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에 구경꾼들이 다시 술렁대기 시작했다.방금 전까지 이율이 성강희에게 들러붙던 모습이 선한데 어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나 싶었지만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그저 자기들끼리 수군댈 뿐이었다.하지만...!우리의 오지라퍼 한유라는 달랐다.화사하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에이, 그건 아니지. 아까 강희한테 죽어라 들러붙던 사람이 누구더라?”그 말에 바로 반박하려던 이율이 험악한 임진호의 눈빛에 겁을 먹고 다시 움츠러들었다.“따라나오라고.”임진호의 호통에 이율은 결국 고분고분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이때, 파티장을 나서려던 임진호가 뭔가 생각난 듯 발길을 돌려 소은정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고맙습니다. 소 대표님 아니었다면 이 꽃뱀한테 제대로 물릴 뻔했네요.”“별말씀을.”소은정이 어깨를 으쓱했다.애초에 임진호가 아니라 성강희를 위해 한 일이었으니까.그리고...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이율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아직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미친듯이 달려오던 이율이 소은정을 향해 소리쳤다.“너야? 우리 자기한테 꼰지른 게 너냐고! 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 이 사기꾼아!”어떻게든 소은정을 때려보려는 듯 이율이 팔이며 다리를 마구 휘둘렀고 마구잡이 공격을 피해 소은정이 한발 물러서는 사이, 성강희가 다가와 거칠게 이율의 손목을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그 동안 온갖 모욕스러운 말을 아끼지 않았지만 한번도 손을 대진 않았던 성강희까지 거칠게 나오니 이율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아무리 재벌 2세들이라지만 이렇게 갑질해도 되는 거야? 두고 봐. 내가 인터넷에 다 까버릴 테니까!”이때 성강희가 손을 젓고 경호원이 다가왔다.“이 여자 당장 내쫓으세요. 네.”“네.”경호원 두 명은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이율을 한쪽 팔씩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혼잡하던 파티홀이 드디어 조용해졌다...성강희가 임진호를 힐끗 바라보았다.“멍하니 서서 뭐 해. 너도 얼른 꺼져.”
이때 옆에 있던 문상아가 살짝 끼어들었다.“성 대표님. 다음 번에 그런 배우 필요하시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제가 아는 동생들 소개해 드릴게요. 페이는 비싼데 A/S는 확실해요.”진심인 듯 농담인 듯 애매한 문상아의 말에 다들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그 덕분에 어딘가 굳어있었던 분위기도 자연스레 풀어졌다.“좋죠. 다음엔 무조건 상아 씨한테 연락할게요.”그 뒤로는 다행히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고 파티의 막바지, 촬영팀에선 성강희를 위한 케이크 자르기 이벤트까지 준비했다.솔직히 다들 흥미가 떨어지긴 했지만 생일자를 위한 예의이니 다들 억지로나마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다.조명이 어두워지고 생일 축하노래 흘러나오니 성강희의 입가에도 미소가 스쳤다.노래가 끝나고 감독을 선두로 모두가 그를 향해 외쳤다.“얼른 소원 비세요.”쑥스러운 미소를 짓던 성강희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진지하게 소원을 빌고 소은정과 그 친구들은 왠지 감개무량한 기분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아직 처음 만났을 때 앳된 얼굴이 눈앞에 선한데 언제 이렇게 컸나 싶으면서도 그만큼 나도 나이가 먹었겠지라는 생각도 들었다.그리고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이 우정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잠시 후, 고개를 든 성강희가 입을 열었다.“다 빌었어요.”그 순간, 누군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성강희의 머리를 눌러 케이크에 박아버렸다.다음 순간 조명이 다시 밝아지고...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무리 생일파티라지만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하나 싶던 찰나.한유라가 꺄르르 웃으며 외쳤다.“성강희, 생일 축하한다!”이미 크림 범벅이 된 성강희가 고개를 들더니 한유라를 째려보다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그리고 그녀가 성강희의 꼴을 비웃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얼굴에 묻은 크림을 떼어내 그녀의 얼굴에도 확 묻혀버렸다.“야, 너 진짜 치사하게!”한유라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사람의 유치한 전쟁에 끼고 싶지 않았던 김하늘과 소은정은 슬금슬금 멀어졌다.이때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문상아가 물었
