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기사 내려라.”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그 자리에 너 끝까지 안 있었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고.”태현은 그만두었다.“뭐가 아니야, 최하연, 그런 여자 맞아.”“네가 그때 나를 안 말렸으면, 틀림없이 그 간사한 불륜 커플에게 다가가서 귓속말로 그들에게 예의와 염치가 뭔지 똑바로 가르쳤을 텐데!”태현은 당시 서준의 살벌한 눈빛 때문에 자기에 대한 의리가 1도 없었음을 알게 됐고,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최하연이 승마장에서 그렇게 나를 놀리고 협박까지 했잖아! 아무래도 네티즌들에게 실체를 다 까발려야겠어.”“그래? 너 먼저 귀싸대기 한 대 크게 맞겠다.”하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태현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또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어떻게 내가 가는 데마다 다 네가 있는 거야!” 태현은 몸이 떨리고 소름이 끼쳤다.혹여 나쁜 말을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들키는 일도 드물다. 그런데 매번 이렇게 험담을 할 때마다 당사자가 듣고 있다니 재수가 정말 없다.하연은 팔짱을 끼고 차가운 표정으로 뒤에 서서 옆의 여은에게 말했다.“좋다. 더 알아볼 것도 없네.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잖아.”예나는 태현의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우리 자기를 계속 괴롭힌 게 너였구나! 너 이 새끼 오늘 혼 좀 나보자!”하연은 예나를 막고 휴대전화를 꺼내 몇 번 조작해서 태현을 향해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네가 이리저리 여자들을 껴안고 있는 사진을 방금 네 아내에게 선물로 보냈어.”태현은 즉시 옆에 끼고 있던 여자들을 놓고 큰 소리로 외쳤다.“최하연, 너 고소할 거야!”“와이프 친정이 그렇게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는 너희 집에서 딱히 별 볼일 없고. 네 와이프가 네가 밖에서 이렇게 즐겁게 노는 것을 안다면, 이 얘기가 나오지 않겠어?”태현은 입이 댓 발 나왔다.“무슨 헛소리야! 내 와이프가 네 말 믿을 것 같아?”초조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꼭 쥐고 있는데 바로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몇 초간 목숨이
“태현이가 고의로 그런 건 아니야. 너에 대해 오해해서 그런 거니까 더 이상 따지지 마.”실망스러운 마음이 컸던 서준은 하연의 발걸음을 따라잡고 하연의 팔을 잡았다.하연은 힘껏 서준의 팔을 뿌리쳤다.“한 대표님은 정말 얼굴도 두껍네요. 무슨 권리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서준은 하연의 좌우에 적의를 띤 여은과 예나를 보았다.“너는 마음이 태평양 같아서 안 된다니까. 우리가 친구처럼 잘 이야기해 볼게.”하연은 무신경하게 웃었고, 치켜뜬 눈에는 무관심이 가득했다.“나한테 전 남편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이혼하고 친구가 된다는 건 말도 안 되지.”하연이 이런 식으로 냉정하게 선을 긋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준은 여전히 담담히 대처할 수 없었다. 서준은 일부러 냉담한 척 말했다.“사과 성명은 내일 아침에 발표할 거고, 실시간 검색어는 내가 곧 내리게 할 겁니다.”“여기서 그럴듯하게 관대한 척할 필요는 없어요. 저 사람들이 나에게 이따위로 대하는 것은 모두 한 대표 묵인하에 된 것 아닌가요?”“내가?”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하연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운이 가득했다. 찬란한 눈동자는 한서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당신이 매번 나를 무시하는 그 태도 때문에 내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마음대로 짓밟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죠. 이제 와서 왜 갑자기 좋은 사람인 척인가요?”“당신 어머니와 여동생처럼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것보다 안태현에게 더러운 물을 뿌리는 것이 차라리 더 낫죠.”서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한씨 집안에서 서준은 여태껏 하연의 처지에 관심을 둔 적이 없어서 겉으로는 가족들이 별 갈등 없이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서준은 하연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둘은 부부 사이였지만 내내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서준의 어머니인 이수애는 줄곧 이 일을 트집 잡아 사사건건 하연을 괴롭혔다. 그러나 하지만 서준은 단 한 번도 하연의 입장에서 말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형제들이 항상 자기 앞에서 하연이 여
