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혁의 질문에 도혁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저 창문 너머 국정원 직원들이 이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터.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아지는 법.‘저 자식들에게 빌미를 잡힐 수야 없지.’잠깐 동안의 침묵 끝에 도혁이 피식 웃었다.“하긴. 난 억울합니다. 난 그쪽들이 말하는 도혁이라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아무리 국정원이라지만 대한민국 국적도 아닌 사람을 이렇게 체포하고 감금해도 되는 겁니까? 증거도 없이 체포해 봤자 48시간 뒤면 풀어줘야 하는 거 아시죠? 어디 누가 이기나 해봅시다.”도혁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박수혁을 도발했다.너 따위가 뭘 할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에 박수혁의 살의가 일렁였다.잠깐 감정을 추스린 박수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대한민국에서 총까지 쏴놓고 뭐? 증거가 없어요? 당신이 도혁이든 아니든 처벌은 받게 되어 있습니다.”순간 표정이 굳은 도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박수혁의 눈치를 살폈다.“그딴 말로 내가 겁이라도 먹을 것 같아요? 곧 내 변호사가 도착할 겁니다. 여기서 나가면... 당신 절대 가만히 안 둬요.”이에 박수혁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아직도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지금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여긴 내 구역입니다.”자신만만한 박수혁의 목소리에 도혁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이때 벌떡 일어선 박수혁이 도혁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의 눈빛이 얼음 비수처럼 도혁의 양심을 찔러댔다.“진짜 도혁은 도망칠 수 있을지 몰라도 넌 안 돼.”순간 몸을 움찔하던 “도혁”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박수혁...”상대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피식 차가운 웃음만을 남겨준 박수혁이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취조실을 나서려 했다.박수혁이 문고리에 손을 댄 순간, 도혁의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네가 날 잡아둘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죽으면 넌 무사할 것 같냐고. 착각하지 마...”도혁의 협박에 멈칫하던 박수혁이 조금 어색한 뒷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하지만 다시 차갑게 굳은 표정의 박수혁이 말했다.“정보에 착오는 없을 겁니다. 애초에 진짜 도혁이 누구인지 저쪽에서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요. 그렇게 한 명은 빠져나간 거고 한 명은 지금 저기 잡혀있는 거죠.”박수혁의 말을 들을 수록 국정원 직원의 입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이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젠장.’하지만 공작 요원답게 상대도 바로 이성을 되찾았다.“같은 항공편으로 들어온 사람들 전부 신상 조사 해보겠습니다.”박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도혁도 분명 같은 비행기로 들어왔을 거야.’진짜 도혁이 소은정을 납치했을 걸 생각하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마음이 급해진 박수혁이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직원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박 대표님, 안진 말입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만나보시지 않겠습니까?”‘짧은 시간 안에 저 안에 잡힌 자가 도혁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어. 박수혁 대표라면 안진의 입을 열 수 있을지도 몰라.’하지만 박수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안진은 애초에 내 계획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어. 전혀 몰랐으니 그렇게 쉽게 함정에 빠진 거겠지... 그 상황에서 은정이를 납치할 계획 같은 걸 세웠을 리가 없어.’한편 소은정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한 세 남자의 속이 타들어가든 말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새카맣던 하늘 한쪽이 조금씩 밝아지더니 곧 찬란한 햇살이 구름층을 뚫고 대지를 비추었다.손발이 모두 묶인 채 덜컹거리는 차에 앉아 한참을 이동한 소은정이 부스스 눈을 떴다.‘윽, 온몸이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네.’겨우 정신을 차린 소은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컨테이너 같은 공간, 비릿한 냄새가 소은정의 코를 찌르고 순간 속이 울렁거렸지만 테이프가 입을 막은 터라 구토 조차 할 수 없었다.‘온몸에 힘이 안 들어가...’소은정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애써 굴려보았다.‘동하 씨랑 영화를 봤었고 유라랑 통화를 했었지... 그리고 수상한 남자가 길을 물어왔고..
