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은 재치 있게 곤란한 질문을 피해갔다.물론 사람들도 그녀의 성격을 알기에 개인 스케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전동하는 그녀의 외투를 받아 들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이런 배려가 고마웠지만 소은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말했다.“동하 씨가 여기 나오는 줄은 몰랐어요.”전동하가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미리 얘기 안 했으니 내 잘못이죠.”소은정은 웃으면서 좌석으로 다가갔고 전동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위해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한유라 씨는 저쪽에 있어요.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돼요.”그가 가리키는 쪽에 한유라가 여자들과 함께 포카를 치고 있었다. 들어오는 것을 봤을 텐데 포카에 정신이 팔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녀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자 소은정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래요. 이쪽은 동하 씨한테 맡길게요. 난 유라한테 좀 가볼게요.”사실 이 자리에 참석한 인원들 중에 유부남이면서 아내 대신 다른 여자를 파트너로 데려온 사람도 많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는 게 이 업계의 암묵적인 룰이었다.어차피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는 관심도 없고 기자도 아닌데 그런 일에 관심 가질 필요도 없었다.전동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갔다. 한유라의 옆에 앉았던 여자가 일어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은정 씨 빨리 와서 앉아요. 한유라 씨가 여기서 돈을 쓸어담고 있어요. 저는 감당이 안 되니까 은정 씨가 여기서 대신 게임 좀 해요. 저는 바람 좀 쐬러 나갔다 올게요.”소은정에게 자리를 비켜준 여자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머릿수나 채우려고 참석한 자리였고 지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재벌 사모님들과는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어차피 소은정이 도착했으니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빨리 자리를 내주는 게 그녀에게는 옳은 선택이었다.소은정은 웃으며 대범하게 자리에 앉았다.“좋아요. 돈 따면 우리 반반씩 나눠가져요.”여자는 생긋 웃으며 자리
사람들은 모두 침묵했고 소은정은 한유라와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여자가 역겹다고 하는 대상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여자는 자기관리를 잘하고 꽤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식석상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업계에서는 꽤 유명인이었다.손재은은 중견기업의 2세로 어릴 때부터 그리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지금 자리에 있는 재벌 사모님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었다.그녀는 소꿉친구와 결혼했는데 꽤 성공한 경영인인 구태정이었다.구태정은 뛰어난 경영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불과 몇 년 사이에 그의 회사는 IT업계에서 꽤 탄탄한 입지를 가진 기업으로 급성장했다.능력은 나무랄 것 없었는데 그에게는 꽤 골치 아픈 고질병이 있었다.그는 사생활이 문란한 것으로 유명했다. 손재은과 결혼 당시에는 유별난 순애보라며 순정남 이미지를 굳히고 아내와 함께 회사를 경영했다. 하지만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오르자 그는 아내에게 경영진에서 물러나 육아에 전념해 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했고 손재은은 그런 남편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기에 흔쾌히 동의했다.그들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안 좋은 스캔들이 터졌다. 누군가가 구태정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증거 사진을 손재은에게 보낸 것이다.그 뒤로 이 가정에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더 이상한 건 그러면서 이혼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공식석상이나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 구태정은 더 이상 여자 파트너를 대동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참석하기 시작했다. 손재은도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기에 사정을 모르는 대중은 예전 스캔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물론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당사자인 손재은과 구태정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그런데 갑작스러운 손재은의 발언에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어떤 여자는 그녀를 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정 씨는 카드 운도 좋네요! 포카드라니!”“아까 자리 비켜줬던 여자분 배 좀 아프겠는데요?”사람들은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싸해진 분위기를 무마했다.소은정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들에게 미소 짓고는 아까 자리를 비켜줬던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운은 내가 끌어왔으니까 잠깐만 치고 있어요. 난 전 대표님한테 좀 갔다 올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한유라도 그녀를 힐끗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도 갈래. 여기만 있으면 우리 집 쪼잔한 남자가 삐질 것 같아.”그녀는 다가가서 소은정의 팔짱을 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기분 나빠?”‘손재은 저 여자는 자기가 좀 불행하다고 쓸데없는 얘기나 꺼내고!’한유라는 다음에 다시 이런 자리가 있으면 손재은을 초대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소은정은 그런 친구를 힐끗 보고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꾸했다.“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아닌 척하지 마. 손재은 그 여자는 은근 자기 남편 디스하면서 박수혁 그 자식을 치켜세우잖아. 자기가 박수혁이랑 결혼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딴 쓰레기 걱정이나 하다니. 정말 웃겨.”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자기가 선택한 결혼이니 책임도 자기가 지는 거지.”“그건 맞아.”두 사람은 남자들이 모여 카드게임 하는 곳으로 갔다. 여자들 테이블보다는 이쪽 분위기가 더 유쾌했다.심강열과 전동하는 와인으로 수시로 목을 축이면서 뭔가 의논하고 있었다. 아마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전동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은정을 보자마자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소은정은 다가가서 그의 옆에 앉았다.전동하가 웃으며 물었다.“돈 좀 땄어요?”소은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가 가진 패를 들여다 보았다.전동하는 그녀가 보기 쉽게 살짝 몸을 비틀어 자리를 내주었다.맞은편에 앉은 임춘식은 화기
