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소은정은 입을 앙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지금 반항해 봤자 불난 집에 기름 퍼붓는 격.그녀는 이런 순간 이성을 잃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다른 한 명이 느끼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훑어보았다.“형님, 이 계집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쓸만한 게 애들한테 던져주는 게 어떨까요?”순간 남자들의 눈동자에 욕정이 서리고 소은정의 등줄기가 차갑게 식었다.꼼짝없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 운명을 맡겨야만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끔찍했다.‘차라리... 차라리 죽고 싶어.’하지만 그녀를 납치한 남자가 픽 웃었다.“건드리지 마. 저 아이는 진이를 바꿀 유일한 카드야. 곱게 놔둬.”그의 말에 부하가 눈앞에 다가온 음식을 빼앗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뭐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그제야 소은정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 비실비실하게 생겨선... 누가 봐도 우리 아가씨가 훨씬 더 예쁘시구만. 박수혁 그 자식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그리고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거칠게 차에서 끌어내렸다.사지가 다 묶인 소은정은 그 어떤 방어 동작도 취하지 못한 채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이렇게 얼굴이 바닥에 닿는구나라고 생각하던 그때, 조금 말랐지만 탄탄한 가슴팍이 그녀를 맞이했다.벽에 부딪힌 듯한 고통에 소은정이 눈을 찌푸리던 그때 남자는 소은정이 뼈를 다치지 않은 걸 발견하고 바로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끌어내린 남자를 노려보았다.“다치지 않게 잘 모셔두라고 했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급격히 음산해진 남자의 목소리에 부하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죄송합니다. 저 계집이 아가씨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이에 남자가 부하를 노려보았다.“잊지 마. 진이가 아직 저놈들 손에 잡혀있어. 진이를 다시 되찾을 때까진 곱게 모셔둬. 그리고 나서 저딴 계집 하나 괴롭히는 건 일도 아니니까.”한편, 남자가 부하를 꾸짖는 사이 소은정은 주위를 훑어보았다.너무나도 평범
소은정의 반응에 남자들은 당황한 건지 잠깐 동안의 적막이 이어졌다.그 적막을 깨트린 건 바로 남자의 헛웃음이었다.“하, 이렇게 매정한 여자인 줄은 몰랐네?”“말 그대로야. 이미 나랑은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 때문에 내가 이런 꼴 당할 이유 없어.”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지금 박수혁은 무섭고 난 만만하다 이거야? 젠장...’말문이 막힌 건지 흠칫하던 남자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말했잖아. 그냥 운이 나빴던 거라고 생각하라고.”‘널 잡아서 박수혁 그 자식을 협박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 진이가 넘긴 정보가 정확하다면 박수혁 그 자식의 약점이 바로 소은정일 테니까.’소은정이 뭔가 더 말하려던 그때, 남자가 고개를 홱 돌렸다.“박수혁 아버지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는 들었지? 그 꼴 나고 싶지 않으면 고분고분해지는 게 좋을 거야.”남자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섬뜩함은 숨길 수 없었다.이에 소은정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박봉원의 팔 다리가 잘렸다는 건 이미 그녀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무기 밀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범죄도 스스럼없이 저지를 게 분명할 터.‘저 자식들 눈엔 인간이 그냥 통나무쯤으로 보이겠지. 그러니까 제발... 누구라도 와서 날 좀 구해 줘.’그렇게 소은정은 남자들의 손에 이끌려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당장 폐차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낡은 차에 몸을 실은 소은정은 풍겨오는 악취에 미간을 찌푸렸다.창문은 천으로 가려져있어 바깥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아니, 설령 가리지 않았다 해도 처음 오는 곳인데다 어두운 밤이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을 것이다.뒷좌석에 앉은 소은정의 왼쪽에는 그녀를 납치한 “형님”이 오른쪽에는 그녀를 가장 무섭게 노려봤던 남자가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 끼인 채 덜컹거리는 차에 타니 다시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래도 해산물 썩은내가 진동하는 컨테이너보다는 낫다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주머니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꺼냈다.칼
