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설아가 이렇게까지 이상준을 혐오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그녀를 배신해서가 아니었다.만약 단순하게 바람을 피운 거라면 그녀는 이혼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포인트는 그 상대가 문상아라는 것이었다.문설아는 남편보다 여동생이 훨씬 중요했다.그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과 함께 그녀를 배신했고 그녀를 이리저리 갖고 놀았다.어떤 변명으로도 그 둘의 죄를 씻어낼 수는 없었다.문설아는 단 한마디도 믿고 싶지 않았고 가로등도 켜져 있지 않은, 칠흑같이 어두워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거리를 멍하니 바라봤다.“한 번만 말할게요. 내일 우린 이혼해요. 끝까지 협조하지 않으면 불륜으로 이혼소송 할 거예요.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까 똑바로 행동해요.”문설아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아무튼 지금 갑은 문설아인데 만약 그녀가 이 좋은 패를 놓친다면 그야말로 바보짓이었다.이 남자에게 미련이 손톱만큼도 남아있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결혼하고 나서 싸워본 적이 없었고 말다툼이 있어도 늘 이상준이 져줬다.그들이 함께했던 모든 순간은 평범하고도 따스했다.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그렇게까지 깊은 감정이 없을 뿐이었다.그저 문설아가 빠져들어 갈 경지가 아니었을 뿐이었다.문설아는 그의 손을 뿌리쳤고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그깟 감정을 위해 자존심을 포기하는 그런 일을 할 리 없었다.사업에서 거듭 실패하는 건 견딜 수 있어도 이런 남자를 계속 옆에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이상준은 녹초가 되어 문설아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봤고 따라 들어갈 용기조차 없었다.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약점을 콕콕 쑤셨기 때문이었다.그까짓 하찮은 사랑의 감정도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제야 그는 후회라는 두 글자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돌아가는 길에 그는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눈에 띄게 줄어든 차들 속을 지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문상아였다.그는 김빠진 콜라처럼 핸들에 파묻혀 있었고
보통의 친구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서로의 선을 넘지 않고 최선의 선택을 한 그녀였다. 이상준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이상준도 이제는 지친 듯 해 보였다. "됐어, 끊어."전에는 문상아를 이해할 수 있었고 조금 불쌍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날의 일이 떠올라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기 어려워졌다. 그녀에게 많은 가면이 씌워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상준에게 보여준 것은 아직 두 개뿐이었다. 이상준과 문설아의 이혼 소식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기에는 이미 끝난 사이로 보였다. 현실은 이상준이 온갖 핑계를 대면서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실에 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점점 적어졌다. ......이 일을 안 소은정이 문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준 씨 어디로 출장 갔는지 알아?"문설아가 차가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뭐 중동 쪽 간다고 하던데... 누가 알아?" 소은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석유 사업이 괜찮다고 들었는데... 맞아?"문설아는 귀찮다는 어투로 답했다."그렇겠지... 나도 잘은 몰라. 이상준도 망하지 않은 게 다 석유덕이잖아. 아니면 그 정도 실력으로 이렇게 플렉스할 재력이 생기겠어?"이상준이 일 년간 쓰는 돈만 해도 일반 회사들이 몇 년간 노력해야 벌어들이는 정도의 돈이었다. 소은정은 앞에 있는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였다. 그녀가 웃더니 사무실 안의 휴식 공간에서 편안한 신발을 가져오면서 얘기했다."능력도 없는데 좀스러우면 더 정떨어져.""그나저나 동하 씨는 언제 와? 새 프로젝트 몇 개 봐놓은 게 있는데 동하 씨랑 물어보려구..."문설아는 이 상황에도 투자 얘기가 나오면 기뻐 보였다. 소은정이 웃으면서 말했다."아직 해외에서 바쁜걸, 돌아오면 같이 밥이나 먹자.""그래! 내가 살게."문설아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은정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아, 상준 씨는 언제 돌아오는지 알아?"문설아의 톤이 확 낮아지더니 말했다.