나운석이 이렇게 내뱉자 안에 앉아있던 커플들이 모두 보고 작은 소리로 흥분하여 청혼에 성공했는지 각자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하연과 운석의 반대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안태현과 그의 아내가 앉아 있었다.태현은 요 며칠 동안 간신히 아내를 달래서 함께 밖에서 저녁을 먹자고 해서 나왔다.그는 커플 전용식당에서 하연을 발견하고는 하연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운석의 뒷모습 사진을 찍어 서준에게로 전송했다.그러고 나서 한 마디 덧붙였다.[야, 네 전처가 또 새로운 사냥감을 찾았어. 몸매를 보니 꽤 멋지네.]회의 중이었던 서준은 메시지를 받고 얼굴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관자놀이가 불룩거렸다. 휴대전화를 탁자 위로 탁탁 신경질적으로 두드려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그는 의자 등받이에 걸린 외투를 들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여러분은 계속 회의 진행하십시오. 저는 일이 좀 있습니다.”곧이어 문을 밀고 떠나 식당으로 바로 달려갔다.운석은 몸을 곧게 펴고 정색하며 말했다.“여신님, 이전에 내가 대중 앞에서 고백한 행위는 확실히 무모했습니다. 나에 대한 인상이 더 나빠졌겠어요. 여기서 지금 사과드릴게요.”“사과받았고, 이제부터 안 그러면 됩니다.”그의 두 눈은 여느 때보다 진지하게 하연을 보고 있다.“하지만 당신에 대한 제 마음은 진심이라는 거 알아주세요.”“경매장에서 하연 씨의 몇 마디 말로 누군가가 거액을 들여 팔찌를 사게 했던 당신의 그 스마트함에 반했습니다.옥상에서 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흘리는 하연 씨 모습 보면서 많이 가슴 아팠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여자의 마음을 잘 알고 주변에 늘 여자들이 많은 것 같지만 그날 밤처럼 단 한 사람 마음이 신경 쓰인 건 처음이에요.나중에 B시로 다시 돌아왔을 때, 무대에서 하연 씨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완전히 빠져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었어요.”하연은 운석의 가슴을 후비는 고백을 듣고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서준은 바짝 마른 입술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한 마디를 뱉었다.“보면 모르겠냐?”“하연 씨?” 나운석은 입을 크게 벌리고 하연을 가리켰고 또 서준을 가리켰다.“너?”결국 다시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나는...”“이게 다 무슨 일이야!”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운석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았다. 여신님을 위해 받아들여야 할 사실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태현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어리둥절한 운석 옆으로 다가왔다.“운석아, 친구의 아내를 속이면 안 되지. 너는 이번에 일을 너무 크게 벌였어.”운석은 갑자기 화가 났다.“이혼했다며! 이제 자유롭게 연애해도 되는 거 아냐?”운석이 한서준을 밀고 건성으로 말했다.“하연 씨 처음 알았을 때 네 전처인 줄 몰랐다.”하연은 침착하게 서준의 곁을 지나쳤다. 그러자 뒤에서 싸늘하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설명하면 되지 않아?”하연은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까?”하연은 말을 마치고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가지 마세요! 여기에 여기 세 사람과 무슨 일인지 같이 이야기해보고 오해도 풉시다.” 운석은 하연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서준은 어두워진 얼굴로 떠났고 안태현은 서준의 뒤를 쫓아갔다.운석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너무 혼란스럽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튿날 아침, 운석은 비서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하연의 사무실로 뛰어들었다.하연은 눈을 들기 귀찮아서 서류에 코를 박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뭐 하러 나한테 왔어요? 좋은 친구들은 운석 씨한테 손가락질 안 하나 봐요?”“밤새 못 자고 생각해 봤는데, 여전히 하연 씨를 포기할 수 없어요.” 운석은 꼿꼿이 서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그리고... 하연 씨에 대한 나의 감정이 더 확실해졌어요!”하연은 어이가 없었다.“이 정도로요?”하연의 기억 속의 이 사람은 천박하기 그지
[이런 불효 자식!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하연이잖아! 너와 정혼한 HT그룹 외동딸 최하연!]운석의 아버지 나훈철 회장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큰 목소리로 운석에게 고함을 질렀다.나훈철이 운석을 B시로 발령을 내주었던 것은 운석이 하연과 가깝게 지냈으면 하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민은 원래 나훈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 운석에게 하연이 누구인지 직접 알려주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운석이 DS그룹에 출근할 수 있도록 했다.‘이런 천하에 막돼먹은 아들놈이 여전히 눈치 없이 어른의 면전에서 보란 듯이 약속을 깨고, 아직도 하연이를 못난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다니!’나훈철은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고, 화면 밖으로 나가 운석을 직접 따끔하게 훈계하고 싶었다.운석이 일어서며 사람의 이목을 끄는 매력적인 눈으로 하연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운석은 정말 기억 속의 못난이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여신이 동명이인이 아닌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내가 추앙하는 나의 여신님이... 