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사장님, 승마 솜씨가 훌륭하군요.”성재는 보이는 그대로 진심을 담아 하연을 칭찬했다. 누가 들어도 성재의 말을 인사치레가 아니었다.하연은 곁눈질로 한서준을 힐끗 보고 성재에게 말했다.“임 대표님, 잠깐 대표님과 단 둘이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기항그룹은 핵심 과학 기술 발전에 주력하는 회사이다.설립 이래 5년간 수많은 참신한 스마트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여 모든 분야의 찬사를 받았다.이번 나노로봇 기술은 전례없는 기술 혁신으로써 의료계 역사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난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하연은 기항그룹의 바로 이 점을 높게 평가하여 성재에게 협업을 제안하려고 했다.서준의 눈동자는 차갑고 목소리에는 이미 불쾌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기항그룹은 이미 HT그룹과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미 다 끝난 계약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하준의 시선이 계속 하연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멀리서 나타났을 때부터 서준은 하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그동안 하연은 서준이 보는 앞에서 말을 타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승마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이 여자에 대해서는……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군.’기항그룹과 HT그룹의 협력은 아직 비밀유지 단계에 있었다. 하연이 이렇게 빨리 소식을 듣고 개입하려 하는 모양새로 보아 앞으로 B시 재계에서 두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할 것으로 예상됐다.하연은 잠시 당황했다. 두 기업의 업무 진행이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짧은 며칠사이에 계약절차까지 이미 끝난 상태였다.마음속으로는 다소 화가 났지만, 홍조를 띤 하연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이 프로젝트에 저희 DS그룹이 함께 해도 될까요?”성재는 하연의 목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 그의 맑게 빛나는 두 눈동자를 보면 누구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현재 기항그룹이 이미 HT그룹의 투자를 받았는데, 투자자를 멋대로 추가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결정이 될 겁
서준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멈췄다.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시종일관 차갑고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이 여자는 정말 아름답고, 팔색조처럼 변화무쌍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이 여자가 내민 문제는 마치 함정처럼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남은 정이 있는지 없는지는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지금 서준은 이 결혼을 너무 쉽게 일찍 끝내 버린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하연은 눈을 아래로 깔고 가볍게 웃으며 미간의 서늘한 기운을 지웠다.“훗! 내가 잠깐 실언한 거예요, 한 대표님 같은 냉혈한이 그런 별볼일 없었던 과거에 매달릴 리가 있겠어요?”하연이 계속해서 말했다.“비즈니스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익이잖아요. 이 점은 내가 굳이 말할 것도 없을 거고. 한 대표님이 나보다 더 잘 알 거고.”“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서준의 얼굴빛이 더욱 어두워지고 그의 매서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더욱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하연은 전혀 서준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한 대표님이 지난날의 감정으로 DS그룹의 사업 참여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요?“저와 승마 시합을 하는 게 어때요?”머리카락 한 가닥이 뺨에 드리워져, 하연의 얼굴 전체에 자유분방함이 넘쳐 보였다.“당신이 이기면 DS그룹은 앞으로 절대 사업 참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내가 이기면 당신은 DS그룹의 참여에 동의하는 겁니다.”서준은 전문적으로 승마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문 선수 수준에 버금가는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하연은 오늘 아주 컨디션이 좋아서 반드시 그를 이기려고 할 것이다.임성재는 딱히 누구 편이라고 할 것이 없었지만 말 속에 자신의 진심을 분명히 드러냈다.“최 사장님의 진심은 제 눈에 너무 잘 보이고, 승마 기술도 특출하신 것 같습니다. 한 대표님이 승마실력에 얼마나 자신이 있는지가 오늘의 관건이겠군요.”서준이 눈썹을 살짝 찌푸릴 때 하연의 눈동자 색이
