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습에 박수혁은 몰래 옆에 앉은 소은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잔뜩 집중한 표정으로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옆라인, 오똑한 코... 박수혁은 그렇게 한참 동안 소은정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으스스한 음향효과와 툭툭 튀어나오는 점프 스케어에도 소은정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일부러 조성하는 공포 분위기와 조잡한 CG를 비웃는 듯 가끔씩 웃음을 터트리기까지 했다.다시 고개를 돌려 앞자리에 앉은 커플을 바라보았다. 좌석 하나를 주어도 될 만큼 꼭 붙어있는 커플을 바라본 박수혁은 마음이 복잡했다.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특별히 공포영화를 선택한 건데... 그의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팝콘과 콜라에는 손도 안 대는 소은정의 모습에 박수혁은 짜증이 치밀어 애꿎은 콜라만 벌컥벌컥 마셨다.어느새 영화가 막바지로 흘러가고 소은정이 고개를 돌려 박수혁에게 물었다.“영화 보고 싶다고 해서 왔더니. 왜 영화는 안 보고 나만 봐?”소은정의 목소리에 앞자리에 앉은 커플이 후다닥 스킨십을 멈추었다.뭐야? 뒤에 사람이 있었나?“널 보면 안 된다는 법도 있나?”박수혁의 덤덤한 대답에 소은정은 말문이 막혔다.“그런데... 안 무서워?”“저건 가짜잖아. 며칠 전 내가 겪었던 일들... 그게 진짜 공포지.”저급한 CG, 개연성 없는 스토리보다 더 무서운 건 점점 스킨십이 짙어지는 두 커플이 영화관에서 19금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었다.뭐,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소은정의 덤덤한 말에 박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잠시 후 영화가 끝나고 커플들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후다닥 영화관을 나섰다. 소은정도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시간이 많이 늦었네. 이제 가봐야겠어.”“데려다줄게.”박수혁도 바로 일어섰다.영화관에서 나온 소은정은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집사를 확인하곤 고개를 돌렸다.“내 목숨을 구해줬으니까 이런
박수혁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잔인함이 스쳐지났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고고함과 폭풍 같은 감정들이 소은정을 압도했다.말을 마친 박수혁이 소은정의 어깨를 풀어준 순간, 마침 집사가 다가왔다.“아가씨... 어? 박 대표님이 어떻게 여기에...”집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고 박수혁은 어느새 평소와 같은 포커페이스로 돌아온 상태였다.하지만 소은정은 화가 난 건지 창백한 안색이었고 그 모습에 집사는 바로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박수혁을 바라보았다. 소은정이 덮고 있는 재킷을 발견한 집사는 따로 챙긴 숄을 그녀에게 건넸다.“아가씨,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소은정은 심호흡을 한 뒤 박수혁의 어깨를 밀쳐냈다. 그리고 정장 재킷을 거칠게 벗어 바닥에 내팽개친 뒤 집사가 건넨 숄을 걸쳤다.차가운 눈빛으로 박수혁을 노려보던 소은정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렸고 집사가 바로 그 뒤를 따랐다.하, 젠틀한 척하더니 겨우 그 정도로 인내심이 바닥난 거야? 감히 날 협박해? 내가 아니라 박우혁을 건드리겠다? 양아치 같은 자식.화가 난 소은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놀라게 한 건가?잠시 고민하던 박수혁이 휴대폰을 꺼냈다.“이 비서, 박우혁이 운영하는 스튜디오 폐쇄하고 내일부터 서진 지사로 출근하라고 해.”“네, 대표님.”한편, 소은정의 본가.소은호는 일찍 퇴근해 서재에서 소찬식과 회사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소은해는 소호랑을 씻겨주겠노라 애쓰고 있었다. 물론 소호랑은 강력하게 거부하는 상태였지만 말이다.집으로 돌아온 소은정을 발견한 소은해가 물었다.“뭐야?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어?”인기척에 소은호와 소찬식도 서재에서 나왔다.“오늘 재밌었어?”소은호가 부드러운 미소로 물었다.가족들을 보니 방금 전까지 언짢던 기분이 눈 녹 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아빠, 오빠, 어서 태한그룹 쪽에 선물을 보내주세요. 어쨌든 박수혁이 절 구해준 건 사실이니까요. 저희를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어요.”생명의 은인이라며