소은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안진 그 여자는 여전히 국정원에 잡혀있는 걸까? 가족들은... 동하 씨는 내가 누구한테 납치당했는지 눈치나 채고 있을까...’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약 20분 정도가 흐르고 차가 드디어 움직임을 멈추었다.곧이어 남자들이 거칠게 소은정을 차에서 끌어내렸다.“형님”의 명령은 그저 팔다리가 부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한 것뿐, 어찌 되었든 이곳에 손님으로 초대받은 건 아니니 굳이 친절하게 대할 필요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그리고 그녀를 맞이한 건 후덥지근한 공기와 무성한 말림이었다.‘국경 근처라고 했지... 지금 날 데리고 몰래 국경을 넘어 동남아로 넘어가려는 거야? 이 풀숲을 넘어서?’소은정은 이 기막힌 상황에 눈물 조차 나오지 않았다.‘부잣집에서 태어나서 재산이나 물려받으며 곱게 살 줄 알았는데... 왜 나한테는 이런 일만 생기는 걸까? 이렇게 자신감 있게 움직이는 걸 보니 주위에 도움을 청할 경찰이나 군인 따위도 있을 리가 없을 테고...’한편, 소은정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남자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올랐다.그리고 곧이어 먼저 풀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뭐해. 움직여.”그녀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등을 툭 건드리고 약 기운에 서 있는 것마저 힘겨웠던 소은정은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윽...”소은정이 이를 꽉 물었다.엉망진창인 몸, 절망적인 마음이 더해져 일어날 용기도 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어쩐지 곱게 풀어주더라니... 자기들 힘드니까 내가 알아서 걸으라는 거였어.’기분 나쁜 습기가 호흡을 따라 소은정의 기도로 흘러들었다.‘어떡하지...’이때 부하가 짜증스레 욕설을 내뱉었다.대충 안진보다 훨씬 더 약하다는 부하의 말을 듣고 있던 소은정이 몰래 그를 노려보았다.‘너희들 아가씨 어깨 좀 봐봐. 당연히 튼튼하겠지.’이때 앞장섰던 남자가 다시 돌아오더니 경멸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못 걷겠어?”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든 소은정이 대답했다.“몰라서 물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들이 소은정의 팔과 목을 스쳤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듯 그저 발걸음을 옮겼다.남자가 선두에 선 소은정의 방향을 이끌고 이동 내내 다른 부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고프고 목도 마르고 지치기 한 소은정도 마찬가지였다.한 발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지만 소은정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여기서 쓰러져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저 짐승 같은 자식들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후덥지근한 공기가 소은정의 폐를 찔렀지만 그녀는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사지를 움직였다.약15분간 걸었을까? 남자가 씩 웃기 시작했다.“도착했어.”울창한 밀림이 걷히고 텅 빈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허? 생각보다 가깝네?”소은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아마 이 자식들만 알고 있는 지름길이겠지. 여기서 벗어나기만 해봐. 이 길부터 바로 막아버리라고 할 거야!’이때 남자가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았다.“허튼 생각하지 마. 이 길은 나만 알아. 10번, 아니 100번을 걸어도 길을 잃게 될걸.”소은정이 마른 입술에 침을 살짝 발랐다.“허튼 생각한 적 없어.”자기 아지트에 도착했다는 생각에서인지 남자의 표정이 훨씬 풀어졌다.그리고 그들을 데리러 온 차량이 다가왔다.밀림과 어울리지 않는 고가 외제차의 자태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허, 범죄로 돈을 아주 쓸어담으셨나 보지? 마음에 안 들어.’먼저 차에 탄 남자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리둥절한 표정의 소은정을 향해 말했다.“타.”굳은 표정의 소은정이 차에 몸을 싣고 곧 차량은 움직이기 시작했다.차에 타자마자 남자는 좌석에 기대 눈을 감았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게다가 저 여자까지... 저희 손의 카드가 또 한 장 늘어났네요.”기사의 아부에 남자는 껄껄 웃었지만 표정은 곧 다시 어두워졌다.“그럼 뭐 해. 진이는 아직인데.”솔직히 남자는 안진과 박수혁의 결혼을 통해 한국 시장으로 진출할 예정이었다. 그런 그에
