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기사 내려라.”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그 자리에 너 끝까지 안 있었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고.”태현은 그만두었다.“뭐가 아니야, 최하연, 그런 여자 맞아.”“네가 그때 나를 안 말렸으면, 틀림없이 그 간사한 불륜 커플에게 다가가서 귓속말로 그들에게 예의와 염치가 뭔지 똑바로 가르쳤을 텐데!”태현은 당시 서준의 살벌한 눈빛 때문에 자기에 대한 의리가 1도 없었음을 알게 됐고,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최하연이 승마장에서 그렇게 나를 놀리고 협박까지 했잖아! 아무래도 네티즌들에게 실체를 다 까발려야겠어.”“그래? 너 먼저 귀싸대기 한 대 크게 맞겠다.”하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태현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또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어떻게 내가 가는 데마다 다 네가 있는 거야!” 태현은 몸이 떨리고 소름이 끼쳤다.혹여 나쁜 말을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들키는 일도 드물다. 그런데 매번 이렇게 험담을 할 때마다 당사자가 듣고 있다니 재수가 정말 없다.하연은 팔짱을 끼고 차가운 표정으로 뒤에 서서 옆의 여은에게 말했다.“좋다. 더 알아볼 것도 없네.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잖아.”예나는 태현의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우리 자기를 계속 괴롭힌 게 너였구나! 너 이 새끼 오늘 혼 좀 나보자!”하연은 예나를 막고 휴대전화를 꺼내 몇 번 조작해서 태현을 향해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네가 이리저리 여자들을 껴안고 있는 사진을 방금 네 아내에게 선물로 보냈어.”태현은 즉시 옆에 끼고 있던 여자들을 놓고 큰 소리로 외쳤다.“최하연, 너 고소할 거야!”“와이프 친정이 그렇게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는 너희 집에서 딱히 별 볼일 없고. 네 와이프가 네가 밖에서 이렇게 즐겁게 노는 것을 안다면, 이 얘기가 나오지 않겠어?”태현은 입이 댓 발 나왔다.“무슨 헛소리야! 내 와이프가 네 말 믿을 것 같아?”초조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꼭 쥐고 있는데 바로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몇 초간 목숨이
“태현이가 고의로 그런 건 아니야. 너에 대해 오해해서 그런 거니까 더 이상 따지지 마.”실망스러운 마음이 컸던 서준은 하연의 발걸음을 따라잡고 하연의 팔을 잡았다.하연은 힘껏 서준의 팔을 뿌리쳤다.“한 대표님은 정말 얼굴도 두껍네요. 무슨 권리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서준은 하연의 좌우에 적의를 띤 여은과 예나를 보았다.“너는 마음이 태평양 같아서 안 된다니까. 우리가 친구처럼 잘 이야기해 볼게.”하연은 무신경하게 웃었고, 치켜뜬 눈에는 무관심이 가득했다.“나한테 전 남편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이혼하고 친구가 된다는 건 말도 안 되지.”하연이 이런 식으로 냉정하게 선을 긋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준은 여전히 담담히 대처할 수 없었다. 서준은 일부러 냉담한 척 말했다.“사과 성명은 내일 아침에 발표할 거고, 실시간 검색어는 내가 곧 내리게 할 겁니다.”“여기서 그럴듯하게 관대한 척할 필요는 없어요. 저 사람들이 나에게 이따위로 대하는 것은 모두 한 대표 묵인하에 된 것 아닌가요?”“내가?”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하연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운이 가득했다. 찬란한 눈동자는 한서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당신이 매번 나를 무시하는 그 태도 때문에 내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마음대로 짓밟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죠. 이제 와서 왜 갑자기 좋은 사람인 척인가요?”“당신 어머니와 여동생처럼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것보다 안태현에게 더러운 물을 뿌리는 것이 차라리 더 낫죠.”서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한씨 집안에서 서준은 여태껏 하연의 처지에 관심을 둔 적이 없어서 겉으로는 가족들이 별 갈등 없이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서준은 하연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둘은 부부 사이였지만 내내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서준의 어머니인 이수애는 줄곧 이 일을 트집 잡아 사사건건 하연을 괴롭혔다. 그러나 하지만 서준은 단 한 번도 하연의 입장에서 말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형제들이 항상 자기 앞에서 하연이 여
나운석이 이렇게 내뱉자 안에 앉아있던 커플들이 모두 보고 작은 소리로 흥분하여 청혼에 성공했는지 각자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하연과 운석의 반대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안태현과 그의 아내가 앉아 있었다.태현은 요 며칠 동안 간신히 아내를 달래서 함께 밖에서 저녁을 먹자고 해서 나왔다.그는 커플 전용식당에서 하연을 발견하고는 하연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운석의 뒷모습 사진을 찍어 서준에게로 전송했다.그러고 나서 한 마디 덧붙였다.[야, 네 전처가 또 새로운 사냥감을 찾았어. 몸매를 보니 꽤 멋지네.]회의 중이었던 서준은 메시지를 받고 얼굴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관자놀이가 불룩거렸다. 휴대전화를 탁자 위로 탁탁 신경질적으로 두드려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그는 의자 등받이에 걸린 외투를 들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여러분은 계속 회의 진행하십시오. 저는 일이 좀 있습니다.”곧이어 문을 밀고 떠나 식당으로 바로 달려갔다.운석은 몸을 곧게 펴고 정색하며 말했다.“여신님, 이전에 내가 대중 앞에서 고백한 행위는 확실히 무모했습니다. 나에 대한 인상이 더 나빠졌겠어요. 여기서 지금 사과드릴게요.”“사과받았고, 이제부터 안 그러면 됩니다.”그의 두 눈은 여느 때보다 진지하게 하연을 보고 있다.“하지만 당신에 대한 제 마음은 진심이라는 거 알아주세요.”“경매장에서 하연 씨의 몇 마디 말로 누군가가 거액을 들여 팔찌를 사게 했던 당신의 그 스마트함에 반했습니다.