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화장실로 향했다. 바깥바람이라도 마시고 싶어 가방을 손에 쥐고 나왔다.옆방을 지날 때,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전동하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화장실을 다녀온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 베란다로 향했다.밖은 어두컴컴했고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조용한 밤공기가 어우러졌다.그녀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전동하에게서는 아직 새로운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리려는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죄송해요! 화장실을 착각했어요! 저는 남자화장실인 것도 모르고..."소은정은 눈살을 찌푸렸다."이율이... 화장실을 착각했다고?"성강희가 이율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 줄 알고 있었다.그러나 성강희는 아직 이율을 찾지 못한 것 같다.혹시라도 나쁜 일을 당할 가봐 소은정은 성강희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그러나 곧이어 들리는 남자 목소리에 소은정은 깜짝 놀랐다."괜찮아요. 여자 화장실은 밖에 있어요."전동하의 목소리다.'전동하가 왜 저기에 있지?'그의 목소리에 소은정은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발걸음을 멈추고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율이 곧 떠난 줄 알았는데 그녀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저... 길을 잃었어요, 혹시 저 좀 데리고 나가주시겠어요?"조심스러우면서도 기대 가득한 말투, 소은정은 이율이 지금 어떤 표정으로 전동하에게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그리고 곧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전동하의 자상함에 익숙해져 그의 주위에는 다른 여자가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두 사람은 다른 여자 때문에 싸운 적도 없었다.전동하는 자신이 아니더라도 좋은 여자를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신랑감이기도 했다.자신이 전동하에게 다가오는 많은 여자들을 막은 것 같다는 생각에 전동하의 행동이 궁금하기도 했다.곧이어 전동하의 차가우면서도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제 아내를 데리러 가야 해서요. "이율의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결혼.
성강희는 이율의 체면을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성강희는 전동하를 발견하고 물었다."어떻게 여기에 있어요?"전동하는 어깨를 으쓱하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이율은 눈을 반짝거렸다."어머,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야? 강희야, 나 소개해 줄래?"성강희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이율을 흘겨보았다.그제야 이율이 그에게 접근한 목적을 알 것 같았다.그는 목적성이 있게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라 따라 온다는 걸 막지 않은 것뿐이다.자기 주제도 모르고 떠드는 이율을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소개? 너를 왜? 몸이라도 팔려고?"수줍은 미소로 전동하를 바라보고 있던 이율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전동하는 표정이 굳어졌다."두 사람 얘기 나눠요."성강희는 몸을 비스듬히 비켜주었다."네, 들어가요..."전동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이율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성강희는 가볍게 웃어 보이고 말했다."너 꿈 깨. 저 남자 아내는 네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너 화장실에 남자 잡으려고 왔니? 내가 방해한 것 같으니 이만 갈게."말을 마친 그는 이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세 사람의 대화에 정신이 팔린 소은정은 자신이 지금 있는 자리가 전동하가 마침 지나가는 자리인 것도 깜빡했다."왔어요?"전동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서있는 곳에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창문을 닫았다."왜 여기 서 있어요?"소은정은 잠시 멍하니 눈을 반짝거렸다."당신이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 같길래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여기서 기다렸죠..."듣기 좋은 거짓말을 했다.엿듣고 있었다는 말보다 이 핑계가 훨씬 나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전동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외투를 고쳐 입히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마침 잘 됐네요. 집에 갈까요? 아, 내가 보낸 메시지는 못 보고 놀음에만 빠진 건 아니죠?"그의 말투에서도 소은정에 대한 애정이 뚝뚝 흘러넘쳤다.