하연은 두 번째 바퀴에서 이겼는지는 개의치 않고, 마지막 세 번째 커브길에 집중해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다시 서준을 한 걸음 차이로 제치고, 결국 먼저 결승점에 도착했다.이 소리 없는 대결은 결국 하연의 승리로 끝이 났다.계속해서 손에 땀을 쥐고 있던 관중석의 사람들의 하연의 승리에 환호를 표했다.경마란 그런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속도를 줄여가며 한 바퀴 더 달리고 난 후, 하연은 서준 앞에서 멈추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이목구비가 날렵한 하연의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해졌다. 헬멧을 벗으니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흩어졌다. 짜릿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목소리에는 아직 경기 중의 흥분이 남아 있었다.“한 대표님이 졌네요.”하연은 일찍이 여왕이 개최하는 ‘여왕컵' 승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여왕의 찬사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하연은 어릴 때부터 말을 타는 것을 매우 좋아했는데, 이 때문에 최하민은 특별히 하연을 위해 진귀한 말을 구입하여 수많은 승마 챔피언을 초청하여 함께 훈련하게 했다.15살 때 하연의 애완동물은 천만 원이 넘는 I 국에서 수입한 황금빛 말이었다.이런 실전이 매우 중요한 종목에서 하연이 서준처럼 감독에게 레슨이나 받는 얼치기 선수에게 질 리가 없었다.이전에는 부드럽고 순종적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강한 면을 숨겨왔었다. 이는 단지 서준이 자신을 한 번만이라도 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우습기 짝이 없었다.서준의 마음속에서는 하연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서준의 복잡한 눈빛이 하연에게 몇 초간 머물렀다가 다시 거둬들여졌다.“당신, 언제 승마를 배운 거야?”좀 전에 하연이 말을 타고 나타났을 때는 하연이 원래 말을 탈 줄 알았다는 사실에 놀랐는데, 이제는 하연이 뜻밖에도 정상급에 도달한 전공자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눈앞의 하연은 야생마처럼 자유분방하고 가시 돋친 장미 같은 존재였다. 하연의 일거수일투
태현은 서준의 성토에 순간 당황했다. 서준은 하연에게 져서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나는 저 바람기 있는 여자를 상대도 안 하고 싶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네.”“그래?”하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태현이 깜짝 놀랐다.그는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며 당황하여 말했다.“소리도 없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당사자가 여기 있는데 바로 물어보면 되잖아?”하연은 팔짱을 끼고 똑바로 섰다. 눈동자 속의 상대를 압도하는 기세는 예전 그대로였다. ‘내가 방금 자기를 욕한 걸 들었나?’서준은 조용히 한쪽에 비껴 서서, 관심 없는 척 하연을 여러 번 곁눈질했다.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서준의 마음은 매우 복잡했다.“쳇, 원래 당신 같은 여자한테는 관심 없었어. 네 돈줄이나 얼른 찾아가.” 태현은 하연에게 가라고 손을 휘저으며 제멋대로 깔보는 투로 말했다.하연은 하이힐 신은 발로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갔다. 하연의 이 기세 때문에 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아무도 말 안 해줘? 안태현 씨, 당신이 다른 사람을 험담할 때 말이야... 정말 동네 노점상 같다는 거.”태현은 갑자기 화가 났다.“최하연 씨! 이혼하고도 내 친구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내 친구들의 일에 방해나 하고 다니고 말이야! 최하연 씨 같은 계집애들 이미 충분히 많이 봐왔어, 그런 당신이 나를 비웃어? 정말 어이가 없어서 웃겨 죽겠네.”마침 이때 청소부가 청소차를 밀고 지나가자 하연은 바닥 발 매트를 닦은 걸레를 빤 오수가 든 통을 들어 태현의 몸에 끼얹었다.태현은 오늘 리넨 소재의 흰색 양복을 입었는데 하연이 뿌린 오수에 온통 젖어 위아래로 옷 색깔이 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속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그야말로 완전히 다 벗은 것보다 훨씬 더 못한, 참으로 딱한 상황이었다.그는 한 손으로는 상반신을 가리려고 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반신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허둥지둥해서 웃음을 자아냈다.“최하연! 당신이 감히 나한테 덤벼?”
