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혁의 말에 주방은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앗차, 실수했다.괜한 욕심을 낸 건가 싶다가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은정의 마음을 열기 전에 다리가 먼저 나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박수혁의 제안에 흠칫 놀란 듯한 소은정의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가 걸렸다.“부러진 건 다리지 팔은 아니잖아?”묘한 미소를 짓는 소은정의 모습에 박수혁의 마음도 점점 기대감에 부풀기 시작했다.좋아, 적어도 화는 안 냈으니까... 조금만 더...박수혁은 짐짓 실망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그렇게 싫어? 이렇게 멀쩡해 보여도 환자인데 밥 정도 먹여줄 수는 있잖아...”그 모습에 소은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하, 어디서 이런 발연기를. 또 무슨 꿍꿍이인 건지.하지만 곧 한숨을 푹 내쉬고 마음을 다스렸다.이 남자는 나 때문에 다친 거다... 참자... 참아...하지만 다음 순간, 소은정의 뒤에 서 있던 최성문이 성큼 다가가 박수혁의 앞에 놓인 죽 그릇을 들었다.“대표님, 아 하십시오...”커다란 최성문의 손에 들린 죽 그릇은 왠지 간장 종지처럼 작아 보였다. 게다가 무뚝뚝한 얼굴에 저런 어울리지 않는 대사라니.벌레라도 씹은 듯한 박수혁의 표정에 소은정도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저 남자가 먹여주는 죽을 받아먹었다간 정말 체할 것만 같아 박수혁이 죽 그릇을 낚아챘다.“그래, 팔이 부러진 건 아니니까. 내가 알아서 먹을게.”박수혁의 말에 최성문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장승처럼 꼿꼿이 서서는 소은정의 뒤를 지켰다.박수혁이 고분고분 식사를 시작하자 소은정은 우연준이 보낸 파일을 처리하고 휴대폰에 쌓인 메시지에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한참 동안 일을 하던 소은정은 박수혁의 시선을 느끼고 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다 먹었어?”박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선 소은정이 그릇들을 치우려 하자 박수혁이 바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뭐야. 이렇게 너 부려먹으려고 부른 거 아니야.”아주머니도 부랴
널찍한 타타미는 일하다 피곤할 때면 잠깐 쉴 수 있도록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뭐야? 쉬고 싶은 거면 안방으로 갈 것이지. 왜 서재로 온 거래?소은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또 뭐 어떻게 해줄까?”퉁명스러운 소은정의 말투에 박수혁이 어깨를 으쓱했다.“계속 여기 앉을 수는 없잖아? 휠체어 불편해. 저쪽에 앉고 싶단 말이야.”“나 당신 저기까지 못 옮겨.”이 남자가 정말 두 다리 다 부러지고 싶나? 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그런대?소은정의 단호한 말투에 깊은 한숨을 푹 내쉰 박수혁이 왼쪽 다리에 중심을 둔 채 천천히 일어섰다. 조금 조금씩 발을 옮기자 고통으로 일그러진 박수혁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순간, 박수혁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소은정은 무의식적으로 박수혁을 부축했다.박수혁의 체중이 그녀의 여리여리한 몸에 쏠렸다. 순간 숨이 막히는 느낌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한 눈빛에 결국 참을 수밖에 없었다.박수혁이 이렇게 된 건 온전히 그녀의 탓이었으니까... 평소 쌓인 감정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일로 화를 낼 수는 없었다.그렇게 소은정은 조심스럽게 박수혁을 부축했다. 산뜻한 박하향이 소은정의 코끝을 자극했다. 오른쪽 다리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박수혁을 조심스럽게 타타미에 앉히고 나니 두 사람 모두 땀벅벅이 되고 말았다.창백한 얼굴로 한숨 돌리던 박수혁이 싱긋 미소 지었다.“무슨 파일 볼 거야? 노트북은? 한 번에 다 말해. 사람 왔다 갔다 하게 만들지 말고.”괜시레 퉁명스러운 말투로 툭 뱉곤 돌아서는 소은정의 손목을 박수혁이 낚아챘다.“일하려고 들어온 거 아닌데? 같이 영화나 봐.”박수혁이 리모컨을 누르자 서재의 불빛이 전부 꺼지고 커튼도 자동으로 닫히더니 큰 스크린이 내려오기 시작했다.하,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겨우 앉혔더니? 뭐? 영화를 봐?소은정이 박수혁을 노려보았다.“당신 정말 어디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은 불쌍한 얼굴로 다리를 가리켰다
