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전동하에게 전씨 일가는 가족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남보다 더 못한 존재였다.눈엣가시 같은 전인그룹을 지금까지 내버려 둔 건 그저 귀찮았기 때문, 그뿐이었다.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소찬식이 살짝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나가 봐. 은정이 그 자식 지금쯤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말없이 일어선 전동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서재를 나섰다.내 과거를 인정해 주시는 건가?나랑 은정 씨... 이제 정정당당하게 만날 수 있는 건가?잔뜩 경직되어 있던 얼굴 근육에 힘이 풀리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전동하였다.가장 큰 고비는 넘겼네.한편, 소은정은 마이크와 함께 2층 방으로 올라왔다.자가 업데이트 실패가 꽤 충격적이었는지 한동안 시무룩하던 소호랑도 마이크의 등장에 다시 기운을 차리고 폴짝폴짝 뛰어올랐다.소호랑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던 마이크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렇게 한참 동안 웃고 떠들던 그때...집사가 문을 두드렸다.“식사 준비 다 끝났습니다. 회장님께서 내려오시라네요.”“동하 씨는... 갔어요?”“아니요. 1층에서 회장님과 함께 바둑을 두시는 중입니다.”오호, 얘기가 생각보다 잘 풀렸나 보네... 역시 아빠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어.흐뭇한 미소를 지은 소은정이 마이크의 손을 꼭 잡고 1층으로 내려갔다.마이크의 애교와 재롱 덕분에 식사도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어졌다.식사 후.“아, 저는 일 때문에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전동하가 소파에서 일어섰다.하지만 마이크는 아빠 말고 소은정과 함께 있겠다며 그녀의 곁에 꼭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아, 오늘은 누나랑 자고 갈래요. 네네?”마이크의 성화에 전동하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삼촌, 물고기들 통통하게 자랐어요? 우리 연못으로 가보면 안 돼요?”그렇게 두 사람은 낚시대를 들고 연못으로 향하고 긴장이 풀리며 피곤함이 밀려온 소은정은 2층 방으로 올라가 낮잠을 청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저녁 6시.휴대폰을 확인해 보
전동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 본 소은정이 전동하 곁으로 다가갔다.“박수혁은 아마 전기섭을 우리 아빠한테 안내하는 정도만 했지 마이크 납치와는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커요.”“왜 그렇게 생각해요?”전동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박수혁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에요. 자기한테 불리한 일은 거의 하지 않죠. 마이크를 납치해 봤자 박수혁한테 좋을 게 하나 없어요. 오히려 이 사실이 밝혀지면 명성에는 물론이고 태한그룹 주가까지 떨어지겠죠. 그리고 정말 가담했다면 다음 날 나한테 그 위치를 말해 줬을 리도 없을 테고요.”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전동하가 피식 웃었다.“그럼 내가 박 대표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요?”“글쎄요. 어차피 본인이 직접 말하지 않았다 해도 동하 씨가 알아보면 충분이 알아볼 수 있었겠죠. 오히려 그렇게 밝혀지면 전기섭과 한패라고 의심받을 걸 아니까 저쪽에서도 미리 선수를 쳐서 손을 긋는 거고요.”소은정의 분석에 전동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아마 은정 씨한테서 고맙다는 말 한 마디라도 들으려고 알려준 걸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쪽에서 알면 꽤 약 오르겠네요.”내 말이 틀렸나?소은정이 어깨를 으쓱했다.“그래요. 은정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고요.”박수혁... 이번에도 허탕쳤네.괜히 전동하를 흘겨보던 소은정이 국을 한숟가락 떴다.깔끔하고 담백한 맛에 소은정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지만 몇 술 뜨다 곧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어휴, 더 먹으면 안 돼. 관리해야지...“다 먹었어요. 마이크한테는 대신 인사 전해 줘요. 난 일단 내려가서 회사 일 좀 처리해야겠네요.”고개를 끄덕인 전동하가 그녀를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소은정이 문을 나서려던 순간, 전동하가 그녀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뭐 까먹은 거 없어요?”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다.휴대폰도 챙겼고 핸드백도 챙겼고... 까먹은 거 없는데?소은정이 고개를 젓자 전동하가 손목에 힘을 주어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
