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휠체어에 앉은 박수혁은 이민혜가 구급차에 실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슬픔? 기쁨?아니, 그가 느끼는 감정은 충격이었다.소은정을 싫어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그 증오를 부추긴 데는 그의 무심함도 한몫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여왔다.급한 일을 처리하고 고개를 돌린 이한석은 휠체어에 꼿꼿이 앉아있는 박수혁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던 사람이 이번에는 꽤나 충격을 먹은 듯한 모양이었다.하긴, 하나뿐인 어머니가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려 했다.그 누구라도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간 이한석이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피를 많이 흘리시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랍니다.”손가락으로 휠체어 휠을 톡톡 두드리던 박수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아줌마는 필리핀으로 보내. 앞으로 절대 돌아오지 못하게 조치해 두고. 그리고 어머니는...”박수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퇴원하시면 바로 정신병원으로 옮겨. 내 명령 없이 퇴원은 금지야.”박수혁의 말에 이한석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곧 다시 담담한 표정을 되찾았다.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한석도 직접 목격한 터였다. 먼저 공격한 건 이민혜였고 소은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민혜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그래도 사람이라면 원망의 마음이 들 만도 한데... 소은정 대표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시는 건가...하지만 박수혁이 내린 결정에 그의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네, 대표님.”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이한석이 조심스레 물었다.“대표님, 소은정 대표님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으시겠죠?”박수혁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건 분명했고 이번 기회까지 놓치면 정말 영원히 소은정을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저녁은 뭘 드시고 싶으신지 전화라도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포장
이한석은 바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20분 뒤, 어림잡아 100kg는 되어 보이는 남자가 박수혁의 앞에 나타났다. 특히 그 능글맞은 웃음이 박수혁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형.”이한석이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남자는 바로 걸걸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대표님, 오한진이라고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 집안에 들이신 거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한 달 안에 소은정 대표님과는 화해하게 되실 거고 늦어도 일 년 안에는 다시 살림 합칠 수 있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오한진은 과장을 섞어 포부부터 밝혔다. 이 정도 보장도 주지 않으면 정말 금방이라도 쫓겨날 것만 같은 기분에서였다.반면, 오한진의 모습을 본 순간, 박수혁은 혀라도 씹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정말 미쳤지라는 생각이 들려던 순간, 오한진의 자신만만한 말에 다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저 껄렁대는 몸뚱아리를 1년 정도는 참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한편, 이한석은 또다시 오한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아니, 허풍도 적당히 쳐야지. 형 그 혓바닥에 내 커리어가 달렸다고! 제발 좀 신중해져 봐!서재에 침묵이 감돌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박수혁이 입을 열었다.“직장 생활을 했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창업할 생각을 했지?”박수혁은 아무나 곁에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사 역할로 지낼 남자라면 더더욱 자세히 알아봐야 했다.하지만 오한진은 차가운 박수혁의 눈빛에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듯 짐짓 한숨을 푹 내쉬었다.“글쎄 구내식당에서 제가 밥 좀 많이 먹었다고 눈치를 주지 뭡니까? 아니 제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요...”오한진은 애교를 부리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아니 제가 영업을 뛰면서 회사에 벌어준 돈이 얼만데... 식대 좀 많이 나간다고 눈치를 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바로 때려치웠죠!”말도 안 되는 이유에 박수혁은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럼... 창업한 뒤로 몇 커플이나 성사시켰지?”박수혁의 질문에 흠
