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이상 숨기는 것도 의미가 없겠다 싶어 소은정은 모든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고 한유라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소은정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와, 진짜 재밌었겠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좋은 구경 놓쳤네.”그리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전기섭을 힐끗 바라보았다.윤시라가 유혹하려던 남자가 전기섭이었다니... 이 바닥도 참 좁다니까. 천한강 대표만 난처하게 됐네... 이번 일로 전인그룹과 척을 지게 된 꼴이 되었으니.한편,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환하게 웃는 소은정의 모습을 힐끗 바라보던 전기섭의 가슴이 살짝 설레였다.동하가 그렇게 비굴하게 쫓아다니는 이유가 있었네...사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예쁘장한 여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그녀가 있는 곳이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히는 걸 발견했다.눈을 뗄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그녀의 모습에 전기섭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리고 무엇보다 박수혁, 전동하도 완전히 가지지 못한 소은정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느껴질 쾌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뚫어져라 소은정을 바라보는 전기섭의 모습을 발견한 남자 한 명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전 대표님도 소은정 대표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전기섭은 대답 대신 눈썹을 씰룩거렸다.“뭐 남자라면 소은정 대표에게 빠질 수밖에 없죠. 저희는 뭐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지만 전 대표님은 다르시잖아요? 게다가 소은정 대표는 이혼 경력도 있고 오히려 저쪽이 땡잡은 거죠. 두 분 잘 어울리시는데 잘해 보세요.”다른 사람들도 바로 거들었다.“그럼요. 전동하 대표가 꾸준하게 대시하는 눈치긴 하지만... 우리 전기섭 대표님이랑은 상대가 안 되죠.”평소였다면 이렇게 전동하를 비하하는 말을 감히 내뱉지 못했겠지만 전기섭이 실종되고 전인국이 입국하며 전씨 일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이 바닥에서 그런 화제는 물어뜯기 딱 좋은 가십거리이니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소은정의 거절에 전기섭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정도 들이댔으면 대충 넘어와야 하는 게 정상이거늘 여전히 도도한 소은정의 표정이 그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소유욕을 넘어 오기가 생기기 시작한 전기섭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손 부끄럽게 정말 이럴 거예요? 우리도 나름 구면인데 술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묘한 분위기에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도도하게 팔짱을 낀 소은정이 차가운 눈동자로 전기섭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침묵에 전기섭도 꽤 창피했지만 이제 와서 돌아서면 그것이야말로 쪽 팔리는 일이니 일단 버티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어색한 대치가 이어지고 전기섭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 설마 동하 때문에 그래요? 하, 그깟 더러운 사생아가 뭐가 좋아요?”사생아...소은정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전기섭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소은정이 피식 웃었다.“사생아라... 말끝마다 더러운 사생아, 사생아. 제 귀에 딱지다 다 앉을 지경이네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대단한 전씨 집안에 사생아가 정말 동하 씨 한 명뿐인가요?”소은정의 질문에 전기섭의 미소가 차갑게 굳었다.“전 한 명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전 대표님 스스로가 더 잘 알고 계시겠죠?”방금 전까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전기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게 지금 무슨 말이죠?”여유롭게 일어선 소은정이 턱을 살짝 치켜세웠다.“글쎄요? 무슨 뜻일까요?”전기섭... 그 비밀이 언제까지 지켜질 것 같아? 동하 씨 엄마는 정부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 천륜까지 져버린 더러운 사이에서 태어난 주제에... 어디서 감히 더럽다는 단어를 입에 올려?”하지만 핵폭탄은 터지지 않을 때 가장 위협적이고 비밀은 터트리지 않았을 때 가장 위험한 법.이런 자리에서 쉽게 밝힐 수야 없지...