소은정은 그의 품에서 도망치기 위해 애써 발버둥을 쳐봤지만 온몸에 힘이 빠지며 다리에 힘이 풀리고 결국 전동하의 팔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쪽팔려...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 따뜻한 전동하의 입술이 닿는 순간, 공기의 흐름이 멈춰버린 듯 더 이상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전동하와 첫키스를 나눴을 때 광경이 소은정의 뇌리를 스쳤다.소중한 보석을 다루 듯 부드럽던 터치와 달리 전동하의 키스는 그녀의 영혼까지 빨아들일 듯 거칠게 몰아쳤다.이미 정신이 아득해진 소은정은 전동하의 리드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찌릿찌릿해졌다. 전동하의 치명적인 키스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그렇게... 이 세상에 두 사람만 남은 듯 달콤하지만 거친 키스를 나누고 있던 그때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이 달콤함을 깨트렸다.“으아악!”샤워를 마친 마이크가 낸 소리였다.이게 무슨 상황이지?동그란 눈동자에는 분노, 실망 그리고 아빠에 대한 증오가 그대로 담겨있었다.갑작스러운 소리에 전동하를 확 밀친 소은정도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는 마이크를 발견했다.이 난처한 상황에 소은정의 작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살짝 부어오른 입술을 깨물던 소은정은 이 모든 사달의 범인인 전동하를 매섭게 노려봐준 뒤 도망치 듯 오피스텔을 나섰다.붙잡을 새도 없이 나가버린 소은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전동하가 피식 웃더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은근 쑥스러움 잘 타는 성격이란 말이야...한편, 감정을 추스른 전동하가 마이크를 향해 말했다.“그만해!”짜증과 분노가 살짝 담긴 호통에 마이크는 바로 비명을 멈추었지만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전동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탁 앞으로 걸어가 식사를 시작했다.그 모습에 마이크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뭐야? 내 기분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거야?짧은 다리로 식탁 옆의 의자에 오른 마이크가 분노로 가득한 눈동자로 아빠를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마이크가 눈물을 닦으며 절규했다.이렇게 불쌍한 척이라도 해 보이면 전동하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아빠는 너무 늙었잖아요. 다른 여자랑 사귀면 안 돼요? 이번에는 절대 안 괴롭힐게요. 그러니까 예쁜 누나는 나한테 돌려줘요...”순간, 전동하의 곁을 맴돌던 수많은 여자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그 여자들이 뭘 노리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온갖 술수로 여자들을 쫓아냈었던 마이크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내가 내 무덤을 팠던 거였어...하지만 전동하는 아들의 마음을 바로 꿰뚫어 본 듯 피식 웃었다.“기다린다는 말은 그냥 네 장단에 맞춰준 거잖아. 그걸 진짜 믿으면 어떡해? 그리고 아빠는 진심으로 은정 씨가 좋아. 아, 앞으로 어떻게 아빠 재산을 빼앗을까 고민 안 해도 돼. 이제 아빠 돈은 전부 은정 씨를 위해 쓸 거니까...!”전동하의 말과 함께 마이크의 울음소리가 더 세차게 울려 퍼졌다.1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절망이었다.한편, 전동하는 아주 침착한 얼굴로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까지 끝내고 욕실로 향했다.하, 모른 척 하겠다 이거지?마이크는 쫄래쫄래 전동하의 방으로 자리를 옮겨 그의 침대에 누워 계속 오열하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전동하의 머리도 지끈거리기 시작했다.휴, 방음이 좋아서 다행이야...하지만 전동하는 애써 마이크를 무시한 채 침대에 누워 자는 척 눈을 감았고 그 모습에 한동안 훌쩍이던 마이크도 지쳤는지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전동하는 마이크를 번쩍 안아 세수를 시킨 뒤 직접 오늘 입을 옷을 코디해 주기 시작했다.비몽사몽한 상태로 전동하의 손에 이끌리던 마이크가 정신이 든 듯 바로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용서 못해요... 당장 헤어져요!”마이크의 말에 전동하의 손이 멈칫했다.“아들, 이성적으로 생각해. 지금 은정 씨가 아빠랑 사귀니까 자주 얼굴도 볼 수 있고 하는 거야. 만약 다른 남자와 사귄다면
