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가득 찬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뒤를 쫓아 호텔로 향하려 했다. 태현이 말했다. “봐, 내 말이 맞지? 남녀가 이렇게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밥 먹은 다음, 호텔을 가는 게 아니라면 어디로 가겠냐?”태현이 서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서준아, 바람기가 많은 여자일 뿐이야. 그냥 내버려둬.” 태현의 위로에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서준이 결국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혼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DS그룹의 최하민 대표와 결탁한 것도 모자라, 부하직원하고 놀아나기까지 하겠다고?”‘최하연, 나랑 이혼하고 변해버린 거야, 아니면 원래 이렇게 방탕한 여자였던 거야?’‘ 호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유신혁이 기다렸다는 듯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연도 유신혁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가 오르려던 그 순간, 서준이 하연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겼다.“얘기 좀 하자.”유신혁과 함께 호텔 방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붙잡는 서준을 본 하연은 순간 황홀감을 느꼈다. 그러나, 곧 이성을 부여잡고 눈앞의 서준을 똑똑히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한서준 씨, 정말 한가한가 봐? 난 일이 있어서 이만.” ‘우연의 일치일 뿐이야.’‘날 따라온 건 아닐 거야.’“두 분, 먼저 이야기 나누시죠.” 유신혁이 안색을 바꾸어 공손하게 서준의 비위를 맞추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눈을 가늘게 뜬 서준이 유신혁이 탄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감히 최하연의 몸에 손을 대려 하다니. 오늘은 절대 그럴 수 없지.’ 서준은 하연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 통증을 느낀 하연이 힘껏 서준을 밀쳐냈다. “빨리 용건이나 말해!”“왜 저런 쓰레기랑 잠자리를 하려는 거야?”서준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으며, 말투는 따지는 듯했다. 유신혁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B시에서 이미 소문이 자자했
문을 닫은 유신혁이 급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최 사장님, 걱정 마십시오. 이 밤이 지나면, 제가 알고 있는 기항 그룹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려드릴 테니까요. 반드시, DS그룹의 B시 지사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침을 흘릴 듯한 유신혁이 침대 머리맡에 숨겨 둔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즐기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야. 녹화해서 원할 때마다 감상해야지. 거물급 인사와만 놀던 여자가 이제는 나랑 놀아난다 이 말이야. 기분을 나쁘게 하면 영상을 빌미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해야겠어.’ 근질근질한 몸을 참을 수 없던 유신혁이 발가벗은 몸으로 아름다운 하연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이때, 하연이 탁자 위의 붉은 술병을 집어 들어 유신혁의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유신혁이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머리를 만지자, 손이 피투성이로 변했다. “아…….”“미친X, 네가 감히 나를 쳐?”유신혁이 곧바로 몇 걸음 나아가 하연을 향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유신혁의 주먹은 하연의 한 손에 의해 반격당하여 아래로 힘껏 꺾이고 말았다. 하연의 강한 힘으로 인해 유신혁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곧이어, 몇 걸음 뒤로 물러선 하연이 옆으로 달려들어 유신혁의 가슴을 걷어찼다. 하이힐의 가는 굽이 유신혁의 갈비뼈를 찔렀다. 방안에 두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유신혁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하연이 이렇게 나올 거라 생각지 못했던 유신혁은 공포에 질려, 피범벅이 된 얼굴로 가슴을 가린 채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하연이 그런 유신혁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진작 하연을 품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유신혁이었다. 그저 끝없는 공포만이 유신혁을 감쌌다. 유신혁이 두려움에 고개를 들고 말했다. “최 사장님, 몰라뵀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놓아주세요.”“그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침대 스킬에 관심이 많던 거 아니었나요? 벌써 시시해지셨어요?” 위엄으로 가득 찬 하연의 눈동자는 유신혁을 두렵게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시시
서준은 하연을 외면한 채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듯했다. 서준은 하연을 데려가기를 원했다. 하연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었다. 서준은 하연과 유신혁이 함께 있던 층에 도착하자마자 유신혁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하연은 아주 후련하고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서준은 자신이 하연을 의심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준의 가슴은 마치 무언가에 의해 찢긴 것처럼 간헐적으로 아파왔다.맞은편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하연의 차가운 눈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채찍이 되어 서준의 얼굴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서준은 하연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했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믿음, 이 역시 3년간의 결혼 생활동안 서준이 하연에게 주지 못한 것이었다. 