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칫하던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동하 씨가 한 거 맞을 거야. 이미 의심하고 있었으니까.”언젠가 결과를 받게 될 거라는 건 알았지만 본의 아니게 가족들까지 다 알게 되다니.무거운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 듯 마음이 무거웠다.겉보기에는 비즈니스계는 물론이고 정계에도 인연이 닿는 명문가인 전씨 일가가 사실은 콩가루 집안이었다니.놀랍다기 보다는 왠지 우스웠다.그래서 전기섭을 그렇게 찾았던 거였어? 아들 어떻게 될까 봐?“아들이라니... 요즘은 드라마 시나리오도 그렇게 안 써. 비현실적이라고 시청자들이 욕한다고. 와, 전대 회장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관뚜껑 열고 나올 일이다 정말...”김하늘이 소은해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전씨 일가에서 동하 씨를 그렇게 배척했던 거군요. 전기섭 대표도... 그렇게가지 동하 씨를 싫어한 걸 보면 이미 자신이 전 회장 아들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겠어요.”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소은해가 엄지를 내밀었다.“역시 우리 하늘이! 똑똑해!”눈치없는 오빠를 흘겨보던 소은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찬식의 눈치를 살폈다.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아마 전동하 때문에 그녀까지 위험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하지만 전동하의 여자친구로서 이 모든 걸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그녀는 그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무거운 거실 분위기에 김하늘이 소은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오빠, 오늘 소장하고 있는 사인들 보여준다고 했잖아요.”김하늘의 말에 소은해가 눈을 반짝였다.“응. 선배님들 사인들은 내가 거의 다 가지고 있거든. 결혼하면 다 네 거야.”“됐네요. 난 보는 것만으로도 족해요.”두 사람이 2층으로 올라가고 소은호는 소은정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이렇게 된 이상 전 회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우리는 절대 그 누구의 편에도 서면 안 돼. 알겠지?”복잡한 표정의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이 와중에 SC그룹까지 끼어든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젓는 아버지의 모습에 그의 어깨에 기댄 소은정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 아빠. 괜히 걱정만 끼쳐드리고...”전인권 회장... 여기까지 사람을 보내? 내가 너무 방심했어.시무룩한 딸의 모습에 소찬식이 미소를 지었다.“아니다. 지금 네 아빠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거니? 그런 걸로 겁 먹을 사람으로 보여? 이 아빠가 가장 걱정되는 건 너야. 전동하 대표 때문에 네가 위험해질까 봐... 너 정말 전동하 대표랑 계속 만날 생각이니?”소찬식이 오랫 동안 고민하던 질문을 던졌다.“일단 며칠 동안 본가에서 지내는 게 어떻겠니? 같은 오피스텔에서 살면 사람들도 오해할 테고.”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전동하 대표의 상황이 안타깝긴 했지만 더 걱정되는 건 소은정 쪽이었다.적어도 자신의 손길이 닿는 곳에 지내야 마음이 놓일 것만 같았다.그의 말에 소은정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망설이던 소찬식이 말을 이어갔다.“아빠도 너희 두 사람 사이를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건 아니야. 일단 헤어졌다가 전동하 대표가 이번 일을 제대로 해결하면 그때...”깊은 한숨을 내쉰 소은정이 그의 말을 끊었다.“아빠, 아빠 말씀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이미... 늦었어요.”“늦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저번에 파티에서 전인권 회장을 만났는데 저랑 동하 씨가 만나는 거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동하 씨 말고 전인권 대표와 만나보는 게 어떠냐는 말에도 거절했고요. 그리고 지금 헤어진다고 말하면 오히려 전에 사귀었다는 걸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전동하 대표가 불리해지니까 버린다고 사람들이 수군댈 수도 있고요.”소은정의 말에 소찬식은 침묵하고 소은호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전인권? 그 늙은이 노망이 났나. 어디서 들이댈 걸 들이대야지...”“나도 그렇게 생각해.”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 뒤로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빠졌고 소찬식도 더 이상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다음 날, 소은정은 마사지를 받으러 가자
