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화장실로 향했다. 바깥바람이라도 마시고 싶어 가방을 손에 쥐고 나왔다.옆방을 지날 때,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전동하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화장실을 다녀온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 베란다로 향했다.밖은 어두컴컴했고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조용한 밤공기가 어우러졌다.그녀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전동하에게서는 아직 새로운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리려는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죄송해요! 화장실을 착각했어요! 저는 남자화장실인 것도 모르고..."소은정은 눈살을 찌푸렸다."이율이... 화장실을 착각했다고?"성강희가 이율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 줄 알고 있었다.그러나 성강희는 아직 이율을 찾지 못한 것 같다.혹시라도 나쁜 일을 당할 가봐 소은정은 성강희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그러나 곧이어 들리는 남자 목소리에 소은정은 깜짝 놀랐다."괜찮아요. 여자 화장실은 밖에 있어요."전동하의 목소리다.'전동하가 왜 저기에 있지?'그의 목소리에 소은정은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발걸음을 멈추고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율이 곧 떠난 줄 알았는데 그녀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저... 길을 잃었어요, 혹시 저 좀 데리고 나가주시겠어요?"조심스러우면서도 기대 가득한 말투, 소은정은 이율이 지금 어떤 표정으로 전동하에게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그리고 곧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전동하의 자상함에 익숙해져 그의 주위에는 다른 여자가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두 사람은 다른 여자 때문에 싸운 적도 없었다.전동하는 자신이 아니더라도 좋은 여자를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신랑감이기도 했다.자신이 전동하에게 다가오는 많은 여자들을 막은 것 같다는 생각에 전동하의 행동이 궁금하기도 했다.곧이어 전동하의 차가우면서도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제 아내를 데리러 가야 해서요. "이율의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결혼.
성강희는 이율의 체면을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성강희는 전동하를 발견하고 물었다."어떻게 여기에 있어요?"전동하는 어깨를 으쓱하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이율은 눈을 반짝거렸다."어머,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야? 강희야, 나 소개해 줄래?"성강희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이율을 흘겨보았다.그제야 이율이 그에게 접근한 목적을 알 것 같았다.그는 목적성이 있게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라 따라 온다는 걸 막지 않은 것뿐이다.자기 주제도 모르고 떠드는 이율을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소개? 너를 왜? 몸이라도 팔려고?"수줍은 미소로 전동하를 바라보고 있던 이율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전동하는 표정이 굳어졌다."두 사람 얘기 나눠요."성강희는 몸을 비스듬히 비켜주었다."네, 들어가요..."전동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이율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성강희는 가볍게 웃어 보이고 말했다."너 꿈 깨. 저 남자 아내는 네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너 화장실에 남자 잡으려고 왔니? 내가 방해한 것 같으니 이만 갈게."말을 마친 그는 이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세 사람의 대화에 정신이 팔린 소은정은 자신이 지금 있는 자리가 전동하가 마침 지나가는 자리인 것도 깜빡했다."왔어요?"전동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서있는 곳에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창문을 닫았다."왜 여기 서 있어요?"소은정은 잠시 멍하니 눈을 반짝거렸다."당신이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 같길래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여기서 기다렸죠..."듣기 좋은 거짓말을 했다.엿듣고 있었다는 말보다 이 핑계가 훨씬 나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전동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외투를 고쳐 입히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마침 잘 됐네요. 집에 갈까요? 아, 내가 보낸 메시지는 못 보고 놀음에만 빠진 건 아니죠?"그의 말투에서도 소은정에 대한 애정이 뚝뚝 흘러넘쳤다.
