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들은 박수혁과 강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나가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누가 헛소리를 하는 거야?”강서진이 화난 듯 소은정이 왔다고 한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 남자는 머뭇거리더니 박수혁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내 친구가 보낸 동영상인데 소은정이 여기서 내기하면서 돈 좀 만진다는데?”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수혁이 그의 핸드폰을 낚아채 동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몇 명의 남녀가 둘러싸 앉아 칩 대신 차 열쇠와 다이아몬드를 테이블에 놓은 채 내기를 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칩 대신 금괴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포커판의 열기가 생일파티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듯하였다. 모두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었으나 한정판 롱 드레스를 입은 소은정에게 눈길이 갔다.그녀의 옆에는 강서진과 김하늘이 앉아 있었고 소은정에게 몰아주기를 해주고 있는 듯 하였고 소은정은 즐겁게 그 자리를 즐기는 듯하였다.“여기 어디야?”박수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친구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여기 새로 오픈한 그 술집 아니야?”박수혁은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하였다. 출국은커녕 바쁜 일도 없었다는 뜻이다.포커판에 갈 시간은 있지만 자신의 생일 파티에 올 생각은 없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마침 옆으로 이한성이 지나갔고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박수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이한성에게 말했다. “보너스 차감.”“... ...?”이 생일 파티는 주인공 빼고 다들 행복하게 보내고 있었다. 박수혁이 중도에 빠져나가고 다들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컨트롤하기 힘든 지경에 도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오픈한 술집에 도착했다. 그가 들어갔을 때 소은정은 이미 떠나간 후였다. 차로 다시 돌아온 박수혁은 마음이 답답하여 미칠 지경이였다.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담배의 불씨가 꺼질 듯 말 듯 하다가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저녁 12시가 되고 핸드폰에 수십 개의 생일 축하 문자가 쌓였지만 정작 소은정은 상투적
“은사랑?”은사랑이 턱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나를 기억하다니. 아무리 어울리는 집안끼리 결혼한다고 하지만 아까 아저씨는 너무 하지 않나? 나이도 많아 보이던데. 집이 궁전이라도 되나 봐. 당신을 꾄 것을 보면.”아직 소은해와 소은정이 어떤 신분인지 모르는 은사랑이 기회를 잡은 듯이 비꼬았다. 함세연이 그녀에게 알려줬다면 소은정이 귀찮게 상대해줄 필요가 없었을 텐데… 김하늘이 한 소리 하려고 하던 찰나에 소은정에게 저지당하였다.차가운 눈빛으로 은사랑을 향해 소은정이 말했다. “지금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착각하지 말고 멀리 꺼져. 구역질 나.”은사랑의 얼굴이 굳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손에 쥔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아까 그 차주가 누군지 검색하면 아까 아저씨가 누군지 금방 나올 텐데. 포르쉐 클래식 아니야? 우리 아빠가 차주라 아는데 20억 정도 하잖아. 다들 소은정이 어떤 남자를 만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소은정이 어이없다는 듯 짧은 탄식을 내쉬었다. “이거로 지금 협박하는 거야?”소은정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은사랑은 의기양양해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함세연을 놓아주길 바랄 뿐이야. 어떻게 그렇게 착한 애를… 고소하다니… 그녀의 연예인 생활을 네가 다 망친 거야!”“그건 그녀가 자초한 일이야. 앞길도 본인이 스스로 망친 거고. 그녀에게 나쁜 짓을 하라고 시킨 사람은 없어.”소은정이 차갑게 은사랑을 훑어보면서 말했다.“본인 앞길이나 간수 잘하지, 그래?”말을 마친 소은정이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걸어 나갔다. 분이 풀리지 않은 은사랑이 소리쳤다.“공소 취하하지 않으면 금방 사진 인터넷에 퍼트릴 거야! 그 아저씨가 누군지 세상 사람들한테 알릴 거라고! 그렇게 되면 소은정이 나이 불문하고 돈만 있으면 사귄다는 얘기가 나오겠지?”이 얘기를 들은 주위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들의 대화에 집중하였다. 소은정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소은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퍼트려.”소은정이
