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소은정을 바라보던 천한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니?”잠깐 고민하는 듯한 소은정이 입꼬리를 올렸다.“이렇게 하죠. 손호영 씨 이미지 세탁에 사용되는 돈은 윤시라 씨가 전부 지불하는 걸로. 그리고 윤시라 씨더러 우리가 어떻게 만났으며 왜 신포그룹에서 쫓겨났고 또 왜 저희 SC그룹에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 전부 밝히는 사과 영상을 업로드하면 이 영상은 내리도록 하죠.”소은정이 이런 요구를 제기할 거라고 예상치 못한 천한강의 낯색이 살짝 어두워졌다.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소은정의 제안에 천한강이 침묵하자 그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이 일이 없는 일처럼 조용히 해결된다면 저희 SC그룹의 체면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여론적으로도 피해자의 증거보다는 진심어린 사과 영상이 더 잘 막힐 겁니다. 그리고 손호영 씨한테 사용되는 비용은...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을 겁니다. 뭐 정 못 내겠다고 한다면 그 정도는 제가 대신 낼 생각도 있고요. 제가 원하는 건 사과영상이니까요. 아저씨가 여기까지 오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타협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윤시라 씨 혼자였다면 아마 며칠이고 저 밖에서 절 기다릴 수밖에 없었겠죠. 아, 물론 이건 명령이 아닌 제안입니다. 거절하셔도 돼요.”제안임을 강조한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어쨌든 영상이 더 퍼지든 말든 그녀에게는 별 영향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똥줄이 타는 건 그쪽이겠지. 어디 한 번 선택해 봐.회사를 위해서라면 소은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하지만 그럼 시라는... 영원히 이 바다에서 매장되고 말 거야...한참을 망설이던 천한강이 타협을 시도했다.“사과 편지로 대신하면 안 되겠니?”“글쎄요. 사과 편지는 대필이네 뭐네 말이 많을 겁니다. 그리고 이 일로는 흥정하고 싶지 않아요. 정 안 내키면 사과 안 하면 그만이니까요.”내가 원하는 건 윤시라 그 여자가 자기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는 거예요, 아저씨...살짝 가시 돋친
천한강의 저택.천한강의 딸과 아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다.그들이 가장 두려운 건 결국 회사에까지 영향이 미치는 것. SC그룹의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면 말 그대로 끝일 테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가장 상석에 앉은 천한강은 어두운 표정으로 윤시라를 바라보았다.“시라야...”천한강의 목소리에 윤시라의 몸이 움찔거렸다.“아빠, 제가 직접 가서 그 여자한테 사과할까요?”“은정이 말로는 손호영 이미지 세탁을 위해 사용되는 비용 모두 네가 부담했으면 좋겠다더구나.”윤시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네. 그럴게요.”“그리고...”망설이던 천한강이 결국 말을 이어갔다.“영상을 찍으라더구나. 네가 직접, 은정이와 만난 그날부터 한치의 거짓없이 전부 밝히라는 게 은정이 뜻이야.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해 전부 사과한다면 영상을 내리겠다고 했어.”순간 윤시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안 돼요. 그건 너무 심하잖아요. 그리고 왜 이 일에 다른 일까지 끌어들여야 해요?”윤시라의 말에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고 천한강의 자식들인 천진수와 천진아가 서로를 바라보았다.“심하다고? 내가 볼 때는 양가의 체면을 위해 최대한 양보한 것 같은데.”천진아의 말에 천진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소은정의 잔인한 수단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소은정이 정말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천한그룹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이건 저랑 소은정 그 여자 사이의 일이에요. 그리고 옛날 일까지 굳이 끄집어내는 이유가 뭔데요. 그 제안 받아들이면 안 돼요!”하지만 윤시라의 애원에도 천한강은 침묵할 뿐이었고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오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오빠, 정말 이렇게 그냥 타협할 거예요? 그 여자, 난 물론이고 언니, 오빠, 아빠 그리고 우리 집안 전체를 우습게 보는 거라고요!”가족들만 내 편을 들어준다면... 더 강경하게 나와준다면... 소은정도 억지를 부리지 못할 거야.하지만 천진수의 어이없다는 미소에 윤시라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천진아와 천진수 역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동시에 일어섰다.2층으로 올라가기 전 집사에게 분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10분 뒤에도 아무 말 없으면 내보내세요. 