사실 어젯밤, 마이크에게 키스 장면을 들켰다는 사실에 소은정은 한참을 뒤척인 뒤에야 잠이 들었다.마음 같아선 며칠 동안 잠수라도 타고 싶었지만 그룹 대표인 그녀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게다가 오늘은 마이크의 새 학교로 가보기로 한 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했던가? 소은정은 우연준에게 오늘 아침 회의를 취소한다는 문자를 보낸 뒤 약속시간보다 먼저 내려와 두 사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두 부자가 다가오고 전동하를 향해 싱긋 웃던 전동하가 허리를 숙여 마이크를 향해 손을 저었다.“좋은 아침이야.”순간, 어젯밤 광경이 다시 떠오르며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아빠의 경고를 떠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좋은 아침이에요, 예쁜 누나...”뭐야. 나랑 결혼하기로 해놓고 어떻게 아빠랑... 어른들은 다들 약속을 안 지키는 건가?소은정에 대한 원망이 남아서인지 마이크의 미소는 어색을 넘어 왠지 기괴하기까지 했다.“오늘은 일단 구경만 하는 거야.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말해.”소은정이 마이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음? 마음에 안 들면 안 가도 되는 건가?순간 마이크가 눈을 반짝였다.차를 타고 학교로 가는 내내 마이크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소은정은 전동하가 준비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이때 전동하가 우유를 건넸다.“천천히 먹어요. 체하겠어요.”싱긋 웃으며 우유를 받아든 순간, 두 사람의 손가락끝이 살짝 스쳤다.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소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전동하를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하, 틈만 나면 유혹한다니까, 여우 같은 남자...잠시 후. 사립국제학교에 도착한 소은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깔끔한 인테리어, 최첨단 설비, 그리고 최고급 교사 인력까지.무시무시할 정도로 비싼 학비로 인해 이곳에 입학할 수 있는 건 전부 서산에서 나름 한가닥 한다는 집안 자제들이었지만 그마저도 학교에서 준비하는 레벨 테스트에 통과해야만 입학이 허가되는 곳이기도 했다.먼저
전동하가 소은정을 SC그룹 앞에 내려주고 그녀는 부랴부랴 아침에 미뤄두었던 회의를 시작했다.거성 프로젝트도 어느새 막바지 단계, 전동하는 유럽 전시회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거성그룹에 주둔하던 남종석도 다시 본사 재무팀으로 돌아왔다.회의를 마치고, 우연준이 자료 뭉치를 든 채 사무실로 들어왔다.“대표님, 지성그룹 프로젝트 진행 상태 보고서입니다. 전체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운전기사 딸 말입니다... 결국 백혈병으로 세상을 떴다더군요.”잠깐 침묵하던 소은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어요. 이제 이 일도 나름대로 끝을 맺게 됐네요.”우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최근, 장일성 배후에 있는 조폭세력 소탕을 위한 검찰 전담팀이 만들어졌으니 날고 긴다하는 장일성도 이번에는 법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짧은 브리핑 후, 소은정은 오전내내 밀린 보고서들을 검토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오후 5시쯤, 겨우 급한 검토를 마친 소은정이 기지개를 켜던 그때, 우연준이 잔뜩 굳은 얼굴로 사무실로 달려들어왔다.“대표님, 큰일났습니다!”항상 예의 바른 우연준이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소은정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인데요?”하지만 다급한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던 우연준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건넸다.“단독 보도, 모델 윤지섭. 스폰서 이름 공개, 전 소속사 대표 김 모로 밝혀져...”태블릿에 뜬 기사 제목을 읽던 소은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김 모?하늘이?소은정은 떨리는 손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에 관한 뉴스가 이미 페이지 타이틀을 장식하고 있었다.마약 사건으로 국제 패션업계에서 쫓겨난 뒤 자숙 기간을 가지고 있던 윤지섭이 터트린 초대형 폭탄은 기자들과 대중들의 흥미를 최대로 끌어오르기에 충분했다.윤지섭은 폭로글에 김하늘과의 채팅 기록은 물론 그녀의 노출 사진까지 업로드한 듯 싶었다.온갖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김하늘은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비록 얼굴