옥상에서 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흘리는 하연 씨 모습 보면서 많이 가슴 아팠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여자의 마음을 잘 알고 주변에 늘 여자들이 많은 것 같지만 그날 밤처럼 단 한 사람 마음이 신경 쓰인 건 처음이에요.나중에 B시로 다시 돌아왔을 때, 무대에서 하연 씨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완전히 빠져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었어요.”하연은 운석의 가슴을 후비는 고백을 듣고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서준은 바짝 마른 입술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한 마디를 뱉었다.“보면 모르겠냐?”“하연 씨?” 나운석은 입을 크게 벌리고 하연을 가리켰고 또 서준을 가리켰다.“너?”결국 다시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나는...”“이게 다 무슨 일이야!”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운석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았다. 여신님을 위해 받아들여야 할 사실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태현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어리둥절한 운석 옆으로 다가왔다.“운석아, 친구의 아내를 속이면 안 되지. 너는 이번에 일을 너무 크게 벌였어.”운석은 갑자기 화가 났다.“이혼했다며! 이제 자유롭게 연애해도 되는 거 아냐?”운석이 한서준을 밀고 건성으로 말했다.“하연 씨 처음 알았을 때 네 전처인 줄 몰랐다.”하연은 침착하게 서준의 곁을 지나쳤다. 그러자 뒤에서 싸늘하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설명하면 되지 않아?”하연은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까?”하연은 말을 마치고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가지 마세요! 여기에 여기 세 사람과 무슨 일인지 같이 이야기해보고 오해도 풉시다.” 운석은 하연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서준은 어두워진 얼굴로 떠났고 안태현은 서준의 뒤를 쫓아갔다.운석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너무 혼란스럽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튿날 아침, 운석은 비서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하연의 사무실로 뛰어들었다.하연은 눈을 들기 귀찮아서 서류에 코를 박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뭐 하러 나한테 왔어요? 좋은 친구들은 운석 씨한테 손가락질 안 하나 봐요?”“밤새 못 자고 생각해 봤는데, 여전히 하연 씨를 포기할 수 없어요.” 운석은 꼿꼿이 서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그리고... 하연 씨에 대한 나의 감정이 더 확실해졌어요!”하연은 어이가 없었다.“이 정도로요?”하연의 기억 속의 이 사람은 천박하기 그지
[이런 불효 자식!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하연이잖아! 너와 정혼한 HT그룹 외동딸 최하연!]운석의 아버지 나훈철 회장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큰 목소리로 운석에게 고함을 질렀다.나훈철이 운석을 B시로 발령을 내주었던 것은 운석이 하연과 가깝게 지냈으면 하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민은 원래 나훈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 운석에게 하연이 누구인지 직접 알려주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운석이 DS그룹에 출근할 수 있도록 했다.‘이런 천하에 막돼먹은 아들놈이 여전히 눈치 없이 어른의 면전에서 보란 듯이 약속을 깨고, 아직도 하연이를 못난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다니!’나훈철은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고, 화면 밖으로 나가 운석을 직접 따끔하게 훈계하고 싶었다.운석이 일어서며 사람의 이목을 끄는 매력적인 눈으로 하연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운석은 정말 기억 속의 못난이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여신이 동명이인이 아닌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내가 추앙하는 나의 여신님이... 내가 죽어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그 혼인 상대였다니!”운석은 그 자리에서 펑 하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야. 사실일 리가 없어!”운석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을 한 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하연은 운석을 보면서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하연은 태블릿은 놓아둔 채, 혼자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웃었다.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도 늦지 않는 법이었다.‘저 원수가 지금처럼 겁에 질려 정신없는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1등짜리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훨씬 기쁘고 신나네!’때마침 하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큰오빠, 저한테 무슨 일 있으세요?” 최하연은 말투가 여유로웠다.[너는 파혼을 당했으면서 이렇게 큰일에 웃음이 나오니?]전화기 너머의 하민은 자신이 아끼던 여동생이 뜻밖에도 이렇게 운석에게 외모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약간 화가 났다.“물론 즐겁