싱긋 미소 짓던 성강희가 차키를 다시 주머니에 챙겨넣었다.“아, 술 마셨잖아요. 그래서 기사 불렀죠.”잠시 후, 두 사람이 나오는 모습에 기사 역시 흠칫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성강희가 말없이 문상아를 바라보고 그녀는 자연스레 주소를 얘기했다.하지만 당연히 집으로 갈 것이라는 성강희의 예상과 달리 문상아가 얘기한 주소는 방송국이었다.“촬영... 다 끝난 거 아니었어요? 방송국엔 왜요?”성강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 질문에 좌석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문상아가 부스스 눈을 떴다.“아, 내일 또 촬영이 잡혀있거든요. 그냥 그 근처 호텔에서 자려고요.”잠 기운이 가득한 몽롱한 눈빛, 순간 누군가의 눈이 생각나며 성강희의 가슴이 살랑였다.“그렇게나 바빠요?”“쉴 틈 없이 일할 수 있는 게 복이죠 뭐. 대중들이 아직 절 원한다는 걸 의미하니까요.”문상아가 싱긋 웃었다.이 세상에 돈 버는 일 치고 쉬운 일 하나 없다지만 배우와 같은 연예인들은 대중들의 관심이 성과에 대한 유일한 평가 잣대가 되는 일이라 더 가늠키 힘들었다.그리고 한때 누구보다 잘 나가다가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는 배우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기에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문상아는 고마웠다.집에 누워서 한물 간 게 아닌가 불안해 하느니 촬영장에서 피곤함에 쓰러지는 게 낫다라는 것이 문상아의 신조였다.문상아의 대답에 말없이 웃은 성강희가 전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술을 마셔서일까? 방금 전 그 눈빛이 집요할 정도로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약 10분 뒤, 차량이 방송국 앞에 멈춰 서고 차에서 내린 문상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탁.”차문이 닫히고 잠깐 동안의 정적을 깬 건 기사의 목소리였다.“댁으로 모실까요?”“그래요.”짧게 대답한 성강희가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정말 취한 건가? 아까 왜... 갑자기 은정이가 생각난 거지? 두 사람 솔직히 하나도 안 닮았
소은정의 얼굴에 충격이 그대로 드리웠다.“제대로 본 거 맞아요?”전동하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그날 파티에서 이상준 대표 파트너는 분명 문상아였어요. 내가 잘못 기억했을 리가 없어요.”‘헐, 뭐야...’할말을 잃은 소은정은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주위에 막장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막힌 일들이 많고도 많았지만 자기 언니 남편과 어떻게...게다가 오늘 저녁 봤던 문상아는 아무리 봐도 그런 배덕한 짓을 저지를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그리고 사생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전동하가 생각나며 묘한 호감까지 생길 정도였는데.‘역시 사람 얼굴로 판단하는 거 아니라더니. 뒤에선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은 정말... 몰랐네.’착잡한 표정의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던 전동하가 물었다.“밀크티 마실래요?”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어떻게 이런 일이...”“됐어요. 어차피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잖아요.”“그렇긴 하지만...”소은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설아 걔는 아무것도 모를 거 아니에요. 투자를 그렇게 말아먹더니 이젠 남편까지 말아먹으려고...”요상한 비유에 전동하가 웃음을 터트렸다.“만약 문상아, 이상준이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차라리 정리하는 게 맞지 않나요?”어쨌든 문설아와 친분이 더 있는 소은정은 그녀에게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문설아의 순진함과 멍청함은 이미 이 바닥에 소문이 쫙 나있는 반면 그 여동생은 침착하고 똑똑해 보이는 이미지였다.‘설아가 당해낼 수 있는 그런 레벨이 아니라고...’잠시 후, 소은정의 본가.새봄이는 소찬식과 마이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전동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자기가 요즘 보고 있는 물리 교재를 들고 와선 선생님 역할을 하고 있는 마이크. 그 얘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얌전히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새봄 때문이었다.‘아직 말도 못 배운 애한테 물리학이라니...’하지만 이미 눈에 콩깍지 필터