내가 죽어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그 혼인 상대였다니!”운석은 그 자리에서 펑 하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야. 사실일 리가 없어!”운석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을 한 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하연은 운석을 보면서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하연은 태블릿은 놓아둔 채, 혼자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웃었다.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도 늦지 않는 법이었다.‘저 원수가 지금처럼 겁에 질려 정신없는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1등짜리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훨씬 기쁘고 신나네!’때마침 하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큰오빠, 저한테 무슨 일 있으세요?” 최하연은 말투가 여유로웠다.[너는 파혼을 당했으면서 이렇게 큰일에 웃음이 나오니?]전화기 너머의 하민은 자신이 아끼던 여동생이 뜻밖에도 이렇게 운석에게 외모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약간 화가 났다.“물론 즐겁
서영이 어색하게 웃었다.“그럴 리가요. 전 얼마 전까지 외국에 있었어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은 믿지 마세요.”이수애 여사가 서준의 만류를 무릅쓰고 몰래 시아버지를 통해 일을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서영은 감옥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체조나 하는 신세였을 것이다.하연이 차갑게 서영을 힐끗 보았다.“감옥에서 나왔으면 개과천선해서 착하게 살아야지. 내 숍을 또 부수고 행패를 부리면 이번에는 초범이 아니라 재범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건데 겁도 없어. 너 알아서 해, 나는 모르니까.”“나 감옥에 안 갔다고! 귀먹었어?”서영은 참지 못하고 하연에게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다가 예나에게 가로막혔다.“지금 2 대 1인데, 몸 싸움하게?”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눈앞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분해서 씩씩거리고 이를 갈며 말했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너희들 숨기에는 이미 늦었어!”한서영은 한서준에게 절대 먼저 나서서 하연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다.“너 겁나는 거 다 알아. 우리 자기는 너 같은 계집애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예나가 의기양양하게 하연의 어깨에 기대어 말했다.서영은 마음속으로 화가 나서 두 주먹을 꼭 쥐었지만 화풀이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조용히 같이 왔던 일행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직원들은 서영과 함께 왔던 명문가 아가씨들이 이미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고, 아무도 서영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그 작은 무리로부터 배척당했다는 수치심이 들자, 서영은 여전히 분개한 눈빛으로 아직 매장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하연은 예나를 도와 팔찌 몇 개를 착용해 보았는데 모두 별로 맘에 들지 않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두 고객님, 혹시 팔찌 하나 더 안 가져가셨나요?” 직원의 눈은 친절한 거짓 웃음을 지었지만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뒤에 다른 직원 한 명이 달려왔다.“확실히 한 점이 부족한데, 직접 찾아
하연이 입가에 조롱하는 웃음을 띠며 서영의 앞에 섰다.“왜 멍하니 있어? 빨리 경찰에 신고해! 나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아.”서영은 초조해져서 온 얼굴이 땀투성이가 되어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어쩔 줄 몰라 했다.“내 가방 안에 있어야 할 팔찌가 왜 네 가방에 들어갔는지 궁금하니?”한서영은 순간 멍해졌다.“나는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네.”“너 정말 네가 내 가방에 물건을 넣는 걸 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해?”하연이 엄하게 물었다.서영이 목걸이를 훔쳐 하연의 가방에 넣을 때 하연은 마침 옆에 있던 거울을 통해 서영이 일을 꾸미는 것을 보았고, 서영이 몸을 돌릴 때 잽싸게 그 목걸이를 꺼내어 서영의 가방 안에 넣었다.예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고, 비로소 큰 그림의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한서영, 너, 너는 정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나이가 어린 데도 못된 짓을 꾸밀 생각을 해? 참 대단하다!”“지난번에 너를 구치소까지 보낼 생각은 아니었어. 근데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그 일에서 배운 게 하나도 없네. 그러면 내가 오늘 한씨 집안 대신 너 좀 따끔하게 가르쳐야겠다!”하연이 고개를 돌려 점원에게 말했다.“112로 신고해서 경찰 부르세요!”“신고하지 마. 경찰 부르지 말라고!”서영은 점원을 막고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게 했다.그 순간 서준으로부터 온 전화가 울리자 서영은 전화를 받고 울기 시작했다.“오빠,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 이 사람들이 나를 경찰로 넘기려고 해.”예나는 기가 찼다.“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잘못은 자기가 저질러놓고, 오히려 억울하다고 울고 있네.”서준은 마침 바로 근처에 있어서 몇 분 내로 금방 매장에 도착했다.들어오자마자 하연의 일행과 서영이 서서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오빠! 이 사람들이 여럿이서 나를 괴롭혀!”서영이 큰 소리로 울며 하연과 친구들을 가리켰다.서준의 냉엄한 눈빛으로 하연을 힐끗 쳐다보고, 얼굴을 돌려 차가운 목소리로 서영에게