서영이 어색하게 웃었다.“그럴 리가요. 전 얼마 전까지 외국에 있었어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은 믿지 마세요.”이수애 여사가 서준의 만류를 무릅쓰고 몰래 시아버지를 통해 일을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서영은 감옥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체조나 하는 신세였을 것이다.하연이 차갑게 서영을 힐끗 보았다.“감옥에서 나왔으면 개과천선해서 착하게 살아야지. 내 숍을 또 부수고 행패를 부리면 이번에는 초범이 아니라 재범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건데 겁도 없어. 너 알아서 해, 나는 모르니까.”“나 감옥에 안 갔다고! 귀먹었어?”서영은 참지 못하고 하연에게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다가 예나에게 가로막혔다.“지금 2 대 1인데, 몸 싸움하게?”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눈앞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분해서 씩씩거리고 이를 갈며 말했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너희들 숨기에는 이미 늦었어!”한서영은 한서준에게 절대 먼저 나서서 하연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다.“너 겁나는 거 다 알아. 우리 자기는 너 같은 계집애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예나가 의기양양하게 하연의 어깨에 기대어 말했다.서영은 마음속으로 화가 나서 두 주먹을 꼭 쥐었지만 화풀이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조용히 같이 왔던 일행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직원들은 서영과 함께 왔던 명문가 아가씨들이 이미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고, 아무도 서영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그 작은 무리로부터 배척당했다는 수치심이 들자, 서영은 여전히 분개한 눈빛으로 아직 매장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하연은 예나를 도와 팔찌 몇 개를 착용해 보았는데 모두 별로 맘에 들지 않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두 고객님, 혹시 팔찌 하나 더 안 가져가셨나요?” 직원의 눈은 친절한 거짓 웃음을 지었지만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뒤에 다른 직원 한 명이 달려왔다.“확실히 한 점이 부족한데, 직접 찾아
하연이 입가에 조롱하는 웃음을 띠며 서영의 앞에 섰다.“왜 멍하니 있어? 빨리 경찰에 신고해! 나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아.”서영은 초조해져서 온 얼굴이 땀투성이가 되어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어쩔 줄 몰라 했다.“내 가방 안에 있어야 할 팔찌가 왜 네 가방에 들어갔는지 궁금하니?”한서영은 순간 멍해졌다.“나는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네.”“너 정말 네가 내 가방에 물건을 넣는 걸 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해?”하연이 엄하게 물었다.서영이 목걸이를 훔쳐 하연의 가방에 넣을 때 하연은 마침 옆에 있던 거울을 통해 서영이 일을 꾸미는 것을 보았고, 서영이 몸을 돌릴 때 잽싸게 그 목걸이를 꺼내어 서영의 가방 안에 넣었다.예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고, 비로소 큰 그림의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한서영, 너, 너는 정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나이가 어린 데도 못된 짓을 꾸밀 생각을 해? 참 대단하다!”“지난번에 너를 구치소까지 보낼 생각은 아니었어. 근데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그 일에서 배운 게 하나도 없네. 그러면 내가 오늘 한씨 집안 대신 너 좀 따끔하게 가르쳐야겠다!”하연이 고개를 돌려 점원에게 말했다.“112로 신고해서 경찰 부르세요!”“신고하지 마. 경찰 부르지 말라고!”서영은 점원을 막고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게 했다.그 순간 서준으로부터 온 전화가 울리자 서영은 전화를 받고 울기 시작했다.“오빠,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 이 사람들이 나를 경찰로 넘기려고 해.”예나는 기가 찼다.“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잘못은 자기가 저질러놓고, 오히려 억울하다고 울고 있네.”서준은 마침 바로 근처에 있어서 몇 분 내로 금방 매장에 도착했다.들어오자마자 하연의 일행과 서영이 서서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오빠! 이 사람들이 여럿이서 나를 괴롭혀!”서영이 큰 소리로 울며 하연과 친구들을 가리켰다.서준의 냉엄한 눈빛으로 하연을 힐끗 쳐다보고, 얼굴을 돌려 차가운 목소리로 서영에게
서영은 하연 앞에 가기 싫어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목소리는 모깃소리만큼 작았다.“그게..., 미안하게 됐어.”예나가 화가 나서 거칠게 말했다.“더 크게 말해, 안 들려!”한서영은 두 손을 꼭 맞잡고 눈을 딱 감고 조금 더 크게 말했다.“미안하다고 말했잖아! 미안하다고!”“됐지?” 서영은 고개를 돌려 서준을 보았다.“오빠.”서영의 표정이 우는 것보다 더 딱해 보였다.서준은 차갑게 말했다.“나 말고 하연 씨에게 사과해야지.”서영은 어쩔 수 없이 하연 쪽으로 몇 발짝 걸어갔다.“사과했으면 됐지, 뭐 하러 경찰까지 불러 조사를 받게 하냐고? 사과만 하면 경찰 조사 안 받아도 된다는 건가? 한 대표님, 너무 이기적이시네.”하연이 붉은 입술로 서준을 비웃었다. 서준은 하연의 이런 태도 때문에 전혀 상황을 종잡을 수 없었다.“괜히 도둑으로 몰려서 꼼짝없이 잡혀갈 뻔했는데, 명문가 한씨 집안사람이면 말 한마디로 죽음도 면하는 금수저인 거야?”가족들이 하도 오냐오냐하며 키워서 서영의 못된 행동은 어른이 되어서 점점 더 심해졌다. 하연은 서영을 혼쭐낼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가흔은 하연의 태도에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미친 듯이 울고 발광하는 서영을 또 한 번 연행해갔다.서영이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서준의 얼굴이 걱정 때문에 어두워졌다.“작은 다이아몬드 팔찌 하나 때문에 이렇게 문제를 키울 필요가 있나?”서준이 하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언제부터 이렇게 몰인정한 사람이 됐지?”이혼 전, 하연은 서준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참았었지만, 이혼하자마자 완전히 한씨 집안사람들이 원수처럼 느껴졌다. 이혼 후에 돌변한 하연의 태도 때문에 서준은 하연이 점점 더 낯설게 보였다.서준은 서영에게 사과도 시켰고, 목걸이 값을 직접 지불해서 하연에게 사주겠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성에 안 차는지 계속 불만인 하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래?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잘 몰랐던 거지.” 서준은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자일 뿐인데, 너무 똑똑하면 손해만 볼 뿐이에요.” 