연결음 소리가 두 번 정도 울리고 차가운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누구시죠?”“소은정 대표님 맞으시죠? 저 연남동에 새로 온 집사 오한진입니다. 제가 대표님 방을 청소하다 화장품을 살짝 건드렸거든요? 박 대표님께서는 전부 새 걸로 갈아치우라고 하시는데 아... 제가 여자 화장품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오한진이 불쌍한 말투로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소은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버리지 마세요. 지금 바로 돌아갈 거니까. 내 물건에 손이라도 대봐요!”서재 안에서 통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박수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이렇게 쉽다고?한편 전화를 받은 소은정은 바로 최성문에게 차를 돌리라 지시했다. 그녀가 사용하는 화장품들은 전부 자주 가는 에스테틱에서 그녀만을 위해 커스터마이징한 것, 시중에서는 구매가 불가능한 것들이었다.이런 멍청한 남자들. 내 화장품에 손이라도 대봐.부리나케 달려온 소은정은 연남동 집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전 피를 철철 흘리던 사람이 쓰러져있던 곳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경찰에는 신고가 안 되었다는 뜻, 박수혁 측에서 이 일로 꼬투리를 잡지 않으면 소은정도 문제를 삼지 않을 생각이었다.박수혁이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것만 2번, 괜히 끝까지 파고들었다가 박씨 집안사람들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애매한 일이니까.심호흡을 깊이 하고 문으로 들어서려던 그때, 딱 봐도 과체중인 남자 한 명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은정 앞에 나타났다.“소은정 대표님?”오한진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새로 온 오한진 집사라고 합니다. TV에서 뵌 것보다 실물이 훨씬 더 이쁘시네요. 평범한 여배우들과는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이랄까. 정말 최고십니다.”갑작스럽게 나타나 칭찬부터 내뱉는 오한진의 모습에 소은정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것 참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이때 뒤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최성문이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말 다 끝났습니까?”“아, 이쪽이
오한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을 다시 이어주는 것, 절대 단둘이 함께 있을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오버스러운 오한진의 말투에 최성문은 물론 박수혁도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하, 당신 저런 직원을 좋아했었나? 한 시간 사이에 스타일이라도 바뀐 거야?”박수혁 주위에는 전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뿐이었다. 그런데 이 오한진이라는 남자는 껄렁한 말투부터 특출한 것 하나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집사로 뽑은 거지?무슨 꿍꿍이야.박수혁이 적당한 핑계를 찾으려던 그때, 오한진이 싱긋 웃었다.“대표님, 사실 저 낙하산이에요.”스스로를 낙하산이라 밝히는 낙하산이라니. 소은정이 흥미로운 듯 물었다.“누구 백으로 들어온 거죠?”오한진은 짐짓 큰 비밀이라도 되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저 사실 한석이 사촌 형입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세요. 보시다시피 제가 외모부터 스펙까지 한석이한테 많이 꿀립니다. 창피하잖아요.”“네, 그럴게요.”이한석의 친척이라... 수행비서로 아끼는 줄은 알았지만 그 인맥으로 직원까지 들일 수 있는 정도였다니.소은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단을 올랐다.“아, 제 물건은...”“전부 그대로 있습니다. 알코올로 소독까지 다 해뒀으니 안심하고 쓰십시오!”소은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쉬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한편, 식사시간, 식탁에 앉아있던 박수혁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소은정이 그렇게 부리나케 돌아온 이유가 화장품이라는 게 괘나 귀엽게 느껴졌다.반면 소은정은 혼자 피식거리는 박수혁을 힐끔 노려보았다.뭐야, 이 인간. 밥이나 조용히 먹을 것이지 왜 웃고 난리래?오한진은 체중이 100Kg를 육박하는 거구였지만 움직임만은 아주 가벼웠다. 그리고 만든 요리들도 전혀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것이 소은정의 입맛에 꼭 맞았다.유씨 아주머니가 만든 음식은 입에도 안 대던 소은정이 곧잘 먹는 모습에 박수혁의 입맛도 다시 되살아나는 듯했다.두 사람이 대충 식사를 마친 듯하자 오한진이 바로 칭찬을 시작했다.
