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실장이 이미 F국 측 병원에 연락해 뒀어. 3일 뒤에 출국해.”출국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민혜경의 두 눈은 당황한 기색으로 가득해졌다. 민혜경이 이내 간절한 목소리로 서준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서준 씨, 나, 나, 가고 싶지 않아. 아기랑, 서준 씨랑 B시에 있을래.”서준의 어두운 얼굴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굳건했다. 혜경이 앞으로 나아가 서준의 팔을 붙잡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아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언니, 민혜주도 좀 생각해 줘. 한씨 집안의 일로 세상을 떠났잖아. 언니를 생각하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혜주 일을 생각하면 분명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혜경이 넌 떠나야 해.” 서준의 말을 들은 혜경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된 탓에 집에 있는 것이 너무도 답답한 서준이었다. 때마침, 나운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서준아, 실시간 검색어 봤어?] 수화기 너머의 운석이 물었다.서준은 운석이 하연과 관련된 기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오보야, 경찰도 이미 철수했어.”[너, 나랑 다른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확인해 봐, 너희 집에 관련된 내용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서 엄청나게 욕먹고 있으니까. 회사 홍보팀한테 빨리 처리하라고 해.]운석과의 전화를 끊은 서준이 재빨리 뉴스 기사를 확인해보았다. 기사를 확인한 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준의 두 눈동자에서는 광풍과 소나기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최하연,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반격한다고?’ ‘혜경이가 자신에 대한 허위 기사를 날조하여 인터넷에 게시하니까, 우리 가문에 본때라도 보여주려고 바로 대응해 오는 거야?’ 서준이 즉시 동후에게 전화를 걸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온 기사를 내리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동후에게서는 기사를 내릴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위클리 뉴스의 편집장이 반드시 한씨 가문에 관한 기사를 3일간 실시간 검색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다른 언론은 손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저 여자…….’무대 위의 사랑스러운 여자를 본 운석이 발걸음을 멈추었다.그 여자가 부르고 있는 노래는 유명한 발라드, ‘바람’이었다. 그녀의 신비로운 목소리가 바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살며시 의자에 앉은 그 여자의 아름다운 뺨으로 한 줄기의 조명이 내려왔다. 곧이어 그 여자의 검은 머리칼이 흔들리고, 붉은 입술이 열렸다. 그 여자의 감미로운 노랫소리는 청중들로 하여금 시공간을 넘나드는 느낌이 들게 했다. 그 여자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운석의 귀를 파고들자, 운석의 머릿속에 발코니에서 울던 하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밤,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고 있던 하연의 눈은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운석은 자신의 가슴에 직격탄을 날리는 듯한 하연의 아름다움 모습에 매료되어, 눈도 한번 깜빡거리지 않은 채 하연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자기야, 너무 감동적이라 눈물이 날 지경이야! 신나는 노래 좀 불러봐!” 무대 아래의 예나가 하연에게 소리쳤다.하연이 무대 아래의 친구들을 향해 윙크를 했다. “그래, 알았어.”곧이어 하연은 ‘사랑해'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는 하연의 얼굴에는 생동감 있는 웃음이 가득했다. 거기에 발로 장단을 맞추는 모습까지 더해지자 전체적으로 대단히 세련되고 매력 있어 보였다. 노래의 가사는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노래의 품격 역시 소탈했다. 무대 아래, 모든 청중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 청중들은 하연이 부르는 노래의 선율에 몸을 맡긴 채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연이 노랫소리로 인해 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운석의 머릿속에 오동나무가 즐비한 F국의 한 거리가 펼쳐졌다. 운석은 자신의 손을 잡은 채 그 거리를 걷고 있는 하연의 모습을 상상했다. 한마디로, 하연에게 완전히 매료되어버린 운석이었다. 운석은 여태 하연과 같이 자신의 심장을 파고들 정도로 아름답고 다채로운 모습을 가진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운석은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를