한집사의 표정이 굳더니 이내 뒤에 있던 보디가드에게 눈치를 주었다.“은사랑 대기실로 보내고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관리 잘해.”소은정과 김하늘은 한집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회장님을 만나 뵙고 성강희한테 발걸음을 옮겼다. 성강희는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건배를 하고있었다. 소은정을 본 성강희는 구세주를 만난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내 파트너가 이제야 오셨네. 이제부터 여자 파트너가 없는 사람들은 나랑 술 같이 못 마셔.”성강희의 말에 화가 났지만, 소은정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웃으면서 넘어갔다. 롱 원피스가 그녀의 분위기를 한껏 더 끌어올렸고 얇게 말린 볼륨 머리가 어깨에 아름답게 떨어지면서 어디에서든지 후광이 빛났다.소은정은 그들을 힐끗 보고서는 자리를 떴고 성강희도 뒤따라왔다.“오늘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다는 뉴스는 못 봤는데.”그 말을 들은 김하늘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그들에게서 벗어나 멀리 가버렸다.소은정은 피식하더니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죽고 싶으면 더 한마디 더 해봐.”성강희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나는 사실만을 말한다고.”성강희가 소은정의 롱드레스 한끝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말했고 소은정은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사랑싸움이었다. 머지않은 곳에서 그녀의 실루엣을 뚫어져라 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차갑고 무거운 공기만이 그를 에워쌌고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남자의 옆에 서 있는 강서진도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젯밤 박수혁은 하룻밤을 꼬박 새우면서 소은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외에 나가 공무를 수행한다던 소은정이 성강희의 생일 파티에서 화려한 등장이라. 하룻밤 간격의 두 파티는 상반되는 분위기를 풍겼다.“에헴, 박대표, 생일 파티가 웅장하기는 하다만 고작 생일 파티 아니야?”박수혁이 성강희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다니! 아무리 웅장한 생일 파티라 하더라도 박수혁에게 초대조차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누가 이렇게 무료한 생
그 말을 들은 소은정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장면이 2층에 있는 박수혁의 눈에 들어 오고 바로 손에 든 술잔을 자리에 놓은 채 터벅터벅 연회장으로 걸어갔다. “파티 망치지 마…”강서진이 급하게 박수혁을 말렸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멈추고 공연을 마친 사람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였고 연회장에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사랑은 뺀 나머지 인원들이 내려가고 은사랑은 무대에 선 채 소은정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렸다. 낌새가 수상하다고 느낀 김하늘이 소은정에게 다가와 말했다.“은사랑이 무슨 일을 꾸민 거 아니야?”소은정이 웃더니 말했다.“자신도 은퇴하고 싶나 보네. 뭐 하는지 들어나 보자.”그 말을 들은 김하늘은 소은정도 눈치채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고 물러났다. 무대 위. “안녕하세요. 저는 은사랑입니다. 이 자리에 초대해 주어 대단히 감사하고 생일 축하드려요!”괜객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고 성강희는 술잔을 들어 감사를 표했다. 박수소리가 그치자 은사랑이 말을 이어 나갔다.“외람된 말이지만 소은정씨를 무대에 모셔서 피아노 연주를 부탁드려도 될까요?”소은정이 무슨 집안의 사람이든지 은사랑은 굴복하지 않았다. 돈 많으면 단가?은사랑도 꽤 나간다는 집안의 자식인지라 돈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은해를 생각하면 질투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소은정은 무대 위의 은사랑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용기를 북돋아 주었을까? 감히 파티에 초대된 VIP에게 무대를 시킬 생각을 한다니! 본인이 퍼포먼스 면에서는 더 잘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성강희의 입가에 미소가 옅어지고 집사에게 은사랑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애야?”집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다.“소은정씨의 신분이 너무 고귀하여 성강희씨에게 피아노 한 곡 들려줄 수 없는 건가요? 아니면 아! 피아노를 칠 줄 모르셨나요? 그