소은정의 질문에 남자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나름 미남 얼굴인 남자가 손을 뻗어 소은정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독사의 혀처럼 차가운 손에 소은정의 등골이 오싹해졌다.고개를 돌려 그 역겨운 손길을 피한 소은정이 혐오 가득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마저 우습다는 듯 남자가 픽 웃었다.“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바깥 풍경을 확인하던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곧 국경을 넘을 거야. 약 더 안 먹일 테니까 가만히 있어. 알겠지?”입을 꾹 다문 소은정의 마음이 점점 더 불안해졌다.‘대한민국에서 육지 국경이라니... 도대체 며칠이나 지난 거야. 약 때문에 머리가 이렇게 아픈 건가? 지금쯤이면... 동하 씨는 물론이고 가족들도 내가 사라졌다는 걸 다 알게 됐겠지.”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소찬식의 모습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난 항상 사람들 걱정만 끼치네...’차에서 내린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했다.‘한국어 같진 않고... 동남아 스타일 영어야... 동남아...? 설마...’소은정의 가슴이 더 세차게 뛰어오르기 시작했다.‘내 주위에 동남아 쪽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박수혁 약혼녀 안진이라는 말이겠지...’소은정은 다시 한유라의 말을 떠올렸다.‘유라는 박수혁이 약혼식장에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그랬어. 설마 그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그리고 소은정은 안진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스타일부터 말투까지 기분 나쁘게 날 따라했었지. 그리고 내 이름까지 사용해 가면서... 그러니까 이게 다 안진 짓이라는 말이지. 그렇다는 건... 무기상도 엮여있다는 말일 테고...’소은정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이미 원래 색깔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더러워진 꼴을 보니 한숨이 밀려왔다.통화를 마친 뒤에도 남자는 다시 출발하지도 그녀에게 다가오지도 않았다.‘뭔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뭐지?’하지만 약 기운 때문에 몰려오는 두통에 제대로 머리를 굴릴 수 없었다.정신이 맑
하지만 소은정은 입을 앙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지금 반항해 봤자 불난 집에 기름 퍼붓는 격.그녀는 이런 순간 이성을 잃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다른 한 명이 느끼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훑어보았다.“형님, 이 계집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쓸만한 게 애들한테 던져주는 게 어떨까요?”순간 남자들의 눈동자에 욕정이 서리고 소은정의 등줄기가 차갑게 식었다.꼼짝없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 운명을 맡겨야만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끔찍했다.‘차라리... 차라리 죽고 싶어.’하지만 그녀를 납치한 남자가 픽 웃었다.“건드리지 마. 저 아이는 진이를 바꿀 유일한 카드야. 곱게 놔둬.”그의 말에 부하가 눈앞에 다가온 음식을 빼앗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뭐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그제야 소은정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 비실비실하게 생겨선... 누가 봐도 우리 아가씨가 훨씬 더 예쁘시구만. 박수혁 그 자식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그리고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거칠게 차에서 끌어내렸다.사지가 다 묶인 소은정은 그 어떤 방어 동작도 취하지 못한 채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이렇게 얼굴이 바닥에 닿는구나라고 생각하던 그때, 조금 말랐지만 탄탄한 가슴팍이 그녀를 맞이했다.벽에 부딪힌 듯한 고통에 소은정이 눈을 찌푸리던 그때 남자는 소은정이 뼈를 다치지 않은 걸 발견하고 바로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끌어내린 남자를 노려보았다.“다치지 않게 잘 모셔두라고 했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급격히 음산해진 남자의 목소리에 부하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죄송합니다. 저 계집이 아가씨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이에 남자가 부하를 노려보았다.“잊지 마. 진이가 아직 저놈들 손에 잡혀있어. 진이를 다시 되찾을 때까진 곱게 모셔둬. 그리고 나서 저딴 계집 하나 괴롭히는 건 일도 아니니까.”한편, 남자가 부하를 꾸짖는 사이 소은정은 주위를 훑어보았다.너무나도 평범