핸드폰의 알림 소리가 울리자, 하연이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하성이 보내온 문자였다. [우리 하연이, 오빠 안 보고 싶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이 셋째 오빠가 네가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조만간 F국에서 보자.] 하연이 온몸에 돋아난 닭살을 떨쳐내며 자판을 두드리며 답장을 보냈다. [안 보고 싶거든!]답장을 보낸 하연이 고개를 돌려 비서에게 지시했다. “저를 대신해서 서명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꽃은 회사의 여직원들에게 나눠주세요.”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비서가 하연의 사무실을 떠났다.하연은 계속해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때, 개발팀의 본부장인 유신혁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책상으로 다가와 하연에게 파일을 건네는 유신혁의 눈동자가 총명함으로 가득했다.“이번 달의 이윤표입니다. 한 번 보시죠.”아직 파일을 받아들지 않은 하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유신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유 부장님이 직접 오시다니, 무슨 일입니까?”하연이 유신혁의 손에 있던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제 비서에게 맡기시면 될 일입니다. 이렇게 번거롭게 하지 않으셔도 돼요.”유신혁의 얼굴에 웃음이 깊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긴장한 기색도 역력해지는 듯했다. “사장님, 지난번 회의 때는 제가 실수했습니다.”하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괜찮습니다, 그냥 말씀해 보세요.”“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죄송해서, 오늘 저녁에 제가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 수 있을까 하고…… 어떠십니까?” “제가 기항 그룹의 최신 소식을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과 개인적으로 공유하고 싶습니다.” 몸을 낮추며 굽신거리는 유신혁의 모습은, 지난번 회의실에서 하연을 향해 칼을 겨누며 날뛰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거짓이 많은, 변덕스러운 사람이야.’하연이 두 손을 깍지 낀 채, 유신혁을 꿰뚫어 보았다. “좋아요, 오늘 저녁에 뵙죠.”하연이 기항 그룹의 성재와 친분을 쌓자마자, 유신혁은 하연이 기항 그룹에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짙은 담배 냄새가 엄습해오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당겨 앉아 유신혁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연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유신혁의 이빨 사이로 새까맣고도 누런 치석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하연은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지는 듯했다.하연은 겉으로는 사람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중년의 남성이 사실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운 남자라는 것을 미쳐 생각지 못한 듯했다.“뭐 하시는 겁니까? 제가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까?” 하연이 최대한 숨을 참고 유신혁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사장님께서는 한서준의 침대에서 겨우 기어 내려와, 눈 깜짝할 사이에 DS그룹의 최하민 대표라는 배를 타셨지요. 그렇게 B시에 돌아오시자마자 우리 같은 원로 직원들은 발밑에 두시다니, 최 사장님, 정말 탄복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연의 입가에 썩소가 번졌다. 하연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가, 칭찬을 하기 위해서였습니까?”“물론 아닙니다. 저는 단지 한서준과 놀던 여자는 다른 여자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유신혁이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노골적인 표현을 내뱉으며 하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유신혁은 며칠 전, 하연에 의해 체면을 구긴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각 부서의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일침을 가했어. 능력이 출중한 여자임이 분명해.’ 이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유신혁의 위기감을 가중시켰다. 하연이 차가운 표정으로 유신혁의 말을 곱씹으며 말했다. “유 부장님, 여태 저를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여자가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잠자리 솜씨가 좋아 높은 자리에 앉았을 뿐이겠지요.” 유신혁은 여성에 대한 뚜렷한 차별을 드러냈다. 급기야 하연은 DS그룹 HR의 안목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우리 그룹에 섞여 있었다니.’ “사장님과 한 대표, 두 사람의 결혼 비화를 좀 듣고 싶군요. 아, 침대 위에서 내는 그 아름다운 소리까
