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찬식이 또 소은해의 뒤통수를 내리쳤다.“으이구, 네 형 반만이라도 따라가봐라. 둘 다 내 자식인데 어쩜 한 명은 천재, 다른 한 명은 바보로 태어났나 몰라...아버지의 핀잔에 소은해 역시 발끈했다.“아버지도 아까 저랑 똑같은 생각하셨잖아요.”“아니거든!”부자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투닥대는 그때, 소은정의 방은 여전히 묘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숨 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내야 할 것 같은 정적속에서 소은정은 전동하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훑어보았다.오늘따라 왠지 더 차가워져 보이는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그 손을 꼭 잡은 전동하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하마터면 이 손... 다시는 못 잡을 뻔했어.“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은정 씨...”소은정을 꼭 껴안은 전동하의 등이 파르르 떨려왔다.소은정이 그를 찾기 위해 외출했다는 우연준의 말을 듣는 순간, 전동하는 머릿속의 뭔가가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온 세상이 정전된 것 같은 끝없는 어둠이 방금 전 소은정이 눈을 뜨기 직전까지 지속되었다.그런 그의 등을 토닥이던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나 괜찮다니까요...”흠칫하던 소은정이 질문을 이어갔다.“범인은 찾았어요?”그래... 내가 너무 힘들어 하면 은정 씨가 더 미안해 할 거야.겨우 어두운 감정에서 헤어나온 전동하는 어느새 생기를 되찾은 소은정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네.”전동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은정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다행이다. 아무 성과도 없이 다쳤으면 진짜 억울했을 텐데.”“은정 씨...”“동하 씨, 나 진짜 괜찮아요. 이번 사고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서도 나 꿋꿋하게 살아남았는 걸요.”일부러 더 가벼운 말투로 전동하를 위로했지만 소은정의 가슴은 여전히 불안감으로 콩닥거리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녀가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창고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이란 묘한 자신감 때문이었다.지금쯤이면 우연준도 그녀가 사라
그런데 이때 전동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수아 씨가 기자를 매수했다는 건 양 회장도 알고 있었고 이를 묵인했습니다. 하지만... 창고에 불을 지른 건 양 회장이 아니에요.”“그럼 누가 그런 건데요?”“전인국이요.”아버지의 이름을 말한 전동하가 고개를 숙였다.잠깐의 정적 후 소찬식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전인국 회장? 자네 아버지가 한국에 왔단 소리인가?”그의 고백에 역시 깜짝 놀란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던 전동하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절 유인해서 납치한 것도 그렇고... 처음부터 은정 씨를 노리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고에 전인그룹이 엮여있다는 걸 알게 된 소찬식의 손에 어느새 식은땀이 고였다.“자네는 아버지를 만났나?”“네. 전기섭이 반신불수 판정을 받고... 은정 씨한테 복수하려고 몰래 들어온 것 같습니다.”발이 넓기로 소문난 박수혁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건 아직도 전인국의 세력이 건재함을 의미했다.전동하의 설명을 듣고 있던 소찬식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우리가 너무 안일했어. 전후 사정이야 그렇다 치고 가족이 그런 꼴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겠지.“쿨럭쿨럭.”연기를 마셔 매캐한 목 때문에 기침을 하던 소은정의 눈동자가 번뜩였다.“몰래 들어온 거라면 부하들을 많이 대동하진 못했을 거예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고개를 끄덕이는 소찬식과 달리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전동하의 눈동자에는 걱정으로 가득했다.“전 회장이 한국을 뜨기 전엔 혼자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어요.”하지만 소은정은 큰 사고를 겪고도 전혀 두렵지 않은 표정이었다.전기섭... 내가 자비를 베풀어서 살려준 건데 은혜도 모르고.“뭐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이니... 하나하나씩 해결해야겠네요.”소은정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피어올랐다.여긴 내 구역이야. 전인국,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마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잠시 후, 소은해와 소찬식이 방을 나서려던 그때, 소은정