내일 바로 기자회견 열어서 딸을 되찾았다는 말 전부 오해였다고 발표할 테니까.”워낙 어렸을 때 헤어진 터라 쌓은 정도 별로 없는 천진아, 천진수 남매에게 윤시라는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는 굴러들어온 돌이나 마찬가지였다.게다가 따로 알아보니 그 동안 해온 짓들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이대로 남겨두면 언젠가 그룹에 큰 해가 될 거야. 차라리 그전에 우리가 먼저 내치는 게 맞아.혼자 남겨진 윤시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이렇게 버려졌다고? 내가?...SC그룹.소은정이 커피타임을 즐기던 그때 우연준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윤시라 씨가 사과 영상을 업로드했습니다. 한 시간만에 조회수가 10만을 넘었고요. 그리고 어부지리 격으로 손호영 씨의 이미지까지 좋아져 저희 신제품도 반응 좋을 것 같은데요?”일석삼조... 역시 대표님이셔!소은정 역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도준호 대표한테도 이 사실 전해요. 손호영 씨 곧 새 드라마 들어간다던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네.”우연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은정이 태블릿을 클릭했다.평소와 달리 청순한 차림의 윤시라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저와 소은정 대표가 처음 만난 건 한 달 전 레스토랑에서였습니다...”울먹이는 목소리로 윤시라는 그 동안 저질렀던 역겨운 짓을 전부 실토했다.아마 조금이라도 숨긴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지금 주동권은 완벽하게 나한테 있으니까.영상을 전부 확인한 소은정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영상에 달린 댓글수도 폭발적이었다.“윤시라 저 여자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저 정도면 망상증인데?”“하... 간도 크지... 저런 짓을 어떻게 저지른대?”“호영 오빠, 때려요. 때려!”“신포그룹에서 쫓겨나고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나 같으
회사일이 바쁘지 않을 때면 직접 현장에서 소품 배치며, 조명이며 사소한 사항까지 도움을 주었던 소은정 역시 덩달아 흐뭇해졌다.비록 아직 약혼식일 뿐이지만 초대한 하객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물론 최대한 조용하게 하고 싶다는 소은호, 한시연의 의견을 따라 언론에는 발표하지 않았고 초대장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만 참석하는 화려하면서도 조용한 약혼식이 만들어졌다.한유라와 심강열도 얼굴을 비추었지만 약혼 선물만 전하고 바로 자리를 떠버렸다.아마... 이것까지 지켜보기엔 아직 무리겠지.그 마음을 알기에 소은정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한숨을 내쉰 소은정이 대기실로 향했다.단아한 흰 드레스를 입은 한시연 위로 쏟아지는 조명 덕에 워낙 흰 피부가 투명하게 느껴졌고 얼굴에 걸린 맑은 샘물 같은 미소에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잠시 후, 식이 시작되고 하객들은 약혼 장소의 신비로운 인테리어와 아름다운 두 연인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소찬식은 워낙 새로운 걸 좋아하는데다 하객들의 칭찬도 끊이지 않으니 저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렸다.식이 끝나고 AI 로봇들이 서빙이며 안내를 맡아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그 중에는 소은정에게 직접 로봇 구매 루트에 대해 묻는 이들도 있었다.잠시 후.익숙한 차량이 정원 앞에 멈춰섰다.소은정이 미소와 함께 다가가고 AI 로봇이 차문을 열어주었다.“오늘의 VIP 손님을 모십니다.”마이크는 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로봇에게 시선을 빼앗겼고 그 뒤에 앉아있던 전동하가 아이를 번쩍 들었다.“얼른 내려! 창피하게!”고개를 돌린 마이크가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홱 돌렸다.“흥, 친아빠 맞아?”“많이 바빴나 봐요? 왜 이렇게 늦었어요.”소은정의 말에 전동하가 싱긋 웃었다.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전동하의 눈동자는 맑게 빛나고 있었다.“미안.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마이크가 달려가 바로 소은정의 손을 잡았다.“예쁜 누나, 평소에도 예쁘지만 오늘은 유난히 이쁘네요.”오늘의 소은정은 그레이톤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치