소은정은 눈을 굴리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래요. 어차피 가려고 했으니까요.”하지만 여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도 전에 소은정의 옆에 있던 남자가 그녀를 말렸다.“안 돼요.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오지랖 부리지 말아요.”그 말에 여자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소은정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어차피 가는 길도 같은데….”전동하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고는 소은정의 어깨를 껴안고 앞으로 몇 걸음 더 가서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저 여자 남자 화장실에서 남자 꼬시는 여자예요. 별로 질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요. 성강희 씨가 한 말도 있으니까 저 여자 믿지 말아요. 저런 애들을 인터넷에서 뭐라고 했더라? 여우? 다른 사람 가정을 파탄 내는 여우니까 저 여자랑 가까이 하지 말아요!”소은정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전동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이런 말은 보통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얘기 아닌가?‘왜 나한테 저런 말을 하지?’전동하는 멍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됐어요. 어차피 은정 씨는 순진해서 그런 거 잘 모르니까 내 말 들어요. 어쨌든 귀찮게 들러붙기 전에 어서 가요.”한편, 이율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제 자리에 서 있었다.이제 더 다가갈 명분도 없었다.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저기서 말하면 이쪽에 안 들릴 줄 알았을까?‘일부러 나 들으라고 말한 건가?’혼신의 연기를 다했지만 그의 한마디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소은정이 다가왔을 때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남자가 단 한마디로 그녀의 계획을 까발릴 줄이야.‘믿을 수 없어… 세상에 어떻게 저런 남자가 다 있지?’이율은 자신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얼른 자리를 뜨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정말 자존심이 상했다.소은정은 웃음을 참으며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운전기사가 도착했다.소은정은 차에 오른 뒤에도 계속해서 그의 표정을 주시했다.전동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차에 올랐다.“난 정말 모르는 여자예요. 전혀 기억이 없어요. 이 여자 누구예요? 이 여자가 사진 줬어요? 우리 사이가 너무 좋아서 질투해서 일부러 우리 이간질하는 것 같네요. 절대 속으면 안 돼요! 이런 사람은 멀리 피하는 게 좋아요.”소은정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어쩐지 기분이 좋았다.그녀는 처음부터 그를 의심하지는 않았다.그냥 그의 반응이 궁금했을 뿐이다.역시 전동하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잔뜩 짜증이 난 그의 모습을 보자 소은정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됐어요. 장난이었어요.”전동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못 말린다는 듯이 웃고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나 가지고 장난친 거예요? 우리 아기는 얌전히 있었어요?”소은정은 흐뭇한 표정으로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오늘은 정말 얌전했어요. 아까 음악소리가 그렇게 컸는데 잘 자는 것 같더라고요.”전동하는 따뜻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럴 줄 알았어요. 질투 때문에 이상한 사진 가져와서 나 놀려먹으러 한 거죠?”소은정은 아니꼽게 그를 흘겨보았다.“아니거든요? 그러기에 평소에 행동거지를 조심했어야죠. 그 사진 진짜예요. 난 또 동하 씨가 투자건 때문에 거래라도 한 줄 알았잖아요!”전동하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무슨 거래요?”소은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까 문설아와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잠시 침묵이 감돌았다.소은정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물었다.“그 투자건… 잘 되면 꽤 많은 돈을 벌겠죠?”전동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돈 안 돼요. 여보, 그거 그냥 연막작전이에요. 겉으로 보기에 전망이 좋아 보이지만 사실 실속이 별로 없어요. 아마 일년 뒤에 파산할지도 몰라요.”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졌다.소은정은 갑자기 문설아가 불쌍하게
소찬식은 서재에서 며칠 동안 나오지 않았다.그러다가 드디어 만족스러운 이름이 생각났다고 발표했다.“전상수 어때?”그 말을 들은 소은정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전상수요? 너무 촌스럽지 않아요? 꼭 옛날 사람 같잖아요.”전동하의 입가도 실룩거렸지만 끝끝내 웃음을 참아냈다.소은해는 대놓고 웃으며 이죽거렸다.“그게 뭐예요, 아버지. 며칠 동안 고민해서 생각한 이름이 상수? 요즘 누가 그런 이름을 써요?”소찬식은 또 삐져서 서재로 들어갔다.그렇게 애기 이름 짓는 것 때문에 시끄러웠지만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그리고 소은정의 출산 반응은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찾아왔다.새로운 계획서를 검토하던 소은정은 갑자기 아랫배가 쭉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느낌이 조금 이상했기에 그녀는 다급히 사람을 불렀다.사실 출산 준비는 이미 충분하게 되어 있었다.전동하는 침착하게 미리 병원에 연락하고 소찬식과 소은해에게도 전화한 뒤, 차에 올라 소은정을 다독여 주었다.첫 출산이기에 소은정은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전동하가 손을 잡아주었고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그녀보다 그가 더 긴장하고 있었다.그녀는 전동하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그런데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안심이 됐다.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준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려 버렸다.병원에 도착하자 진통은 점점 심해졌다.그녀는 거의 의식을 잃었고 간호사와 의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의식이 흐릿해지던 순간, 희귀혈액형이라 위험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그 뒤로 그녀는 완전히 혼수상태가 되었다.며칠이 지났다.소은정은 예쁜 여자 아기를 출산했다. 한유라와 김하늘도 문안을 다녀갔다.하지만 병실에는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소은정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출혈이 심했다고 했다. 게다가 그녀는 희귀혈액형이라 물론 병원에서 미리 혈액을 준비하긴 했지만 빈혈 상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더해져서