분노에 가득 찬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뒤를 쫓아 호텔로 향하려 했다. 태현이 말했다. “봐, 내 말이 맞지? 남녀가 이렇게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밥 먹은 다음, 호텔을 가는 게 아니라면 어디로 가겠냐?”태현이 서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서준아, 바람기가 많은 여자일 뿐이야. 그냥 내버려둬.” 태현의 위로에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서준이 결국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혼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DS그룹의 최하민 대표와 결탁한 것도 모자라, 부하직원하고 놀아나기까지 하겠다고?”‘최하연, 나랑 이혼하고 변해버린 거야, 아니면 원래 이렇게 방탕한 여자였던 거야?’‘ 호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유신혁이 기다렸다는 듯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연도 유신혁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가 오르려던 그 순간, 서준이 하연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겼다.“얘기 좀 하자.”유신혁과 함께 호텔 방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붙잡는 서준을 본 하연은 순간 황홀감을 느꼈다. 그러나, 곧 이성을 부여잡고 눈앞의 서준을 똑똑히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한서준 씨, 정말 한가한가 봐? 난 일이 있어서 이만.” ‘우연의 일치일 뿐이야.’‘날 따라온 건 아닐 거야.’“두 분, 먼저 이야기 나누시죠.” 유신혁이 안색을 바꾸어 공손하게 서준의 비위를 맞추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눈을 가늘게 뜬 서준이 유신혁이 탄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감히 최하연의 몸에 손을 대려 하다니. 오늘은 절대 그럴 수 없지.’ 서준은 하연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 통증을 느낀 하연이 힘껏 서준을 밀쳐냈다. “빨리 용건이나 말해!”“왜 저런 쓰레기랑 잠자리를 하려는 거야?”서준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으며, 말투는 따지는 듯했다. 유신혁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B시에서 이미 소문이 자자했
문을 닫은 유신혁이 급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최 사장님, 걱정 마십시오. 이 밤이 지나면, 제가 알고 있는 기항 그룹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려드릴 테니까요. 반드시, DS그룹의 B시 지사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침을 흘릴 듯한 유신혁이 침대 머리맡에 숨겨 둔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즐기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야. 녹화해서 원할 때마다 감상해야지. 거물급 인사와만 놀던 여자가 이제는 나랑 놀아난다 이 말이야. 기분을 나쁘게 하면 영상을 빌미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해야겠어.’ 근질근질한 몸을 참을 수 없던 유신혁이 발가벗은 몸으로 아름다운 하연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이때, 하연이 탁자 위의 붉은 술병을 집어 들어 유신혁의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유신혁이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머리를 만지자, 손이 피투성이로 변했다. “아…….”“미친X, 네가 감히 나를 쳐?”유신혁이 곧바로 몇 걸음 나아가 하연을 향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유신혁의 주먹은 하연의 한 손에 의해 반격당하여 아래로 힘껏 꺾이고 말았다. 하연의 강한 힘으로 인해 유신혁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곧이어, 몇 걸음 뒤로 물러선 하연이 옆으로 달려들어 유신혁의 가슴을 걷어찼다. 하이힐의 가는 굽이 유신혁의 갈비뼈를 찔렀다. 방안에 두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유신혁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하연이 이렇게 나올 거라 생각지 못했던 유신혁은 공포에 질려, 피범벅이 된 얼굴로 가슴을 가린 채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하연이 그런 유신혁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진작 하연을 품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유신혁이었다. 그저 끝없는 공포만이 유신혁을 감쌌다. 유신혁이 두려움에 고개를 들고 말했다. “최 사장님, 몰라뵀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놓아주세요.”“그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침대 스킬에 관심이 많던 거 아니었나요? 벌써 시시해지셨어요?” 위엄으로 가득 찬 하연의 눈동자는 유신혁을 두렵게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시시
