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의 폭탄 발언에 주위가 조용해졌다.SW그룹은 글로벌 대기업으로 시가 총액은 위연그룹의 수십 배에 달했다.허인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원한빈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란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유튜버인 원한빈이 재벌 2세라니...하지만 폭탄을 던져버린 소은정은 여유롭게 원한빈의 팔짱을 끼고 룸을 나섰다. 문을 닫는 순간, 술병이 깨지는 소리와 허인혜의 울음 섞인 해명이 흘러나왔다.복도 끝까지 걸어간 뒤에야 두 사람은 팔짱을 풀고 서로를 향해 싱긋 웃었다.“우리 집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어요?”원한빈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우혁이가 말해 줬는데요.”“하, 이 자식. 진짜 입만 가벼워서는.”원한빈이 고개를 저었다.“뭐 어때요? 나쁜 일도 아니고. 마지막 선물로 이 폭탄은 터트려줘야죠?”두 사람이 클럽을 나가려던 그때, 뒤편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벌써 가려고?”박수혁이었다.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원한빈, 소은정은 흠칫 하다 뒤돌아섰다.“친구 위로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나왔어?”남자친구를 배신한 허인혜가 인과응보를 당한 것도 속이 시원했지만 평소 안하무인이던 이태성이 당한 꼴을 보는 것도 나름 깨고소하다고 생각하던 소은정이었다.“두 사람 일부러 룸에 들어온 거지?”원한빈을 힐끗 바라보던 박수혁이 물었다.“그렇다면요? 친구 대신 복수라도 하시려고요?”원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여유로운 원한빈의 표정에 박수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딴 건 내 알 바 아니고. 내가 궁금한 건... 너랑 소은정 도대체 무슨 사이야?”고개를 돌린 박수혁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태성과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고 평소 그의 이름을 팔아 밖에서 잘난 척하는 꼴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그는 친구의 실패한 연애사 따위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그의 기분을 거슬리게 만든 건 바로 룸에 들어온 뒤로 다정한 연인처럼 스킨쉽을 주고 받는 소은정과 원한빈이었다.“무슨 사이면 뭐?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
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은 가슴이 욱신거렸다.뭐야? 정신 차려. 박수혁이 불쌍하기라도 하단 거야?소은정은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박수혁과 시선을 마주했다.“알면 됐어.”매정한 소은정의 말에 마음이 아프긴 박수혁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수많은 여자들의 시선을 끌던 멋진 뒷모습이 오늘만큼은 외롭게 느껴졌다.협박도,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소은정 앞에서만큼은 무력해지는 자기 자신이 미웠다.이때 룸에서 나온 강서진이 부랴부랴 달려왔다.“형, 얼른 좀 와봐! 태성이가 지금 당장 애부터 지워야 한다고 난리... 어? 은정 씨?”이에 소은정은 싱긋 미소를 지어준 뒤돌아섰다. 외롭지만 결연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박수혁은 또다시 아려오는 가슴에 미간을 찌푸렸다.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표정을 관리했지만 손톱이 파고들어갈 정도로 꽉 움켜쥔 주먹이 지금 이 순간, 박수혁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대충 눈치챈 강서진이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려던 그때, 박수혁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형!”부름에도 대답 없이 움직이는 박수혁의 모습에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든 강서진이 뒤를 따라가던 그때, 룸 안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온다.“젠장...”짧은 욕설을 내뱉은 강서진은 잠깐 고민하다 결국 룸으로 다시 돌아간다.소은정이 다시 룸으로 돌아오지 그제야 원한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남녀 사이는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는 말이 맞나 보다. 그 천하의 박수혁이 여자 앞에서 결국 고개를 숙인 걸 보면.박우혁은 약속대로 비싼 양주를 주문했지만 이미 기분이 잡친 소은정은 술을 마실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붉은 눈시울로 그녀를 바라보던 박수혁의 눈빛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내가 너무 심했나? 아니야. 괜한 희망을 심어주는 것보다 현실을 제대로 짚어주는 게 맞아. 언젠가 나도 새로운 연애를 할 테고 박수혁 당신도 재혼할 거잖아.착잡