소은정은 눈을 굴리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래요. 어차피 가려고 했으니까요.”하지만 여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도 전에 소은정의 옆에 있던 남자가 그녀를 말렸다.“안 돼요.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오지랖 부리지 말아요.”그 말에 여자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소은정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어차피 가는 길도 같은데….”전동하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고는 소은정의 어깨를 껴안고 앞으로 몇 걸음 더 가서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저 여자 남자 화장실에서 남자 꼬시는 여자예요. 별로 질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요. 성강희 씨가 한 말도 있으니까 저 여자 믿지 말아요. 저런 애들을 인터넷에서 뭐라고 했더라? 여우? 다른 사람 가정을 파탄 내는 여우니까 저 여자랑 가까이 하지 말아요!”소은정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전동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이런 말은 보통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얘기 아닌가?‘왜 나한테 저런 말을 하지?’전동하는 멍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됐어요. 어차피 은정 씨는 순진해서 그런 거 잘 모르니까 내 말 들어요. 어쨌든 귀찮게 들러붙기 전에 어서 가요.”한편, 이율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제 자리에 서 있었다.이제 더 다가갈 명분도 없었다.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저기서 말하면 이쪽에 안 들릴 줄 알았을까?‘일부러 나 들으라고 말한 건가?’혼신의 연기를 다했지만 그의 한마디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소은정이 다가왔을 때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남자가 단 한마디로 그녀의 계획을 까발릴 줄이야.‘믿을 수 없어… 세상에 어떻게 저런 남자가 다 있지?’이율은 자신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얼른 자리를 뜨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정말 자존심이 상했다.소은정은 웃음을 참으며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운전기사가 도착했다.소은정은 차에 오른 뒤에도 계속해서 그의 표정을 주시했다.전동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차에 올랐다.“난 정말 모르는 여자예요. 전혀 기억이 없어요. 이 여자 누구예요? 이 여자가 사진 줬어요? 우리 사이가 너무 좋아서 질투해서 일부러 우리 이간질하는 것 같네요. 절대 속으면 안 돼요! 이런 사람은 멀리 피하는 게 좋아요.”소은정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어쩐지 기분이 좋았다.그녀는 처음부터 그를 의심하지는 않았다.그냥 그의 반응이 궁금했을 뿐이다.역시 전동하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잔뜩 짜증이 난 그의 모습을 보자 소은정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됐어요. 장난이었어요.”전동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못 말린다는 듯이 웃고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나 가지고 장난친 거예요? 우리 아기는 얌전히 있었어요?”소은정은 흐뭇한 표정으로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오늘은 정말 얌전했어요. 아까 음악소리가 그렇게 컸는데 잘 자는 것 같더라고요.”전동하는 따뜻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럴 줄 알았어요. 질투 때문에 이상한 사진 가져와서 나 놀려먹으러 한 거죠?”소은정은 아니꼽게 그를 흘겨보았다.“아니거든요? 그러기에 평소에 행동거지를 조심했어야죠. 그 사진 진짜예요. 난 또 동하 씨가 투자건 때문에 거래라도 한 줄 알았잖아요!”전동하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무슨 거래요?”소은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까 문설아와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잠시 침묵이 감돌았다.소은정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물었다.“그 투자건… 잘 되면 꽤 많은 돈을 벌겠죠?”전동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돈 안 돼요. 여보, 그거 그냥 연막작전이에요. 겉으로 보기에 전망이 좋아 보이지만 사실 실속이 별로 없어요. 아마 일년 뒤에 파산할지도 몰라요.”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졌다.소은정은 갑자기 문설아가 불쌍하게
소찬식은 서재에서 며칠 동안 나오지 않았다.그러다가 드디어 만족스러운 이름이 생각났다고 발표했다.“전상수 어때?”그 말을 들은 소은정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전상수요? 너무 촌스럽지 않아요? 꼭 옛날 사람 같잖아요.”전동하의 입가도 실룩거렸지만 끝끝내 웃음을 참아냈다.소은해는 대놓고 웃으며 이죽거렸다.“그게 뭐예요, 아버지. 며칠 동안 고민해서 생각한 이름이 상수? 요즘 누가 그런 이름을 써요?”소찬식은 또 삐져서 서재로 들어갔다.그렇게 애기 이름 짓는 것 때문에 시끄러웠지만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그리고 소은정의 출산 반응은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찾아왔다.새로운 계획서를 검토하던 소은정은 갑자기 아랫배가 쭉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느낌이 조금 이상했기에 그녀는 다급히 사람을 불렀다.사실 출산 준비는 이미 충분하게 되어 있었다.전동하는 침착하게 미리 병원에 연락하고 소찬식과 소은해에게도 전화한 뒤, 차에 올라 소은정을 다독여 주었다.첫 출산이기에 소은정은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전동하가 손을 잡아주었고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그녀보다 그가 더 긴장하고 있었다.그녀는 전동하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그런데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안심이 됐다.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준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려 버렸다.병원에 도착하자 진통은 점점 심해졌다.그녀는 거의 의식을 잃었고 간호사와 의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의식이 흐릿해지던 순간, 희귀혈액형이라 위험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그 뒤로 그녀는 완전히 혼수상태가 되었다.며칠이 지났다.소은정은 예쁜 여자 아기를 출산했다. 한유라와 김하늘도 문안을 다녀갔다.하지만 병실에는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소은정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출혈이 심했다고 했다. 게다가 그녀는 희귀혈액형이라 물론 병원에서 미리 혈액을 준비하긴 했지만 빈혈 상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더해져서