하연이 호텔을 나서자, 구급차에서 내린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든 채 호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연은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호텔로 차를 보낼 것을 지시하면서 다시 한번 옆에 서있는 양복차림의 서준을 힐끗 보았다. “내가 데려다 줄게.” 서준은 덤덤한 말투로 하연에게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말했다.하연의 눈은 서늘함과 예리함으로 가득했다. “아니, 한 대표님 차를 더럽힐 수는 없지.” “내 잘못이야.”서준의 목소리에는 실의가 섞여 있었다.“서영이랑 혜경이가 한 일, 내가 대신 사과할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난 하연은 희미한 표정으로 거절을 표했다. “필요 없어.”“3년 동안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왜 나한테 말 한 번을 안 했어?”하연이 떠난 후에야, 서준은 비로소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일을 묻는 말투조차도, 서준은 조심스러웠다. 하연은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한서준, 지겹지도 않니? 이미 다 지난 일이야. 이제 와서 고민하면 무슨 소용이야? 진작에 했어야지! 과거는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인데 이제 와서 이런 것 고민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구. 여태 뭐 하다 이제 와서!”‘늦바람이 무섭다더니.’기사가 포르쉐를 몰고 하연을 데리러 왔다. 하연은
하연이 편안하고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어제 구급차에 실려가셨는데 오늘 퇴원하시다니. 유 본부장님 정말 건강하시네요.” “최 사장님, 농담 마십시오. 저도 회사의 업무에 지장을 줄까 걱정했습니다.”유신혁은 머리에 거즈를 두르고 있었고, 양복 재킷 밑에는 여전히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유신혁이 뻔뻔스럽게 말했다.“어제 기항그룹의 내부 소식을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생각나 서둘러 회사로 달려왔습니다.”하연이 유신혁을 향해 앉으라며 날렵한 턱을 들어올려 소파를 가리켰다.‘절대 그냥 말 하지 않을 것 같이 하더니, 한 대 맞고 나니 드디어 입을 여는군.’ “기항그룹에서 오늘 나노 로봇에 관한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DS 그룹의 의료 개발 프로젝트와 약속이나 한 듯 일치하더군요,” 하연은 짜증이 나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쓸데없는 말만 하실 거면 나가보세요.” 하연의 말을 들은 유신혁은 온몸을 벌벌 떨며 하연은 위협을 입으로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즉시 요점만 골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항그룹이 이미 HT그룹을 찾아가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요 며칠 계약 절차를 밟고 있는 것 같더군요.”“HT그룹이요?” 하연은 의아해했다.유신혁이 지팡이를 짚은 채 하연에게 가까이 다가가 계속해서 말을 하려 했으나 하연이 눈빛으로 경고하자 즉시 한쪽으로 물러났다. “제가 들은 바로는, 기항 그룹과 HT그룹이 이틀 후, 교외 승마장에서 소규모 회의를 개최하고 그 때 최종적으로 계약을 확정한다고 합니다.”하연은 손에 든 금색 펜을 돌리다가 눈을 들어 유신혁에게 물었다. “믿을만한 정보예요?”“그럼요, 믿을만한 소식통입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음.” 하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수긍하는 듯했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기밀 정보가 이런 사람에게 알려진 거라면 틀림없이 고위층 인사와 관련된 것임이 분명해.’ 유신혁은 일찍이 하연의 미움을 샀다. 누구보다도 하연을 골탕먹이면 어떻게 되는지 잘
숨을 가라앉힌 하연이 휴대전화를 꺼내어 최근 D국으로 돌아온 하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는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운석이 D국의 멀쩡한 NW그룹의 대표 자리를 놔두고, DS그룹 B시 지사에 지원하여 일반 직원으로 일하기를 원한다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연은 반드시 큰오빠인 하민에게 전화를 걸어 NW그룹의 상황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하민이 전화를 받았다.[하연아, 나한테 전화를 다하고, 무슨 일이야?]전화기 너머의 하민의 말투는 세련되었지만 온화한 애교가 배어있었다. 하연은 한쪽에 어색하게 서 있는 투자팀 본부장 장영환을 보고 입을 가린 채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나운석, 그 녀석이 B시에 와서 우리 DS그룹 투자팀에 프로필을 넣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NW그룹이 파산이라도 한 거야?”하민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하민은 하연이 나운석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못되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아니야, 나 회장님께서 나운석을 B시로 파견하셨다고 들었어. 그런데 DS그룹에 지원할 줄은 나도 전혀 몰랐어.] “알았어, 당장 꺼지라고 할게.”[하연아, 진정해.]하민이 충고했다.[나운석의 실력은 이미 너도, 나도 잘 알고 있잖아. 진정한 벤처 고수인 나운석이 네 투자팀에 있다면, 올해 네 손익계산서는 반드시 주주들을 만족하게 할 거야.]하민의 말에 조금은 누그러진 하연이 남매 사이에서만 있을 법한 애교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운석이 나한테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어떡해?”[네 신분은 대외적으로 공개된 적 없잖아. 나운석은 네가 한서준과 결혼했던 최씨 가문의 넷째 딸이라는 건 몰라. 네가 굳이 말하지만 않으면, 어떻게 알겠어?” 하연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지자 하민이 덧붙였다.[B시DS그룹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나운석 같은 인재야. 너의 일방적인 감정 때문에 그렇게 우수한 인재를 거절한다는 게 아깝지 않아?] 하민은 하연을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하연의 현재 임무는 DS그룹의 B시 지사에서의 업무를
