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우연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한석의 시선은 오직 소은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 대표님... 이게 지금...”‘저희 대표님은 지금 은정 씨가 죽은 줄 알고 계신다고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우연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이 비서님, 지금 저희 대표님께서 중요한 대화 중이시라... 저랑 얘기하시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한편, 소은정은 이한석의 집요한 시선을 애써 피하며 윤 화백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평생 그림만 그려온 윤화백은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는 백지 상태였다.이미 세계 톱 화가인 윤 화백에게 돈 버는 일은 그동안 굉장히 쉬웠었다.예술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법, 오직 그의 그림이라는 이유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려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으니까.하지만 윤 화백의 연로한 아버지가 사업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회사의 중심축이 사라지게 되었다.아버지의 평생 정성을 들여 키운 회사가 이사들 손에 분해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던 윤 화백은 결국 팔자에도 없는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다행히 진짜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그저 꼭두각시로서 사람들 앞에 서는 역할만 하면 되긴 했지만 갑자기 바뀐 삶의 패턴에 윤 화백은 나름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윤 화백의 얘기를 듣고 있던 소은정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솔직히 선생님 나이도 적진 않은데... 예순 넘어서 경영이 웬말이에요.”“이 자식아. 그래도 난 젊었을 때 실컷 즐겼잖냐.”윤 화백의 말에 대충 눈을 흘기던 소은정이 한쪽 구석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한석과 우연준을 힐끗 쳐다보았다.그 시선을 느낀 건지 하필 이한석 역시 고개를 돌렸고 그 날카로운 눈빛에 소은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아니야. 날 보는 게 아니야. 좀 더 뒤쪽을...’왠지 불안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 윤 화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 저 사람은 내 그림을 구매했던 사업가잖아? 아직도 너 좋다고 쫓아다니는 거니?
솔직히 이한석도 박수혁의 결정이 딱히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다.복수... 이미 죽은 판에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그 복수는 도대체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죽은 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산 자의 마지막 발버둥일까?‘하지만 이젠 대표님이 뭐라고 하셔도 은정 씨는 마음을 돌리지 않으실 거야.’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이가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다는 사실에 이한석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대표님은 도혁의 제안을 왜 거절하신 걸까? 은정 씨를 그렇게 사랑하시면서. 그런 범죄자들이 정말 약속을 지킬 거라 생각하신 건가? 분명 안진을 동남아 공항까지 데려다줬으면서 왜 다시 생각을 바꾸신 걸까? 대표님에 대한 은정 씨의 무게와 도혁에 대한 안진의 무게가 같을 거라 생각하신 걸까?’이번 일을 통해 박수혁도 아마 큰 교훈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이 세상에는 장사가 아닌 거래도 많으며 선택지가 없는 상황도 수없이 많다는 걸 말이다.그 뒤로 박수혁은 각성이라도 한 듯 미친듯이 복수를 이어갔고 복수를 마친 뒤에는 폭발이 일어났던 곳에서 가슴이 터져라 오열했으며 결국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한 얼굴로 귀국했다.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은 박수혁의 삶의 의지를 완전히 없애버렸다.그런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이한석은 한 초대장에서 SC그룹의 이름을 발견하고 박수혁에게 전했었다.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으면 싶다는 마음에서였다.그런데 못 이기는 척 온 자리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소은정을 만나게 됐을 줄이야. 박수혁도, 이한석도 놀라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며칠 사이에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박수혁은 삐쩍 마른 모습이었다.누가 보면 저승 문턱에서 돌아온 게 소은정이 아니라 박수혁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겨우 발걸음을 옮긴 박수혁의 눈동자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후회, 놀라움, 기쁨...하지만 벅찬 그와 달리 소은정의 반응은 무덤덤하기만 했다.그저 낯선 이를 바라보는 것 같은 무표정이 박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윤 화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뭐 일적으로 너한테 다시 연락할 일이 있을까? 나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그냥 쉬고 싶은 마음뿐이야.”그의 말에 싱긋 웃던 소은정이 돌아섰지만 성큼성큼 다가온 박수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가지 마. 제발...”애원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고개를 돌린 소은정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이거 놔.”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건지 손에 꽉 주었던 힘이 스르륵 풀렸다.“은정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이 입술 사이에서 소은정의 이름만 흘러나왔다.‘이렇게 보낼 순 없어. 뭐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는 거 알아. 그래도 무슨 해명이라도 하고 싶어... 널 향한 내 사랑이 그냥 가식이었다고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는데... 너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가 심했다는 거 알아. 그래도...’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수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하지만 소은정은 이 상황 자체가 짜증 난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이때 우연준이 다시 다가섰다.“저기... 저희 대표님 지금 컨디션이 완벽히 정상은 아니십니다. 어서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셔야 해요. 부탁드리겠습니다.”부탁이라는 단어와 달리 우연준의 말투는 강경했다.그 동안 소은정을 곁에 모시며 우연준이 느낀 소은정은 쿨한 척 하지만 원한관계에 있어선 한없이 쪼잔해질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박수혁과 엮일 가능성은 0%, 그러니 우연준 입장에서도 더 이상 형식적인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우연준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은 더 다급해졌다.“다쳤어?”하지만 그 초조함마저도 소은정은 웃길 따름이었다.“그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인데 뭐. 다친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박수혁의 심장을 난도질했다.곧이어 박수혁의 입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그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미안해...”