소은정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오랜 시간 걸은 데다 약기운까지 더해져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이 자식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약을 먹인 거야... 왜 아직도 이렇게 힘든 거냐고...’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몰래 허벅지까지 꼬집었지만 육체의 고단함은 역시 정신력을 이기지 못했고 소은정은 결국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소은정이 잠든 걸 확인한 남자의 표정이 다시 매섭게 변하고 백미러로 기사에게 눈치를 주었다.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운전기사가 차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소은정은 덜컹거리는 길 때문에 부스스 눈을 떴다.다시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긴 악몽일 뿐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구불구불한 길, 무성한 풀숲에는 허리까지 오는 풀들이 야만스럽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건물은커녕 초가집 하나 보이지 않는 주위 풍경에 소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여긴 또 어디야?’“깼어?”그녀의 옆에 앉은 남자가 피식 웃었다.“이럴 때 보면 육체란 참 성실한 것 같아.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오는 걸 보면 말이야.”비아냥거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자는 것 말고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소은정의 당당한 목소리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하긴.”고개를 돌린 소은정은 주위 풍경을 살피기 시작했지만 어차피 이제 그런 것따위 기억해 봤자 탈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서인지 남자는 그런 그녀를 막지도 않았다.차량은 울퉁불퉁한 길을 빠르게 달려 밀림 사이에 덩그러니 지어진 건물 앞에 멈춰섰다.금방이라도 원주민이 고개를 내밀 것만 같은 독특한 스타일의 건물이었다.얼핏 보기엔 소박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정교한 인테리어 소품이 센스있게 배치되어 있었고 나무 본연의 향기가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소은정이 주위를 돌아보는 동안 집 안에서 누군가 달려나왔다.“형님, 오셨습니까?”운전기사가 좌석 문을 열어주
건물로 들어가니 새로운 별천지가 펼쳐졌다.현대의 모던함과 옛것의 멋스러움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이 집은 무시무시한 군수물자 상인이 사는 곳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늑했고 우아했다.남자의 정체를 몰랐다면 은퇴하고 귀농한 대학교 교수나 학자의 집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이때 늘씬한 몸매의 여자가 다가오고 은은한 향기가 소은정의 코끝을 자극했다.꽤 예쁘장하게 생긴 동남아 스타일의 미인이었다.“자기야, 왔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여자가 요염한 미소와 함께 남자의 품에 안기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엉덩이를 두드린 남자가 여자와 기나긴 키스를 나누었다.진한 스킨십을 마친 여자는 남자와 한몸이라도 되려는 듯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한편,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애정행각에 소은정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하, 지금 멀쩡한 사람 납치해 놓고 지들은 물고 빨고 난리 부르스를 치고 있고만...’남자와 여자는 그 뒤에도 한참을 서로에게 집중한 뒤에야 소은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만 훔쳐보지?”남자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소은정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날 죽이고 싶은 거였으면 굳이 그 개고생 하면서 여기까지 끌고 올 필요까진 없었을 테고... 어쨌든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건데... 그럼 말해 봐. 조건이 뭔지. 내가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지.”눈앞의 남자가 정말 안진의 아버지 도혁이 맞는지는 여전히 100%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그들의 진짜 타깃은 그녀가 아닌 박수혁이라는 걸 말이다.게다가 괜히 한국에서 먼저 협박 전화를 걸었다가 출국을 못하는 상황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돼서인지 그 사이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았다.‘짜증 나게 치밀한 놈들...’소은정의 질문에 남자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의 번호를 클릭했다.약 5초간의 정적 후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어딘가 피곤함이 묻어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목소를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소은정이 비틀거렸다.‘박수혁? 역시 박수혁 그