서영은 하연 앞에 가기 싫어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목소리는 모깃소리만큼 작았다.“그게..., 미안하게 됐어.”예나가 화가 나서 거칠게 말했다.“더 크게 말해, 안 들려!”한서영은 두 손을 꼭 맞잡고 눈을 딱 감고 조금 더 크게 말했다.“미안하다고 말했잖아! 미안하다고!”“됐지?” 서영은 고개를 돌려 서준을 보았다.“오빠.”서영의 표정이 우는 것보다 더 딱해 보였다.서준은 차갑게 말했다.“나 말고 하연 씨에게 사과해야지.”서영은 어쩔 수 없이 하연 쪽으로 몇 발짝 걸어갔다.“사과했으면 됐지, 뭐 하러 경찰까지 불러 조사를 받게 하냐고? 사과만 하면 경찰 조사 안 받아도 된다는 건가? 한 대표님, 너무 이기적이시네.”하연이 붉은 입술로 서준을 비웃었다. 서준은 하연의 이런 태도 때문에 전혀 상황을 종잡을 수 없었다.“괜히 도둑으로 몰려서 꼼짝없이 잡혀갈 뻔했는데, 명문가 한씨 집안사람이면 말 한마디로 죽음도 면하는 금수저인 거야?”가족들이 하도 오냐오냐하며 키워서 서영의 못된 행동은 어른이 되어서 점점 더 심해졌다. 하연은 서영을 혼쭐낼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가흔은 하연의 태도에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미친 듯이 울고 발광하는 서영을 또 한 번 연행해갔다.서영이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서준의 얼굴이 걱정 때문에 어두워졌다.“작은 다이아몬드 팔찌 하나 때문에 이렇게 문제를 키울 필요가 있나?”서준이 하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언제부터 이렇게 몰인정한 사람이 됐지?”이혼 전, 하연은 서준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참았었지만, 이혼하자마자 완전히 한씨 집안사람들이 원수처럼 느껴졌다. 이혼 후에 돌변한 하연의 태도 때문에 서준은 하연이 점점 더 낯설게 보였다.서준은 서영에게 사과도 시켰고, 목걸이 값을 직접 지불해서 하연에게 사주겠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성에 안 차는지 계속 불만인 하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래?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잘 몰랐던 거지.” 서준은
남준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정지철은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한걸음에 다가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자, 그럼 우리 집으로 가세.” 동시에, 정씨 가문의 저택은 불빛으로 환히 밝아져 있었다. 정다영은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벌써부터 문밖으로 자꾸만 향하며,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주머니, 기사님께 전화 한 번 해 보세요. 왜 아직도 안 오시는 거죠?” 가정부인 왕순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께서 직접 모시러 가셨으니,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다영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 “분명히 남준 씨일 거야.” 문을 나서자 찬바람이 불어왔고, 다영은 몸을 살짝 떨었지만, 마음속 설렘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남준 씨!” 차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다영의 시선은 오직 한 곳만을 향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이는 기대했던 남준이 아니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녀는 놀란 듯 말했다. “어머님, 여기 웬일이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묻어났지만, 금세 태연한 척하며 표정을 고쳐 잡았다. “왜? 내가 오면 안 되는 거니?”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송혜선이었다. 송혜선은 어두운 색의 패딩을 입고 있었지만, 부드럽게 불룩 나온 배는 그녀의 우아함과 품격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다영은 서둘러 다가가 송혜선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다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실 줄 몰랐고, 미리 말씀도 없으셨잖아요.” 송혜선은 다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남준이가 돌아온다길래 네 아버지가 연락을 줬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들러본 거야.” 다영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상황을 이해했다. 단순히 들르겠다는 말은 구실에 불과했고, 내일 있을 이사회를 염두에 둔 방문임이 분명했다.