소은정의 반응에 남자들은 당황한 건지 잠깐 동안의 적막이 이어졌다.그 적막을 깨트린 건 바로 남자의 헛웃음이었다.“하, 이렇게 매정한 여자인 줄은 몰랐네?”“말 그대로야. 이미 나랑은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 때문에 내가 이런 꼴 당할 이유 없어.”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지금 박수혁은 무섭고 난 만만하다 이거야? 젠장...’말문이 막힌 건지 흠칫하던 남자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말했잖아. 그냥 운이 나빴던 거라고 생각하라고.”‘널 잡아서 박수혁 그 자식을 협박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 진이가 넘긴 정보가 정확하다면 박수혁 그 자식의 약점이 바로 소은정일 테니까.’소은정이 뭔가 더 말하려던 그때, 남자가 고개를 홱 돌렸다.“박수혁 아버지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는 들었지? 그 꼴 나고 싶지 않으면 고분고분해지는 게 좋을 거야.”남자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섬뜩함은 숨길 수 없었다.이에 소은정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박봉원의 팔 다리가 잘렸다는 건 이미 그녀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무기 밀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범죄도 스스럼없이 저지를 게 분명할 터.‘저 자식들 눈엔 인간이 그냥 통나무쯤으로 보이겠지. 그러니까 제발... 누구라도 와서 날 좀 구해 줘.’그렇게 소은정은 남자들의 손에 이끌려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당장 폐차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낡은 차에 몸을 실은 소은정은 풍겨오는 악취에 미간을 찌푸렸다.창문은 천으로 가려져있어 바깥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아니, 설령 가리지 않았다 해도 처음 오는 곳인데다 어두운 밤이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을 것이다.뒷좌석에 앉은 소은정의 왼쪽에는 그녀를 납치한 “형님”이 오른쪽에는 그녀를 가장 무섭게 노려봤던 남자가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 끼인 채 덜컹거리는 차에 타니 다시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래도 해산물 썩은내가 진동하는 컨테이너보다는 낫다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주머니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꺼냈다.칼
소은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안진 그 여자는 여전히 국정원에 잡혀있는 걸까? 가족들은... 동하 씨는 내가 누구한테 납치당했는지 눈치나 채고 있을까...’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약 20분 정도가 흐르고 차가 드디어 움직임을 멈추었다.곧이어 남자들이 거칠게 소은정을 차에서 끌어내렸다.“형님”의 명령은 그저 팔다리가 부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한 것뿐, 어찌 되었든 이곳에 손님으로 초대받은 건 아니니 굳이 친절하게 대할 필요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그리고 그녀를 맞이한 건 후덥지근한 공기와 무성한 말림이었다.‘국경 근처라고 했지... 지금 날 데리고 몰래 국경을 넘어 동남아로 넘어가려는 거야? 이 풀숲을 넘어서?’소은정은 이 기막힌 상황에 눈물 조차 나오지 않았다.‘부잣집에서 태어나서 재산이나 물려받으며 곱게 살 줄 알았는데... 왜 나한테는 이런 일만 생기는 걸까? 이렇게 자신감 있게 움직이는 걸 보니 주위에 도움을 청할 경찰이나 군인 따위도 있을 리가 없을 테고...’한편, 소은정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남자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올랐다.그리고 곧이어 먼저 풀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뭐해. 움직여.”그녀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등을 툭 건드리고 약 기운에 서 있는 것마저 힘겨웠던 소은정은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윽...”소은정이 이를 꽉 물었다.엉망진창인 몸, 절망적인 마음이 더해져 일어날 용기도 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어쩐지 곱게 풀어주더라니... 자기들 힘드니까 내가 알아서 걸으라는 거였어.’기분 나쁜 습기가 호흡을 따라 소은정의 기도로 흘러들었다.‘어떡하지...’이때 부하가 짜증스레 욕설을 내뱉었다.대충 안진보다 훨씬 더 약하다는 부하의 말을 듣고 있던 소은정이 몰래 그를 노려보았다.‘너희들 아가씨 어깨 좀 봐봐. 당연히 튼튼하겠지.’이때 앞장섰던 남자가 다시 돌아오더니 경멸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못 걷겠어?”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든 소은정이 대답했다.