소은호는 소매를 걷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성강희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띠며 그에게 다가갔다. "와, 수천억이 오가는 손으로 구운 고기는 무슨 맛일까요?"소은호는 그런 성강희를 째려보았다. 주위 사람들도 그들 쪽으로 웃으면서 다가왔다. 한시연은 잘 씻은 과일을 사람들에게 건네주었다. 다들 행복해 보였다. 소은정과 김하늘은 모래사장에 나란히 누워 휴식을 즐겼다. 오랜만에 쉬러 나왔는데 낯선 사람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소은정은 아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맨발로 모래사장을 뛰었다. 모래사장은 낮의 열기로 아직 따뜻했다. 김하늘은 옆에서 한유라와 영상통화를 하였다. 아직 부산에 있던 한유라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일과 대뇌 싸움으로 대머리가 될 지경이었다. "부럽다... 나도 돌아가면 미친 듯이 놀 거야!"소은정은 카메라를 보면서 활짝 웃었다. "강열 씨가 너 찾으러 갔다던데 어떻게 됐어? 다음에 올 때는 손잡고 같이 돌아오는 거 아니야?"전화기 너머의 한유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냥 하루만 있다가 갔어, 그렇게 바쁜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쭉 있겠어..."하지만 심강열이 하루 있었던 동안 적지 않을 일이 발생했다.그날 밤의 일이 기억난 한유라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김하늘은 그녀의 발그스레 해진 얼굴을 바라보다 실수로 영상통화를 끊어버렸으나 굳이 다시 걸지는 않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소은정은 바람을 따라 뛰었고 연핑크의 원피스가 바람에 춤을 추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금색펄을 두른 바다에 비쳐 유난히 예뻤다. 그 모습을 본 김하늘은 흥분된 손으로 부랴부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소은정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선 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고요했던 바다에 점점 큰 선박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배는 점점 가까워졌다. 김하늘이 의아한 듯 그녀에게 걸어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소은정이 입술을 깨
정체 모를 외국인들은 딱 봐도 평범한 사업가의 모습은 아니었다.‘그런데 박수혁이 왜 저런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거지?’하지만 곧이어 김하늘이 소은정의 손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한 덕에 소은정은 잠깐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떠났다 잔뜩 실망한 얼굴로 돌아온 김하늘, 소은정 두 사람을 발견한 소은호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싶어 의아했지만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아 대놓고 물을 수도 없었다.잠시 후, 눈치를 살피던 그가 어색한 기침으로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두 사람 나 좀 도와줄래?”흠칫하던 소은정과 김하늘이 가까이 다가오고...소은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소은정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망설이자 소은호는 김하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하늘아, 말해 봐.”김하늘 역시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자기가 본 걸 그대로 얘기했고 소은호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갑게 굳었다.“제대로 본 거 확실해?”김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한참을 고민하던 소은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오빠, 박 회장이 세상을 뜬 게 겨우 얼마 전이야. 박수혁이 왜 지금 귀국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리고 동하 씨랑 이상준 대표도 하필 해외 출장 중이고. 이 모든 게 정말 우연일까?”별 생각없이 넘겼던 일들이 사실은 복선이 아닐까 의심이 드는 소은정이었다.‘미국 쪽에 하필 동하 씨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대영그룹은 동남아에서 수십 년간 석유 수입 사업을 해왔어.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힘들어졌다고? 그리고 박수혁도... 하필 박대한 회장이 살해당한 이 시점에 갑자기 귀국을 했다라... 이건 분명 우연이 아니야.’소은정의 말에 소은호도 들고 있던 파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깊은 그의 눈동자 역시 의심으로 번뜩이고 있었다.“아직 우리 쪽에 들리는 소식은 없어. 며칠 더 기다려 보자. 뭐, 그전에 박수혁 본인이 못 견디고 먼저 우리 쪽에 연락을 해올지도 모르지.”소은호의 말에도 복잡한 소은정의 마음은 진