파티장 밖.어느새 차에 탄 소은정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노을이 먹구름에 가리워져 거무튀튀한 하늘, 그녀의 기분처럼 우중충했다.부랴부랴 다시 차에 탄 우연준이 뒷좌석을 힐끗 바라보았다.“병원으로 갈까요?”시간을 확인하던 소은정이 대답했다.“학교로 가죠. 마이크 픽업하고 병원으로 가요.”이에 우연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여느때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우연준이 다시 조심스레 소은정의 눈치를 살폈다.‘아무렇지 않은 척하시지만 얼마나 짜증이 나시겠어. 내 실수야. 애초에 초대장 따위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이렇게 각자의 생각을 가슴에 품은 채 차는 마이크의 학교 앞에 도착했다.비록 기숙학교였지만 전동하가 의식을 회복한 뒤로는 매일 병원으로 드나들고 있는 마이크였다.비록 전동하의 신경은 온통 소은정에게 쏠려있느라 마이크와는 딱히 대화도 나눌 틈이 없었지만 하루가 달리 좋아지는 모습에 마이크도 꽤 기쁜 모양이었다.마이크의 안전이 걱정되었던 소은정이 경호원을 붙여줄까 묻기도 했었지만 마이크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지금 그를 케어하는 경호원, 시터는 워낙 마이크의 성격을 잘 맞춰주는 사람들이라 가끔씩 몰래 나가서 노는 게 가능한 거지... 새로운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면 꼼짝없이 새장 안에 갇힌 신세가 되어버릴 것이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마이크는 하교 시간을 맞추어 교문을 나섰다.깡총깡총 뛰어나온 마이크는 우연준, 그리고 그 뒤에 세운 차를 발견하고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역시나 마이크를 발견하고 차에서 내린 소은정이 싱긋 웃었다.“오늘 학교는 어땠어? 즐거웠어?”“그럼요! 우리 학교에서 내가 공부 제일 잘해요! 나이는 내가 가장 어리지만.”기회를 잡았다는 듯 바로 자기 자랑을 하는 모습에 소은정이 밤톨 같은 머리를 쓰다듬었다.“가자.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이에 마이크가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우리 둘만 가는 거예요?”잠시 후. 패스트푸드점
마이크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러니까요. 아빠는 햄버거 절대 안 사주거든요. 두고 봐요. 이제 어른 되면 내가 직접 패스트푸드 가게 차릴 거예요! 시간이 더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아이만이 할 수 있는 원대한 꿈 발표에 우연준이 소리없이 웃음을 터트렸다.‘전 대표님이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네. 행여나 아시면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시겠어.’“사업하려고? 아빠 의견도 묻는 게 좋지 않을까? 사업적으로는 아빠가 선배잖아.”또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던 마이크가 소은정의 얼굴을 잡혔다.“누나,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요?”정곡을 찔린 소은정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최성문과 우연준은 눈치껏 콜라를 마시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아까부터 기분 안 좋았잖아요. 아빠가 누나 화나게 만든거죠? 누나,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성인 되면 아빠는 바로 차버리는 거예요. 내가 아빠보다 더 잘해 줄게요.”천진난만한 마이크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소은정이 대답했다.“아빠 때문 아니야. 그냥...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거든.”잠깐 멈칫하던 소은정이 말을 이어갔다.“마이크는? 마이크는 싫어하는 사람 있어?”그녀의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던 마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다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저번에 날 괴롭혔던 형아도, 형 편만 들어주던 선생님도 싫어요. 그런데...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그냥 잊어버리려고요. 이제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괜히 미워해 봤자 내 기분만 나빠지잖아요.”기특한 마이크의 말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잊어야지.”“어른들은 고민이 더 많겠죠? 그래도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마이크의 조언에 조금 마음이 편해진 소은정이 다시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먹었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달콤한 맛이었다.잠시 후, 거하게 식사를 마친 마이크는 소은정과 함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병실에서 영어로 된 책을 읽던 전동하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이렇게 빨리...”당연히 소은정인 줄 알고 활짝 웃던 전동하는 그
“네.”짧게 대답한 소은정이 병실을 나서고 어느새 전동하, 마이크 두 부자만 남게 되었다.한편, 전동하의 말에 마이크 역시 죄책감이 밀려왔다.쪼르르 전동하 곁으로 다가간 마이크가 먼저 아빠의 손을 잡았다.“아빠, 얼른 나아서 우리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평소에 정크푸드를 먹는 걸 제한하긴 했지만 전동하는 그래도 아이들 입맛에 맞추어 나름 융통성있는 아버지였다.그런 아빠를 속였다는 생각에 방금 전 맛있게 먹은 햄버거가 속이 턱 걸린 듯했다.왠지 전동하의 신뢰를 져버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눈시울까지 붉히는 마이크의 모습에 전동하도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아빠가 자고 있을 때 마이크도 걱정 많이 했다면서?”전동하의 질문에 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마이크, 아빠는 널 기르면서 최선을 다했어. 아빠가 못해 주는 부분은 수잔이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빠한테 진짜 가족은 마이크뿐이야.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것도 마이크고. 