2층 방 발코니에서 햇빛을 즐기며 차를 마시던 소은정이 솔솔 밀려드는 잠에 눈을 감으려던 그때, 살금살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오 집사님?”“역시 은정 대표님, 돌아보지도 않고 저인 걸 아셨네요? 역시 평범한 여자들과는 뭐가 달라도 다르십니다. 후식 과일 좀 준비해 왔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는 마음에 드셨습니까?”소은정이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오한진이 짐짓 불안한 듯 두 손을 비비며 말을 이어갔다.“대표님께서 분부하신 메뉴대로 준비하긴 했는데 은정 대표님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사실 저 오늘 첫 출근이라서요. 집사로서 이런 기본적인 식사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바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오한진의 말에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박수혁이 분부한 거라고? 전부 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이라 의아했었는데 박수혁이 시킨 대로 한 거였다니.그녀의 음식 취향은 어떻게 아는 걸까?불편했다. 박수혁이 그녀에게 신경을 쓰면 쓸수록 마음은 꽉 막힌 듯 답답해져만 갔다.하지만 그녀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저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어차피 산해진미를 차려준다 해도 박수혁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마음 편히 밥을 먹을 수는 없을 테니까.“아, 그리고 저녁에 친구랑 쇼핑하기로 했어요. 저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쇼핑이요? 제가 백이라도 들어드릴까요?”오한진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두 사람을 이어주려면 우선 소은정의 신뢰를 어는 게 급선무! 어떻게든 소은정의 마음을 열어야 했다.“아니요. 경호원이 있으니 괜찮습니다.”......한 시간 후, 소은정은 한유라와 김하늘이 있는 쇼핑몰로 향했다.“갑자기 웬 쇼핑이야?”소은정의 질문에 김하늘이 눈을 흘겼다.“얘 좀 봐? 너 혼자 맨날 박수혁이랑 얼굴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 받을 게 뻔하니까 데리고 나와줬더니? 아니면 뭐? 같은 집에서 있으니까 옛정이 막 살아나고 그래?”한유라도 김하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세 사람 모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박예리가 틀림없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그때, 한유라가 입을 열었다.“하, 집에서 쫓겨났다더니 여기서 일하고 있었어? 등잔 밑이 어둡긴 하네.”소은정은 박예리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가식적인 미소이긴 하지만 고객에게 굽신대는 모습이 꽤 어색했지만 마음은 왠지 깨고소했다.그런데 박씨 집안 금지옥엽 외동딸이 왜 여기서 매장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거지? 박수혁은 자기 여동생이 여기서 일하는 걸 알고 있을까?“가까이 가서 볼래?”김하늘이 물었다.소은정이 고개를 저으려던 그때, 한유라가 먼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당연히 가야지. 우리가 뭐 죄지었어?”“어서오...”매장에 손님이 들어오자 자연스레 인사를 하던 박예리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너희들이 여기 어떻게... 당장 나가!”역시...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성깔은 여전하네.“신발 매장에 왜 왔겠어요? 당연히 신발 사러 왔지. 그런데 박예리 씨야말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한유라가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소은정의 얼굴만 생각하며 칼을 갈던 박예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고객에게 대놓고 진상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입술을 꽉 깨물더니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어디서 일하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 신발 살 거면 조용히 보고 안 살 거면 당장 꺼져!”그녀의 말에 소은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빠가 서민 체험이라도 해보라고 여기로 보냈나 봐요?”“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서 입을 놀려!”박예리가 이를 갈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소은정을 노려보았다.“내 탓이라고요? 그동안 박예리 씨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다 잊었나 봐요?”한편, 매장 매니저는 범상치 않은 옷차림의 세 여자를 보고 바로 아부섞인 미소를 지었다.“예리 씨, 예리 씨 손님이에요? 어서 안내해 드려요.”박예리가 고개를 저으려던 그때 한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저거, 저거, 저것까지 전부 한 번 볼게요.”