“걱정하지 말아요. 나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으니까.”2층에서 내려오니 집사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식탁에 차리고 있었다.그를 힐끗 바라보던 소찬식이 입을 열었다.“저녁 식사하고 가지 그래?”“하이고, 우리 은정이 두고 갈 수 있겠어?”장난스러운 소은해의 말투에 소찬식이 쿠션으로 아들의 머리를 내리쳤다.부자가 아닌 연년생 형제라고 해도 믿을만큼 환상적인 두 사람의 티키타카에 전동하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은정 씨도 깨어났고 이제 밀린 일들을 처리해야 할 것 같아서요.”“그래... 그럼.”전동하의 대답에 소찬식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잠깐만.”소찬식이 공손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돌아서는 전동하를 불러 세웠다.“전 대표, 이번 일... 자네와 아무 상관 없다는 거 나도 알아. 자책하지 말게. 자네가 우리 은정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도 눈이 있으니 볼 만큼 봤고... 난 은정이만 좋다면 뭐든 다 괜찮으니까.”무뚝뚝한 소찬식의 말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느낀 전동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참 부럽다, 은정 씨가. 아버지가 저렇게 훌륭한 분이라...잠시 후, 전동하가 문을 나선 뒤, 소은해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정말 괜찮으신 거 맞으세요?”아들의 질문에 소찬식은 말없이 일어섰고 유령처럼 소파에 앉아 보고서를 확인하던 소은찬 역시 스르륵 일어섰다.“박수혁보다야 훨씬 낫지. 적어도 우리 은정이가 비굴하게 매달릴 필요는 없잖아? 아니지. 오히려 그때랑 반대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말을 마친 소은찬이 주방으로 향하고 혼자 거실에 남은 소은해는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공부만 하는 샌님 같다가도... 가끔씩 보면 은근히 사랑에 대해 잘 안단 말이지...”이때 뭔가 생각난 소은해가 쪼르르 그 뒤를 따랐다.“그런데 형, 왜 갑자기 돌아온 거야? 연말쯤 돼서야 휴가 날 거 같다면서?”금테 안경을 살짝 올린 소은찬이 대답했다.“
소은정이 무사한 걸 확인한 이건은 지금 당장 액정을 통해 A시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다.소은호 대표가 S시로 내려온 뒤로 그 동안 소은정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자비를 베풀었는지 뼛속깊이 느낀 이건이었다.정말 그녀의 마지노선을 건드리는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한, 대충 봐주는 소은정과 달리 소은호는 실수를 저지른 이에게 절대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는 잔인한 성격이었다.은호 대표님과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린단 말입니다. 은정 대표님 어서 돌아와 주세요. 이러다 저 정말 제 명에 못 죽습니다...부쩍 수척해진 이건의 얼굴을 바라보던 소은정이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어이구, 이 팀장님 흰 머리가 더 많아지신 것 같은데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머리를 쓰다듬던 이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소은정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이건은 잠 한 숨 마음 편히 자지 못한 데다 소은호가 직접 S시로 내려온 뒤로는 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흰 머리만 늘어나고 있었다.그나마 별일 없어서 다행이지만 행여나 더 큰 사고가 났다면 자리 보전은커녕 생존까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졌을 것이다.은정 대표님... 제발 건강하셔야 합니다. 저 이제 곧 정년퇴직이에요. 그때까지 편안하게 지내다 가고 싶다고요.하소연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소은호의 매서운 눈초리에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이건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요즘 워낙 바쁘다 보니 새치 염색을 깜박했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직원들도 대표님 걱정 많이 하고 있어요. 부디 빨리 건강 회복하시기 바랍니다.”“다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쓸데없는 소리는 그쯤 하고 일 얘기나 하지?”이때, 소은호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그래. 일 얘기 좋지. 오빠, 기자는 뭐래? 자백했어?”“박수아가 인턴으로 있는 회사 대표의 사주를 받았다고 자백했어. 대표가 태한그룹이 뒤를 봐준다고 한 모양이야. 그래서 마음 놓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거고.”미간을 찌푸리던