항상 침착하던 소은정이 소리를 높였다.“그럼 이렇게 둘 거예요? 지금 사람들이 하늘이한테 뭐라고 하는지 봤어요? 우리 하늘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김하늘은 그저 허영과 탐욕으로 가득한 윤지섭에게 질려 헤어진 것뿐이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김하늘이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소은정의 날카로운 질문에 도준호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저도 압니다. 하지만 지금 기사는 퍼질대로 퍼진 상태예요. 내려도 달려지는 건 없을 겁니다. 가장 빠른 건 남자 측에서 사과나 해명글을 쓰는 거긴 한데... 은해 씨가 벌써 그쪽으로 갔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네요...”뭐? 오빠가?눈이 휘둥그레진 소은정은 바로 전화를 끊고 사무실을 나섰다.“우 비서님, 회사 일은 일단 은호 오빠한테 결제받아요.”“네.”김하늘 대표는 대표님의 가장 친한 친구기도 하지... 저렇게 나오시는 것도 이해가 가...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내내 소은정은 미친 듯이 소은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부 묵묵부답이었다.충동적인 소은해 성격에 정말 윤지섭을 때려죽인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으니 소은정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차에 탄 소은정은 잠깐 고민하다 다시 도준호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윤지섭 지금 어디에 있죠?”“고향인 백동시로 내려간 것 같습니다.”“알겠어요.”전화를 끊은 소은정은 백동시를 향해 엑셀을 밟았다.충격을 받았을 김하늘, 단단히 화가 났을 소은해... 양쪽 다 걱정되는 상황에 마음만 조급해질 따름이었다.분신술이라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결국 소은정은 한유라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하늘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한유라의 목소리에도 초조함으로 가득했다.“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지금 내가 하늘이한테로 가는 중이야. 회사에 있다는데 윤지섭 팬들이랑 기자들이 이미 회사 앞에 진을 치고 있다더라. 그리고 그 댓글들... 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대댓글
윤지섭이 죽어버리면 김하늘의 결백을 밝혀줄 유일한 사람이 사라지는 건 물론이고 윤지섭의 살인 혐의까지 씌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정말 그렇게 된다면 김하늘이 아무리 억울하다 울부짖어도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살짝 흠칫하던 소은해가 잔뜩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딴 건 모르겠고 난 죽여야겠어! 하늘이 대신 복수해 줘야겠다고!”방금 전 난투로 인해 소은해의 죽여버리겠다는 말이 허세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낀 윤지섭은 공포에 질린 채 구석에 숨어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소은해의 손목을 잡은 소은정이 오빠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윤지섭은 벌을 받게 될 거야. 괜히 오빠 손 더럽히지 마.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빠는 하늘이한테 가봐.”하늘의 이름을 들은 소은해의 눈동자가 슬프게 반짝였다.하지만 이대로 여길 떠나고 싶지 않았다. 윤지섭의 팔 하나라도 부러트리지 않으면 이 타오르는 분노가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까.“얼른 가라고! 하늘이가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소은해의 팔목을 꽉 잡은 소은정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순간 소은해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고개를 든 소은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래. 저 자식을 죽여버리는 건 언제 해도 돼. 일단 하늘이를 지키는 게 먼저야.그제야 한 발 물러선 소은해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윤지섭을 노려봐 준 뒤 성큼성큼 집을 나섰다.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린 뒤에야 소은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윤지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맞아서 멍투성이가 된 걸 감안하더라도 몰라 보게 마른 얼굴에서 첫 만남 때의 빛을 찾아보긴 힘들었다.또각또각 걸어간 소은정이 말했다.“꼴을 보니까 약은 아직 못 끊었나 봐요?”그녀의 질문에 흠칫하던 윤지섭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소은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대표님, 대표님은 돈 많으시죠? 저 돈 좀 빌려주세요. 어떻게든 갚을 테니까 제발요. 하늘이 일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돈만 빌려주시면 바로 해명하겠습니다.”순간, 공기속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윤지섭을 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