역시나. 숙제는 진작 뒷전이었던 마이크가 스르륵 자리를 뜨고...소은정이 짐짓 전동하의 등을 찰싹 때렸다.“자기도 좋으면서 왜 엄한 애 겁을 주고 그래요?”너무나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일상에 전동하의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졌다.그렇게 한 손은 소은정의 손을 잡고 다른 한 팔엔 새봄이를 안은 전동하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며칠 뒤.임진호와 이율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퍼져나가기 시작했다.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던 임진호에겐 그 소문은 치욕 그 자체였다.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면 모를까?그저 한동안 데리고 놀고 버리려던 이율이 주제도 모르고 밖으로 나돈 탓에 그는 하루아침에 여자친구 간수 하나 제대로 못한 천하의 찌질이 남자친구가 되어버렸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얼굴, 몸매가 마음에 꼭 드는 건 아니었지만 순종적인 태도와 아양을 떠는 그 모습이 나름 귀여워 돈도 많이 썼는데...이렇게 그를 배신했을 줄이야.‘두고 봐. 내가 그렇게 당하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아...?’임진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한편,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 이율은 더 죽을 맛이었다.그날 파티에서 성강희 버프로 연예계 인사들에게 얼굴 도장이라도 찍을 예정이었는데 다른 의미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여배우, 특히 신인 여배우에게 이미지는 곧 생명과 같은 것.앞으로는 그나마 간간히 들어오던 단역 대본들도 뚝 끊기게 될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보다 무서운 건 바로 임진호의 복수였다.‘그 짐승같은 자식한테 걸리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그렇게 이율은 두문불출하며 하루하루를 불안감속에서 살아갔다.며칠 뒤. 새봄이의 돌잔치.백일 잔치는 가족들끼리 소소하게 한 대신 돌 잔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대하게 치러야 한다는 소찬식의 고집 때문에 장소는 유명 호텔 파티홀로 정해졌고 잔치 현장은 하객들로 북적댔다.게다가 전동하는 파티장 테이블에 놓을 생화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쓰는 정성을 보여주었다.두 남자의 남다른 열정에 소은정은 괜히 왜 이렇게 유난을 떠나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한석이 오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전동하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말을 아끼지 않았다.이한석은 웃으며 큰 박스 하나 작은 박스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새봄이랑 은정 씨 선물이에요. 받아주셨으면 해요.”전동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웃었고 그 상황을 즐기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좋아요. 감사합니다.”이한석은 금방까지도 전동하가 거절하면 어쩌나 긴장했었다.이렇게 쉽게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다.전동하는 손에 들린 술을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말했다. “선물 주신 분께도 빨리 건강한 아이 낳으라고 전해주세요.”이한석은 움찔했다.전동하는 진작에 이 물건을 누가 준 것인지 알았다.까놓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았다.그는 웃으며 말했다.“네. 꼭 전달하겠습니다.”그는 그 말을 전달할 용기가 없었다.박수혁은 여자도 없는데 어디 가서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박수혁이 열 받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이한석은 선물을 전해주고 자리를 뜨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전 대표님, 이만 가보겠습니다.”“안녕히 가세요. 멀리 안 나갑니다.”전동하는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시선을 돌린다. 그가 두고 간 박스 두 개를 보는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그가 손을 흔들자, 옆에 있던 종업원이 다가온다.전동하가 감정 없이 말했다.“버려요.”종업원은 깜짝 놀랐다. 얼핏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종업원이 다시 묻기 전에 전동하는 이미 들어가 버렸다.소은정은 새봄이를 안은 채 친구들의 칭찬을 듣고 있었다.한유라가 말했다.“새봄이는 손도 예쁘네. 커서 피아니스트 해도 되겠다!”김하늘이 한술 더 떠 말했다.“손이 예뻐서 돈도 잘 세겠다. 갑부가 되겠어!”성강희도 한마디 거든다.“팔다리도 기네. 국가대표가 돼서 메달 따면 좋겠다!”한유라가 한마디 더 한다.“피부도 어쩜 이리 좋아? 새봄이보다 예쁜 애는 본 적이 없어!”김하늘이 맞장구를 친다.“맞아!”오늘따라 늦게 온 문설아가 웃으면서 걸어오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는 전동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했다.