소은정은 괜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술자리가 끝나고 소은정과 스태프들은 카드게임을 시작했고 밤새 이긴 그녀는 왠지 어깨가 으쓱해졌다.일부러 져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짜릿한 승리의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판마다 지는 반시연의 표정이 일그러질 무렵에야 소은정은 오늘은 이만 파하자고 제안했다.다음 날 점심쯤,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에 소은정은 낑낑대며 몸을 뒤척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다시 꿈나라로 가려던 그 순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이런! 무음으로 해놓을걸.“한유라, 제발 잠 좀 자자. 잠 좀.”짜증스런 소은정의 말투에도 한유라는 웃는 걸 멈추지 않았다.“아직도 자고 있었어? 네가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알아?”“뭔데.”“오늘 이태성 결혼식이잖아. 그런데 신부가 바뀌었더라고.”“뭐?”소은정은 순간, 잠에서 덜 깼나 싶었다.“어제 솔로 파티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예비 신부 전 남친이라는 남자가 나타나서 판을 다 엎고 나왔대. 뭐 암튼 그래서 애부터 지울 거라고 새벽에 응급실까지 갔는데... 그 여자 애초에 임신도 아니었대.”한유라의 이어지는 폭탄 발언에 소은정의 눈은 점점 더 커다래졌다.“그래서 오늘 결혼식 취소할 줄 알았는데 신부만 바꿔치기 한 거 있지? 중소기업 회장 외동딸인데 전부터 이태성 좋다고 꽤 따라다녔나 봐. 그쪽 집안에서는 중소기업 사돈이 눈에 차지 않는 눈치지만 뭐 전 여자보다야 낫지 뭐.”결혼식 하루 전 날 신부가 바뀌다니. 그냥 지나가는 말로만 들었다면 분명 거짓 뉴스라고 넘길 정도로 막장인 상황에 소은정은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게다가 허인혜 그 여자 임신도 아니었어?한참을 망설이던 소은정이 겨우 입을 열었다.“신부 쪽 집안은 이런 결혼도 괜찮대?”“여자 쪽에서 먼저 제안한 거라던데? 그리고 어차피 이태성 그 자식 인성 개차반인 거 이 바닥 사람들은 다 아는데 웬만한 집안 여자들이 왜 굳이 이태성이랑 결혼하려 하겠어. 이 정도면 만족해야지.
박수혁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왜겠어. 너랑 같은 이유겠지.”사업가인 박수혁과 소은정이 전동하에게 이토록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돈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박수혁의 대답에 소은정은 고개를 끄덕인 뒤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익숙한 박하향 향수가 코를 찔렀다.연예인 뺨치는 외모의 소유자인 두 사람이 나란히 앉자 순식간에 학생들의 시선들이 쏠리기 시작했다.“이런 일에 직접 나설 정도로 한가해?”“그러는 너도 직접 왔잖아?”박수혁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소은정의 귓가에 속삭였다.소은정은 고개를 돌려 박수혁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평소처럼 진중하면서도 약간 차가운 모습, 그런데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어제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를 바라보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그런데 어제까지 죽을 상이더니 오늘은 기분 좋아 보이네? 또 무슨 꿍꿍이야?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박수혁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싱긋 미소를 지었다.“왜? 그렇게 잘생겼어?”하!소은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박수혁을 흘겨보았다.박수혁의 웃다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경악하겠네.소은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왜? 보고 싶으면 봐. 안 놀릴 테니까.”계속 능글맞게 들이대는 박수혁의 모습에 소은정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박수혁, 미쳤어?”하지만 박수혁은 소은정이 화내는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질 뿐이었다.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학생들은 입을 떡 벌렸다. 방금 전까지 차가운 포스를 자랑하던 박수혁이었다. 그 분위기에 겁을 먹고 옆자리에 감히 못 앉았던 건데. 저렇게 웃을 줄도 알고 농담도 던질 줄 아는 사람이었나 싶었다.저 정도로 예뻐야 웃어준다는 건가?몇몇 여학생들은 질투 어린 시선으로 입을 삐죽대기도 했다.그렇게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10여 분이 흐르고, 교수가 무대 앞에 섰다.“아, 죄송합니다. 전 대표님께서 오늘 급한 사정으로 강연은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다들 이만 돌아가주세요