“박 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성강희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억지로 방해하는 박수혁을 향해 불만을 토로했다.어차피 이혼한 사이, 이제 성강희는 절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박수혁은 성강희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 소은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시계에서 반짝이는 빛이 유난히 박수혁의 눈에 거슬렸다. 파텍 필립은 박수혁의 가장 좋아하는 시계 브랜드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소장하고 있는 시계에 전부 불태워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소은정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박수혁의 큰 손을 뿌리쳤다.“뭔데?”박수혁의 꾹 다문 입술이 열리려는 순간, 소은정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할 말 있으면 다음에 해. 오늘 강희 생일이야. 다른 사람 생일파티에서 이게 무슨 추태야?”말을 마친 소은정은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성강희에게 다가가 준비한 시계를 직접 해주었다. 이리저리 훑어보던 소은정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강희야, 생일 축하해.”성강희는 손목을 들더니 일부러 박수혁에게 보여주었다.“고마워. 내가 받은 최고의 생일선물이야. 평생... 평생 간직할게...”성강희가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강희의 따뜻하고도 열렬한 눈빛에 소은정의 마음도 벅차올랐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박수혁의 눈빛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박수혁에게는 생일파티를 해준 적도 선물을 준 적도 바이올린 연주를 보여준 적도 없다. 그런데 성강희가 무슨 자격으로...!생일 파티에서 보여준 소은정의 모습은 예리한 비수처럼 박수혁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결혼생활 동안 두 사람이 쌓은 추억 하나 없다는 게 허무하면서도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소은정은 싱긋 웃더니 장난스레 말했다.“그래.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가격은 더 올라갈 거야. 재테크한다고 생각해.”한편, 김하늘은 두 남자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있는 소은정과 면박을 받고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박수혁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핑계를 대며 소은정
박수혁의 말에 강서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내... 내가 뭐 이렇게 될 줄 알았나?”박예리가 쓸데없는 말만 안 했어도 애초에 그쪽으로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소은정은 왜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구는 걸까? 공식적인 자리에서 서로 체면 정도는 세워줘도 되지 않나?강서진은 의아했다.한편, 김하늘과 소은정은 수다를 떨며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분장실로 들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때, 누군가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룸에서 나왔다.은사랑이었다.역시 소은정을 발견한 은사랑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지만 갑자기 한 집사가 분장실로 들어왔다.“은정 아가씨, 죄송한데 제가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깐 자리 좀 피해 주실 수 있을까요? 몇 분이면 됩니다.”한 집사가 공손한 태도로 양해를 구했다. “네, 그러세요.”소은정과 김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한 집사가 뒤를 따르던 보디가드들에게 눈치를 주자 두 장정이 은사랑의 팔목을 덥석 잡더니 분장실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한 집사님, 무슨 오해라도 있으신 게...”한 집사는 성씨 일가의 실세와도 같은 존재, 그의 행동이 곧 성씨 일가의 뜻임을 은사랑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성씨 일가에서 이렇게 거칠게 그녀를 대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럼 앞으로 활동은 어떡하지? 이대로 귀국하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은사랑 씨, 미리 말씀드린 대로 공연을 진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건 심각한 무대 사고입니다. 계약서에 따라 계약을 해지하겠습니다. 회사 쪽에는 따로 얘기드렸고 위약금은 며칠 뒤 협상이 끝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한 집사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네? 제가요?”이때 은사랑이 소은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은정, 설마 네가...”일그러진 은사랑의 표정에 소은정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내가 뭘요?”소은정이 앞으로 다가가더니 팔짱을 꼈다.“은사랑 씨, 순진이 지나치면 멍청한 게 되는 거예요.”차갑고 아