“제가 요즘 입덧이 심해서 기름진 음식은 못 먹거든요.” 하연의 말에 부동건은 금방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구나. 그렇다면 다음에 혜선 이모에게 담백한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할게.” 부동건은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곁에 있던 비서는 부동건의 눈짓을 읽고, 즉시 보온 통을 조용히 치워갔다. “혜선 이모는 그런 일을 잘 아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혜선 이모에게 물어보렴.” 그 말이 떨어지자, 사무실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연은 상혁의 표정이 차갑게 변한 것을 느꼈다. 그의 주변에는 금세 폭풍이 몰아칠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연은 상혁의 손을 살짝 잡으며 그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점점 사람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혜선 이모도 지금 임신 중이신데, 어떻게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있겠어요?” 부동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냐, 넌 걱정하지 말거라.” 하연은 여전히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 “아니에요. 전 늘 진숙 이모가 해주신 음식을 먹어서, 다른 분이 만든 건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녀가 조용히 조진숙을 언급하자, 부동건은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 곧 코를 문지르며 멋쩍게 말했다. “그렇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다. 진숙 이모는 어릴 때부터 널 봐왔으니 네 입맛을 가장 잘 알겠지.” 그는 말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럼 앞으로 이런 건 진숙 이모에게 부탁하자꾸나.” 상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이런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들의 단호한 어조에 부동건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젊은 사람들 일은 내가 나설 일이 아니지. 다만 너희 둘이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부동건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이제 너희가 가정을 이루고 일도 안정적으로 맡게 되어, 정말 기쁘구나.” 그는 마치 옛날을 떠올리는 듯
상혁은 하연을 단숨에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밀착했다. “대범하다는 건 과장이야. 그저 한 번의 신세를 갚았을 뿐이야.” 하연은 그의 말에 질투가 더 짙어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톡톡 찌르며 따져 물었다. “어떤 일이길래 부 대표님이 그렇게 큰 손을 쓰셨나요?” 전진그룹의 프로젝트는 최소 몇억에 달하는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하연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면, 부 대표님이 나한테 감추고 싶은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요?” 상혁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네 작은 머릿속엔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렇게 가득하니?” 상혁의 큰 손은 자연스럽게 하연의 어깨로 내려왔다. 그는 몸을 숙이며 하연의 시선을 마주했다. 깊고 진지한 눈동자 속에 하연의 모습만 담겨 있었다. 상혁은 하연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알아? 하연아, 너 지금 엄청 귀엽다.” 하지만 하연은 여전히 진지했다. “부 대표님, 화제를 돌리지 말아요.” “응.”상혁은 가볍게 대답하며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그 모임에서 들었던 말이 하연의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주슬기에게 이익을 준 건, 단지 주슬기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른 얽매임이 없다는 걸 뜻하지.” 잠시 말을 멈춘 후,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하연아. 오늘 너의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들었어.” 하연이 질투를 하고, 다른 여자를 신경 쓰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혁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하연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상혁의 손등을 꼬집으며 말했다. “부 대표님,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우리 아이 아빠가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으읏!” 하연의 말이 끝나
“마침 ZT그룹의 서류가 도착했네요. 최 사장님, 함께 올라가시죠.” 연지의 말에 하연은 자연스럽게 주의를 기울였다. “DL그룹이 ZT그룹과도 협력하고 있나요?” 연지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원래는 없었죠.”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연지는 공손하게 손짓하며 말했다. “먼저 타시죠.” 하연은 앞장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연지는 뒤따라 옆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올해 사업 조정으로 ZT그룹과 협력할 기회가 조금 생겼습니다. 게다가 부 대표님께서 ZT그룹을 꽤 신경 써 주신 덕에, 자연스레 왕래가 잦아졌죠.” 하연은 시선을 고정한 채 연지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느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호기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 “오, 그게 무슨 뜻이죠?” 연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연말은 늘 우리 회사에서 가장 바쁜 시기인데, 최근 부대표님께서 전진그룹의 프로젝트를 모두 ZT그룹에 넘기셨거든요. 덕분에 이번 연말은 꽤나 한가해졌어요. 전진그룹이라면 바로 무역협회 전영철 회장님 회사잖아요.”하연은 연지의 말 속에서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전진그룹은 F국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으로, 그 기반은 단단했고 산하 프로젝트도 방대했다. 그런 이익을 고스란히 주슬기에게 넘겼다니,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하연의 마음속에 의혹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며 연지를 흘깃 바라봤다. 연지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분명 의도가 있었다. 하연은 차갑게 눈을 좁히며 물었다. “그 말은, DL그룹이 그 프로젝트를 전부 ZT그룹에 넘겼다는 거네요?” 연지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부 대표님께서 이 일을 말씀 안 하셨나 봐요?” 하연은 옅게 미소 지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말해 줬으니, 덕분에 알게 됐네요.” 연지는 속이 뜨끔하며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급히 변