예쁜 누나와 떨어지는 게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곧 다시 만날 거란 생각에 잠깐 망설이던 마이크는 결국 예쁜 누나의 손을 놓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하여간 애는 애라니까.전동하가 피식 웃었다.소은정이 마이크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낸 건 강서진이 왔다는 건 그 사람도 왔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역시나 고개를 돌리니 강서진 옆에 서 있는 박수혁의 얼굴이 보였다.꽤 오래만에 만나는 것이었지만 박수혁은 여전한 모습이었다.굳이 달라진 점을 찾자면... 워낙 차갑던 분위기가 더 냉랭해진 것 정도랄까?소은정 옆에 서 있는 전동하가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손의 온기가 심장까지 전해지고 방금까지 차갑게 식었던 마음이 다시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고개를 돌린 소은정은 전동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은 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강서진에게 말을 걸었다.“서진 씨, 바쁜 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요즘 거의 반연예인처럼 사시잖아요?”강서진은 전 와이프인 추하나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그녀가 고정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반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었는데 능청스러운 모습으로 나름 인기 몰이 중이었다.“역시... 은정 씨는 여전히 독설가시네. 나 뼈 맞았어요.”강서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뭐, 재밌잖아요?”소은정의 여유로운 미소에 강서진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박수혁 혼자 왔다가 괜히 깽판이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오긴 했지만 소은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역시 후회가 밀려왔다.하지만 소은정에게 여전히 그의 나체사진이 있으니 반박도 할 수 없고 더 미칠 노릇이었다.저 흑역사를 어떻게 지워야 하지...강서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박수혁은 차가운 시선으로 전동하, 소은정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그의 매서운 눈초리가 꼭 잡은 두 사람의 손에 살짝 멈추고 곧 별일 아니라는 듯 시선을 돌렸지만 누군가 심장을 쥐어뜯 듯 가슴이 욱신거렸다.“전동하 대표님, 거성 프로젝트도 이제 막바지네요. 해외 특허 신청, 전시회 참여에 관한
사실 손을 홱 놓아버린 게 마음에 걸렸지만 농담을 하는 걸 보니 화가 난 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소은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나 그런 여자 아니에요.”그리고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소은정이 다시 슬그머니 전동하의 손을 잡았다. “동하 씨가 나랑 가장 잘 어울리는 파트너인데 내가 어디로 가요.”그녀답지 않은 닭살 멘트에 소은정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불빛이 어두워서 다행이야...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전동하의 입가에 미소가 실렸다.낯섬에서 익숙함으로 익숙함에서 친절함으로...그에 대한 소은정의 태도가 점점 바뀌고 있다는 걸 전동하도 느끼고 있었다.어느새 그의 세계로 더 깊이 발을 들이는 소은정을 바라보며 전동하는 왠지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한편, 전동하와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소은정의 모습을 발견한 소찬식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다른 사람이 보기엔 형식적인 파티 파트너일지 모르겠지만 소찬식은 그게 아님을 알고 있으니 표정 관리가 더 힘들었다.두 사람의 사이를 딱히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허락도 하지 않았다.어차피 젊은이들의 연애란 불확실성이 많은 것.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헤어지겠거니 했는데 한 달이 지났는데도 헤어지긴커녕 더 다정해진 모습에 왠지 불안해졌다.이때 소찬식의 친구가 다가와 자연스레 그의 옆에 앉았다.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소은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친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자식 키워봤지 소용없어. 은정이랑 전 대표 선남선녀에 잘 어울리는데... 이러다 다음 청첩장은 은정이 몫이겠어?”친구의 주책맞는 말에 소찬식의 마음은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은호 말고 은찬이, 은해도 있어. 은정이 차례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무슨 소리야!”“하여간 은근히 보수적이라니까.”요즘 순서대로 결혼하는 집안이 몇이나 된다고.한편 소찬식의 마음도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집안이면 집안, 외모면 외모, 성격이면 성격... 사람만 놓고 보면 눈 씻고 찾아도 찾기 힘든 최고의 사윗감이지만...
