 그 집안사람들이 편하게 지내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담뱃대를 팔지 않겠다 말한 것도 조금이라도 더 지옥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저쪽 집안사람들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터, 굳이 아닌 척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박예리 씨, 알고 있겠지만 난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당한 건 무조건 갚아주는 성격이랍니다. 3년 동안 그 집안사람들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아직도 눈앞에 선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마음에 묻고 살기엔 제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요?”소은정의 말에 말문이 막힌 박예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뿐이었다. 오히려 소은정이 솔직하게 인정하니 더 화가 치밀었다.박대한이 또다시 흥분하는 박예리를 나무라듯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박예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기 시작했다.“새언니, 전에는 내가 심했어요. 내가 어려서, 철이 없어서 그랬어요. 언니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줘요.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사과만 받아준다면 시키는 건 뭐든 할게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담뱃대는 다시 돌려줘요. 내가 친 사고 때문에 엄마는 외출도 못하시고 저도 할아버지한테 충분히 혼났어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지만 그래도 분이 안 풀린다면 따귀라도 때려요.”구구절절 말을 마친 뒤 고개를 든 박예리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소은정은 감동은커녕 재밌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은정의 도발에 박예리는 더 이상 연기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어디 한번 계속해 봐.’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수치심이 몰려왔다. 박예리의 절절한 사과에도 소은정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박대한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은정아, 네가 결혼생활 동안 고생한 거 나도 안다. 오늘도 예리가 너한테 사과하고 싶다고 해서 온 거야.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