병실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소은해는 어떤 말로 이 사람을 위로해야 할지 막막했다.계속 여기 있으라고 해야 하나?그러다가 전동하까지 쓰러질 것 같았다.소은정이 혼수상태에 빠진 건 그들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아무도 이런 사고가 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희귀혈액형이라 다른 사람보다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지금 상황은 그녀가 하루빨리 호전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소은해는 한숨을 내쉬고는 화제를 돌렸다.“영감님이 아기 애칭을 지어주셨어. 새봄이라고, 봄처럼 활기찬 아이로 되라는 뜻으로….”전동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괜찮네요. 예상했던 것보다는 잘 지었는데요?”소은해도 씩 웃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가서 한숨 자고 와. 우리가 여기 있을게. 은정이 깨어나기 전에 매제가 먼저 쓰러지겠어. 그러면 은정이는 누가 돌봐?”전동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소은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운전기사 대기시켰어.”그가 소은정에 대한 전동하의 사랑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걸까? 며칠 사이에 전동하는 누워 있는 소은정보다 더 초췌해졌다. 소은해는 이러다가 전동하가 먼저 쓰러질까 봐 걱정이었다.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순애보였다니 믿기지 않았다.사실 예전에는 소은정이 박수혁에게서 벗어나 아무나 만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전동하는 마침 그 시기에 나타난 사람이었고 동생에게 그럭저럭 잘하는 것 같아서 은근히 속으로 두 사람을 응원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전동하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였다.소은정이 출산하던 당일, 간호사가 아이를 안고 나오자 소찬식과 가족들 모두 아이에게 달려갔다.유독 전동하만 굳은 표정으로 아이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소은정부터 찾았다.수술실 밖에서 의사의 설명을 들은 전동하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절망적이었다.그렇게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소은정이 혼수
이한석은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병실을 힐끗 바라보고 묵묵히 자리를 떴다.그의 호주머니에는 전하지 못한 선물이 있었다.박수혁이 전해달라고 부탁한 선물이었다.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선물을 전한다고 그녀가 깨어나는 것도 아닐 텐데.그냥 그가 아직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걸까?이한석은 한숨을 쉬고는 걸음을 재촉했다.전동하는 집에 돌아가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는데 어두운 밤이 되었다.그는 텅 빈 방에서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당장이라도 거실에서 그녀가 웃으며 배 안 고프냐고 다가올 것만 같았다.그는 순간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그래서 얼른 핸드폰을 챙겨 병원으로 갔다.마친 가는 길에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대표님, 몇몇 프로젝트가 지금 마비 상태인데 추가 투자를 더 해야 할까요? 지금은 그냥 지켜보고 있는데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위험이 따를 수도 있어서요.”전동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설명을 들은 뒤, 몇 달 사이에는 불안정하겠지만 전망이 꽤 좋은 투자 항목이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해 주었다.그러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알아서 해.”비서는 알겠다고 한 뒤, 화제를 돌렸다.“작은 도련님께서 대표님을 찾으시더라고요. 집에 돌아가 보고 싶다고 하는데 학교에서는 부모 동의가 필요하다고 해서요.”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차갑게 대꾸했다.“얌전히 학교에 있으라고 해. 너무 애가 고집을 부리면 며칠 데리고 나가서 바람이나 쐬든가. 병원에는 데려오지 말고.”말을 마친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잠시 후, 그는 병원에 도착했다.소은정이 있는 병실 복도는 아주 조용했다.병실로 다가가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게 심호흡했다.그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았다.하지만 미소가 잘 지어지지 않았다.그럴 기분이 아니었다.처음 창업할 때,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이렇게 두려운 적은 없었다.소은정 그 여자에게 생명줄이 단단히 잡힌 것 같았다.병실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점점 더
말을 마친 뒤, 소은정은 그를 힘껏 밀치고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갔다.전동하는 넋을 잃은 상태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뒤돌아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다시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은정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그러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도도한 말투로 물었다.“내가 왜 병원에 있는지 알아요? 당신은 누구예요?”전동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리고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나 기억 안 나요?”소은정은 입술을 삐죽이고는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사실 외모는 꽤 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남자한테 막 마음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자상한데다가 외모까지 그녀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그래서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몰라요. 우리 아빠랑 오빠는요?”그녀는 턱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공주님처럼 도도한 말투로 물었다.전동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깨어난 건 정말 기쁜데 왜 그를 잊어버렸을까?‘내가 얼마나 힘들게 당신의 마음을 열었는데… 어떻게 나를 잊을 수 있지?’그는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했다.“참 양심도 없네요.”소은정은 입을 삐죽이고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말 안 해줄 거면 됐어요. 내가 알아서 찾죠 뭐!”그녀는 소찬식이나 오빠들이 자신을 이곳에 혼자 버려두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그녀가 뒤돌아선 순간, 전동하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한 손에 잡아도 남을 정도.그녀는 많이 야위었다.임신해서 조금 쪘던 살이 며칠 사이에 다 빠져버렸다.전동하는 안쓰러운 마음부터 들었다.그녀는 아이를 임신해서 이런 일을 겪었다.그런데 어떻게 그녀를 원망할 수 있을까?일부러 잊어버린 것도 아닌데!그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내가 찾아줄 테니까 병실에서 기다릴 수 있어요?”소은정이 머뭇거리며 물었다.“내가 왜 그쪽을 믿어야 하죠?”전동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내가 나쁜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