아빠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평소 투닥거리는 게 일상이었던 부자 사이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들으니 눈에 고였던 눈물이 결국 또르르 흘러내렸다.한참을 망설이던 마이크가 결국 솔직하게 모든 걸 내뱉었다.“그게 오늘... 누나랑 패스트푸드 가게에 갔었어요. 누나는 잘못한 거 없어요. 내가 가고 싶다고 떼쓴 거거든요.”귀여운 아이의 모습에 전동하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한편 마이크는 평소 혼날 때 벌을 받았던 것처럼 두 팔을 들었다.“아빠, 다신 거짓말 안 할게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에 전동하는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우리 마이크는 착한 아이니까 약속은 꼭 지키겠지? 하지만...”전동하가 말꼬리를 늘어트리자 마이크 역시 급 긴장하기 시작했다.이에 전동하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나랑 예쁜 누나 무슨 사이인 거 알지?”전동하의 질문에 마이크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하지만 전동하는 말을 이어갔다.“아빠
어찌나 속상했으면 어느새 눈시울까지 붉어진 마이크가 또 뭔가를 말하려던 그때, 전동하가 위압적인 눈빛으로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여튼 명심해. 앞으론 누나 아니고 이모야. 뭐 언젠가는 더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기대하고.”소은정과 결혼한 뒤의 아름다운 미래가 눈앞에 선한 듯 전동하의 눈동자에 행복이 가득 담겼다.하지만 마이크는 그의 말이 결코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었다.입술을 깨문 마이크가 불쌍한 눈으로 전동하를 올려다 보았다.“예쁜 누나는 동의했어요? 아빠랑 결혼해 준대요?”“그럼. 아빠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하잖아. 그러니까 결혼할 준비도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비록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안 했다며 전동하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마지막 결정타에 마이크는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커다란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려던 그때.전동하의 엄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남자는 그렇게 쉽게 우는 거 아니야. 울고 싶으면 몰래 울어.”‘은정 씨가 보면 속상해 할 테니까.’물론 양심상 마지막 말은 하지 않은 전동하였다.역시나 전동하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도시락을 든 소은정이 병실로 들어왔다.“아저씨가 디저트도 만드셨네요. 마침 마이크도 있고 잘됐다.”소은정은 환하게 웃었지만 마이크는 별다른 대꾸없이 고개를 홱 숙였다.하지만 별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소은정은 바로 전동하에게 도시락을 건넸다.도시락 가방 안에 든 그릇들을 스윽 훑어보던 전동하가 그 사이에서 디저트가 담긴 락앤락을 꺼내 소은정에게 건넸다.건네받은 소은정은 당연하게도 마이크에게로 향했다.그제야 이상한 점을 눈치챈 소은정이 마이크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평소엔 디저트라면 눈에 불을 켜던 애가 오늘은 왜 가만히 있지? 내가 없던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당황한 소은정이 무슨 일이냐고 묻던 그때 전동하가 옆에서 헛기침을 시작했다.“큼큼.”그 소리에 움찔하던 마이크가 도시락통을 받아들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고맙습니다. 예
전동하가 식사를 하는 사이 소은정은 그 옆에서 파일을 확인했다.그녀가 점점 건강을 회복하자 소은호는 망설임 없이 그 동안 밀린 일을 던져주었고 그 덕에 병원에서도 노트북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여유롭게 식사를 마치고 독서를 하는 전동하를 바라보던 소은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부럽다... 회사 걱정은 하나도 안 하는 것 같네.’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산책이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떠올린 소은정은 전동하와 함께 정원 산책을 나섰다.워낙 아늑하게 꾸며진 곳이라 그 순간만큼은 병원이 아니라 경치 좋은 공원으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전동하는 천천히 움직이고 소은정은 옆에 있는 그네에 앉아 몸을 흔들거렸다.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싱긋 웃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근처의 꽃내음마저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듯했다.너무나 행복해서일까? 그 누구도 그들의 뒤편에서 풍겨오는 스산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다.정원 울타리 밖, 박수혁이 빛 한 줄기 없는 혼탁한 눈동자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서로를 향해 웃을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지만 왠지 모르게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다.정말 마조히스트 성향을 가진 건지 아니면 이대로 물러나면 정말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인지 혹은 그 알량한 승부욕 때문에 자리를 지켰는지 박수혁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다.주먹을 꽉 쥔 채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눈으로 앞쪽을 주시하고 있는 박수혁은 혼자만 엄동설한의 설산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안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박수혁은 처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그 실수는 이젠 돌이킬 수 없는 큰 간격을 만들어냈다.언젠가는 다시 그에게 돌아오게 될 거란 막연한 요행심리는 결국 완벽하게 부서졌다.이미 끝난 인연이었지만 어떻게든 다시 이어보기 위해 죽을둥 살둥 애를 썼지만...떠난 버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흘러간 물을 다시 거스를 수 없 듯이 이미 떠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