생각을 정리한 소은정은 샤워를 마치고 팩까지 끝낸 뒤 침대에 누웠다.잠들기 전 휴대폰을 뒤적거리던 소은정은 카톡 친구 추가 화면이 온통 박수혁의 프로필 사진으로 가득 찬 걸 발견했다.보통 친구.그가 친구 추가 글에 적은 글귀였다.방금 전까지 박우혁한테서 떨어지라며 협박을 하더니 왜 갑자기 친구 추가를 하려는 걸까?박수혁의 변덕에 소은정은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친구 추가 요청을 깔끔하게 무시한 소은정은 잠자리에 들었다.한편, 아무런 반응 없는 휴대폰을 바라보는 박수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젠장, 아까 조금만 더 참았어야 했는데...저녁내내 소은정에게 잘 보이기 위해 쌓은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다시 절망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어두운 하늘, 누군가는 달콤한 꿈속을 거닐고 누군가는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지고 있었다.다음 날, 태한그룹.조심스럽게 노크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간 이한석은 바로 박수혁의 표정을 살폈다. 요즘 따라 대표님의 기분이 안 좋은 이유는 아마 소은정 대표 때문이겠지.“대표님, 그림값은 소은정 대표의 비서 우연준 씨 편에 보냈습니다.”이한석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박수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박우혁 도련님의 스튜디오는 현재 모든 자금 출처가 끊긴 상태입니다. 스튜디오 측이 받은 광고도 전부 계약 해지되었으니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사실 가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꿈만을 바라보고 이 정도 성과를 이룬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순간 잘못된 욕심으로 인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다니. 이한석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이때 박수혁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박우혁이었다. 박수혁은 짜증스레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박우혁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전화를 멈추지 않았다.박수혁이 아예 박우혁의 번호를 차단해 버린 그때, 이번에는 이한석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이한석은 난처한 얼굴로 박수혁의 표정을 살피더니 살며시 거절 버튼을 눌렀다.“나가봐.”한참을 침묵하던 박수혁
선셋 클럽, 이곳은 럭셔리 프라이빗 클럽이다.회사 업무를 마친 소은정이 이곳에 도착했다. 문에 들어선 순간, 바로 직원이 그녀를 1004번 룸으로 안내했다.오늘은 한유라, 김하늘이 주도하여 주최한 프라이빗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물론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눈에 익은 얼굴도 여럿 보였다. 심지어 연예계 신인 모델, 배우들도 있었는데 별다른 접점이 없는 듯한 게스트들의 공통점은 바로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유준열과 윤지섭도 소은정을 발견하고 목례를 건넸다.한유라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는 소은정의 옆으로 다가가며 속삭였다.“미남파티야. 널 위해 준비한 선물이랄까? 마음에 드는 사람이랑 바로 나가도 돼.”소은정은 어색한 표정으로 한유라를 바라보았다.“또 무슨 꿍꿍인데?”“너 죽다 살아났잖아. 눈앞의 즐거움도 좀 더 즐겨야지.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술도 좀 마시고 잘생긴 남자들이랑 연애도 좀 실컷 해보고!”한유라의 말에 소은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 방식이 조금 과격하긴 했지만 두 사람의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 결국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래, 고맙다.”“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네 스타일인 애들로 특별히 엄선했으니까 오늘은 즐기는 거야?”이때 휴대폰이 울렸다. 박우혁이었다.“누나, 어디야?”잠깐 고민하던 소은정은 결국 문자로 위치를 보내주었다.“한 명 더 와도 괜찮지?”한유라가 어깨를 으쓱했다.“남자야? 그렇다면 얼마든지.”파티가 시작되고 다들 시답잖은 농담에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20분 뒤, 박우혁이 파티장에 도착했다.다급한 얼굴의 박우혁이 바로 소은정에게 다가갔다.“누나, 나 좀 도와줘.”박수혁의 잔인한 수단에 박우혁도 화가 단단히 난 상태였다. 게다가 지사로 출근을 시킨다니 집안 어른들도 전부 삼촌 편. 지금 그의 곁에 서줄 사람은 소은정뿐이었다.“왜 그래?”고개를 돌린 소은정은 잔뜩 굳은 표정의 박우혁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삼촌 때문에 우리 스튜디오 지금 부도 일보 직전이야.
