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뭘 잘못한 게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아 한유라가 골치가 아플 무렵.심강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늘 퇴근할 때 뭐 까먹은 거 없어?”까먹은 거?한유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에 심강열이 작은 힌트를 주었다.“퇴근할 때 말이야...”“회식 나오기 전에 급한 일은 다 처리했는데?”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톡톡.”“회식에 왜 난 안 불렀어? 회사 직원들 다 초대했으면서 왜 나한텐 아무 말도 안 했냐고. 게다가 내 카드로 계산한 거잖아.”결국 스스로 삐친 이유를 말한 심강열은 순간 현타가 오는 기분이었다.‘아, 내가 생각해도 진짜 치사하다.’심강열의 대답에 한유라가 미간을 찌푸렸다.‘아니, 왜 직원들 회식에 끼려고 해. 대표가 끼면 제대로 흉도 못 볼 거 아니야. 그럼 그게 회식이냐. 그냥 일이지...’하지만 대놓고 널 까려고 자리를 만든 거다라고 말할 순 없으니 좀 더 유연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당신은 매일 야근하느라 바쁘잖아. 직원들 여가 활동까지 신경 쓸 여유 없는 거 내가 아니까 특별히 신경 쓴 거지.”은근슬쩍 책임을 심강열에게로 미는 게 느껴지자 심강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핸들을 잡고 있던 큰 손이 한유라의 두 볼을 꾹 눌렀다.“그래서? 야근하느라 너랑 제대로 안 놀아줬다고 시위하는 거야?”차라리 그런 거라면 오늘 하루 이상하리만치 틱틱대던 그녀의 모습이 이해가 될 것만 같았다.제멋대로 한유라의 반항을 너무 바쁜 남편을 향한 투정으로 이해한 심강열은 어느새 화가 다 풀리고 말았다.‘나랑 그렇게 같이 있고 싶었어?’한편, 얼굴을 꾹 잡힌 한유라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아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고! 난 차라리 당신이 매일매일 야근했으면 좋겠어! 돈을 많이 벌어야 내가 더 펑펑 쓸 거 아니야!’하지만 한유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는 눈치 정도는 있었기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한유라의 얼
뜨거운 키스가 조금 더 깊은 스킨십으로 이어지려던 그때, 한유라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여기 주차장이야.”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은 심강열의 입술은 한유라의 얼굴과 목선을 가볍게 훑어지났다.“괜찮아...”뜨거운 욕망을 꾹꾹 참는 듯한 무겁게 잠긴 목소리에 한유라의 손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그래... 가끔은 색다른 것도... 나쁘진 않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피곤함과 취기의 더블 콤보에 한유라가 시트에 축 늘어졌다.아슬아슬 잠이 들려던 그때, 누군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고 잠시 후, 따뜻한 물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아, 따뜻하다.’눈앞에 휴가지의 바다가 펼쳐지는 듯해 한유라의 다리가 물장구를 치기 시작하고...이때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으이그, 좀 가만히 있지?”그리고 또 누군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어 몸을 깨끗하게 닦아준 뒤 산뜻함이 느껴지는 폭신한 곳에 뉘였다.‘음, 기분 좋아. 여긴 어디지? 모래사장인가?’이미 비몽사몽인 한유라가 제멋대로 침대 위를 굴러다니고 심강열의 탄탄한 팔이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려는 한유라의 허리를 덥썩 잡았다.그리고 곧 따뜻한 품에 안긴 한유라가 따뜻한 느낌의 바디워시 향을 만끽했다.‘하, 그냥 재우려고 했는데. 자꾸 유혹을 해온다 이거지?’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심강열이 반격을 시작했다.뜨거운 입술이 한유라의 몸 곳곳을 누비고 한유라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었다.‘아, 누구지? 아... 깡이구나. 아, 맞다. 나 이 사람이랑 결혼했었지...’그녀의 눈동자에 들어온 심강열의 눈동자는 이미 거친 욕망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한유라가 손을 뻗어 심강열의 탄탄한 가슴을 만졌다.‘마음에 들어...’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치고... 심강열이 피식 웃었다.“깼어? 네가 먼저 나 건드린 거야. 내일 뭐라고 하기 없기다?”그리고 한유라의 대답 따윈 필요없다는 듯 숨 막힐 듯한 키스가 이어졌다....잠시 후, 땀범벅이 된 두 사람이 침대에 축 늘어지고
한유라는 그런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심강열의 체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게 문제였다. 남자는 자극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평소였다면 자정 전에는 잠에 들었을 텐데 오늘 밤 그녀는 눈을 감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들은 새벽이 올 때까지 서로의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한편, 소은정은 꽤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전동하와 소찬식이 번갈아 가면서 그녀를 케어했고 출장이나 긴 회의 같은 일은 전부 소은해가 부담하게 되었다.집에서 너무 갑갑하다고 그녀가 항의해서 매일 3시간은 회사에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소은해에게는 거절할 자유가 없었다. 임시로 회사 운영을 맡게 되었지만 너무 많은 업무와 일정이 쌓여서 감당이 안 될 때도 많았다.어느 날, 그는 초대장 한 장을 들고 소은정의 사무실을 찾았다.“오후에 와인바에서 미팅이 하나 잡혔어. 새 프로젝트 관련 기업들이 모여서 하는 미팅인데 회사 고위 인원 중 한 명은 무조건 참석해야 해. 이런 일에는 네가 나서야지! 은정아, 부탁할게!”소은정은 미팅 장소를 확인하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한유라도 오늘 이 와인바에 간다고 했는데 마침 그녀를 만날 기회였다.“알았어. 내가 가지 뭐.”소은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유분방한 귀공자에서 요즘 따라 무척 진지해진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소은정은 조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었다.오늘 따라 그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조금 웃음이 나왔다.오후가 되자 소은정은 준비를 마치고 우연준과 함께 약속장소로 향했다.사실 소은정은 술을 많이 마셔야 하는 미팅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기에 예전이었다면 이런 일은 거의 소은호 몫이었다. 그래도 그녀에게 너무 낯선 곳이 아니라 다행이었다.미팅 장소인 더블레인 와인바는 오늘 미팅 인원 외에 다른 손님을 받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외제차들이 주차장에 육속 도착했고 안으로 들어서자 호화로운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소은정은 담담한 표정으로 와인바에 들어섰다. 좌석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전부