소파에서 일어선 소은정이 전기섭을 스쳐지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술잔을 바라보던 소은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차피 이 자리에서 밝힐 생각은 없었지만 칼자루는 그녀가 쥐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점점 더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사람들이 바로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아이고, 전 대표님 많이 취하셨네. 우리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쐴까요?”“은정아, 너 화장실 간다면서. 내가 같이 가줄까?”“대표님, 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냥 하는 말일 거예요. 술은 저희랑 마시시죠.”누군가 또다시 술 얘기를 꺼내고 전기섭이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다시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든 전기섭이 소은정을 향해 걸어갔다.“좋습니다. 이 술 다 마시면 아까 있었던 일은 없었던 걸로 하죠...”하, 뭐야? 이 봐준다는 듯한 말투는... 주제도 모르고.소은정은 헛웃음을 짓더니 팔짱을 끼고 전기섭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했다.커다란 룸이 다시 침묵에 잠긴 그때.술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한유라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번쩍 떴다.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사람들을 밀치며 소은정에게 다가갔다.“은정아, 너 성격 많이 죽었다? 저런 협박에 겁 먹은 건 아니지?”한유라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SC그룹의 위상이 대단한 것도 있었지만 아직 경영수업 중인 대부분 재벌 2세들과 달리 소은정은 제대로 된 대표이자 최대 주주였다.전기섭 주위에 섰던 남자들마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술에 취해 졸고 있다 이제야 다가온 한유라를 흘겨본 소은정이 말했다.“뭐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지.”“그래서? 더 지킬 의미가 있는 것 같아?”“아니.”옆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에 전기섭은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오늘 점심 윤시라에게 거침없이 물을 끼얹던 소은정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차피 윤시라 정도야 이 바닥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지만 어느새 그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전기섭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무슨 짓을 하...전기섭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잔을 들고 있던 손이 가벼워지고 위스키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
그리고 지금은 이미 바닥까지 추락한 자존심을 다시 되찾는 게 중요했다.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에 소은정이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 거대한 힘이 그녀를 뒤로 잡아당겼다.벽에 제압당한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전기섭이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술 내음에 속이 울렁거렸다.“네가 뭔데 그딴 표정으로 날 바라봐. 사과해. 사과 안 하면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아.”하, 이젠 협박까지? 제대로 막 나가네. 망나니 같은 자식.소은정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야, 너 그거 안 놔!”한유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음 순간, 소은정이 전기섭의 팔을 잡아 뒤로 비틀었다.뚝!관절이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소은정이 하이힐로 전기섭의 배를 걷어찼다.벽에 등을 부딪힌 전기섭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순식간에 상황이 뒤집히고 또각또각 걸어간 소은정이 비아냥거렸다.“난 또... 다짜고짜 덤비길래 뭐라도 되는 줄 알았네.”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그때, 맞은 편 룸 문이 벌컥 열렸다.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소은정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동하 씨?”오늘 저녁 약속 있다고 했었잖아? 설마 약속 장소가 여기였어?전동하 역시 소은정이 여기 있을 줄은 모르고 그저 소란스러워 문을 연 것뿐이었다.하지만 놀람도 잠시 바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온 그가 소은정의 이곳저곳을 살폈다.“괜찮아요? 어디 다친 건 아니죠?”소은정이 고개를 젓고 다시 고개를 돌린 전동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전기섭?”전동하, 전기섭 두 사람 사이에서 풍기는 묘한 화학 냄새에 소은정도 왠지 긴장되기 시작했다.워낙 전동하를 싫어하긴 했지만 시궁창 같은 곳에서 며칠 동안이나 갇혀있었던 전기섭의 증오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상태였다.