하성은 핸드폰 화면을 힐끗 보더니, 온통 빨갛게 물든 주식 그래프를 보고는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우리 하연이, 이제 완전 큰 부자가 됐네.” 하연은 활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다 오빠 덕분이에요. 역시 든든한 나무 밑에 있어야 시원하게 쉴 수 있는 거죠.” 하성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눈에 애정 어린 미소를 띄웠다. “하연이 네가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될 수 있어서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 하연은 문득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오빠가 있어서 참 좋아요.” 하성은 책상 위의 서류를 들어 흔들며 웃었다. “그럼, 최 사장님. 이 프로젝트, 이제 나한테 넘겨줄 준비는 됐습니까?” 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네, 오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하성은 업무를 빠르게 익혔다. 그의 예리한 감각과 타고난 사업적 통찰력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심지어 정태훈도 하성의 능력에 감탄하며 연신 칭찬했다. “하성 도련님, 처음부터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우리 최 사장님보다 더 대단한 걸요.” 하성은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정 실장까지 이런 입발린 소리를 하다니, 어울리지 않네.” 태훈은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는 하성을 한번, 하연을 한번 번갈아 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최씨 가문 분들은 모두 사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십니다. 하민 도련님이든, 하연 아가씨든, 지금의 하성 도련님까지, 모두 뛰어난 경영 실력을 가지셨죠. DS그룹은 누구 손에 맡겨도 틀림없이 번창할 겁니다.” 하연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들었죠, 오빠? 이제 회사는 오빠한테 맡기고, 저는 잠시 쉬어야겠어요.” 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지금 너는 우리 집안
“오빠, 정말 나한테도 숨길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요!” 하연은 점점 초조해졌다.하성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 지난 일이야.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잖아.”“하지만...” 하연이 더 말하려 하자, 하성은 서둘러 동생의 말을 잘랐다. 그는 손으로 하연의 어깨를 주무르며 화해를 구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됐어. 하연아, 오빠 이제 막 돌아왔는데 좀 쉬게 해 줘. 내일이면 회사에 나가야 하는데, 남은 마지막 자유 시간마저 빼앗을 거야?”하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알았어요.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다만, 후회하지 않으면 좋겠어요.”하성은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 난 할아버지랑 좀 있다가 갈게.”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바로 몸을 돌려 떠났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떠나는 하성의 뒷모습을 보며,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신가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가흔에게도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았다. 마치 그 메시지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다음 날. 하성이 DS그룹을 맡게 된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지며 많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이른 아침부터 회사 입구에는 여러 매체의 기자들이 몰려들어 첫 번째 단독 기사를 얻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서여은이 하연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성 오빠가 DS그룹을 맡는다는 소문 들었는데, 진짜야?] 하연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답장을 보냈다. [응, 맞아.] 여은은 깜짝 놀라며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왜 갑자기 하성 오빠가 DS그룹을 맡아? 그리고 너는? 혹시 너는 상혁 오빠랑 사랑에 빠져서 정신없는 거 아니야?]하연은 당황하며 짧게 답했다. [나 임신했어.]순간 채팅창에는 감탄사로 가득 찬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 [하연아, 너 진짜 너무 빠르잖아!]하연이 답장을 쓰기도 전에 여은
손이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의 하늘은 이미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눈부신 석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창유리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이현을 발견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상무님, 깨어나셨습니까?”이현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오늘 고생 많았어.”그 말에 비서는 마치 큰 짐을 내려놓은 듯 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전 괜찮습니다. 상무님, 그리고 이젠 정말 건강 좀 생각하세요. 그러다가 큰일 나십니다. 더 쉬세요.”이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어.”“사장님,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목마르시죠? 