소은정은 재치 있게 곤란한 질문을 피해갔다.물론 사람들도 그녀의 성격을 알기에 개인 스케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전동하는 그녀의 외투를 받아 들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이런 배려가 고마웠지만 소은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말했다.“동하 씨가 여기 나오는 줄은 몰랐어요.”전동하가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미리 얘기 안 했으니 내 잘못이죠.”소은정은 웃으면서 좌석으로 다가갔고 전동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위해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한유라 씨는 저쪽에 있어요.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돼요.”그가 가리키는 쪽에 한유라가 여자들과 함께 포카를 치고 있었다. 들어오는 것을 봤을 텐데 포카에 정신이 팔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녀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자 소은정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래요. 이쪽은 동하 씨한테 맡길게요. 난 유라한테 좀 가볼게요.”사실 이 자리에 참석한 인원들 중에 유부남이면서 아내 대신 다른 여자를 파트너로 데려온 사람도 많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는 게 이 업계의 암묵적인 룰이었다.어차피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는 관심도 없고 기자도 아닌데 그런 일에 관심 가질 필요도 없었다.전동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갔다. 한유라의 옆에 앉았던 여자가 일어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은정 씨 빨리 와서 앉아요. 한유라 씨가 여기서 돈을 쓸어담고 있어요. 저는 감당이 안 되니까 은정 씨가 여기서 대신 게임 좀 해요. 저는 바람 좀 쐬러 나갔다 올게요.”소은정에게 자리를 비켜준 여자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머릿수나 채우려고 참석한 자리였고 지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재벌 사모님들과는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어차피 소은정이 도착했으니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빨리 자리를 내주는 게 그녀에게는 옳은 선택이었다.소은정은 웃으며 대범하게 자리에 앉았다.“좋아요. 돈 따면 우리 반반씩 나눠가져요.”여자는 생긋 웃으며 자리
사람들은 모두 침묵했고 소은정은 한유라와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여자가 역겹다고 하는 대상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여자는 자기관리를 잘하고 꽤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식석상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업계에서는 꽤 유명인이었다.손재은은 중견기업의 2세로 어릴 때부터 그리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지금 자리에 있는 재벌 사모님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었다.그녀는 소꿉친구와 결혼했는데 꽤 성공한 경영인인 구태정이었다.구태정은 뛰어난 경영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불과 몇 년 사이에 그의 회사는 IT업계에서 꽤 탄탄한 입지를 가진 기업으로 급성장했다.능력은 나무랄 것 없었는데 그에게는 꽤 골치 아픈 고질병이 있었다.그는 사생활이 문란한 것으로 유명했다. 손재은과 결혼 당시에는 유별난 순애보라며 순정남 이미지를 굳히고 아내와 함께 회사를 경영했다. 하지만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오르자 그는 아내에게 경영진에서 물러나 육아에 전념해 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했고 손재은은 그런 남편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기에 흔쾌히 동의했다.그들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안 좋은 스캔들이 터졌다. 누군가가 구태정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증거 사진을 손재은에게 보낸 것이다.그 뒤로 이 가정에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더 이상한 건 그러면서 이혼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공식석상이나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 구태정은 더 이상 여자 파트너를 대동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참석하기 시작했다. 손재은도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기에 사정을 모르는 대중은 예전 스캔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물론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당사자인 손재은과 구태정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그런데 갑작스러운 손재은의 발언에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어떤 여자는 그녀를 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정 씨는 카드 운도 좋네요! 포카드라니!”“아까 자리 비켜줬던 여자분 배 좀 아프겠는데요?”사람들은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싸해진 분위기를 무마했다.소은정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들에게 미소 짓고는 아까 자리를 비켜줬던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운은 내가 끌어왔으니까 잠깐만 치고 있어요. 난 전 대표님한테 좀 갔다 올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한유라도 그녀를 힐끗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도 갈래. 여기만 있으면 우리 집 쪼잔한 남자가 삐질 것 같아.”그녀는 다가가서 소은정의 팔짱을 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기분 나빠?”‘손재은 저 여자는 자기가 좀 불행하다고 쓸데없는 얘기나 꺼내고!’