‘오해라니? 선 넘네.’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모욕했던 일들이 지금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절대 별일 아닌 것처럼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지.’“공교롭게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나는 성격은 좋은데 뒤끝 작렬이지.’하연은 큰오빠의 설명을 떠올리자 운석을 놀리는 일이 재미있어졌다. 운석은 하연이 누군지도 모른 채 관심을 보였고 하연은 그런 운석의 모습을 즐겼다.“나한테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시겠어요?”운석은 하연의 말을 전혀 듣지도 않고 직접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부드러운 빛을 띤 옥팔찌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 가치가 상당했다. 지난번 민혜경의 경매 낙찰 금액보다 수백 배 더 비싸 보였다.“지난번 일에 대한 감사의 선물인데, 마음에 드는지 한번 보세요.”이 옥팔찌는 운석이 오래 시간을 들여 직접 골랐다. 여러 보석 전문가들을 청해 보석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배우고 나서 장만한 상품이었다. 팔찌의 퀄리티로 보나, 가격으로 보나 그야말로 운석의 정성이 가득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가져가세요, 저는 이런 거 필요 없어요.”“나의 여신님,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운석은 다시 한번 하연에게 마음을 고백했다.운석은 온몸에 눈부신 자신감이 흐르고, 용모도 준수하고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운석과 원수진 사람일지라도 그의 소탈하고 제멋대로인 매력에 흠뻑 빠질 정도다. 그러나 지금 운석의 앞에 있는 사람은 하연이었다.“저는 아니에요.”“왜죠?”“내 스타일이 아니에요.”하연의 말 한마디에 운석은 상처받은 것 같았다. ‘여신도 자기 이상형이 있었군. 흠...”운석은 하연의 이상형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기로 했다.“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하연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혹시 나중에 내 아이의 아이큐에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요.”운석은 마치 엄청난 농담을 들은 것 같았다. 운석은 실제로 IQ 167의 천재였다.“저를 거절하는 이유가 아이큐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사장님.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막았지만 워낙 완력으로 들이닥쳐서...”비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뒤따라 들어왔다.하연이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아, 문 닫아.”유신혁의 갈비뼈 골절 회복이 빠르고, 얼굴의 상처도 대부분 아물었다.“사장님, 기항그룹과의 프로젝트 계획서를 봤는데, 거기 내 이름이 안 보이네요? 누락된 것 아닌가요?”하연은 만년필을 손가락으로 돌리면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빠뜨린 거 아니고, 내가 유신혁 씨 이름 빼라고 했어요.”“사장님, 이것은 애초에 약속했던 겁니다.” 유신혁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음흉한 것이 가득했다.“아쉬울 때는 이용하고, 쓸모없으면 그냥 버리는 거 너무 모양 빠지는 거 아닙니까?”하연은 예리한 눈빛으로 유신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유신혁 씨는 내가 당신 상관이라는 것을 잊은 거 아니죠? 내 판단에 따라 내가 결정하고 책임도 내가 집니다.”유신혁은 하연에게 잘 보이는 것에 실패하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최 사장님, 저한테 너무 함부로 하지 마세요.”“그래? 그러면 내 결정 안 따를 겁니까?”하연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두꺼운 사진 한 묶음을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 날렵한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유 부장 같은 사람이 기항그룹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면 적지 않은 분란이 일어났을 것 같네요.”유신혁이 책상 위의 사진을 들고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온몸에 힘이 빠져 후들거리고 공포에 질려 하연을 바라보았다.“이거 다 어디서 났어요?”“아직 보여줄 게 많이 남았는데, 유 부장한테 내가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까?”“아니, 됐습...”순식간에 유신혁의 기세가 꺾였다.하연의 가녀린 손가락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연의 입술 사이에는 유신혁에 대한 비웃음이 가득했다.“내 짐작이 맞네요. 몰카를 찍은 게 처음이 아니더군요.”“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 연락처 다 가지고 있어요. 이 여자들과 유신혁 씨와의 관계가 사생활이겠지만 이게 다 몰카로 찍혔다는 것을 알면, 이 여자들 모
DS 그룹, 기항그룹과 HT그룹 이 세 기업의 3자 간 협력의 큰 골자가 확정되었고, 결정된 계약 내용에 더 이상 이의 제기 없이 세부 사항 조율 중이며, DS그룹과 HT그룹은 각자 자기가 맡은 사업의 진행 내용과 일정을 공유하고 확인하도록 결정되었다.그 누군가의 관리 소홀로 도중에 작은 실수라도 발생하면 곧바로 수억 원의 손실로 연결된다.하연은 사업 진행 일정표를 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모든 협력 항목에 우리 DS그룹이 제시한 인원들이 추가되지 않았는데 왜죠?”세 회사의 전략 공유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협력 문건에는 기항그룹과 HT그룹 간의 상호 정보 공유는 명시되었지만 DS그룹만 유독 빠져 있었다.“이 프로젝트들은 이전부터 모두 HT그룹과 기항그룹이 진행해오고 있었습니다. DS그룹의 인원이 추가되어 일을 진행하면 자연히 업무 진행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두 측이 쭉 진행해서 결과가 나오면 그때 공유할 겁니다.”이 말을 하는 사람은 기항그룹에서 파견된 우지나 상무였다. 40세 전후반의 여성으로서 완벽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속마음은 그렇지 않고 겉으로만 웃고 있으니 마치 보톡스를 맞은 것처럼 표정이 어색했다.