박수혁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소은정이었고 박수혁과 세력적으로 기싸움이 가능한 그룹 역시 SC뿐이었기에 심강열이 그녀에게 SOS를 친 것이었다.심강열의 설명 덕분에 박수혁의 꿍꿍이를 대충 짐작하게 된 소은정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자금 세탁을 하려는 건가? 왜? 뭘 위해서? 태한그룹 정도 되는 기업이 왜 굳이 다시 자금 세탁에 손을 대려는 걸까?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통화를 마친 소은정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오빠가 보낸 사람들도 아직 감감무소식이고.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네. 더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다음 날. 휴가가 끝난 소은정이 회사에 출근하고.우연준은 평소와 같이 커피 한 잔을 내왔다.“대표님, 태한그룹 이한석 대표님이 접객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이한석이? 왜 여기까지 온 거래요?”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실험실 프로젝트 건에 대해 상의할 사안이 있으시다는데요.”“그 프로젝트는 오빠가 담당하고 있으니까 그쪽으로 연락하라고 해요.”박수혁과 관련된 일은 조금이라도 손을 대고 싶지 않았기에 소은정은 깔끔하게 소은호에게 책임을 넘겨버렸다.하지만 우연준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꼭 대표님께 드려야 하는 말씀이라는데요.”‘하... 이렇게 나오시겠다?’최근 박수혁의 움직임에 대해 떠올린 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래요. 들어오라고 해요. 그리고 10분 뒤에 들어와서 회의 잡혀있다고 말 좀 해줘요. 쓸데없는 소리하면 바로 대화 끊어버리게.”이에 우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이한석이 소은정의 사무실에 들어섰다.이한석, 박수혁의 비서로 일할 때 태한그룹에서 유일하게 소은정을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이었고 그쪽 세력 사람들 중에선 소은정이 유일하게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뭐, 그마저도 이혼 뒤엔 서로 왕래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오랜만에 보는 이한석의 얼굴은 댄디하고 깔끔한 스타일이던 그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한석의 얘기를 듣고 있던 소은정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태한그룹, SC그룹을 비롯해 대한민국에서 나름 인지도가 있다 하는 기업들은 다들 세계 진출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SC그룹에게 있어 가장 부족한 부분은 바로 최첨단 과학기술 분야.소은호가 거금을 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기업 소유의 실험실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다. 천문학적인 자금, 기약없는 시간, 이 모든 걸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게 바로 실험실 프로젝트였다.그리고 이번 기회에 운 좋게 군수물자 프로젝트까지 따냈으니 더더욱 첨단 과학기술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임은 분명했다.소은정의 표정을 살피던 이한석이 입을 열었다.“박 대표님이 직접 와서 얘기 나눌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대화할 기회도 안 주실 것 같아서요. 하지만 이번 기회 놓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이한석의 말을 듣고 잠깐 고민하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솔직히 자꾸만 태한그룹 쪽에서 함정을 파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듭니다. 그쪽들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위약금을 무는 한이 있더라도 박수혁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너무나도 단호한 소은정의 태도에 이한석은 눈을 질끈 감더니 소파에 털썩 등을 기댔다.“박수혁 대표님 때문에 저희와의 협력을 거절하시는 겁니까?”그녀의 질문에 소은정이 싱긋 웃었다.“저번에 박수혁이 귀국한 이유가 군수물자 프로젝트 때문이라고 했죠? 그런데 프로젝트가 우리 손에 들어왔네요? 솔직히 박수혁이 수를 쓴다면 충분히 저희에게서 프로젝트를 빼앗아갈 수도 있겠죠. 그런데 박수혁은 지금 전혀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어요. 박수혁 성격에 그대로 넘어갈 리는 없고.”소은정의 말에 이한석이 미간을 찌푸렸다.‘소은정 대표님도 많이 바뀌셨네. 전보다 훨씬 더 날카로워졌어...’“그렇다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소린데. 제 생각이 맞나요?”분명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서늘한 날 선 분위기.두 사람은 약 3분 정도 아무 말도 하지
