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나타난 거구의 사내의 모습에 아주머니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누... 누구세요?”하지만 최성문은 그 질문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 옆으로 물러섰다.“아가씨, 들어가시죠...”본가의 스파이 역할을 해왔던 아주머니와 회포를 풀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소은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왠지 분위기가 바뀐 사모의 모습에 아주머니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거실로 들어선 소은정의 시야에 그레이톤의 홈웨어를 입은 박수혁의 얼굴이 들어왔다. 살짝 야위어서인지 더욱 선명해진 턱선과 콧날... 휠체어에 앉아서인지 평소의 포스는 줄어들고 묘한 병약미까지 더해져 왠지 모르게 모성애를 자극하는 모습이었다.“드디어 돌아왔네?”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던 소은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가구, 인테리어 소품들까지 3년 전과 그대로인 모습에 소은정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짐은 손님방에 풀게.”“아, 아주머니한테 부탁해.”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병인이란 명목으로 소은정을 다시 집으로 불러들이긴 했지만 다시 그녀와 함께 살게 된 이상, 이번에는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달라진 소은정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아주머니가 부랴부랴 다가가 최성문의 손에 들린 트렁크 손잡이를 잡았다.“네, 제가 할게요. 사모님 방은 제가 깔끔하게 청소해 뒀습니다.”하지만 최성문은 아가씨 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아주머니를 노려보았다.소은정은 어색한 미소로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아주머니를 무시하고 박수혁에게 물었다.“뭐야? 내가 지내던 방에서 지내라고?”“아, 워낙 급하게 들어오느라 손님 방은 아직 정리가 덜 끝나서. 당분간이라도 그 방에서 지내.”“휴, 그래.”소은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 방을 쓰느냐로 의미 없는 기싸움에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길어봐야 몇 달일 테니까.생각보다 쉽게 한발 물러서는 소은정의 모습에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박수혁을 뒤로하고 소은정이 계단을 올랐고 최성문이
연남동 아파트는 두 층을 하나로 이은 복식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휠체어로 다니는데 불편함이 거의 없었다.2층으로 올라온 소은정은 앞으로 지낼 방을 훑어보았다. 방의 모습은 그녀가 이곳을 떠날 때와 그대로였다. 이곳에서 외로움으로 눈물로 지새우던 나날들이 어제 일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벌레처럼 소은정의 심장을 갉아먹는 듯하고 무거운 마음에 숨조차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발코니의 의자도 그대로였다. 저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게 일상이었지... 박수혁의 차가 나타나길 기다리면서...결혼하고 나서 박수혁은 이 방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곳의 모든 기억은 박수혁과 관련된 것이었다.피식 웃음을 터트리던 소은정은 쇼핑백 하나를 꺼내 화장대 위에 진열된 물건을 전부 집어넣은 뒤 쓰레기통에 버린 뒤 그녀의 방과 연결된 옷방으로 들어갔다.집안에서 유일하게 바뀐 곳이 바로 이 옷 방이었다. 그녀가 입던 옷들은 전부 사라지고 이번 시즌 최신상 명품들이 액세서리 진열장과 옷장에 가득 걸려있었다.하지만 죽어버린 소은정의 눈빛은 다시 반짝이지 않았다......“똑똑똑...”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은정은 시간을 확인했다. 6시 반... 시간도 참 빠르게 흐르네.최성문이 성큼성쿰 다가가 문을 열자 잔뜩 겁먹은 얼굴의 아주머니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갔다.“사... 은정 씨, 대표님께서 식사하러 내려오시라는데요.”“알겠어요.”소은정의 대답에 아주머니는 단 1초도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은 듯 후다닥 1층으로 내려갔다.계단으로 1층으로 내려온 소은정은 거실의 풍경에 눈빛을 빼앗겼다. 아름다운 노을이 비치는 따뜻한 거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흰색 커튼... 이렇게 예쁜 곳이었는데 그때는 왜 몰랐을까?멍한 표정의 소은정의 곁으로 다가온 박수혁이 물었다.“배고프지?”