서준은 하연을 외면한 채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듯했다. 서준은 하연을 데려가기를 원했다. 하연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었다. 서준은 하연과 유신혁이 함께 있던 층에 도착하자마자 유신혁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하연은 아주 후련하고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서준은 자신이 하연을 의심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준의 가슴은 마치 무언가에 의해 찢긴 것처럼 간헐적으로 아파왔다.맞은편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하연의 차가운 눈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채찍이 되어 서준의 얼굴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서준은 하연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했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믿음, 이 역시 3년간의 결혼 생활동안 서준이 하연에게 주지 못한 것이었다. 하연이 호텔을 나서자, 구급차에서 내린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든 채 호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연은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호텔로 차를 보낼 것을 지시하면서 다시 한번 옆에 서있는 양복차림의 서준을 힐끗 보았다. “내가 데려다 줄게.” 서준은 덤덤한 말투로 하연에게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말했다.하연의 눈은 서늘함과 예리함으로 가득했다. “아니, 한 대표님 차를 더럽힐 수는 없지.” “내 잘못이야.”서준의 목소리에는 실의가 섞여 있었다.“서영이랑 혜경이가 한 일, 내가 대신 사과할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난 하연은 희미한 표정으로 거절을 표했다. “필요 없어.”“3년 동안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왜 나한테 말 한 번을 안 했어?”하연이 떠난 후에야, 서준은 비로소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일을 묻는 말투조차도, 서준은 조심스러웠다. 하연은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한서준, 지겹지도 않니? 이미 다 지난 일이야. 이제 와서 고민하면 무슨 소용이야? 진작에 했어야지! 과거는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인데 이제 와서 이런 것 고민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구. 여태 뭐 하다 이제 와서!”‘늦바람이 무섭다더니.’기사가 포르쉐를 몰고 하연을 데리러 왔다. 하연은
하연이 편안하고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어제 구급차에 실려가셨는데 오늘 퇴원하시다니. 유 본부장님 정말 건강하시네요.” “최 사장님, 농담 마십시오. 저도 회사의 업무에 지장을 줄까 걱정했습니다.”유신혁은 머리에 거즈를 두르고 있었고, 양복 재킷 밑에는 여전히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유신혁이 뻔뻔스럽게 말했다.“어제 기항그룹의 내부 소식을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생각나 서둘러 회사로 달려왔습니다.”하연이 유신혁을 향해 앉으라며 날렵한 턱을 들어올려 소파를 가리켰다.‘절대 그냥 말 하지 않을 것 같이 하더니, 한 대 맞고 나니 드디어 입을 여는군.’ “기항그룹에서 오늘 나노 로봇에 관한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DS 그룹의 의료 개발 프로젝트와 약속이나 한 듯 일치하더군요,” 하연은 짜증이 나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쓸데없는 말만 하실 거면 나가보세요.” 하연의 말을 들은 유신혁은 온몸을 벌벌 떨며 하연은 위협을 입으로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즉시 요점만 골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항그룹이 이미 HT그룹을 찾아가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요 며칠 계약 절차를 밟고 있는 것 같더군요.”“HT그룹이요?” 하연은 의아해했다.유신혁이 지팡이를 짚은 채 하연에게 가까이 다가가 계속해서 말을 하려 했으나 하연이 눈빛으로 경고하자 즉시 한쪽으로 물러났다. “제가 들은 바로는, 기항 그룹과 HT그룹이 이틀 후, 교외 승마장에서 소규모 회의를 개최하고 그 때 최종적으로 계약을 확정한다고 합니다.”하연은 손에 든 금색 펜을 돌리다가 눈을 들어 유신혁에게 물었다. “믿을만한 정보예요?”“그럼요, 믿을만한 소식통입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음.” 하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수긍하는 듯했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기밀 정보가 이런 사람에게 알려진 거라면 틀림없이 고위층 인사와 관련된 것임이 분명해.’ 유신혁은 일찍이 하연의 미움을 샀다. 누구보다도 하연을 골탕먹이면 어떻게 되는지 잘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