박우혁의 말에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저 아이의 몸과 마음을 가져서 어디에 쓸까 싶었다.카드를 받은 박우혁은 부랴부랴 파티장을 나섰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유라와 김하늘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역시. 너한테는 부잣집 아가씨-가난한 연하남 콘셉트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한유라가 소은정의 어깨를 토닥였다.소은정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매력적으로 웃어 보였다.“콘셉트라니. 난 부잣집 아가씨 맞는데?”어느새 파티의 분위기는 고조로 치닫고 고막이 터질 듯한 음악소리가 파티장을 가득 메웠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얼큰하게 취한 소은정은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소은정은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여자는 비명소리와 함께 더러운 쓰레기라도 묻은 듯 옷을 털어내더니 대뜸 짜증부터 내기 시작했다.“뭐야? 도대체 눈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옷 더러워지면 네가 배상할 거야?”익숙한 목소리에 소은정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소은정이 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사모님, 오랜만이네요?”그녀와 부딪힌 여자는 바로 이민혜였다.이민혜도 역시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실 이민혜는 박예리가 이곳에 있다는 소리에 찾으러 왔다가 결국 성과 없이 돌아간다는 생각에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그래서 부딪힌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도 보지 않고 욕설부터 내뱉었었다. 그런데 소은정일 줄이야.예전 같았으면 옳다고나 하고 달려들었겠지만 이제 그녀는 SC그룹 대표이사 예전과는 차원이 달라졌다.이민혜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너였구나?”사실 아무리 신분이 바뀌었다 해도 이민혜는 여전히 소은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민혜는 소은정이 살아돌아온 그날, 집으로 돌아와 이번 생에 그가 다시 결혼을 한다면 그 사람은 소은정뿐이라고 못을 박던 아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소은정에게 허튼짓을 했다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었지.
이민혜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은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제가 박수혁과 다시 사귀기로 했다고요? 전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박수혁 혼자서 내린 결정에 왜 내가 사생활을 관리해야 하지? 어이가 없어서.소은정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이민혜도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며칠 뒤 아버님이 직접 소 회장님을 찾아뵙고 결혼 얘기를 꺼내실 거야. 두 가문 모두 손해 볼 게 없는 결혼이야. 네가 우리 가문보다 더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갈 수 있을 것 같니?”이민혜는 한 번 이혼한 소은정을 다시 집안에 들이는 것만으로도 최대한의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제도 모르고 튕겨?아무리 재벌가라지만 재혼이 아닌가? 이 정도로 자세를 굽혔으면 냉큼 기회를 잡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저 아이는 뭐가 잘났다고 저렇게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거지?하지만 소은정은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아니요. 전 그럴 생각 없습니다. 박 회장님한테도 말씀 전해주세요. 저희 가족들은 박씨 집안과 다시 얽히고 싶지 않으니 찾아오실 필요도 없다고요. 박씨 집안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아서요.”소은정의 마에 이민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너...! 이건 가문과 가문 사이의 연합이야. 네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어! 이번에도 우리 수혁이 아니었어 봐. 네까짓 게 그 해적들 소굴에서 살아돌아올 수 있었을 것 같아?”“그래서요?”소은정은 어깨를 으쓱했다.“제가 박수혁한테 제발 구하러 와달라고 빌기를 했나요? 알아서 구하러 온 것도 다른 보상을 거절한 것도 박수혁입니다. 전 할 만큼 했어요. 그리고 제 마음대로 될 것 같냐고요? 뭐, 그건 앞으로 두고 보시죠.”말을 마치고 돌아서던 소은정이 멈칫하더니 말을 이어갔다.“아, 그리고 제 사생활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제가 남자를 후리고 다니든 스폰을 하든 제 인생이니 신경 꺼주세요.”이 정도로 말했으면 콧대 높은 박씨 가문에서도 알아서 포기하겠지. 갑자기 한유