“네, 대표님께서 2층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소은정 씨도 대표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고분고분 한 방에 들어가는 걸 보면... 무슨 생각 하는지 뻔하죠.”유씨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달칵!순간 주방 불이 켜지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던 아주머니는 당황한 나머지 휴대폰까지 떨구고 말았다.그리고 휴대폰 액정에 찍힌 이름을 확인한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큰 사모님.”하, 이민혜 그 여자랑 통화 중이었어?현장을 잡힌 유씨 아주머니가 당황한 눈빛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소... 소은정 씨, 왜 거... 거기에...”소은정은 아무 말 없이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컵에 따른 뒤 2층으로 올라갔다.별말없이 올라가는 그녀의 모습에 아주머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주웠다.짜증스러운 마음에 찬 우유를 벌컥벌컥 마신 소은정은 울렁거리는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하, 아직도 저런 스파이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결혼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씨 아주머니는 이민혜가 꽂은 사람, 그녀가 하루 종일 뭘 했는지 매일 이민혜에게 보고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박수혁이 입는 옷은 속옷까지 다려야 한다, 집안 곳곳의 청소는 소은정이 직접 해야 한다, 식사는 이민헤가 정해준 메뉴대로 준비해야 한다...그렇게 소은정은 이민혜가 정해준 규칙에 따라 박수혁이 한 번도 입지 않는 셔츠를 다리고 한 번도 만진 적 없는 가구를 닦고 그가 먹지도 않는 식사를 차려야 했다. 청소 아주머니라고 붙여두긴 했지만 유씨 아주머니는 그녀가 매일 하는 일들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상사와 다름이 없었다.그런데 이혼 도장까지 찍은 지금도 날 통제하려 해? 하, 하긴, 개가 똥을 끊지.서재로 돌아온 소은정은 일부러 문을 쾅 닫았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박수혁이 눈을 번쩍 떴다.“잘 거면 방 가서 자.”소은정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분이 확 나빠진 것 같은 모습에 박수혁
방으로 돌아온 박수혁은 화가 치밀어 잠도 오지 않았다.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소은정과 가까워지려고 했는데 새끼 오리마냥 소은정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최성문 때문에 도무지 다가갈 수가 없었다.하... 짜증 나.......다음 날, 잠을 설친 소은정이 피곤한 얼굴로 일어났다.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깨셨습니까?”“네, 잠시만 기다리세요.”소은정은 심플한 실크 블라우스와 블랙 A 라인 스커트로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이미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수혁은 깔끔한 커리어 우먼 스타일의 소은정을 보고 두 눈을 반짝였다.“굿모닝,”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예의상 물었다.“잘 잤어?”하지만 박수혁은 최성문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아니.”“아직 다리 많이 불편하지? 그래도 조금만 참아.”질문이 나온 김에 최성문의 존재에 대해 불평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덤덤하게 걱정해 주는 소은정의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이때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나오며 식탁에 접시들을 올려놓았다.“은정 씨는 아침 가볍게 드시는 거 좋아하죠?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어때요?”혹시나 소은정이 자신의 스파이짓을 박수혁에게 고자질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하지만 소은정은 아주머니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아, 당신 어제저녁에 약 안 먹었지?”옳거니... 박수혁은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러네. 간병인 자격미달이야. 어떻게 보상할 거야?”하지만 소은정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약상자를 챙겨오더니 약들을 식탁 위에 탁 내려놓았다.“그럼 어제 몫까지 전부 다 먹으면 되겠네.”그 모습에 박수혁은 흠칫 했지만 아무 불평 없이 소은정이 건네는 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평소 차갑기만 하던 박수혁의 고분고분한 모습에 아주머니의 눈이 커다래졌다.“나 출근해야 해. 갈게.”소은정이 핸드백을 들고 일어서자 박수혁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됐어. 오빠가 아침 포장해 주기로 해서.”