“아니!”김하늘이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그냥 좀... 이상해서...”평생 혼자 모든 걸 책임지고 해결하는 삶을 살아온 김하늘은 갑작스러운 소은해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송구스러웠다.연애를 할 때도 항상 김하늘이 먼저 리드하는 쪽이었는데 왠지 소은해 앞에서만큼은 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기도 했다.하지만 그녀 대신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항상 그녀만을 바라만 봐주는 소은해의 모습에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것만은 사실이었다.아니,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불안할 지경이었다.“그럼 천천히 적응해 나가면 되지. 우리 오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멋있는 척 다하고 다니지만 너도 알지? 사실은 그냥 애야 애.”잠깐 고민하던 김하늘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얻은 사랑인데... 행복한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그래. 시간 지나면 적응되겠지. 아, 너야말로. 동하 씨랑 오래 가네? 난 솔직히 두 사람... 곧 헤어질 줄 알았거든.”김하늘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동하 씨가 좋은 사람인 건 맞지만 뭐 여러 모로 네 스타일은 아니잖아? 난 네가 은인에 대한 고마움? 그런 마음인 줄 알았는데...”김하늘의 말에 소은정이 피식 웃었다.“그러게.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런데 동하 씨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좋아하는 사람이랑 손을 잡고 날씨 좋은 날 산책하는 기분이랄까?”소은정은 저번 연애는 다르게... 라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3년 동안 박수혁만 바라봤지만 손끝 한번 허락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소은정은 이미 사랑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전동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소은정의 미소에 김하늘의 입가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다행이야, 좋은 사람 만나서... 은정이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그날 점심, 소은정은 작품 촬영을 마치고 쉬고 있는 손호영과 점심 약속을 가졌다.윤시라의 악행이 드러나며 손호영의 이미지가 좋아진 건 사실이었지만 매일 수많은 신인들이 쏟아지는 연예계에서
소은정이 솔직하게 대답했다.SC그룹 같은 대기업이 오점이 있는 연예인을 억지로 홍보하는 리스크를 그대로 감당할 순 없었다.여론 작업이며 SC그룹이 할 수 있는 건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만 남은 건... 운에 맡겨야 했다.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손호영도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소은정의 휴대폰이 울렸다.“회사로 점심 주문했어요. 먹고 일해요.”전동하가 보낸 문자였다.“나 점심 약속 있는데...”“약속이요? 남자예요? 여자예요?”“당연히 남자죠.”소은정의 답장에 전동하가 우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유치하긴.소은정이 피식 웃던 그때 어딘가에서 익숙하지만 거부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어, 이게 누구야? 소은정 대표님, 이런 데서 다 뵙네요. 우리가 우연이긴 한가 봐요.”순간 미소를 지운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오랜만에 보는 윤시라와 여유로운 모습으로 걸어오는 전기섭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전기섭 대표님? 아, 풀려나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축하드려요.”소은정의 말에 전기섭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평생 곱게 자란 전기섭에게 며칠 동안이나 감금을 당했다는 건 일생 일대의 치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던 전기섭이 피식 웃었다.“고맙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남자랑 식사 중이시네요? 우리 귀여운 조카가 알면... 꽤 슬퍼하겠는데요?”“제가 누구랑 밥을 먹든 그건 제 자유입니다.”소은정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윤시라가 끼어들었다.“소 대표님이야 뭐. 젊고 돈도 많으니까 누구를 못 만나겠어요. 전동하 대표님만 불쌍하게 됐죠 뭐...”윤시라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기도 전에 벌떡 일어선 소은정이 손에 잡히는 유릿잔의 물을 그녀에게 끼얹었다.민첩하게 몸을 피해 물 한 방울 묻지 않은 전기섭과 달리 쫄딱 젖은 윤시라의 눈이 커다래졌다.순간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흔들렸다.다시 자리에 앉은 소은정이 여유롭게 물었다.“저번 일로 입 단속 하는