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뭘 끓이는 거예요?”복숭아와 제비집을 섞어 만든 건강 차입니다. 칼로리도 낮고 여자들 피부에 아주 좋죠. 맛 좀 보시겠어요?”내내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시장했던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은 잠드셨나요?”“아니요. 서재에서 화상회의 중이십니다. 조금 쉬시라고 해도 제 말은 안 들으시네요...”오한진이 감탄하며 주방에서 갓 끓인 건강차를 찻잔에 담아 내왔다.“우리 경호원 분도 한잔하시겠어요?”홀짝 차를 마신 소은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성문에게 말했다.“그래요. 우리 오 집사님 솜씨가 참 좋네요.”하지만 최성문은 여전히 오한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아니요, 전 됐습니다.”하지만 여기서 쉽게 포기할 오한진이 아니었다. 그는 체중을 빌어 최성문의 등을 꾹꾹 밀며 말했다.“아이 참... 그러지 말고 마셔보세요. 한 번 마시면 반한다니깐요.”그 모습에 싱긋 웃던 소은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몸에도 좋다니까 낭비하지 말고 마셔요. 전 이만 올라가 볼게요. 오 집사님도 일찍 주무세요.”“네, 은정 대표님. 은정 대표님은 참 상냥하신 것 같아요. 돈 좀 있다고 갑질 하는 재벌 2세들도 많은데...”소은정이 자리를 뜨자 오한진은 타깃을 바꾸어 최성문에게 아부를 건네려고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 페이스에 말리면 오늘 밤새 수다만 떨어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오한진은 단 번에 건강차를 원샷 한 뒤 소은정의 뒤를 따랐다.텅 빈 찻잔을 보던 오한진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국대 출신이라 그러신지 차를 마셔도 호탕하십니다!”한편, 서재 앞을 지나던 소은정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매력적인 박수혁의 중저음이 프랑스어와 유난히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흠, 목소리 하나는 괜찮단 말이야.하지만 소은정은 서재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방으로 돌아가 아빠와 오빠들과 영상통화를 하기 시작했다.반면 소은정이 방으로 들어가자 최성문은 오늘도 역시나 방 문 앞에 침낭을 폈다. 겨우 누워서 눈을 감으려던 그때, 누군가
잠버릇은 없다며 호언장담할 때는 언제고 누운지 10분도 안 돼서 코를 골기 시작하다니. 어이가 없었다.최성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그 소리를 소은정도 들었는지 방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했다.“이게 무슨...”방 문 앞에 대자로 뻗어 코를 골고 있는 오한진의 모습에 소은정이 고개를 갸웃했다.“아가씨, 이 자식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어서 들어가서 주무십시오!”“아, 너무 시끄러워서 못 잘 것 같은데요?”소은정의 불평에 최성문도 더 이상 참지 않고 오한진에게 킥을 날렸다.갑작스러운 충격에 눈을 번쩍 뜬 오한진이 소은정을 발견하고 바로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아, 은정 대표님. 아직도 안 주무시고 뭐 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경호원 분한테서 대표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소은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어이 없다는 듯 최성문을 바라보았다.“앞으로는 손님방에서 자요. 난 괜찮으니까.”내키지는 않았지만 딱히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던 최성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국가대표로 선발되고 국제대회 챔피언까지 한 그가 이깟 뚱땡이한테 밀리다니.최성문이 침낭을 챙기기 시작하자 오한진도 바로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저기요. 우리 같이 자면 안 될까요? 제가 혼자 자면 자꾸 가위에 눌려서. 아까도 보셨겠지만 전 잠버릇 없습니다...”두 사람이 자리를 뜬 뒤에야 소은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때 서재 문이 열리고 휠체어에 앉은 박수혁이 모습을 드러냈다.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어, 언제 들어왔어?”“왜?”“나 케어해 주겠다고 온 거잖아.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면 어떡해... 그리고 오늘 몸은 어땠냐고 묻는 게 먼저 아니야?”박수혁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서글픔이 담겨있었다.가련한 모습에 소은정의 마음도 살짝 흔들렸지만 곧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오늘 몸은 어땠어?”“살짝 아팠는데 네 얼굴 보니까 기분이 좋아졌어.”말을 마친 박수혁은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었고 그 모습에 소은정은 어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