예전과 달라진 소은정과 어떻게든 다시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에 아주머니가 다시 넉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박수혁의 말에 주방은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앗차, 실수했다.괜한 욕심을 낸 건가 싶다가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은정의 마음을 열기 전에 다리가 먼저 나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박수혁의 제안에 흠칫 놀란 듯한 소은정의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가 걸렸다.“부러진 건 다리지 팔은 아니잖아?”묘한 미소를 짓는 소은정의 모습에 박수혁의 마음도 점점 기대감에 부풀기 시작했다.좋아, 적어도 화는 안 냈으니까... 조금만 더...박수혁은 짐짓 실망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그렇게 싫어? 이렇게 멀쩡해 보여도 환자인데 밥 정도 먹여줄 수는 있잖아...”그 모습에 소은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하, 어디서 이런 발연기를. 또 무슨 꿍꿍이인 건지.하지만 곧 한숨을 푹 내쉬고 마음을 다스렸다.이 남자는 나 때문에 다친 거다... 참자... 참아...하지만 다음 순간, 소은정의 뒤에 서 있던 최성문이 성큼 다가가 박수혁의 앞에 놓인 죽 그릇을 들었다.“대표님, 아 하십시오...”커다란 최성문의 손에 들린 죽 그릇은 왠지 간장 종지처럼 작아 보였다. 게다가 무뚝뚝한 얼굴에 저런 어울리지 않는 대사라니.벌레라도 씹은 듯한 박수혁의 표정에 소은정도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저 남자가 먹여주는 죽을 받아먹었다간 정말 체할 것만 같아 박수혁이 죽 그릇을 낚아챘다.“그래, 팔이 부러진 건 아니니까. 내가 알아서 먹을게.”박수혁의 말에 최성문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장승처럼 꼿꼿이 서서는 소은정의 뒤를 지켰다.박수혁이 고분고분 식사를 시작하자 소은정은 우연준이 보낸 파일을 처리하고 휴대폰에 쌓인 메시지에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한참 동안 일을 하던 소은정은 박수혁의 시선을 느끼고 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다 먹었어?”박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선 소은정이 그릇들을 치우려 하자 박수혁이 바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뭐야. 이렇게 너 부려먹으려고 부른 거 아니야.”아주머니도 부랴
널찍한 타타미는 일하다 피곤할 때면 잠깐 쉴 수 있도록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뭐야? 쉬고 싶은 거면 안방으로 갈 것이지. 왜 서재로 온 거래?소은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또 뭐 어떻게 해줄까?”퉁명스러운 소은정의 말투에 박수혁이 어깨를 으쓱했다.“계속 여기 앉을 수는 없잖아? 휠체어 불편해. 저쪽에 앉고 싶단 말이야.”“나 당신 저기까지 못 옮겨.”이 남자가 정말 두 다리 다 부러지고 싶나? 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그런대?소은정의 단호한 말투에 깊은 한숨을 푹 내쉰 박수혁이 왼쪽 다리에 중심을 둔 채 천천히 일어섰다. 조금 조금씩 발을 옮기자 고통으로 일그러진 박수혁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순간, 박수혁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소은정은 무의식적으로 박수혁을 부축했다.박수혁의 체중이 그녀의 여리여리한 몸에 쏠렸다. 순간 숨이 막히는 느낌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한 눈빛에 결국 참을 수밖에 없었다.박수혁이 이렇게 된 건 온전히 그녀의 탓이었으니까... 평소 쌓인 감정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일로 화를 낼 수는 없었다.그렇게 소은정은 조심스럽게 박수혁을 부축했다. 산뜻한 박하향이 소은정의 코끝을 자극했다. 오른쪽 다리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박수혁을 조심스럽게 타타미에 앉히고 나니 두 사람 모두 땀벅벅이 되고 말았다.창백한 얼굴로 한숨 돌리던 박수혁이 싱긋 미소 지었다.“무슨 파일 볼 거야? 노트북은? 한 번에 다 말해. 사람 왔다 갔다 하게 만들지 말고.”괜시레 퉁명스러운 말투로 툭 뱉곤 돌아서는 소은정의 손목을 박수혁이 낚아챘다.“일하려고 들어온 거 아닌데? 같이 영화나 봐.”박수혁이 리모컨을 누르자 서재의 불빛이 전부 꺼지고 커튼도 자동으로 닫히더니 큰 스크린이 내려오기 시작했다.하,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겨우 앉혔더니? 뭐? 영화를 봐?소은정이 박수혁을 노려보았다.“당신 정말 어디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은 불쌍한 얼굴로 다리를 가리켰다