저녁에 하연은 친구 예나와 함께 명품 매장에 가서 주문해둔 물건을 찾기로 약속했다.가게에 들어서자 직원들은 그녀가 최하연이라는 것을 알고는 즉시 매장 매니저를 호출했다.매니저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최하연 고객님, 잠시만요. 고객님이 주문하신 보석은 너무 고가의 제품이라서 금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받으러 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제가 먼저 다른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괜찮습니다, 저희끼리 알아서 볼게요.”예나와 하연은 매장 곳곳을 한 바퀴 돌았지만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자기야, 1층의 옷은 별로 맘에 안드네. 다른 사람들이 다 고르고 나서 남은 것들 같아. 우리 2층으로 가 보자.”예나는 하연을 끌고 2층으로 갔다.매니저는 곤란해하며 말했다.“정말 죄송합니다. 2층은 여러 사모님들이 보고 계십니다. 지금 들어가서 보시는 것이 불편하실 겁니다.”하연은 매니저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알겠어요, 그럼 우리는 주문한 보석만 가지고 갈게요.”매니저는 매장의 상황을 잘 이해해준 하연에게 연거푸 감사인사를 했다. 이렇게 재산이 있으면서도 갑질을 하지 않는 고객은 드물었다.하연은 예나를 끌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즐겁게 핸드폰 게임 ‘에닝팡’을 즐겼다. 아래층에 있는 두 사람의 말소리는 펀칭된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전해졌고 이수애의 귀에까지 들렸다.이수애가 유리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고 하연을 발견하고는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옆에 동행한 귀부인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으며 이수애의 상황을 비꼬는 것을 잊지 않았다.“사모님 댁 한씨 집안 못된 며느리가 인터넷에서 이름도 다 공개되고, 무슨 일인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는데, 정말이예요?”“댁의 따님 서영이는 경찰서로 연행됐었잖아요, 이제 나왔어요?”상류층은 원래 강약약강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라, 모두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수애의 아픈 곳을 세게 찔렀다.이수애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악 물었다. 물컵을
“세상에 이렇게 비싼 목걸이가 어디 있어? 순 날강도 같으니라구!”이수애는 평소에는 고상하고 우아한 척 행동했지만 막상 하연과의 갈등 상황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뼛속 깊은 데부터 인색하고 쩨쩨함이 드러났다. 이수애의 날카롭고 째지는 목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매장 직원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매니저가 앞으로 나가서 설명했다.“사모님, 이 제품은 VERE와 우리 브랜드의 주문제작형 모델입니다. 위의 노란 빛을 띠는 다이아몬드는 일찍이 T국 여왕이 착용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이 가격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있습니다.”“내가 당신들이 물건 팔아먹으려고 하는 허튼소리를 믿을 것 같아? 차라리 죽은 사람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을 믿겠네. 정말 우리 같은 부자들 돈을 그렇게 쉽게 뜯어가려고?”이수애는 매장 매니저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매니저는 지금까지 일해오면서 진상부리는 고객들을 수없이 봤지만 이수애처럼 직설적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매니저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매장 직원들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하연은 조롱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고, 말투도 점점 차갑고 딱딱해졌다.“말씀하신 대로 저는 뭘 사도 상관없는데 뭘 머뭇거리시는 거예요? 빨리 결제하세요!”그녀는 위층에서 난간에 기대어 구경하는 재벌집 안주인들을 가리켰다.“지금 사모님이 하신 말씀은 B시의 명문가 사모님들 모두가 들었으니 억지 부리시면 안 됩니다.”이수애가 고개를 들자마자 2층에 함께 있었던 재벌 집안 안주인들이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는 얼굴들을 보았다.상황이 불리해지자 후회가 막심이었다. 체면을 되찾으려고 그런 건데 오히려 낯뜨거운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하연은 매장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침착하게 목걸이를 착용했다. 불빛 아래의 황금빛 다이아몬드는 반짝반짝 빛나고 눈부신 광채를 내는 것이 하연의 성격과 잘 어울려 보였다.예나는 하연 옆에서 한술 더 뜨며 맞장구를 쳤다.“역시 자기는 안목이 높다니깐.”또한 이수애를 향해 눈알을 부라
“최 사장님, 승마 솜씨가 훌륭하군요.”성재는 보이는 그대로 진심을 담아 하연을 칭찬했다. 누가 들어도 성재의 말을 인사치레가 아니었다.하연은 곁눈질로 한서준을 힐끗 보고 성재에게 말했다.“임 대표님, 잠깐 대표님과 단 둘이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기항그룹은 핵심 과학 기술 발전에 주력하는 회사이다.설립 이래 5년간 수많은 참신한 스마트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여 모든 분야의 찬사를 받았다.이번 나노로봇 기술은 전례없는 기술 혁신으로써 의료계 역사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난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하연은 기항그룹의 바로 이 점을 높게 평가하여 성재에게 협업을 제안하려고 했다.서준의 눈동자는 차갑고 목소리에는 이미 불쾌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기항그룹은 이미 HT그룹과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미 다 끝난 계약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하준의 시선이 계속 하연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멀리서 나타났을 때부터 서준은 하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그동안 하연은 서준이 보는 앞에서 말을 타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승마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이 여자에 대해서는……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군.’기항그룹과 HT그룹의 협력은 아직 비밀유지 단계에 있었다. 하연이 이렇게 빨리 소식을 듣고 개입하려 하는 모양새로 보아 앞으로 B시 재계에서 두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할 것으로 예상됐다.하연은 잠시 당황했다. 두 기업의 업무 진행이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짧은 며칠사이에 계약절차까지 이미 끝난 상태였다.마음속으로는 다소 화가 났지만, 홍조를 띤 하연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이 프로젝트에 저희 DS그룹이 함께 해도 될까요?”성재는 하연의 목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 그의 맑게 빛나는 두 눈동자를 보면 누구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현재 기항그룹이 이미 HT그룹의 투자를 받았는데, 투자자를 멋대로 추가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결정이 될 겁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