당장이라도 뼈까지 씹어먹고 싶었지만 더 이상 한국에서 사고를 치지 말라는 전인국의 분부가 있었기에 겨우 참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그것도 이렇게 비참한 꼴로...전기섭이 고통을 무릅쓰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 욕설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며 옆 사람들이 보기에 잔인하다 느껴질 정도의 폭력이 이어졌다.처음에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던 한유라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뭐야. 저 남자 더럽게 못 싸우네. 그런데 뭘 믿고 그렇게 나댄 거래?”이 바닥에서 재벌 2세들은 어렸을 때 납치 등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보니 어느 정도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게 태권도나 유도 같은 무술을 배우는 게 국룰이나 마찬가지였다.“전기섭은 어렸을 때부터 전문 경호원이 밀착 경호를 했거든. 그래서 필요없었던 거겠지.”“아... 그래서 지금 저렇게 맞기만 하는구나?”한유라가 피식 웃었다. 한편 소은정은 전기섭의 몸을 가로탄 채 주먹을 날리는 전동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평소 부드럽고 젠틀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마치 오랫 동안 몸을 웅크리고 있던 맹수가 사냥감을 유린하 듯 포악했다.살기로 번뜩이는 눈동자에서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이러한 전동하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분명 같은 집에서 자랐는데 온실의 화초처럼 연약한 전기섭과 별다른 초식이 없는 말 그대로 길바닥 스타일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는 전동하...무엇이 저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들어냈는지 알고 있기에 가슴이 저려왔다.짜증 나... 동하 씨가 이기고 있는데도...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섭은 반항할 힘도 없는지 바닥에 축 늘어졌지만 전동하는 기계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그만해요...”조용히 다가간 그녀의 목소리에 전동하가 드디어 행동을 멈추었다.고개를 든 전동하의 새카만 눈동자에 점차 빛이 들어왔다.그의 주먹을 잡아 어루만지던 소은정의 눈에 눈물빛이 서렸다.“됐어요. 이제 그만 가요.”자리에서 일어난 전동하가 조심스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놀랐어요?”이 와중에 그녀를 걱정하는 전동하를 향해 소은정은 최선을 다해 웃어주었다.“아니요. 손 아프죠? 집 가서 내가 약 발라줄게요.”그제야 전동하의 입가에 늘 보이던 익숙한
”주위에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데 미련하게 거기 갇혀있어? 대문은 잠겼어도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면 되잖아. 사내 새끼가 그것도 못 뛰어내려? 아무리 곱게 자랐어도 그렇지.”돌아온 그를 바라보던 전인권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도망칠 기회가 수없이 있었음에도 고집스럽게 곰팡이 핀 빵을 먹으며 구조를 기다렸다니...한심하다는 듯한 전인권의 눈빛에 전기섭이 느낀 건 끝없는 치욕이었다.주위에 보디가드를 둘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을 전동하의 오만함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전인권은 동네 창피하다며 복수는 생각도 하지 말라 했지만...바닥에 엎드린 전기섭이 몰래 주먹을 쥐었다.언젠가... 내 바지가랑이를 잡고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하게 만들어주겠어, 전동하...한편, 오피스텔 앞에서 전동하와 소은정은 누가 먼저 돌아서냐로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이걸로 한참 동안 고민할 일인가 싶어 두 사람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결국 전동하가 먼저 그녀의 등을 들이밀었다.“얼른 가요. 오늘은 푹 쉬어요.”“알겠어요. 내가 먼저 들어갈게요. 오피스텔 안에서 동하 씨가 가는 거 보면 되잖아요.”소은정의 고집에 피식 웃던 전동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냥 같이 올라갈래요?”“됐어요.”소은정이 손을 쏙 빼냈다.싱긋 미소 짓던 전동하가 다시 소은정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손목을 확 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두 팔로 허리를 안으니 전동하의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느껴지고 소은정도 왠지 마음이 착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언제면... 동하 씨가 상처를 모두 지워낼 수 있을까? 나와의 즐거운 추억으로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흔적도 없이 덮였으면 좋겠다...한참 뒤에야 전동하는 품에서 그녀를 풀어주었다.“들어가요.”안겨있던 그녀도 왠지 달라진 전동하의 신체 변화를 느끼고 도망치듯 오피스텔 안으로 사라졌다.문에 기댄 소은정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어른 대 어른으로 사귀는 마당에 너무 내숭을 버리는 것도 웃기고 소은정도 어느 정도 다음 단계 스킨쉽에 대해 마음의 준비