하지만 소찬식이 묻기 전에 전기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회장님, 제가 오늘 실례를 무릅쓰고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온 건 박 대표님의 부탁을 받아 회장님께 저희 집안의 비밀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전기섭의 말에 소찬식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박수혁을 바라보았다.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박수혁이 입을 열었다.“회장님, 요즘 은정이가 전동하 대표와 각별한 사이로 지내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네. 제 사적인 욕심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은정이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큽니다. 그래서 차마... 직접 은정이한테 알려줄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소찬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기섭을 바라보았다.“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지만... 집안의 사적인 비밀을 제가 알아도 괜찮을까요?”저번에 우리 집에서 한 말 말고 또 비밀이 있단 말이야? 딱히 듣고 싶지 않은데...게다가 소은정의 말에 따르면 전기섭은 겉보기엔 점잖고 침착한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교활하다고 하니 엮이지 않고 싶은 마음이 컸다.전기섭이 진심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제가 거짓말을 하는 거면 어떡하나 걱정하시는 거 압니다. 전에 제가 한 제안도 결국 거절하셨더군요. 그 결정 저도 존중합니다. 이제 얽혀있는 이해관계가 없으니 더 편한 입장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으니까요.”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소찬식이 미소를 지었다.“좋습니다. 그럼 한 번 들어보죠.”박수혁을 힐끗 바라보던 전동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사실 전동하의 어머니는 미국 교포였습니다. 외모는 빼어났지만 가난했죠. 그런 여자가 해외에서 돈을 빨리 벌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업소에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 형님을 만나 정부가 되었죠. 그 결과로 동하가 태어났지만 형님은 애초에 이혼할 생각이 없었고 그 모습에 화가 난 건지 동하와 함께 죽어버리겠다고 형님을 협박했죠. 그래서 동하를 저희 집안에 들인 겁니다.”여기까지 말을 이어가던 전
하지만 소찬식은 형식적인 인사도 할 생각이 없는 듯 말없이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잔뜩 굳은 소찬식을 힐끗 바라보던 박수혁이 말했다.“회장님, 저도 어디까지나 은정이를 위해 전기섭을 여기까지 부른 겁니다. 전동하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해 과거를 깨끗하게 세탁했죠. 어쩌면 전기섭은 전동하의 진짜 모습을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일지도 모릅니다...”한참을 침묵하던 소찬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래. 우리 은정이... 걱정해 주는 마음은 고맙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지 않나? 신랑 아버지가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손님 맞이도 해야 하니 이만 가보겠네. 자네도 어서 나가보게.”소찬식의 비정상적인 차분함에 박수혁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별다른 불평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박수혁이 휴게실을 나간 뒤에도 소찬식은 한참 동안 휴게실에 멍하니 앉아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딸과 사귀고 있는 남자의 끔찍한 과거에 대해 안 이상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티를 낼 수 없으니 마음을 누르고 또 억눌렀다.물론 전기섭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아예 믿지 않기엔 너무나 찝찝했다.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전동하는 왜 과거를 숨긴 것일까?밀려드는 의문이 가시처럼 그의 마음을 콕콕 찔렀다.은정이야 지금 콩깍지가 씌워진 상태니 말해도 별반 소용없을 테고... 나라도 신경 써야겠어.어느새 초대한 하객들이 거의 다 모였다.그 동안 소은정과 전동하는 항상 붙어있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그저 비즈니스적으로 엮인 게 많다 보니 친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하객들과 돌아가며 술을 마시다 보니 소은정은 왠지 기가 쪽 빠지는 기분이었다.와인잔을 내려놓은 소은정이 휴게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워낙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고 걸음을 옮기는 소은정의 모습이 왠지 위태로워 보였다.그런데 그때, 잘 걷던 소은정이 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