사람들도 이한석의 위치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기에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그를 맞아주었다.이한석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전보다는 확연히 다른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그는 대범하게 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소은정과 전동하에게 인사할 차례가 되자 그는 부담스럽지 않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소은정과 전동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임춘식이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이 대표, 요즘 회사가 많이 바빠요? 몇 번이나 만나자고 문자했는데 매몰차게 거절했잖아요.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이한석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질문에 대답했다.“임 대표님,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워낙 바쁘기도 했고 임 대표님이 밥 먹자고 부르면 당연히 나가야죠. 그런데 솔직히 해외 여행을 같이 가자는 건 좀 아니잖아요.”말문이 막힌 임춘식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이렇게 박수혁에 관한 주제는 자연스럽게 묻히게 되었다.심강열 옆에 앉은 한유라는 원래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라 엉덩이를 움찔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심강열이 힘으로 그녀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경고 섞인 말투였다.그는 한유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너무 진지한 자리가 아니었기에 누군가를 골려 주기에는 이만한 자리가 없었다.한유라는 몇 번이나 시도해도 소용이 없자 얌전히 그의 옆을 지켰다.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 그녀는 짜증이 치밀었다.다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는데 심강열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겼다.‘옆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나?’한유라는 이를 갈며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사고 안 칠 테니까 이거 좀 놔주면 안 돼? 은정이랑 대화 좀 하고 올게.”심강열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은정 씨는 지금 전 대표랑 같이 있잖아. 은정 씨가 당신처럼 장난꾸러기인 줄 알아? 이상한 핑계 대지 마.”한유라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소은정은 그녀의 불만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한유라가 심강열의 비서로 취직한 건 업무적인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심해그룹에서 인정받지 못해도 한유라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하지만 심강열이 적당한 인사발령을 내주지 않으니 다시 가문으로 돌아가 가업을 물려받을 수도 없었다.심해그룹에서 한동안 비서로 근무하다가 가문에서 운영하는 유한그룹으로 돌아가서 대표가 된다?유한그룹 직원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문제였다.그리고 한유라의 부모님을 설득하기엔 설득력도 부족했다.소은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그러면 강열 씨한테 너 혼자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건 어때?”어차피 업계에서는 잘나가는 회사의 대표가 여자친구를 띄워주기 위해 여자친구에게 프로젝트를 맡기고 뒤에서 도와주는 일도 비일비재했다.한유라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돌아가서 다시 잘 얘기해 보지 뭐!”그녀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그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한유라는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더 기다리다가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았다.조금 전 심강열이 임신 얘기를 꺼냈을 때도 불편했다.그와 아이를 가지는 게 불편한 건 아니었다.그녀는 소은정과 상황이 조금 달랐다. 회사에서 그녀의 발언권은 별로 많지 않았다.김현숙과 심강열은 그녀가 임신하면 바로 직장생활 그만하라고 할 것이 뻔했다.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아이 때문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소은정은 그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가서 전화를 받고 화장실로 향했다.그들이 대여한 대형 룸을 나와 화장실을 찾는데 옆방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소은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걸음을 재촉해서 그곳을 빠져 나왔다.‘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인데?’소은정이 지나간 뒤,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이한석은 공손한 자세로 자신을 등지고 선 남자의 눈치를