“아, 그래요?”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지나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하연은 프로젝트서를 덮고 엷게 웃었다.“그럼 우 상무님은 계약을 체결한 뒤에 우리 측이 나노 로봇의 핵심 기술을 확인하려고 했을 때 왜 볼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우지나는 물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이 문제에 대해 이미 할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이런 일들은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직접 이야기하실 문제입니다. 만약 실수로라도 기술 유출 문제가 발생하면 저희 기항그룹에 손해가 막심하거든요.”우지나는 흘끔 옆을 보고 서준이 전혀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마음을 놓았다.오늘 이 소동에 서준이 혹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낼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현재 서준의 이혼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하기 때문이었다. 서준이
임원 이하의 실무 책임자들은 더 이상 하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밥그릇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최 사장님, DS의 직원들 지금 즉시 투입하실 수 있고, DS쪽에서 온 분들과는 모든 데이터와 자원을 공유할 겁니다!”“프로젝트에 관한 자료들 지금 바로 DS그룹 관계자에게 보내 드릴게요!”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한 시간 내에 마무리하세요. 이게 맘에 안 드는 분은 스스로 떠나시면 됩니다.”책임자들은 연달아 하연의 말에 대답하면서 회의 중이라는 사실도 망각하고 바쁘게 전화를 걸어 부하 직원들에게 재빨리 일을 처리하도록 배치했다. 모두 우지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곤란하고, 안 하는 것도 불편했다.“우 상무님은 다른 사람 이야기 듣는 거 참 좋아하시나 봐요.”하연은 눈을 내리깔고 비웃듯이 말했다.“내가 단지 예쁜 얼굴 덕분에 날개 달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줄 알아요? 당신이 마음대로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그럴 리가요. 다 오해니까 대표님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하연의 말투에 당해낼 재간이 없자, 우지나가 완전히 태세를 전환하여 하연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했다.하연은 의자에서 일어나 얼굴을 돌려 회의에서 아무 잘못도 없는 서준 쪽을 바라보았다.“한 대표님, 나한테 덤비는 사람들 어떻게 하는지 봤죠? 그럼 저는 이만 갑니다.”하연은 서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가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문을 밀고 나갔고, 정기태는 하연의 서류와 가방을 챙겨 들고 그 뒤를 따랐다.엘리베이터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뒤에서 차분하고 힘찬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서준이 뒤따라 나왔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하연은 서준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한서준의 희미한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울렸다.“언제 이렇게 강하게 상대를 압박할 줄 알게 된 거지?”“항상 그랬어요.”“최하민이 이렇게 가르쳤나?” 서준은 낮은 목소
남준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정지철은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한걸음에 다가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자, 그럼 우리 집으로 가세.” 동시에, 정씨 가문의 저택은 불빛으로 환히 밝아져 있었다. 정다영은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벌써부터 문밖으로 자꾸만 향하며,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주머니, 기사님께 전화 한 번 해 보세요. 왜 아직도 안 오시는 거죠?” 가정부인 왕순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께서 직접 모시러 가셨으니,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다영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 “분명히 남준 씨일 거야.” 문을 나서자 찬바람이 불어왔고, 다영은 몸을 살짝 떨었지만, 마음속 설렘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남준 씨!” 차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다영의 시선은 오직 한 곳만을 향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이는 기대했던 남준이 아니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녀는 놀란 듯 말했다. “어머님, 여기 웬일이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묻어났지만, 금세 태연한 척하며 표정을 고쳐 잡았다. “왜? 내가 오면 안 되는 거니?”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송혜선이었다. 송혜선은 어두운 색의 패딩을 입고 있었지만, 부드럽게 불룩 나온 배는 그녀의 우아함과 품격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다영은 서둘러 다가가 송혜선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다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실 줄 몰랐고, 미리 말씀도 없으셨잖아요.” 송혜선은 다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남준이가 돌아온다길래 네 아버지가 연락을 줬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들러본 거야.” 다영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상황을 이해했다. 단순히 들르겠다는 말은 구실에 불과했고, 내일 있을 이사회를 염두에 둔 방문임이 분명했다.