소은정과 김하늘은 다시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은정의 신분이 밝혀지자 다들 그저 가식적인 인사를 건넬 뿐 그 누구도 그녀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지 않았다.왠지 피곤해진 소은정은 발코니로 다가갔다. 조용하고 우아하게 발코니 창문 너머로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가 보였고 은은한 꽃향기가 소은정의 코끝을 자극했다.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던 그때,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은정 씨, 여긴 어떻게 왔어요?”강서진이었다.여유롭던 소은정의 얼굴에 불만이 비치고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강서진을 노려보았다.“내가 어디를 가든 강서진 씨 허락까지 받아야 합니까?”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어서 꺼지라는 뜻이었다. 소은정의 태도에 머쓱해진 강서진이었지만 그래도 친구인 박수혁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아 그건 아니지만... 은정 씨, 그 시계 형 선물로 준비한 거 아니었어요? 생일날에도 형이 밤새 은정 씨를 기다렸는데 결국 오지도 않고...”박수혁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반면 소은정은 강서진의 말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시계가 박수혁을 위한 선물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김칫국부터 마시긴.“강서진 씨, 내가 왜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 파티에 가야 하죠? 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생일선물까지 준비해야 하냐고요?”뻔뻔하긴.망설이던 강서진이 입을 열려던 순간, 커튼 뒤의 그림자가 살짝 흔들렸다. 익숙한 그림자였다...이런, 하필 이때...깜짝 놀란 강서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넌 정말 내가 싫어?”남자의 질문에 소은정의 몸이 흠칫 떨리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박수혁은 바로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긴 커튼이 그의 모습을 가려주었나 보다.복잡미묘한 눈빛과 달리 박수혁의 목소리만은 아주 덤덤했다.소은정은 시선을 피하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 동안 티는 충분히 낸 것 같은데. 정말 몰라서 물어?”이왕 엿들었으니 더 이상 숨길 생각도 없었다. 이참에 확실
왜 다 지난 일을 또 끄집어내는 걸까? 왜 굳이 그녀의 상처를 다시 헤집는 걸까?박수혁, 당신 참 독하다...하지만 수많은 상처를 받은 소은정은 이제 상처 위에 덧씌워진 굳은살들로 단단하게 변해버렸다. 박수혁이 뭔가 더 말하려던 그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성강희가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은정 여왕님...”닭살스러운 호칭에 소은정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흑역사와도 같은 과거사로 인해 찝찝해진 기분도 다시 가벼워졌다.과거에 빠져있는 사람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성강희는 자연스럽게 소은정의 어깨를 감싸더니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박수혁을 노려보았다.“은정아, 지금 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널 위해 만든 자리인데 어서 가자.”10분 전이었다면 흔쾌히 따라나섰겠지만, 지금은...“됐어. 좀 피곤하네. 나 집에 갈래.”소은정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데려다줄게.”집으로 가겠다는 말에 성강희가 바로 대답했다.“됐어. 집사 아저씨가 오실 거야.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잖아. 주인공이 먼저 자리를 비우면 되겠어?”“괜찮아. 저 자식들보다 네가 훨씬 더 소중하니까.”소은정 앞에서는 친구에 대한 의리고 뭐고 없는 서강희였다. 앞으로 몇 발자국 걷던 소은정은 뭔가 생각난 듯 멈춰 섰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백지 수표 한 장을 꺼내 숫자를 적더니 박수혁에게 다가갔다.다정한 성강희와 소은정의 모습을 노려보던 박수혁은 다시 그를 향해 다가오는 소은정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 듯 뒤로 한 발 물러섰다.소은정은 수표를 박수혁의 정장 앞주머니에 넣어주었다.“30억, 이 정도면 당신 마음에 드는 차 충분히 살 수 있을 거야. 이제 빚은 다 청산한 거다?”소은정은 활짝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일을 빌미로 또다시 들러붙을까 무서워 시장 가격보다 훨씬 더 높게 책정해 주었다.거성그룹에서 우연히 엿들은 임춘식, 박수혁 두 사람의 대화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죄책감 때문에? 두 가문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미친 자식.망설임 없이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