차가운 눈으로 소은정을 노려본 남자가 드디어 박수혁 앞에 존재감을 드러냈다.“박 대표, 아주 기분 좋은 만남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쪽이 다 망쳤습니다. 어때요? 좀 후회되십니까?”‘그러게 고분고분 우리 안진이랑 약혼식 올렸으면 지금쯤 사이좋게 식사를 하고 있을 텐데 말이야...’“도혁... 원하는 게 뭐야. 말해.”이에 남자가 다시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았다.“우리 진이한테서 들은 거랑 많이 다른데요? 진이 말로는 박 대표가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소은정 이 여자한테만큼은 끔찍한 걸 보니.”도혁의 도발에도 박수혁은 화를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저 자식이 은정이를 인질로 잡고 있어. 참아... 참아야 해.’“그 여자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 조금이라도 다치면... 당신 딸 시체 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니까.”하지만 박수혁의 분노는 일말의 이성 따위로 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여전히 날카롭기만 했다.박수혁의 말에 남자의 표정도 확 어두워졌다.“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그저 통화일 뿐인데도 두 사람의 기싸움은 그야말로 용호상박이었다.스피커폰으로 이 모든 걸 듣고 있는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이 자식이... 지금 당장 무릎이라도 꿇어도 모자랄 판에 도발을 하고 있어?’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유리한 상황이라는 걸 인지한 듯 곧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말을 마친 남자가 다시 휴대폰을 소은정에게 건넸다.“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다시 휴대폰을 받은 소은정은 혹시 눈물이라도 터져나올까 이를 악물었다.“은정아, 걱정하지 마. 내가 곧 갈 테니까.”평소와 다른 따뜻한 목소리에 울지 않겠다는 소은정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른 사람이었다.“박수혁...”지금껏 참아온 눈물이 결국 주르륵 내려왔다.“응.”“동하 씨한테 전해.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나 괜찮다고.”소은정도 알고
이에 이한석이 미간을 찌푸렸다.“설마... 소은정 대표님이 지금 거기에...”박수혁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쪽 가족들한테도 전해.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안전하게 데리고 오겠다고.”소은정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이한석의 얼굴에도 보기 드물게 미소가 피어올랐다.“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하지만 잠깐 망설이던 이한석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정말 직접 가실 겁니까? 거긴 도혁의 아지트나 마찬가지입니다. 대표님께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요.”서랍에서 다른 휴대폰을 꺼낸 박수혁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조수는 내가 알아서 찾을 거야. 그리고 국정원 측에 연락해. 안진 그 여자 데리고 오라고.”“하지만... 정말 이대로 보내면 저희 계획이 전부 수포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국정원 쪽에서 저희 말대로 할 거란 보장도 없습니다.”하지만 박수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아니. 무조건 협조할 거야. 진짜 도혁을 만나러 갈 거거든.”순간 표정이 굳은 이한석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을 나섰다.그날 오후, 부랴부랴 공향에 도착한 박수혁의 눈에 익숙하지만 낯선 그림자가 스쳤다.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전동하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은정 씨한테서 연락 온 겁니까?”피곤함 때문인지 목소리까지 잠겨있었지만 눈만은 반짝이고 있었다.상대편에서 박수혁에게 먼저 접선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전동하는 하느님의 구원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은혜로운 기분이었다.‘다행이야... 은정 씨가 무사해서.’하지만 전동하를 마주한 박수혁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목숨이 위급한 순간 남긴 마지막 말이 전동하를 향한 것이라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다시 답답해졌다.‘인정하고 싶지 않아... 너 따위가 뭔데 은정이를...’고집스레 고개를 돌린 박수혁이 어색하게 한 마디를 남겼다.“그쪽이랑 상관없는 일입니다.”‘나랑 은정이는 훨씬 더 복잡하게 얽힌 사이야.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연이었던 사이라고. 갑자기 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