“제가 요즘 입덧이 심해서 기름진 음식은 못 먹거든요.” 하연의 말에 부동건은 금방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구나. 그렇다면 다음에 혜선 이모에게 담백한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할게.” 부동건은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곁에 있던 비서는 부동건의 눈짓을 읽고, 즉시 보온 통을 조용히 치워갔다. “혜선 이모는 그런 일을 잘 아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혜선 이모에게 물어보렴.” 그 말이 떨어지자, 사무실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연은 상혁의 표정이 차갑게 변한 것을 느꼈다. 그의 주변에는 금세 폭풍이 몰아칠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연은 상혁의 손을 살짝 잡으며 그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점점 사람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혜선 이모도 지금 임신 중이신데, 어떻게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있겠어요?” 부동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냐, 넌 걱정하지 말거라.” 하연은 여전히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 “아니에요. 전 늘 진숙 이모가 해주신 음식을 먹어서, 다른 분이 만든 건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녀가 조용히 조진숙을 언급하자, 부동건은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 곧 코를 문지르며 멋쩍게 말했다. “그렇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다. 진숙 이모는 어릴 때부터 널 봐왔으니 네 입맛을 가장 잘 알겠지.” 그는 말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럼 앞으로 이런 건 진숙 이모에게 부탁하자꾸나.” 상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이런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들의 단호한 어조에 부동건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젊은 사람들 일은 내가 나설 일이 아니지. 다만 너희 둘이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부동건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이제 너희가 가정을 이루고 일도 안정적으로 맡게 되어, 정말 기쁘구나.” 그는 마치 옛날을 떠올리는 듯
상혁은 하연을 단숨에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밀착했다. “대범하다는 건 과장이야. 그저 한 번의 신세를 갚았을 뿐이야.” 하연은 그의 말에 질투가 더 짙어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톡톡 찌르며 따져 물었다. “어떤 일이길래 부 대표님이 그렇게 큰 손을 쓰셨나요?” 전진그룹의 프로젝트는 최소 몇억에 달하는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하연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면, 부 대표님이 나한테 감추고 싶은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요?” 상혁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네 작은 머릿속엔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렇게 가득하니?” 상혁의 큰 손은 자연스럽게 하연의 어깨로 내려왔다. 그는 몸을 숙이며 하연의 시선을 마주했다. 깊고 진지한 눈동자 속에 하연의 모습만 담겨 있었다. 상혁은 하연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알아? 하연아, 너 지금 엄청 귀엽다.” 하지만 하연은 여전히 진지했다. “부 대표님, 화제를 돌리지 말아요.” “응.”상혁은 가볍게 대답하며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그 모임에서 들었던 말이 하연의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주슬기에게 이익을 준 건, 단지 주슬기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른 얽매임이 없다는 걸 뜻하지.” 잠시 말을 멈춘 후,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하연아. 오늘 너의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들었어.” 하연이 질투를 하고, 다른 여자를 신경 쓰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혁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하연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상혁의 손등을 꼬집으며 말했다. “부 대표님,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우리 아이 아빠가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으읏!” 하연의 말이 끝나
“마침 ZT그룹의 서류가 도착했네요. 최 사장님, 함께 올라가시죠.” 연지의 말에 하연은 자연스럽게 주의를 기울였다. “DL그룹이 ZT그룹과도 협력하고 있나요?” 연지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원래는 없었죠.”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연지는 공손하게 손짓하며 말했다. “먼저 타시죠.” 하연은 앞장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연지는 뒤따라 옆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올해 사업 조정으로 ZT그룹과 협력할 기회가 조금 생겼습니다. 게다가 부 대표님께서 ZT그룹을 꽤 신경 써 주신 덕에, 자연스레 왕래가 잦아졌죠.” 하연은 시선을 고정한 채 연지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느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호기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 “오, 그게 무슨 뜻이죠?” 연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연말은 늘 우리 회사에서 가장 바쁜 시기인데, 최근 부대표님께서 전진그룹의 프로젝트를 모두 ZT그룹에 넘기셨거든요. 덕분에 이번 연말은 꽤나 한가해졌어요. 전진그룹이라면 바로 무역협회 전영철 회장님 회사잖아요.”하연은 연지의 말 속에서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전진그룹은 F국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으로, 그 기반은 단단했고 산하 프로젝트도 방대했다. 그런 이익을 고스란히 주슬기에게 넘겼다니,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하연의 마음속에 의혹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며 연지를 흘깃 바라봤다. 연지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분명 의도가 있었다. 하연은 차갑게 눈을 좁히며 물었다. “그 말은, DL그룹이 그 프로젝트를 전부 ZT그룹에 넘겼다는 거네요?” 연지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부 대표님께서 이 일을 말씀 안 하셨나 봐요?” 하연은 옅게 미소 지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말해 줬으니, 덕분에 알게 됐네요.” 연지는 속이 뜨끔하며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급히 변