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지만 곧 다시 포커페이스를 회복했다.매력적인 미소를 짓던 박수혁은 바람에 날리는 소은정의 머릿결을 정리해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는 소은정의 모습에 박수혁의 손은 어색하게 허공을 머물 뿐이었다.“그래? 그래도 나랑 밥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잖아?”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박수혁은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소은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껌딱지도 아니고 왜 자꾸 달라붙는 건데!“당신이랑 밥 먹고 싶지 않다고! 제발 눈치 좀 챙겨.”하지만 소은정의 핀잔에도 박수혁의 입가에는 묘한 피소가 피어올랐다.“싫은데?”뻔뻔한 박수혁의 모습에 말문이 막힌 소은정은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됐어. 말을 말아야지.“같이 밥 먹자니까?”“꺼져!”이 인간이 진짜 왜 이래? 밥 먹다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건가?“강치훈과 전동하가 무슨 사이인지 알고 있는데도?”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좋아.”1초 만에 태도를 바꾸는 소은정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박수혁이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그냥 대충 아무 식당에나 가서 정보나 얻으려던 소은정이었지만 박수혁은 도시 전체를 가로질러 프라이빗 레스토랑에 도착했다.매일 15 테이블만 받고 적어도 한 달 전부터 예약해야 하는 레스토랑, 뭐 그만큼 맛만큼은 최고를 자랑하는 곳이었다.박수혁이 도착하자 직원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VIP 구역으로 안내했다.“뭐 먹을래?”박수혁이 메뉴판을 건넸다.“가장 비싼 걸로 시켜줘.”소은정은 메뉴판을 펼쳐보지도 다시 박수혁에게 돌려주었다.“그래.”박수혁이 직원과 메뉴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소은정은 주위의 경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일식 원림 스타일로 꾸며진 정원, 정교한 초롱불, 연못,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까지... 마음이 편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내가 강치훈과 전동하의 관계를 조사하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
박수혁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소은정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과거의 불행을 말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어디서 뭘 해도 존경받고 사랑받았을 여자다. 그런데 하필 그를 선택해서, 그와 결혼했던 탓에 가장 빛나는 3년이란 시간을 사람들의 냉대와 무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반면 소은정은 더 이상 과거의 경험 때문에 슬프지도 가슴 아프지도 않았다. 누가 시켜서, 떠밀려서 한 결혼도 아니다. 온갖 모욕을 받으면서도 박수혁에 대한 사랑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가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마음은 박수혁에 대한 사랑이 식으며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지만...“은정아...”박수혁은 낮은 목소리로 소은정의 이름을 불렀지만 목이 메어오는 듯 한참을 침묵했다.“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박수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은정을 지키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하지만 소은정은 싱긋 미소 지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앞으로? 우리 두 사람에게 앞으로가 있을까?소은정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일 얘기나 해.”이런 헛소리나 들으려고 바쁜 시간 쪼개서 이곳에 온 게 아니니 말이다.박수혁은 잠깐 고개를 숙이고 감정을 추스른 뒤 다시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강상원이 자신만만해 한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 좋은 인맥을 하나 쌓았거든. 전동하의 집사야.”“집사?”소은정이 눈썹을 꿈트거렸다.“말로는 집사라는데 전동하가 굉장히 신뢰하는 인물인 것 같아. 집사의 말 몇 마디에 결정을 바꿀 정도라던데?”“집사라기보다는 내...”내시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집어삼키는 소은정이었다.“어쨌든 출장도 전동하 대신 오고 가는 모양인데 그때 강치훈과 인연을 맺은 것 같아. 그 비서가 강상원의 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모신다던가...”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런 우연이 있다니.그래서 아들 강치훈에게 모든 패를 건 것이었다.소은정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개인적인 관계가