”그게...”잔뜩 당황한 얼굴의 윤시라가 입을 열었지만 소은정은 그녀에게 해명할 기회 따위 주지 않았다.“아니면 새로운 빽이 생겼다 이건가?”시선을 전기섭에게 돌린 소은정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잔뜩 겁 먹은 윤시라를 힐끗 바라보던 전기섭이 바로 손을 저었다.“아, 그건 오해예요. 윤시라 씨와는 오늘 비즈니스차 처음 만난 사이입니다.”전기섭의 단호한 선 긋기에 윤시라는 정말 말 그대로 바닥으로 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한편 흥미롭다는 눈길로 소은정을 훑어보던 전기섭이 말했다.“뭐,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어요. 소은정 씨. 동하한테 질리면 언제든지 연락줘요. 식사든 데이트든 다 가능하니까.”전기섭의 저속한 농담에 소은정이 얼굴에 실린 미소를 지웠다.‘으, 천박해...’“글쎄요. 번호표 뽑고 대기하셔도 전 대표님 차례가 올 것 같긴 않네요.”소은정의 차가운 거절에 어깨를 으쓱한 전기섭이 복도를 지나 룸 쪽으로 향했다.혼자 어색하게 남겨진 윤시라가 소은정 앞에 앉아있는 손호영을 노려보았다.‘내 덕분에 SC그룹 CF까지 찍게 됐으면서 이제 와서 모르는 척 하는 것 좀 봐. 뻔뻔하게...’가는 곳마다 눈칫밥만 얻어먹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진 윤시라는 소은정에게 아부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마지막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한편, 소은정은 윤시라의 존재는 깔끔하게 무시한 뒤 고개를 돌렸다.“주문하죠. 누구 때문에 입맛 다 버렸으니까 그냥 대충 시켜요.”고개를 끄덕인 손호영이 직원을 부르고 우두커니 서 있던 윤시라가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입맛을 버려?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몰래 소은정을 노려본 윤시라 역시 홱 돌아섰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은정의 머리가 순간 번뜩이고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휴대폰을 들었다.‘신지연... 윤시라가 자기 아빠와 만나는 게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 그때 몰래 찍은 영상을 보내주기도 했고.’연락처에서 신지연의 이름을 찾은 그녀가 문자를 보냈다.“지연 씨, 오
딸의 질문에 신호민이 고개를 갸웃했다.“시라도 여기 있는 거야?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우연히 알았어요. 합석하실래요?”신지연의 코웃음에도 신호민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너 드디어 시라를 받아주기로 한 거야? 그래. 어차피 한 가족 될 사이인데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지.”이때 홀에 앉은 소은정을 발견한 신호민은 조금 당황한 듯 싶었으나 미처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신지연이 그의 팔을 끌고 룸쪽으로 향했다.복도 안쪽 룸 앞에 도착한 신지연이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날카로운 두 여자의 비명소리가 선후로 울려 퍼졌다.“아악!”“아악!”각각 신지연과 윤시라의 목소리였다.한편, 딸의 뒤에서 안쪽의 상황을 확인한 신호민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거칠게 딸을 밀친 신호민이 바로 룸 안으로 쳐들어갔다.“윤시라, 이 천박한 게 네가 감히 날 배신해?”그 뒤로 비명소리와 온갖 물건들이 넘어지고 부숴지는 소리가 우당탕탕 들리고 흐트러진 옷차림의 전기섭이 룸에서 가장 먼저 걸어나왔다.잔뜩 굳은 얼굴에 맞기라도 했는지 입가에 터져있었고 얼굴 여기저기에 여자의 손톱에 할퀸 자국이 가득했다.윤시라가 감히 그의 얼굴에 손을 댈 리는 없을 테고 방금 전 몸싸움 도중 신지연에게 긁힌 것으로 보였다.셔츠 단추를 다시 채운 전기섭이 룸 쪽을 돌아보더니 퉷 하고 침을 뱉었다.“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방금 전 룸에 들어가마자 먼저 온갖 육탄 공세를 해온 건 윤시라였다.윤시라가 온갖 미인들을 돌아가며 만나본 전기섭의 마음에 들 리는 없었지만 방금 전 도도한 소은정의 얼굴이 떠오르며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받아준 것이었는데...떠나기 전까지도 소은정의 테이블을 힐끔힐끔 바라보던 전기섭이 레스토랑을 나서고 디저트를 즐기던 소은정의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피어올랐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두 사람 룸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비록 전기섭은 윤시라와 처음 보는 사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허영심 가득한 윤시라가 돈 많고 잘생긴 전기섭을 가만히 내버