하성은 핸드폰 화면을 힐끗 보더니, 온통 빨갛게 물든 주식 그래프를 보고는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우리 하연이, 이제 완전 큰 부자가 됐네.” 하연은 활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다 오빠 덕분이에요. 역시 든든한 나무 밑에 있어야 시원하게 쉴 수 있는 거죠.” 하성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눈에 애정 어린 미소를 띄웠다. “하연이 네가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될 수 있어서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 하연은 문득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오빠가 있어서 참 좋아요.” 하성은 책상 위의 서류를 들어 흔들며 웃었다. “그럼, 최 사장님. 이 프로젝트, 이제 나한테 넘겨줄 준비는 됐습니까?” 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네, 오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하성은 업무를 빠르게 익혔다. 그의 예리한 감각과 타고난 사업적 통찰력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심지어 정태훈도 하성의 능력에 감탄하며 연신 칭찬했다. “하성 도련님, 처음부터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우리 최 사장님보다 더 대단한 걸요.” 하성은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정 실장까지 이런 입발린 소리를 하다니, 어울리지 않네.” 태훈은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는 하성을 한번, 하연을 한번 번갈아 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최씨 가문 분들은 모두 사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십니다. 하민 도련님이든, 하연 아가씨든, 지금의 하성 도련님까지, 모두 뛰어난 경영 실력을 가지셨죠. DS그룹은 누구 손에 맡겨도 틀림없이 번창할 겁니다.” 하연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들었죠, 오빠? 이제 회사는 오빠한테 맡기고, 저는 잠시 쉬어야겠어요.” 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지금 너는 우리 집안
“오빠, 정말 나한테도 숨길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요!” 하연은 점점 초조해졌다.하성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 지난 일이야.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잖아.”“하지만...” 하연이 더 말하려 하자, 하성은 서둘러 동생의 말을 잘랐다. 그는 손으로 하연의 어깨를 주무르며 화해를 구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됐어. 하연아, 오빠 이제 막 돌아왔는데 좀 쉬게 해 줘. 내일이면 회사에 나가야 하는데, 남은 마지막 자유 시간마저 빼앗을 거야?”하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알았어요.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다만, 후회하지 않으면 좋겠어요.”하성은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 난 할아버지랑 좀 있다가 갈게.”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바로 몸을 돌려 떠났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떠나는 하성의 뒷모습을 보며,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신가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가흔에게도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았다. 마치 그 메시지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다음 날. 하성이 DS그룹을 맡게 된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지며 많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이른 아침부터 회사 입구에는 여러 매체의 기자들이 몰려들어 첫 번째 단독 기사를 얻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서여은이 하연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성 오빠가 DS그룹을 맡는다는 소문 들었는데, 진짜야?] 하연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답장을 보냈다. [응, 맞아.] 여은은 깜짝 놀라며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왜 갑자기 하성 오빠가 DS그룹을 맡아? 그리고 너는? 혹시 너는 상혁 오빠랑 사랑에 빠져서 정신없는 거 아니야?]하연은 당황하며 짧게 답했다. [나 임신했어.]순간 채팅창에는 감탄사로 가득 찬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 [하연아, 너 진짜 너무 빠르잖아!]하연이 답장을 쓰기도 전에 여은
손이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의 하늘은 이미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눈부신 석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창유리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이현을 발견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상무님, 깨어나셨습니까?”이현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오늘 고생 많았어.”그 말에 비서는 마치 큰 짐을 내려놓은 듯 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전 괜찮습니다. 상무님, 그리고 이젠 정말 건강 좀 생각하세요. 그러다가 큰일 나십니다. 더 쉬세요.”이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어.”“사장님,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목마르시죠? 