물 한 잔 가져오겠습니다.” 비서는 그렇게 말하며 유리잔에 따뜻한 물을 따라 내밀었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으니 제가 도시락 하나 포장해 올게요.”이현이 막 말리려 했지만, 이미 비서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하연은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연말 전까지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이젠 홀몸도 아닌데. 몸도 챙기고 뱃속의 아이도 생각해야지.” 최동신은 진심 어린 충고를 했지만, 하연은 자기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저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 큰오빠, 새언니 달콤한 신혼이잖아요.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좀 보낼 수 있게 큰 오빠 몫까지 제가 해야죠.”최동신은 하연의 이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최 노인에게는 손자, 손녀 모두 소중했기 때문이다. 하민이 이제 막 신혼을 맞이했으니 당연히 더 신경 써줘야 했다.“정 실장이 있잖아. 정 실장이 네 옆에서 오래 도왔으니. 정 실장한테 맡기면 되지, 네가 다 할 필요는 없잖아.” 그 말의 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하
그 순간, 비서는 이현에게 팔을 잡히며 벽 쪽으로 강하게 밀려 들어갔다. 비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현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걸 비서도 알고 있었다. ‘마음의 병은 결국 마음의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는데, 최 사장님 이야말로 그 약이 아닌가? 그런데 상무님은 왜 자꾸 피하려고만 하는 걸까?’비서는 이현이 하연을 피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계속 하연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현의 마음속 병은 마음의 약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음의 약이 바로 최하연이라는 사실을...그래서 비서도 이현이 왜 굳이 숨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 멀리, 하연은 상혁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눈에 띄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가 함께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끌었다. 두 사람은 오늘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최하연 님, 초음파실은 이쪽입니다.”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하연은 초음파실로 들어갔고, 상혁은 밖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연이 초음파실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한 장의 초음파 사진이 들려 있었다. 하연의 눈은 반짝였고, 사진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상혁이 다가가 사진을 보려고 했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사진을 감추며 피했다. “자, 부 대표님? 보고 싶으세요?” 하연은 얼굴 가득한 환한 미소를 띄우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상혁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의사가 뭐래? 아이는 잘 자라고 있데?” 하연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어머, 부 대표님도 긴장하는 순간이 있네요?” 상혁은 하연을 따라붙으며 장난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빨리 말해봐, 최하연.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히히, 안 알려줄래요.” 두 사람은 웃음소리를 주고받으며 평온하고 따스한 장면을 연출했다. 한편, 벽 뒤에 숨어 있던 이현은 하
상혁은 부동건의 말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한 태도였다. 바로 그때, 상혁의 핸드폰에 하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출발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뭐 하고 있어요?] 그는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회사에 있어.] [아직도 안 끝났어요?] 하연이 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귀여운 이모티콘 하나가 따라붙었는데, 살짝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상혁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두드렸다. [곧 끝나 조금 있다가 보자.] [넹, 부 대표님.]하연은 말 잘 듣는 학생이 선생님한테 보내듯 답장을 보내왔다. 상혁의 눈빛에는 어느새 부드러움이 가득해졌다.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버지, 그럼 하고 싶은 말씀이 더 남으셨으면 그건 남준이한테나 들려주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상혁의 단호한 태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고, 부동건에게 체면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상혁아, 나는 진심에서 하는 말인데...” 부동건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긴 한숨만 내쉬면서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과 풀리지 않는 걱정이 어른거렸다. 상혁이 복도로 나오자, 그곳에서 원신민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원신민은 상혁이 나오자마자 바삐 뒤따랐다. “대표님, 교도소 쪽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고경수가 새로운 증거를 대량으로 제출했는데, 정규인을 철저히 몰아넣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상혁은 담담히 대꾸했다. “고나희의 죽음은 고경수에게 가장 큰 상처였어. 이번엔 그저 이자 정도를 챙기는 셈이야. 결국 개싸움일 뿐이지.”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원신민이 이어 말했다. “정규인은 이미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검찰 쪽에서 증거를 고정하고 있습니다. 변호사 말로는 내년 초쯤 재판이 열릴 예정이며, 최소 20년형 이상은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경제 범죄는 보통 다른 사건보다 형량이 무겁다. 게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