송혜선은 태동이 불안해졌지만, 병원에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조봉규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돌아오자, 송혜선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아, 의사가 말했잖아. 임신 기간은 많이 지나서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고 지금처럼 자극을 받으면 쉽게 자궁 수축이 일어나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봉규의 말에 송혜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천천히 물었다. “그 사람... 아직 안 왔어?”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당연히 부동건을 뜻했다. 조봉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송혜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에 남준이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 때문이야.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손을 천천히 배 위로 가져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동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 너머로 송혜선이 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걸음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송혜선은 몸을 돌려 등을 돌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은 다급해지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봐.” 옆에 있던 조봉규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부동건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자극?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순간, 송혜선은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부동건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자 송혜선은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뭐긴 뭐겠어요! 내가 다 들었어요. 이사회에
떠나기 전, 부동건은 마지막으로 남준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비록 너를 본사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지사의 전망은 여전히 밝다. 남준아, 이 기회를 잘 살려 내가 기울인 정성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이사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떠났다. 순식간에 넓은 회의실에는 상혁과 남준 단둘만 남게 되었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준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이겼네요, 형님.”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결국 그렇게 말할 거면서 원래부터 누구의 것이었는지, 오늘로 분명해졌을 뿐이다.” 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대꾸했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승패는 병가상사일 뿐, 그저 순간의 결과에 불과하겠지요.” 상혁은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동남아 시장은 기회의 땅이지. 남준아, 이 기회를 잘 활용해라. 너의 전임자였던 정규인의 사례처럼 성급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상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참, 깜빡할 뻔했네. 정규인의 사건이 곧 재판에 들어간다고 하더라.” 남준의 얼굴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빨리?’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남준은 곧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꿰뚫은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규인의 입은 아직 단단히 닫혀 있지. 지금까지는 별다른 중요한 정보는 불지 않았다고 하던데. 하지만...” “하지만 뭐 말입니까?” 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형님, 말씀은 끝까지 하셔야죠.” 상혁은 몇 걸음을 걸어 남준의 바로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고경수는 제법 많은 걸 실토했다고 하던데. 정규인은 거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 거야. 게다가 정규인의 아내가 뭔가 중요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하고... 그게 네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부동건과 부남준의 대립을 본 이사회 임원들은 공기의 분위기를 읽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부동건의 목소리가 임원들을 붙잡았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분들입니다.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동건의 한 마디에, 임원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부동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깊은 회한과 슬픔을 내비쳤다. 