박수혁이 왜 갑자기 전화를? 게다가 이 번호는 처음 보는데?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사모님이 사진만 보내고 위치까지는 안 알려주셨나 봐?”이민혜의 생각 정도야 이미 꿰뚫고 있는 소은정이었다. 아마 사진을 보내고 있는 일 없는 일까지 지어내며 그녀를 천박한 여자, 남자를 밝히는 여자로 몰아갔겠지.하지만 소은정은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박수혁이 그 말을 듣고 실망해 떨어져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원하는 바였으니까.그녀의 말에 박수혁은 한참을 침묵했다. 소은정이 짜증스레 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박수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의 낮은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감정을 꾹꾹 억누르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일찍 들어가.”생각지 못한 대사에 당황한 건 소은정도 마찬가지였다. 박수혁이 대답하면 바로 쏟아내려던 비난과 욕설이 목구멍에 걸린 듯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뭐야? 네가 뭔데 날 짜증 나게 만들어.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남이사?”말을 마친 소은정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요즘 따라 더 이상하게 행동하는 박수혁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조용히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던 김하늘이 입을 열었다.“그 사람 설마... 너랑 진짜 화해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그녀의 말에 한유라가 고개를 저었다.“그럴지도 몰라. 뭔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그게 진심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태한그룹 정도 되는 집안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겠어. 그런 거라면 설마...”이에 한유라는 바로 고개를 젓더니 소은정의 팔을 덥석 잡았다.“은정아, 너 절대 흔들리면 안 돼. 같은 실수 두 번 할 수는 없잖아! 이 세상에 반이 남자야. 그 자식한테 목맬 필요가 없다고!”“그럼. 당연하지.”소은정도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시간이 또 흐르고 한유라의 손에 이끌려 또 술을 몇 잔 더 마신 소은정은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멀쩡한 김하늘이 사람들을
순식간에 일어난 일, 소은정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한편 박수혁의 어두운 눈동자에서 발사되고 있는 경고의 레이저에 윤지섭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박수혁은 그렇게 두 남자가 미처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돌아섰다. 혼자 남겨진 윤지섭은 주먹을 꽉 쥐었다.완벽한 그의 패배였다.그 모습에 유준열이 한숨을 쉬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연예계에서 나름 오랫동안 뒹군 그는 눈치 보기와 상황 파악에는 도가 튼 상태였다.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누구도 박수혁에서 소은정을 빼앗아 올 수 없다는 걸.“지섭 씨, 하늘이 누나한테 연락하죠.”소은정을 뒷좌석에 눕힌 박수혁은 그녀의 숨결에서 느껴지는 알코올 향헤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소은정의 잔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텅 빈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처럼 그의 눈빛에는 쓸쓸함과 고독이 그대로 담겨있었다.박수혁은 조용히 소은정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잠들어있을 때만 이렇게 손을 잡을 수 있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지던 그때, 방금 전 만난 윤지섭을 떠올리며 박수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감히, 주제도 모르고.20분 정도가 흘렀을까? 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 박수혁은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고 소은정도 그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뭐야?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던 소은정은 박수혁의 얼굴을 보고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마침 이 근처에서 약속이 있어서.”박수혁이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한편 소은정은 방금 전까지 술을 마시고 있던 그녀가 왜 지금 박수혁의 차에 있는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그 모습에 박수혁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네가 날 보자마자 바로 달려들던데? 말려도 소용없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단 뒷좌석에 눕힌 거고.” “헛소리하지 마!”소은정이 소리쳤다.“그럼 블랙박스 돌려봐?”소은정은 한참 동안 박수혁을 노려보았다. 당당한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