“몰라서 물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들이 소은정의 팔과 목을 스쳤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듯 그저 발걸음을 옮겼다.남자가 선두에 선 소은정의 방향을 이끌고 이동 내내 다른 부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고프고 목도 마르고 지치기 한 소은정도 마찬가지였다.한 발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지만 소은정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여기서 쓰러져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저 짐승 같은 자식들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후덥지근한 공기가 소은정의 폐를 찔렀지만 그녀는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사지를 움직였다.약15분간 걸었을까? 남자가 씩 웃기 시작했다.“도착했어.”울창한 밀림이 걷히고 텅 빈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허? 생각보다 가깝네?”소은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아마 이 자식들만 알고 있는 지름길이겠지. 여기서 벗어나기만 해봐. 이 길부터 바로 막아버리라고 할 거야!’이때 남자가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았다.“허튼 생각하지 마. 이 길은 나만 알아. 10번, 아니 100번을 걸어도 길을 잃게 될걸.”소은정이 마른 입술에 침을 살짝 발랐다.“허튼 생각한 적 없어.”자기 아지트에 도착했다는 생각에서인지 남자의 표정이 훨씬 풀어졌다.그리고 그들을 데리러 온 차량이 다가왔다.밀림과 어울리지 않는 고가 외제차의 자태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허, 범죄로 돈을 아주 쓸어담으셨나 보지? 마음에 안 들어.’먼저 차에 탄 남자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리둥절한 표정의 소은정을 향해 말했다.“타.”굳은 표정의 소은정이 차에 몸을 싣고 곧 차량은 움직이기 시작했다.차에 타자마자 남자는 좌석에 기대 눈을 감았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게다가 저 여자까지... 저희 손의 카드가 또 한 장 늘어났네요.”기사의 아부에 남자는 껄껄 웃었지만 표정은 곧 다시 어두워졌다.“그럼 뭐 해. 진이는 아직인데.”솔직히 남자는 안진과 박수혁의 결혼을 통해 한국 시장으로 진출할 예정이었다. 그런 그에
소은정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오랜 시간 걸은 데다 약기운까지 더해져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이 자식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약을 먹인 거야... 왜 아직도 이렇게 힘든 거냐고...’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몰래 허벅지까지 꼬집었지만 육체의 고단함은 역시 정신력을 이기지 못했고 소은정은 결국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소은정이 잠든 걸 확인한 남자의 표정이 다시 매섭게 변하고 백미러로 기사에게 눈치를 주었다.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운전기사가 차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소은정은 덜컹거리는 길 때문에 부스스 눈을 떴다.다시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긴 악몽일 뿐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구불구불한 길, 무성한 풀숲에는 허리까지 오는 풀들이 야만스럽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건물은커녕 초가집 하나 보이지 않는 주위 풍경에 소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여긴 또 어디야?’“깼어?”그녀의 옆에 앉은 남자가 피식 웃었다.“이럴 때 보면 육체란 참 성실한 것 같아.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오는 걸 보면 말이야.”비아냥거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자는 것 말고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소은정의 당당한 목소리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하긴.”고개를 돌린 소은정은 주위 풍경을 살피기 시작했지만 어차피 이제 그런 것따위 기억해 봤자 탈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서인지 남자는 그런 그녀를 막지도 않았다.차량은 울퉁불퉁한 길을 빠르게 달려 밀림 사이에 덩그러니 지어진 건물 앞에 멈춰섰다.금방이라도 원주민이 고개를 내밀 것만 같은 독특한 스타일의 건물이었다.얼핏 보기엔 소박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정교한 인테리어 소품이 센스있게 배치되어 있었고 나무 본연의 향기가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소은정이 주위를 돌아보는 동안 집 안에서 누군가 달려나왔다.“형님, 오셨습니까?”운전기사가 좌석 문을 열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