SC그룹.소은정은 소은호와 전동하에 관한 일을 상의하기 위해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한 소은정은 접견실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다.허인혜였다.누렇게 뜬 낯빛에 얼굴에는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소은정을 발견한 허인혜가 일어서고 경비원이 바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잠깐만요...”허인혜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무슨 짓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한빈이 연락처 아시나 해서요. 그때 빌린 돈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푸흡 웃음을 터트린 소은정과 달리 허인혜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저한테 주세요. 제가 전해 주면 되니까.”소은정이 손을 내밀었다.허인혜의 가식적인 밑낯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태성이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면 돈을 돌려줄 생각이나 했을까?사실 돈을 돌려주는 걸 빌미로 원한빈과 다시 가까워지려는 게 목적이겠지.소은정의 말에 흠칫하던 허인혜가 말했다.“제가 직접 돌려주고 싶은데요.”“나랑 한빈이가 무슨 사이인 걸 알면서 그런 말을 한다고요? 사실 갈아타고 싶은 건 아니고요?”소은정의 말에 자극받았는지 허인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런 거 아니에요!”성격 같아선 당장 소은정의 뺨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냥 직접 만나서 사과하고 싶어서요.”“그래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요. 기다려요.”소은정의 말에 허인혜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소은정은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냈고 원한빈의 전화번호를 클릭했다.“누나, 무슨 일이에요?”그녀에게만 다정하던 목소리가 지금은 소은정을 누나라고 부르고 있다.허인예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빛이 살짝 비쳤다 곧 사라졌다.“여보세요? 지금 인혜 씨가 내 옆에 있거든? 네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전에 빌린 돈을 갚고 싶다는데?”허인혜란 이름에 한동안 침묵하던 원한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됐어요. 돈은 그냥 누나가 가져요. 더러운 걸 들였으니 이곳저곳 청소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툭!허인혜의 지갑이 바닥
주소를 확인한 소은정은 이리저리 문자를 돌려보았지만 한유라도 김하늘도 놀이동산으로 가자는 그녀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결국 소은정은 소호랑과 단둘이 놀이동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소호랑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고양이 옷까지 입혀주니 누가 봐도 귀여운 고양이의 모습이었다.소은정의 가방에 담긴 소호랑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와, 회전목마다. 타고 싶어... 롤러코스터도 타고 싶어...”“진정 좀 해. 넌 호랑이라고!”소호랑은 잔뜩 불쌍한 얼굴로 발버둥쳤다.“야옹...”그 모습에 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소호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조금만 참자. 착하지...”어디까지나 일을 위해 여기로 온 것이니 한가로이 놀이동산 구경이나 할 겨를이 없었다. 집사의 사진을 확인한 나이 든 중년 남자 위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아무리 둘러봐도 다들 아이들과 함께 온 아빠들뿐이었다. 이때 인형옷을 입은 남자아이가 달려오더니 소은정의 다리를 껴안았다.“예쁜 누나다...”“넌... 넌 누구니?”소은정은 부랴부랴 주위를 둘러보았다.길을 잃은 건가?“나예요. 예쁜 누나. 나 기억 안 나요?”남자아이가 앳된 목소리로 물었다.소은정은 남자아이의 인형탈을 톡 건드렸다.“사자?”“아!”그제야 남자아이는 무언가 떠올린 듯 인형탈을 벗어려 애썼다. 그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짓던 소은정이 남자아이를 도와주었다.8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는 겨우 소은정의 허벅지 정도밖에 오지 않았지만 이목구비만큼은 뚜렷했다.게다가 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보석 같이 반짝이는 두 눈동자, 혼혈인가?남자아이는 소은정의 다리를 끌어안더니 얼굴을 비비적거렸다.“예쁜 누나, 드디어 다시 만났네요!”소은정도 남자아이에게 정이 가긴 했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건 아닐까?“가족들은 어디 있어? 길 잃어버린 거야? 누나가 도와줄까?”하지만 꼬마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누나, 정말 날 까먹은 거예요? 나 마이크잖아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