한유라는 다음에 다시 이런 자리가 있으면 손재은을 초대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소은정은 그런 친구를 힐끗 보고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꾸했다.“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아닌 척하지 마. 손재은 그 여자는 은근 자기 남편 디스하면서 박수혁 그 자식을 치켜세우잖아. 자기가 박수혁이랑 결혼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딴 쓰레기 걱정이나 하다니. 정말 웃겨.”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자기가 선택한 결혼이니 책임도 자기가 지는 거지.”“그건 맞아.”두 사람은 남자들이 모여 카드게임 하는 곳으로 갔다. 여자들 테이블보다는 이쪽 분위기가 더 유쾌했다.심강열과 전동하는 와인으로 수시로 목을 축이면서 뭔가 의논하고 있었다. 아마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전동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은정을 보자마자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소은정은 다가가서 그의 옆에 앉았다.전동하가 웃으며 물었다.“돈 좀 땄어요?”소은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가 가진 패를 들여다 보았다.전동하는 그녀가 보기 쉽게 살짝 몸을 비틀어 자리를 내주었다.맞은편에 앉은 임춘식은 화기
사람들도 이한석의 위치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기에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그를 맞아주었다.이한석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전보다는 확연히 다른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그는 대범하게 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소은정과 전동하에게 인사할 차례가 되자 그는 부담스럽지 않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소은정과 전동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임춘식이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이 대표, 요즘 회사가 많이 바빠요? 몇 번이나 만나자고 문자했는데 매몰차게 거절했잖아요.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이한석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질문에 대답했다.“임 대표님,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워낙 바쁘기도 했고 임 대표님이 밥 먹자고 부르면 당연히 나가야죠. 그런데 솔직히 해외 여행을 같이 가자는 건 좀 아니잖아요.”말문이 막힌 임춘식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이렇게 박수혁에 관한 주제는 자연스럽게 묻히게 되었다.심강열 옆에 앉은 한유라는 원래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라 엉덩이를 움찔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심강열이 힘으로 그녀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경고 섞인 말투였다.그는 한유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너무 진지한 자리가 아니었기에 누군가를 골려 주기에는 이만한 자리가 없었다.한유라는 몇 번이나 시도해도 소용이 없자 얌전히 그의 옆을 지켰다.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 그녀는 짜증이 치밀었다.다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는데 심강열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겼다.‘옆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나?’한유라는 이를 갈며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사고 안 칠 테니까 이거 좀 놔주면 안 돼? 은정이랑 대화 좀 하고 올게.”심강열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은정 씨는 지금 전 대표랑 같이 있잖아. 은정 씨가 당신처럼 장난꾸러기인 줄 알아? 이상한 핑계 대지 마.”한유라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소은정은 그녀의 불만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한유라가 심강열의 비서로 취직한 건 업무적인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심해그룹에서 인정받지 못해도 한유라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하지만 심강열이 적당한 인사발령을 내주지 않으니 다시 가문으로 돌아가 가업을 물려받을 수도 없었다.심해그룹에서 한동안 비서로 근무하다가 가문에서 운영하는 유한그룹으로 돌아가서 대표가 된다?유한그룹 직원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문제였다.그리고 한유라의 부모님을 설득하기엔 설득력도 부족했다.소은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그러면 강열 씨한테 너 혼자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건 어때?”어차피 업계에서는 잘나가는 회사의 대표가 여자친구를 띄워주기 위해 여자친구에게 프로젝트를 맡기고 뒤에서 도와주는 일도 비일비재했다.한유라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돌아가서 다시 잘 얘기해 보지 뭐!”그녀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그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한유라는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더 기다리다가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았다.조금 전 심강열이 임신 얘기를 꺼냈을 때도 불편했다.그와 아이를 가지는 게 불편한 건 아니었다.그녀는 소은정과 상황이 조금 달랐다. 회사에서 그녀의 발언권은 별로 많지 않았다.김현숙과 심강열은 그녀가 임신하면 바로 직장생활 그만하라고 할 것이 뻔했다.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아이 때문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소은정은 그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가서 전화를 받고 화장실로 향했다.그들이 대여한 대형 룸을 나와 화장실을 찾는데 옆방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소은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걸음을 재촉해서 그곳을 빠져 나왔다.‘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인데?’소은정이 지나간 뒤,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이한석은 공손한 자세로 자신을 등지고 선 남자의 눈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