소은정이 씩씩거리는 소찬식의 어깨를 토닥였다.“S시에서 나름 떵떵거리고 사는 양 회장이 직접 마중까지 나온 정도면 정말 놀라긴 했나 봐요. 그리고 그게 어디 오빠 체면만 살려주는 건가요? 우리 가족들 귀에까지 들어올 걸 예상하고 한 행동이겠죠. 솔직히 그 나이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손녀딸 때문에 이런 일에 엮였으니... 양 회장도 참 불쌍해요.”“그래서 뭐? 불쌍해도 다 자기가 자초한 일이야.”소찬식이 픽 웃었다.“그 동안 S시에서 왕 노릇을 하면서 살다 보니 현실감각이 떨어진 거지.”“오빠, 아빠 많이 화나신 거 보이지? 내 복수 제대로 해줘. 한 번 굽히고 들어왔다고 우리가 무조건 용서해 줘야 할 이유는 없잖아?”소찬식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그럼.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두 부녀의 막무가내에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소은호가 입을 열었다.“양사그룹 전자기기 쪽은 저희가 인수하는 게 어떨까요? 저희와 이미지도 겹치고... 그냥 둬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은데요.”아들의 제안에 소찬식의 얼굴에 드디어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좋아!”양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 기세가 예전 같지 않은 양사그룹이었지만 전자기기 쪽은 워낙 꽉 잡고 있는 터라 겨우 적자는 면하고 있었다.S시의 산업과도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터라 기업가들은 물론 정치인들도 시의 경제적 지주나 다름없는 양사그룹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고 그 덕에 양 회장도 지금까지 인맥과 세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지금 양사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고객의 개성을 맞춰서 제작된 커스터마이징 전자기기, 더 큰 시장을 목표로 움직이는 SC그룹에게 딱히 도움이 안 되는 사업이긴 했지만 이쪽 업무를 빼앗기면 양사그룹의 근간이 흔들리게 될 터. 그 이유만으로도 인수인계를 진행하기에 충분했다.소은호가 덤덤하게 말하긴 했지만 소은정은 이번 합병을 통해 양 회장의 목덜미를 단번에 틀어쥘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소은호의 단호한 처사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소은정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소은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전 회장이 한국에 들어왔는데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우리는 그렇다 치고 지금 미국에 있는 박수혁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야. 박수혁 쪽에서도 분명 전 회장을 주시하고 있을 텐데 그 감시망을 뚫었단 말이지. 전인국 회장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 같아. 그 화재도... 전 회장이 낸 거야.”소은정의 설명에 소은호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전기섭이 왜 그 지경이 된 건지 알게 된 거겠지. 이번 기회에 널 죽이고 싶었던 모양인데... 무사해서 다행이야.”소은호의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번뜩이고 소은정 쪽의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마음이 불편한 건 소은정 역시 마찬가지였다.전기섭을 그렇게 만든 게 그녀라는 걸 언젠가 들키게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앞으로 이어질 전 회장의 복수가 두려운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어쨌든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겠어.몇 초동안의 정적을 깬 건 소은호였다.“최 팀장한테 한시도 네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해야겠어.”소찬식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소은정은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최성문이 옆에 있으면 마음이 더 편한 건 사실이니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내 걱정은 말고 S시 프로젝트나 제대로 처리해 줘. 재점검도 대충 끝났으니까 2기 공사 시작해도 될 거야. 시간이 지연되면 우리 쪽 손실만 늘어나니까. 그리고 여론도 지금 많이 좋아지지 않았어? 내가 인질로 잡혀서 협박당하는 모습, 기자들도 봤을 테니까. 설마 그게 연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소은정의 질문에 소은호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마. 지금 여론은 널 동정하는 쪽으로 돌아갔으니까. 상대 편에서 이렇게 나온다는 건 우리 건물에 문제가 없다는 걸 의미하겠지? 입주자들 불만도 쏙 들어갔고. 오히려 환경부 쪽 사람들이 먼저 물어보더라. 재점검은 그냥 이쯤에서 접는 게 어떻겠냐고.”생각지 못한 수확에 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래. 그럼 이쪽