물 한 잔 가져오겠습니다.” 비서는 그렇게 말하며 유리잔에 따뜻한 물을 따라 내밀었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으니 제가 도시락 하나 포장해 올게요.”이현이 막 말리려 했지만, 이미 비서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하연은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연말 전까지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이젠 홀몸도 아닌데. 몸도 챙기고 뱃속의 아이도 생각해야지.” 최동신은 진심 어린 충고를 했지만, 하연은 자기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저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 큰오빠, 새언니 달콤한 신혼이잖아요.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좀 보낼 수 있게 큰 오빠 몫까지 제가 해야죠.”최동신은 하연의 이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최 노인에게는 손자, 손녀 모두 소중했기 때문이다. 하민이 이제 막 신혼을 맞이했으니 당연히 더 신경 써줘야 했다.“정 실장이 있잖아. 정 실장이 네 옆에서 오래 도왔으니. 정 실장한테 맡기면 되지, 네가 다 할 필요는 없잖아.” 그 말의 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하
그 순간, 비서는 이현에게 팔을 잡히며 벽 쪽으로 강하게 밀려 들어갔다. 비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현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걸 비서도 알고 있었다. ‘마음의 병은 결국 마음의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는데, 최 사장님 이야말로 그 약이 아닌가? 그런데 상무님은 왜 자꾸 피하려고만 하는 걸까?’비서는 이현이 하연을 피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계속 하연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현의 마음속 병은 마음의 약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음의 약이 바로 최하연이라는 사실을...그래서 비서도 이현이 왜 굳이 숨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 멀리, 하연은 상혁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눈에 띄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가 함께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끌었다. 두 사람은 오늘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최하연 님, 초음파실은 이쪽입니다.”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하연은 초음파실로 들어갔고, 상혁은 밖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연이 초음파실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한 장의 초음파 사진이 들려 있었다. 하연의 눈은 반짝였고, 사진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상혁이 다가가 사진을 보려고 했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사진을 감추며 피했다. “자, 부 대표님? 보고 싶으세요?” 하연은 얼굴 가득한 환한 미소를 띄우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상혁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의사가 뭐래? 아이는 잘 자라고 있데?” 하연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어머, 부 대표님도 긴장하는 순간이 있네요?” 상혁은 하연을 따라붙으며 장난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빨리 말해봐, 최하연.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히히, 안 알려줄래요.” 두 사람은 웃음소리를 주고받으며 평온하고 따스한 장면을 연출했다. 한편, 벽 뒤에 숨어 있던 이현은 하
상혁은 부동건의 말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한 태도였다. 바로 그때, 상혁의 핸드폰에 하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출발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뭐 하고 있어요?] 그는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회사에 있어.] [아직도 안 끝났어요?] 하연이 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귀여운 이모티콘 하나가 따라붙었는데, 살짝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상혁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두드렸다. [곧 끝나 조금 있다가 보자.] [넹, 부 대표님.]하연은 말 잘 듣는 학생이 선생님한테 보내듯 답장을 보내왔다. 상혁의 눈빛에는 어느새 부드러움이 가득해졌다.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버지, 그럼 하고 싶은 말씀이 더 남으셨으면 그건 남준이한테나 들려주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상혁의 단호한 태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고, 부동건에게 체면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상혁아, 나는 진심에서 하는 말인데...” 부동건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긴 한숨만 내쉬면서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과 풀리지 않는 걱정이 어른거렸다. 상혁이 복도로 나오자, 그곳에서 원신민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원신민은 상혁이 나오자마자 바삐 뒤따랐다. “대표님, 교도소 쪽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고경수가 새로운 증거를 대량으로 제출했는데, 정규인을 철저히 몰아넣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상혁은 담담히 대꾸했다. “고나희의 죽음은 고경수에게 가장 큰 상처였어. 이번엔 그저 이자 정도를 챙기는 셈이야. 결국 개싸움일 뿐이지.”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원신민이 이어 말했다. “정규인은 이미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검찰 쪽에서 증거를 고정하고 있습니다. 변호사 말로는 내년 초쯤 재판이 열릴 예정이며, 최소 20년형 이상은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경제 범죄는 보통 다른 사건보다 형량이 무겁다. 게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