병실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소은해는 어떤 말로 이 사람을 위로해야 할지 막막했다.계속 여기 있으라고 해야 하나?그러다가 전동하까지 쓰러질 것 같았다.소은정이 혼수상태에 빠진 건 그들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아무도 이런 사고가 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희귀혈액형이라 다른 사람보다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지금 상황은 그녀가 하루빨리 호전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소은해는 한숨을 내쉬고는 화제를 돌렸다.“영감님이 아기 애칭을 지어주셨어. 새봄이라고, 봄처럼 활기찬 아이로 되라는 뜻으로….”전동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괜찮네요. 예상했던 것보다는 잘 지었는데요?”소은해도 씩 웃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가서 한숨 자고 와. 우리가 여기 있을게. 은정이 깨어나기 전에 매제가 먼저 쓰러지겠어. 그러면 은정이는 누가 돌봐?”전동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소은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운전기사 대기시켰어.”그가 소은정에 대한 전동하의 사랑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걸까? 며칠 사이에 전동하는 누워 있는 소은정보다 더 초췌해졌다. 소은해는 이러다가 전동하가 먼저 쓰러질까 봐 걱정이었다.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순애보였다니 믿기지 않았다.사실 예전에는 소은정이 박수혁에게서 벗어나 아무나 만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전동하는 마침 그 시기에 나타난 사람이었고 동생에게 그럭저럭 잘하는 것 같아서 은근히 속으로 두 사람을 응원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전동하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였다.소은정이 출산하던 당일, 간호사가 아이를 안고 나오자 소찬식과 가족들 모두 아이에게 달려갔다.유독 전동하만 굳은 표정으로 아이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소은정부터 찾았다.수술실 밖에서 의사의 설명을 들은 전동하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절망적이었다.그렇게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소은정이 혼수
이한석은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병실을 힐끗 바라보고 묵묵히 자리를 떴다.그의 호주머니에는 전하지 못한 선물이 있었다.박수혁이 전해달라고 부탁한 선물이었다.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선물을 전한다고 그녀가 깨어나는 것도 아닐 텐데.그냥 그가 아직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걸까?이한석은 한숨을 쉬고는 걸음을 재촉했다.전동하는 집에 돌아가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는데 어두운 밤이 되었다.그는 텅 빈 방에서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당장이라도 거실에서 그녀가 웃으며 배 안 고프냐고 다가올 것만 같았다.그는 순간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그래서 얼른 핸드폰을 챙겨 병원으로 갔다.마친 가는 길에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대표님, 몇몇 프로젝트가 지금 마비 상태인데 추가 투자를 더 해야 할까요? 지금은 그냥 지켜보고 있는데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위험이 따를 수도 있어서요.”전동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설명을 들은 뒤, 몇 달 사이에는 불안정하겠지만 전망이 꽤 좋은 투자 항목이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해 주었다.그러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알아서 해.”비서는 알겠다고 한 뒤, 화제를 돌렸다.“작은 도련님께서 대표님을 찾으시더라고요. 집에 돌아가 보고 싶다고 하는데 학교에서는 부모 동의가 필요하다고 해서요.”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차갑게 대꾸했다.“얌전히 학교에 있으라고 해. 너무 애가 고집을 부리면 며칠 데리고 나가서 바람이나 쐬든가. 병원에는 데려오지 말고.”말을 마친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잠시 후, 그는 병원에 도착했다.소은정이 있는 병실 복도는 아주 조용했다.병실로 다가가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게 심호흡했다.그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았다.하지만 미소가 잘 지어지지 않았다.그럴 기분이 아니었다.처음 창업할 때,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이렇게 두려운 적은 없었다.소은정 그 여자에게 생명줄이 단단히 잡힌 것 같았다.병실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점점 더
말을 마친 뒤, 소은정은 그를 힘껏 밀치고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갔다.전동하는 넋을 잃은 상태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뒤돌아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다시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은정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그러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도도한 말투로 물었다.“내가 왜 병원에 있는지 알아요? 당신은 누구예요?”전동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리고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나 기억 안 나요?”소은정은 입술을 삐죽이고는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사실 외모는 꽤 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남자한테 막 마음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자상한데다가 외모까지 그녀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그래서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몰라요. 우리 아빠랑 오빠는요?”그녀는 턱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공주님처럼 도도한 말투로 물었다.전동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깨어난 건 정말 기쁜데 왜 그를 잊어버렸을까?‘내가 얼마나 힘들게 당신의 마음을 열었는데… 어떻게 나를 잊을 수 있지?’그는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했다.“참 양심도 없네요.”소은정은 입을 삐죽이고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말 안 해줄 거면 됐어요. 내가 알아서 찾죠 뭐!”그녀는 소찬식이나 오빠들이 자신을 이곳에 혼자 버려두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그녀가 뒤돌아선 순간, 전동하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한 손에 잡아도 남을 정도.그녀는 많이 야위었다.임신해서 조금 쪘던 살이 며칠 사이에 다 빠져버렸다.전동하는 안쓰러운 마음부터 들었다.그녀는 아이를 임신해서 이런 일을 겪었다.그런데 어떻게 그녀를 원망할 수 있을까?일부러 잊어버린 것도 아닌데!그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내가 찾아줄 테니까 병실에서 기다릴 수 있어요?”소은정이 머뭇거리며 물었다.“내가 왜 그쪽을 믿어야 하죠?”전동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내가 나쁜 사람으로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