하지만 소은정은 또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박수혁은 그렇다 치고 전동하에게서 문자 하나 도착하지 않았다니.그럴 사람이 아닌데... 할일이 많다고 하더니 아직 일하는 중인가?잠시 후, 샤워까지 마친 소은정은 여전히 잠잠한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잠들었나? 모르겠다. 문자나 보내둬야지.“난 이만 잘게요. 굿나잇.”그리고 문자 전송 뒤 약 2초만에 전동하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좋은 꿈 꿔요, 은정 씨.”더없이 평범한 문자였지만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에 소은정은 한참 동안이나 그의 글귀를 바라보았다.다음 날 아침, 소은정은 눈을 뜨자마자 우연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약 1시간 뒤, 우연준은 전인그룹의 최신 자료를 잔뜩 든 채 저택을 방문했다.두 사람이 서재로 들어가고...손님이 왔으니 당연하다는 듯 차와 간식을 내가려던 집사를 불러 세운 소찬식이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일 얘기 중일 테니까 차는 조금 있다가 내가.”이에 집사가 실망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아가씨는 숙제하실 때 뭐든 씹을 게 있어야 집중이 더 잘 되신다고 하셨는데...”“아직도 우리 은정이가 여고생인 줄 알아?”“알겠습니다. 그럼 이건 은해 도련님께 드리도록 하죠.”...한편, 서재.소은정은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커다란 모니터 세 개로 전인그룹의 자료를 훑어보고 있다.이때 우연준이 기획안 몇 개를 건넸다.“전인그룹이 비교적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분야입니다. 특히 의료 분야에서는 미국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주가 변화 그래프를 훑어보던 소은정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정상적인 등락을 이어가는 듯했지만 소은정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개미들 돈을 쏙쏙 빨아먹고 있었네...“대충 보니까 2년 정도가 주기인 것 같은데 우리는 그때까지 못 기다려요. 1주 뒤면 크리스마스던가요? 전인그룹 주가도 오를 가능성이 크겠죠? 그때, 전기섭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는 뉴스를 흘리는 게 좋겠어요.
잔뜩 곤두선 소호랑의 털가닥들이 거절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고 있었다.그 푼수데기... 난 싫다고!“으이그, 너도 은근 츤데레라니까.”싱긋 미소를 짓던 소은정이 1층으로 내려가던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여보세요?”소은정의 목소리에 한참을 침묵하던 상대방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랜만이네요, 소은정 씨.”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흠칫하던 소은정의 입가에 곧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가 소은정의 기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전 회장님?”“그래요. 전인국입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묘한 비아냥거림이 담긴 전인국의 말투에 소은정은 기가 막혔다.왜? 내가 아직 살아있어서 아쉬운가 보지?“네, 별문제 없어요. 회장님 덕분에 액땜 제대로 했으니 앞으로 몇십 년은 사건, 사고 없이 무사히 살 수 있을 것 같네요.”그녀의 가벼운 말투에 전인국은 화가 난 듯 또 한동안 침묵을 이어갔다.“소은정 씨, 집안 세력만 믿고 나대다간 큰 코 다칩니다. 집안에서는 몰라도 밖에서는 얌전히 다니라고 아버님께서 안 가르쳐주셨나 보죠?”살짝 쉰 그의 목소리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협박을 하시겠다?차갑게 미소와 함께 소은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글쎄요. 제 아버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먼저 공격해 왔을 때 절대 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 회장님이야말로... 아들 교육 제대로 못 시키신 것 같은데요? 아무리 봐도 전기섭 회장... 인성이 말이 아니던데요?”“...”약 1분 동안 정적이 감돌고 전화를 끊은 게 아닌가 의심이 갈 무렵, 전인국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너 뭐라고 그랬어?”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도 소은정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다시 한번 말씀드릴까요?”“누구한테서 들었어? 전동하 그 자식이 말한 거야?”“글쎄요? 전기섭 대표가 직접 떠벌린 걸 수도 있잖아요?”전동하를 끌어들일 수 없단 생각에 소은정은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