이한석이 이를 악물었다.“안진... 기억하시죠?”안진이라는 이름이 귓구멍에 꽂히는 순간, 도혁을 비롯해 동남아에서 겪었던 악몽이 다시 떠오르며 머리가 지끈거렸다.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닌 듯 이한석은 망설임 없이 말을 이어갔다.“안진은 동남아로 돌아간 뒤로 아버지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현재 동남아의 가장 큰 군수물자 브로커는 바로 안진이죠. 그 오빠란 사람은... 해외에서 전문적으로 돈 세탁을 담당하고 있는데. 여동생과 오빠의 복수를 하겠다며 박 대표님을 타깃으로 잡은 것 같습니다. 사업적으로 엮이게 된 게 바로 함정의 첫 단계였죠.”상황을 설명하는 이한석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태한그룹 한국지사 지사장으로 취임하고 이한석은 당연하게도 비서로 일할 때보다 많은 일을 도맡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은밀한 비밀 역시 많이 알게 되었다.그리고 이 바닥의 추잡한 실상에 대해 알면 알아갈 수록 박수혁이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지금 잠시나마 그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장 위를 걷는 듯 불안한데... 그동안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지 예상도 가지 않았다.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이한석의 시야에 단호한 소은정의 얼굴이 들어왔다.눈앞의 이 여자는 박수혁 대표와 징한 악연으로 얽힌 사람이다. 사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고.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고, 아니.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박수혁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혐오로 가득찬 눈동자가 꾹 닫힌 소은정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해 괜히 마음이 답답해졌다.차가운 적막을 깬 건 소은정의 목소리였다.“다른 사람한테 그 정도로 휘둘리는 박수혁이라니. 상상이 잘 안 가는데요.”“그쪽에서 사모님과 예리 아가씨를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지만 예리 아가씨가 안진의 오빠라는 사람에게 반해 버려서... 대표님의 구조 계획을 전부 유출해 버렸죠. 그래서 회장님이
이한석 역시 소은정의 고민을 눈치챈 듯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군수물자 프로젝트를 손에 넣은 이상 설령 저쪽에서 방해를 한다한들 군에서 가만히 두고 보고 있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이 프로젝트를 빼앗기시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너무나 절박한 표정의 이한석과 달리 소은정은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애초에 프로젝트 담당자도 오빠니까 오빠한테 이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죠. 전 전적으로 오빠 결정에 따를 겁니다.”애매한 대답에 다급해진 이한석이 또 한 마디 덧붙이려던 그때, 우연준이 약속한 시간에 맞춰 회의실로 들어왔다.이한석을 힐끗 바라보던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대표님, 급하게 회의가 잡혀서 어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오케이, 나이스 타이밍, 우 비서님.’우연준의 말에 소은정이 자연스레 따라 일어섰다.“보시다시피 제가 좀 많이 바빠서요.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회의가 잡혀있다는데 좀 더 얘기를 들어달라 생떼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 이한석은 아쉬움 역력한 얼굴로 일어섰다.“오늘 실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이한석이 사무실을 나서고 소은정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연준이 눈치껏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오며 물었다.“대화하시는 동안 전 대표님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동하 씨가?’흠칫하던 소은정이 자세를 고쳐앉았다.“알겠어요.”본인이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해서일까? 전동하는 누구보다 가정적인 남자였다.결혼 전에도 소은정과 떨어지기 싫다며 미룰 수 있는 출장은 전부 미뤄버리더니 결혼 뒤에는 일에 대한 열정이 훨씬 더 식은 모습이었다.와이프인 소은정이 재벌인데다 그 본인 역시 지금 가진 자산만으로도 네 식구 평생 원하는 대로 펑펑 쓰며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돌아간 뒤로는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미국에서도 하루에 전화를 5, 6번 해오는 건 물론, 새봄이 얼굴을 보기 위해 소찬식에게도 줄기차게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