박수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다시 폈다.조금 전 문틈을 통해 어렴풋이 보았던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이제는 남이 되어버린 사람.그만을 향해 웃어주던 여자가 이제는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되었다.그리고 그에게는 만류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그는 남들이 잠든 밤에 몰래 그녀를 그리워하면서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그건 오로지 그에게 속한 시간이었다.한편, 미팅은 저녁 때가 되어서 끝이 났다.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줄을 지어 와인바를 나섰다.전동하는 임춘식과 인수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았고 소은정은 옆에서 조용히 그들을 기다렸다.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졸음이 몰려왔다.정신이 몽롱해진 사이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는 것이 느껴졌다.그녀는 눈을 뜨고 자신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이제 갈까요? 돌아가서 쉬어요.”소은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드디어 끝났네요.”사실 그녀는 얼굴만 내밀었고 업무 관련 담화는 전부 전동하가 진행했다.그녀가 관심 있어하는 프로젝트 얘기가 나오면 그녀가 일부러 언질을 줄 필요도 없이 전동하에게 눈길만 보내면 그가 알아서 적극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었고 이 부분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전동하가 다가와서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자 소은정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밖으로 나가자 전동하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이제 출발할게요.”소은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많이 피곤할 것을 알기에 전동하도 말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구석진 곳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이었지만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그를 따라 밖으로 나온 이한석은 외투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대표님, 비행기 시간이 곧 다가오는데 바로 공항으로 출발하실 거죠?”박수혁은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참이
정신을 차린 심강열은 미간을 마사지하며 말했다.“기분 좀 나아졌어?”한유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공들여서 피부관리를 했더니 아까보다는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하지만 굳이 야심한 밤에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그녀가 뒤돌아서는데 심강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한유라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당신은 피곤하지도 않아?”심강열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치켜올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책임질 자신 없으면 자극하지 마.”한유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물었다.“나랑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은 거야?”심강열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오늘 기분 나쁜 일 있었어?”한유라는 눈을 깜빡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아니. 그런 거 없는데?”“거짓말하지 마. 우리 사이에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할 얘기 있으면 솔직하게 얘기해.”말은 그렇게 했지만 화가 난 말투는 아니었다.많이 피곤하지만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한유라는 시선을 떨구고 잠시 침묵하다가 진지한 눈빛으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조희찬 씨도 본사를 떠났는데 나는 언제 본사에서 내보내 줄 거야?”그 말에 심강열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디로 가고 싶은데?”한유라는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심해그룹 안주인이 평생 당신 비서로 살 수는 없잖아? 본사에 출근하기로 결정한 것도 일개 비서에 만족하려고 온 게 아니야. 어떻게 생각해?”심강열은 잠시 침묵하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생각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비서 일이 지겨워?”“지겨운 건 아니야. 그냥 지금 위치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서 배운 경험으로 내가 유한그룹을 물려받기에는 부족해. 당
심강열은 턱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은 뒤, 어깨를 으쓱했다.“뭐라 반박할 수가 없네. 알았어. 내가 좀 소홀했네. 당신이 그렇게까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 당신이 나보다 낫네.”한유라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심강열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어떤 위치가 당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해?”가장 중요한 문제였다.한유라는 잠시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기획본부장이나 이사장 정도?”그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심강열은 별로 놀라거나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침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렵게 용기를 냈던 한유라에게는 다행이었다.그가 그녀의 요구를 너무 지나치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그는 한참 고민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프로젝트를 직접 맡아서 진행하고 싶어?”별로 내키지 않은 말투였다.그녀가 과거 유한그룹에서 맡았던 프로젝트는 부모님 도움을 받았거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게 더 많았다. 실질적으로 큰 프로젝트를 맡기에는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했다.하지만 한유라는 억울했다.남자가 자신을 얕보는 것 같아서 불쾌하기도 했다.한유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안 돼?”심강열은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그는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자. 마침 기획실에 꼴 보기 싫은 놈 한 명이 있었는데 나도 참을 만큼 참았거든. 당신은 기획실장으로 취임해. 내일 임원회의에서 발표하도록 할게.”한유라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렇게 쉬운 일이었다고?이렇게 쉽게 동의한다고?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냥 찔러본 말이었는데 바로 기획실장으로 취임하라고?”사실 그녀도 자신의 능력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부러 과장해서 말한 부분이 있었다.유한그룹에서 기획실장을 맡으라고 했다면 어차피 부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