”게다가 어제저녁에는 대표님 약 챙겨주는 것도 까먹은 거 있죠? 그러곤 아침에 2회분 약을 챙겨주는데... 하, 참 어이가 없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대표님한테 복수하려고 다시 돌아온 것 같은데요? 사모님, 저 여자가 다시 돌아오면 분명 집안이 시끄러워질 거예요...”......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던 박수혁의 표정은 의아함에서 언짢음으로 바뀌었다.휠체어를 잡은 박수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머니가 통화하는 상대가 바로 그의 어머니 이민혜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한편, 계단에 앉은 채 이 대화를 엿듣고 있는 소은정의 모습은 마치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의 가십을 듣고 있는 듯 담담, 아니 흥미로워 보였다.그 덤덤함이 오히려 비수처럼 박수혁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말도 안 되는 억지까지 부려가며 그녀를 이 집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집에서 있었던 불행했던 과거를 다시 행복한 기억으로 덮어주고 싶어서였다.그런데... 이게 뭐야?결혼 생활 중에도 아주머니는 이 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가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던 이 집에서 어머니가 꽂은 스파이와 함께 지내는 소은정의 기분은 어땠을까?지난 3년간... 어떻게 살아왔을지 눈앞에 선했지만 그 상상만으로 끔찍해 박수혁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어젯밤... 다시 서재로 돌아온 소은정의 눈동자에 담긴 혐오가 덤덤함으로 덤덤함에서 다시 차가움으로 바뀐 것도 이것 때문일까?한동안 소은정의 흉을 보던 아주머니는 15분은 족히 더 떠들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계단을 다시 올라가려던 소은정은 잔뜩 굳은 박수혁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자기 험담도 아니고 왜 저런대?그러든지 말든지 다시 2층으로 올라가려던 그때, 박수혁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은정아, 화나지 않아? 화난다고 한 마디만 말해 줘. 그럼 내가... 복수해 줄 테니까.”차라리 화라도 내면 3년 동안의 불쾌함을 모두 쏟아버릴 수 있지 않을까?하지만 소은정은 화를 내기는커녕 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
게다가 필리핀 메이드 학교라니. 이 나이에 처음부터 허드렛일을 배우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설마... 사모님과 통화하는 걸 전부 들으신 걸까?공포가 발끝에서부터 온몸에 퍼지고 아주머니는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지금의 박수혁은 결혼생활 내내 한 번도 신혼집을 와보지 않은 무정했던 박수혁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히 소은정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빛이었으니까...그래서 날 내치려는 건가?방으로 돌아온 유씨 아주머니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이민혜에게 전화를 걸었다.1시간 뒤, 이민혜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마침 기분 전환 겸 쇼핑하러 나가려던 소은정과 마주친 이민혜는 바로 삿대질을 시작했다.“이런 불여우 같은 X. 이혼 도장 찍었으면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질 것이지.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무슨 염치로 다시 내 아들 집으로 들어와!”하, 이 아줌마는 정말 하나도 안 바뀌었네.“사모님, 말씀 조심하세요. 제가 아직도 사모님 말 한 마디에 굽신대던 며느리인 줄 아세요? 어른 대접도 어른처럼 행동하셔야 받는 겁니다.”소은정의 당당한 태도에 이민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네가 감히... 내 아들을 업고 나한테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인기척에 방에서 달려나온 유씨 아주머니가 이민헤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오열했다.“사, 사모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대표님께서 절 필리핀으로 보내시겠다잖아요.”“걱정하지 마. 내가 있는 한 누구도 자네를 쫓아낼 수 없으니까. 자네가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나 본데. 그럴수록 더 마음 독하게 먹고 붙어있어야지!”이민혜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소은정이 눈을 흘겼다. 이 무슨 피해망상인지. 정말 내가 박수혁한테 저 아줌마가 한 일을 전부 이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해명하기도 귀찮고 말이 안 통하는 아줌마와 입씨름도 하고 싶지 않았던 소은정이 문을 나서려던 순간, 이민혜가 다시 소은정의 앞을 가로막았다.“소은정, 경고하는데