“네, 대표님께서 2층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소은정 씨도 대표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고분고분 한 방에 들어가는 걸 보면... 무슨 생각 하는지 뻔하죠.”유씨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달칵!순간 주방 불이 켜지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던 아주머니는 당황한 나머지 휴대폰까지 떨구고 말았다.그리고 휴대폰 액정에 찍힌 이름을 확인한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큰 사모님.”하, 이민혜 그 여자랑 통화 중이었어?현장을 잡힌 유씨 아주머니가 당황한 눈빛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소... 소은정 씨, 왜 거... 거기에...”소은정은 아무 말 없이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컵에 따른 뒤 2층으로 올라갔다.별말없이 올라가는 그녀의 모습에 아주머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주웠다.짜증스러운 마음에 찬 우유를 벌컥벌컥 마신 소은정은 울렁거리는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하, 아직도 저런 스파이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결혼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씨 아주머니는 이민혜가 꽂은 사람, 그녀가 하루 종일 뭘 했는지 매일 이민혜에게 보고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박수혁이 입는 옷은 속옷까지 다려야 한다, 집안 곳곳의 청소는 소은정이 직접 해야 한다, 식사는 이민헤가 정해준 메뉴대로 준비해야 한다...그렇게 소은정은 이민혜가 정해준 규칙에 따라 박수혁이 한 번도 입지 않는 셔츠를 다리고 한 번도 만진 적 없는 가구를 닦고 그가 먹지도 않는 식사를 차려야 했다. 청소 아주머니라고 붙여두긴 했지만 유씨 아주머니는 그녀가 매일 하는 일들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상사와 다름이 없었다.그런데 이혼 도장까지 찍은 지금도 날 통제하려 해? 하, 하긴, 개가 똥을 끊지.서재로 돌아온 소은정은 일부러 문을 쾅 닫았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박수혁이 눈을 번쩍 떴다.“잘 거면 방 가서 자.”소은정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분이 확 나빠진 것 같은 모습에 박수혁
방으로 돌아온 박수혁은 화가 치밀어 잠도 오지 않았다.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소은정과 가까워지려고 했는데 새끼 오리마냥 소은정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최성문 때문에 도무지 다가갈 수가 없었다.하... 짜증 나.......다음 날, 잠을 설친 소은정이 피곤한 얼굴로 일어났다.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깨셨습니까?”“네, 잠시만 기다리세요.”소은정은 심플한 실크 블라우스와 블랙 A 라인 스커트로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이미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수혁은 깔끔한 커리어 우먼 스타일의 소은정을 보고 두 눈을 반짝였다.“굿모닝,”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예의상 물었다.“잘 잤어?”하지만 박수혁은 최성문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아니.”“아직 다리 많이 불편하지? 그래도 조금만 참아.”질문이 나온 김에 최성문의 존재에 대해 불평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덤덤하게 걱정해 주는 소은정의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이때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나오며 식탁에 접시들을 올려놓았다.“은정 씨는 아침 가볍게 드시는 거 좋아하죠?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어때요?”혹시나 소은정이 자신의 스파이짓을 박수혁에게 고자질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하지만 소은정은 아주머니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아, 당신 어제저녁에 약 안 먹었지?”옳거니... 박수혁은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러네. 간병인 자격미달이야. 어떻게 보상할 거야?”하지만 소은정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약상자를 챙겨오더니 약들을 식탁 위에 탁 내려놓았다.“그럼 어제 몫까지 전부 다 먹으면 되겠네.”그 모습에 박수혁은 흠칫 했지만 아무 불평 없이 소은정이 건네는 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평소 차갑기만 하던 박수혁의 고분고분한 모습에 아주머니의 눈이 커다래졌다.“나 출근해야 해. 갈게.”소은정이 핸드백을 들고 일어서자 박수혁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됐어. 오빠가 아침 포장해 주기로 해서.”