동하는 분명 돈도 있고 재능도 있지만 우리 가문의 지지 없이는 그저 자수성가한 젊은이에 불과해. 그런 수준으로 소은정 대표와 결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이미 결혼을 경험해 본 전인권이었기에 더 확신이 갔다.그제야 전기섭의 표정이 조금 풀리긴 했지만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여전했다.“그러니까 더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해야지. 지금 문제는 소은정 그 계집애가 날 싫어한다는 건데... 어쨌든 동하랑 계속 만나는 꼴은 난 못 봐.”“조급해 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문전박대나 당하는 주제에. 넌 도대체 밖에서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니?”전인권도 어느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어렸을 때는 나름 영리한 아이였는데 전인그룹 대표로 취임하면서 점점 더 성격이 안하무인으로 변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얼굴이 살짝 일그러진 전기섭이 복잡한 시선으로 전인권을 바라보았다.“형, 지금 동하가 형 아들이라고 두둔하는 거야? 어차피 동하랑 소은정이 결혼해도 전씨 일가에 얻는 건 마찬가지니까 누구든 상관없다 이거야?”형이라고 부르는 전기섭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전인권의 눈동자에도 어느새 분노가 피어올랐다.그 동안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동생 밖에 모르는 멍청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네 편을 들었어. 그런데 네가...!하지만 무작정 전동하에게 덤벼드는 전기섭의 행동에 실망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전기섭이 광기 어린 눈으로 전인권을 노려보았다.“어찌 어찌 해도 자기 핏줄이라 이거야? 게다가 친손주인 마이크까지 키워주고 있으니까 왜 마음이 흔들려? 다시 우리 집안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전인권의 침묵을 묵인으로 받아들인 전기섭은 더 화가 치밀었다.“동하도 밖에서 나름 잘 나가니까 왜 애초에 내친 게 후회라도 돼? 내가 아니라 동하한테 회사 물려줄 걸 후회라도 하는 거냐고!”“전기섭, 그만해!”고개를 든 전인권이 소리쳤다.다른 건 몰라도 형까지 전동하 그 자식한테 빼앗기면 난 정말 미쳐버릴지도 몰라.
여느 때처럼 박수혁과 함께인 이한석이 조용하게 그의 곁을 지켰다.올 때까지만 해도 기분 나쁘지 않으셨는데... 그런 얘기는 제발 집에서 하라고...이한석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이때 비서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죠. 들어오세요...”역시 프로라 그런지 방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박수혁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전인권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전인권이 소파에서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죄송합니다. 박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죠...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실례 많았습니다.”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온 박수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닙니다. 전기섭 대표가 풀려났으니 걱정거리가 없으시겠어요. 요즘 바쁘게 지내고 있죠?”“아닙니다. 기섭이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진중한 멋이 없어요. 아직 배우고 있는 단계입니다.”“말씀드린 건 다 준비하셨나요?”박수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묻고 전인권이 부랴부랴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인그룹은 A시에 첫 한국지사를 지을 예정입니다. 착공식도 이미 진행했고요. 태한그룹과의 계약서는 이미 작성했으니 확인해 보세요.”비록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전인권이 훨씬 더 우위였지만 워낙 다가기 어려운 박수혁의 포스에 왠지 기가 죽는 전인권이었다.게다가 전기섭을 찾아주는 조건으로 진행된 계약이라 일단 한수 접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계약서를 확인하던 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생각이 바뀌었어. 전인그룹... 그냥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결심을 내린 박수혁이 고개를 들었다.“계약이야 뭐... 언제든지 사인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전인그룹이 한국에 자리를 잡으면 그때 다시 얘기하시죠.”전기섭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모든 게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반 년안에 새 건물로 옮길 수 있을 것 같네요. 준공식에 박 대표님도 꼭 와주세요.”“아, 저까지 갈 필요가 있나요.”피식 웃던 박수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전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