부씨 가문 형제가 서로 다투는 모습은 부동건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미 이렇게 된 김에, 오늘 여러분께 제 마음속에 있는 말 몇 마디 전하고자 합니다.” “회장님,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우리는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장 이사가 먼저 나서서 지지를 표명하자, 다른 이사들도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DL그룹이 누구에게 넘어가든, 우리는 최선을 다해 협력할 것입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이사회의 임원들은 이제 그의 뜻과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한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부동건은 주석 자리에 앉아, 깊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항상 두 형제가 화합하고 협력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부동건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고요한 숨을 내쉬었다. 이내 시선을 돌려 상혁을 바라보았다.상혁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냉담한 태도를 풍기고 있었다. “동남아 시장에서 남준이가 해낸 일은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시장을 안정시키고 발전시킨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남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진수용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정지철의 허위 비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형님의 결백이 밝혀진 셈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사회에서 우리가 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DL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후계자를 확정하는 것입니다.” 남준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남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 이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진실은 이미 밝혀졌으니, 이제 우리 모두 이 일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 이사는 고개를 돌려 이사회 임원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부상혁 대표님이 결백하다면, DL그룹의 수장을 계속 맡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부상혁 대표님을 계속 지지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이건 부동건 회장님께서도 바라셨을 일일 겁니다.” 지 이사 역시 곧바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사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다른 이사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발언 이후, 나머지 이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맞습니다.” “저도 부상혁 대표님을 지지합니다.”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했던 왕 이사 마저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세 명의 이사가 상혁에게 지지를 보내며, 상혁과 남준 형제간의 대립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그러나 조금 전까지 남준을 지지하던 진수용과 오국정은 서로 눈을 마주친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이 두 사람도 상황이 끝났음을 깨달았다.하지만 직장에서 마지막 순간에 배신하는 것은 큰 금기 이기때문에 진수용과 오국정은 처음부터 잘못된 편을 들었기에, 끝까지 그 길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너무도 빠르게 뒤바뀌었고, 남준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이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한 표는 여기 없었다. 바로 부동건의 손에 있었다. 남준은 부동건을 배제하고 네 표를 확보해 승리를 확정 지으려 했으나,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
“이럴 수는 없어...!” 정지철이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뒤에 있던 의자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의자의 손잡이를 꽉 잡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계약들이 모두 가짜라는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위조된 계약서였다고?” 그의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지철은 점차 자신을 의심하며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만약 이 계약들이 위조된 것이라면? 도장이 가짜라면? 그렇다면 그의 모든 비난은 단지 무효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문서 위조라는 중대한 범죄가 될 수 있을 텐데...’“아니야, 아니야.” 정지철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지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기엔 뭔가 문제가 있어.” 그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너야. 그래, 너 맞지! 이 모든 게 네가 한 짓이야.” 정지철은 무언가 깨달은 듯,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혼자서 고함을 질렀다. 그의 떨리는 손을 들어 상혁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 모든 게 네가 만든 함정이야! 내가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린 거잖아. 너야말로 이 모든 사건의 주범이야! 이건 모두 네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계산한 일이야!” 정지철의 비난에도 상혁은 아무런 동요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혁은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했다. 정지철은 모든 걸 잃은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으며 머릿속에서 최근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는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어쩐지...’정지철은 이번에 이렇게 순조롭게 모든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상혁은 항상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쉽게 약점을 잡히게 놔둘 리가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