”게다가 어제저녁에는 대표님 약 챙겨주는 것도 까먹은 거 있죠? 그러곤 아침에 2회분 약을 챙겨주는데... 하, 참 어이가 없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대표님한테 복수하려고 다시 돌아온 것 같은데요? 사모님, 저 여자가 다시 돌아오면 분명 집안이 시끄러워질 거예요...”......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던 박수혁의 표정은 의아함에서 언짢음으로 바뀌었다.휠체어를 잡은 박수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머니가 통화하는 상대가 바로 그의 어머니 이민혜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한편, 계단에 앉은 채 이 대화를 엿듣고 있는 소은정의 모습은 마치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의 가십을 듣고 있는 듯 담담, 아니 흥미로워 보였다.그 덤덤함이 오히려 비수처럼 박수혁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말도 안 되는 억지까지 부려가며 그녀를 이 집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집에서 있었던 불행했던 과거를 다시 행복한 기억으로 덮어주고 싶어서였다.그런데... 이게 뭐야?결혼 생활 중에도 아주머니는 이 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가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던 이 집에서 어머니가 꽂은 스파이와 함께 지내는 소은정의 기분은 어땠을까?지난 3년간... 어떻게 살아왔을지 눈앞에 선했지만 그 상상만으로 끔찍해 박수혁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어젯밤... 다시 서재로 돌아온 소은정의 눈동자에 담긴 혐오가 덤덤함으로 덤덤함에서 다시 차가움으로 바뀐 것도 이것 때문일까?한동안 소은정의 흉을 보던 아주머니는 15분은 족히 더 떠들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계단을 다시 올라가려던 소은정은 잔뜩 굳은 박수혁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자기 험담도 아니고 왜 저런대?그러든지 말든지 다시 2층으로 올라가려던 그때, 박수혁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은정아, 화나지 않아? 화난다고 한 마디만 말해 줘. 그럼 내가... 복수해 줄 테니까.”차라리 화라도 내면 3년 동안의 불쾌함을 모두 쏟아버릴 수 있지 않을까?하지만 소은정은 화를 내기는커녕 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
게다가 필리핀 메이드 학교라니. 이 나이에 처음부터 허드렛일을 배우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설마... 사모님과 통화하는 걸 전부 들으신 걸까?공포가 발끝에서부터 온몸에 퍼지고 아주머니는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지금의 박수혁은 결혼생활 내내 한 번도 신혼집을 와보지 않은 무정했던 박수혁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히 소은정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빛이었으니까...그래서 날 내치려는 건가?방으로 돌아온 유씨 아주머니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이민혜에게 전화를 걸었다.1시간 뒤, 이민혜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마침 기분 전환 겸 쇼핑하러 나가려던 소은정과 마주친 이민혜는 바로 삿대질을 시작했다.“이런 불여우 같은 X. 이혼 도장 찍었으면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질 것이지.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무슨 염치로 다시 내 아들 집으로 들어와!”하, 이 아줌마는 정말 하나도 안 바뀌었네.“사모님, 말씀 조심하세요. 제가 아직도 사모님 말 한 마디에 굽신대던 며느리인 줄 아세요? 어른 대접도 어른처럼 행동하셔야 받는 겁니다.”소은정의 당당한 태도에 이민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네가 감히... 내 아들을 업고 나한테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인기척에 방에서 달려나온 유씨 아주머니가 이민헤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오열했다.“사, 사모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대표님께서 절 필리핀으로 보내시겠다잖아요.”“걱정하지 마. 내가 있는 한 누구도 자네를 쫓아낼 수 없으니까. 자네가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나 본데. 그럴수록 더 마음 독하게 먹고 붙어있어야지!”이민혜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소은정이 눈을 흘겼다. 이 무슨 피해망상인지. 정말 내가 박수혁한테 저 아줌마가 한 일을 전부 이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해명하기도 귀찮고 말이 안 통하는 아줌마와 입씨름도 하고 싶지 않았던 소은정이 문을 나서려던 순간, 이민혜가 다시 소은정의 앞을 가로막았다.“소은정, 경고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