바닥에 엎드린 윤시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오... 오해예요. 전... 전기섭 대표가 절 억지로, 억지로 안으려 한 거였다고요!”그녀의 변명에 신호민이 다시 뺨을 날렸다.“하, 정말 날 바보로 아는 거야? 네가 그 남자 무릎 위에 앉아있는 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딴 걸 지금 변명이라고! 다들 네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의심할 때도 난 네 편을 들어줬어. 널 진심으로 믿었으니까! 그런데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내가 어떻게 날 배신해!”신호민의 분노에 찬 따귀에 윤시라는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지만 이대로 신호민까지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 콧물을 쏟아냈다.“아니에요. 제가 회장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아까는 그 남자가 절 먼저 유혹해서... 순간 실수한 거예요. 여자들도 가끔씩 그런 실수 한다고요!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윤시라의 적반하장에 신호민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용서? 내 눈으로 그 꼴을 봤는데 용서? 내가 미쳤지. 결혼이고 뭐고 다 없었던 일로 할 거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신호민은 끈질기게 자신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눈물을 흘리는 윤시라를 거칠게 떼어냈다.“지, 지금 파혼하시겠다는 말씀이세요?”윤시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파혼이라니! 말도 안 돼! 나 좋다는 남자들 다 마다하고 당신한테 간 건데 파혼이라니! 내가 아직도 당신 정부처럼 보여? 천한그룹 회장 천한강이 내 아버지야! 우리 두 사람 결혼은 정략 결혼이라고! 그런데 누구 마음대로 파혼을 해! 절대 안 돼!”나이 들고 이혼 경력까지 있는 신호민에게 차였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다시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란 불안감에 윤시라가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나이 많고 이혼 경험에 짜증 나는 딸까지,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었지만 신호민과 결혼만 하면 한해그룹을 가질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역겨운 관계를 이어왔던 윤시라였다.게다가 그녀를 견제하는 오빠, 언니들 틈에서 아버지의 사랑
유리조각에 베인 상처를 움켜쥔 윤시라가 매서운 눈빛으로 신지연을 노려보았다.“꺼져. 네까짓 게 뭐라고 입을 놀려.”그녀의 태도에 신지연이 피식 웃었다.“사실 엄마 아빠 사이 안 좋은 건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고 아빠가 언젠가 재혼할 거란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너처럼 여우 같은 여자는 안 돼. 쓰레기 같은 X.”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언젠가 새 엄마를 맞이하게 될 거라는 얘기를 들어온 신지연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둔 상태였고 친 모녀처럼 막역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웬만큼 사이좋게 지낼 마음도 있었다.하지만 넌 안 돼... 너 같은 걸 내 엄마라고 인정할 순 없어.말을 마친 신지연이 돌아서고 룸 앞에서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윤시라의 코트를 들고 있는 직원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코트 줄 필요 없어요. 아무 때나 벗어제끼는 여자거든요. 노출증이라고 해야 하나? 아, 손해배상은 천한그룹 쪽에 청구하세요. 저 여자... 천한강 대표 딸이거든요.”말을 마친 신지연은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며 소은정에게 문자를 보냈다.“모든 게 완벽했어요. 고마워요, 언니.”문자를 확인한 소은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날 밤. 소은정은 친구들의 초대를 받았다.마침 전동하도 일 때문에 바빠 데이트도 없겠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소은정이 바로 펍으로 향했다.커다란 룸, 익숙한 얼굴들 사이로 한유라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소은정의 자리를 비워둔 한유라는 이미 거하게 한 잔 걸쳤는지 눈빛이 조금 풀어진 모습이었다.가슴까지 쿵쿵 대는 음악소리에 한유라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야, 윤시라 그 여자 파혼당했다면서? 윤시라가 큰 사고 친 것 같은데 뭐 아는 거 있어?”하, 신호민 대표...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네. 하긴, 이 세상 어느 누가 그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부처도 안 될 거야...“그래?”소은정이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하고 한유라가 자연스레 그녀의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사람들은 다 쌤통이라는 태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