소은정이 집을 나서자 이민혜는 핸드백까지 바닥에 내팽개치고 소리쳤다.“저 계집애 당장 내쫓아! 두 사람 결혼 난 절대 허락 못 하니까!”“어머니, 이 집안에서 어머니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게다가 제가 다섯살 먹은 애도 아니고 연애나 결혼 같은 거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 하는 나이는 지났지 않습니까?”차가운 아들의 태도에 이민혜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넌 내 아들이야! 어떻게 내 앞에서 저딴 여자 편을 들 수 있어!”아들이라... 박수혁은 생각에 잠겼다. 박수혁은 5살 때부터 박대한 손에 이끌려 해외 유학을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 울면서 이민혜에게 전화를 걸 때면 항상 쇼핑 중이던 그의 어머니는 짜증스레 전화를 끊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체벌까지 받아야 했다.그렇게 내놓은 자식처럼 키워놓고 이제 와서 아들을 치맛자락에 품으려고 해?하, 웃기지도 않아.과거를 회상하던 박수혁이 코웃음을 쳤다.“어머니라서 이 정도까지 봐드리는 겁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세요? 아, 모르실 리가 없지. 이렇게 키우신 게 바로 어머니니까. 아니면 정말 이대로 쫓겨나고 싶으세요? 생모라는 알량한 명분이라도 유지하고 싶으시다면...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박수혁의 말에 이민혜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한 번도 살가운 적 없는 아들이지만 이렇게 매정한 말까지 내뱉는 건 처음이었으니까.안쓰러운 눈빛으로 창문을 통해 멀어져 가는 소은정을 바라보는 아들의 모습에 이민헤는 속이 부글부글 끌어 올랐다.딸도 집안에서 쫓겨나고 아들이란 자식은 여자한테 미쳐서 엄마 취급도 안 해주는데다 항상 발밑에서 굽신대던 소은정까지 이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드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왜! 감히 태한그룹 사모님인 나한테 어떻게 다들... 그래, 이게 다 소은정 저 불여우 때문이야.소은정이 살아있는 한 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순간 무서운 생각이 이민혜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광기 어린 눈빛의 이민혜는 테이블에
연남동.휠체어에 앉은 박수혁은 이민혜가 구급차에 실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슬픔? 기쁨?아니, 그가 느끼는 감정은 충격이었다.소은정을 싫어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그 증오를 부추긴 데는 그의 무심함도 한몫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여왔다.급한 일을 처리하고 고개를 돌린 이한석은 휠체어에 꼿꼿이 앉아있는 박수혁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던 사람이 이번에는 꽤나 충격을 먹은 듯한 모양이었다.하긴, 하나뿐인 어머니가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려 했다.그 누구라도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간 이한석이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피를 많이 흘리시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랍니다.”손가락으로 휠체어 휠을 톡톡 두드리던 박수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아줌마는 필리핀으로 보내. 앞으로 절대 돌아오지 못하게 조치해 두고. 그리고 어머니는...”박수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퇴원하시면 바로 정신병원으로 옮겨. 내 명령 없이 퇴원은 금지야.”박수혁의 말에 이한석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곧 다시 담담한 표정을 되찾았다.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한석도 직접 목격한 터였다. 먼저 공격한 건 이민혜였고 소은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민혜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그래도 사람이라면 원망의 마음이 들 만도 한데... 소은정 대표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시는 건가...하지만 박수혁이 내린 결정에 그의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네, 대표님.”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이한석이 조심스레 물었다.“대표님, 소은정 대표님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으시겠죠?”박수혁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건 분명했고 이번 기회까지 놓치면 정말 영원히 소은정을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저녁은 뭘 드시고 싶으신지 전화라도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