“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새봄이를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던데요!”전동하는 그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저도 못 건드리게 할 거예요.”이상준은 놀라 아무 말도 못 했다.“......”너무 앞서갔나?......소은정은 새봄이를 안고 문설아를 흘깃 보더니 무심한 듯 말했다.“며칠 전에 강희 생일에 네 여동생 봤는데!”문설아는 고개를 숙여 새봄이와 놀고 있었다.그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나도 들었어. 내 여동생도 일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을 거야. 시간 나면 가서 봐야지.”소은정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사이가 좋은가 봐? 소문에 너네……”문설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리를 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남의 프라이버시를 왜 마음대로 말해? 그것도 내 앞에서?”소은정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정은 그저 문설아가 문상아를 조심 했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김하늘은 그 상황을 모두 들었다.소은정은 호기심이 생겼다.그녀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소은정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뒤에서 말한 것도 아닌데.”문설아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기에 내뱉은 말이었다.문설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알려져도 상관없어. 나한테는 그냥 친동생이야. 엄마가 다르면 어때? 어차피 아빠가 같은데!”김하늘이 웃으며 말했다.“다른 집은 엄청나게 물고 뜯고 한다던데 정말 기적이다!”문설아는 활짝 웃으면서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우린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았어. 내 공부도 도와주고 친구들도 대신 괴롭혀 주고 목숨까지 구해줬어. 이런 동생이 어딨냐?”김하늘이 한마디 거든다.“그랬구나. 괜히 말했다 정말.”문설아가 소은정을 보며 말했다.“들었지?”소은정이 웃으며 잘못을 인정했다.“내가 잘못했어. 그 얘기 안 꺼낼게.”한창 얘기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한 여종업원이 소은정을 본 순간 얼굴빛이 좋지 않게 변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소은정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저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수많은 그림자가 눈앞을 스치고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은 기억보다 더 빨랐다.그녀는 왜 갑자기 마음이 괴로운지 알지 못했다.괴로움도 잠시, 마음은 금세 진정이 됐다.술병이 깨지는 순간, 주위의 소리가 선명해졌다.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이마가 깨질듯한 고통도 점점 심해져만 갔다.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났다.그녀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그 순간, 그녀는 지극히 따뜻한 품에 안겼다.“은정 씨......”익숙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편안해졌다.조금 전의 슬픔과 숨 막히는 감정은 착각인 듯싶었다.그녀는 해냈고 새 출발 했다.박수혁을 잊고 지낸 나날들에 그녀는 얼마나 쾌활했는가!그가 정말로 나타난 적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다행히도 그녀는 모두 잊었다.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했다.전동하가 준 모든 것들은 공기처럼 그녀의 삶에 스며들었고 그녀를 다시 살게 했다.정말 행운이 따로 없다!눈앞의 빛은 점점 흐려졌다.그녀는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지만, 눈을 뜰 힘조차 없었다.눈앞에 어둠이 찾아왔다.화려하고 빛나는 연회장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다.누구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온화하고 다정하던 전동하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위험이 닥치는 순간, 김하늘은 재빨리 새봄이를 안아올렸다.위기의 순간에 전동하는 소은정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범인 이율을 잡았다.이율도 겁만 살짝 주려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그렇게까지 그녀의 머리에 명중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그녀는 분노로 이성을 잃어 소은정의 신분을 까먹었다.그 자리에 있는 권세 있는 사람 중에 누군들 소은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