남준이 허징인에게 다가가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이제 줘야 하지 않겠어요?” 허징인은 차갑게 비웃으며 얼굴을 굳혔다. “뭐가 그렇게 겁나십니까, 상무님? 제가 약속을 어길까 봐요? 아니면... 그 물건들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요?” “그건 사모님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죠.” 남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징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고, 속으로는 분이 차올랐지만, 상황을 감안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최선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상무님. 이미 약속한 이상, 전 제 말을 반드시 지킬 겁니다.” 허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남준과 눈을 맞췄다. “상무님도 본인의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남준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가 반은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드릴게요.” “안 돼요!” 남준이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사모님한테는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허징인은 눈을 감고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절 죽이세요. 하지만 제가 죽으면 그 물건들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두세요.” “엄마!” 곁에 있던 민찬이 울먹이며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무서워요!” 허징인은 민찬을 꼭 안으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물러서면 끝장이야. 적어도 내 아이는 지켜야 해.’ “상무님,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남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묵했다. 남자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잠시 후 말했다. “죽음도 불사하다니, 사모님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
집에 돌아온 하연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침실 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하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가정부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문틈 사이로 방 안의 하연을 흘깃 바라보며 손으로 가정부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가정부가 물러난 뒤, 상혁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상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는데, 원신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그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상혁은 짧은 문장을 확인한 뒤,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우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마치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이내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하연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상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할 때 마셔.”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우유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회사에 좀 다녀올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상혁은 하연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이 밤중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하연은 살짝 의아해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자는 고개를 숙여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이 난 참 행복해.” 상혁의 눈에는 하연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이 행복이 오래가길,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하연은 상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안기며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요. 정말 행복해
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혁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한 줄기 차가운 빛... 하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가려졌다. “지석 도련님 말씀대로, 형제간에는 서로 도와야 하는 법이죠.” “다만, 부씨 가문의 일을 굳이 외부인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상혁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기운에 압도된 지석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석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슬기가 먼저 나섰다. “하연 씨, 여기 메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맛이 괜찮아요? 추천 좀 해주세요.” 슬기의 말에 하연은 조용히 상혁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자, 상혁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너무 날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 별일도 아닌 걸로 걱정하는 하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상혁은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이 그제야 안심이 되어 바로 슬기에게 메뉴를 추천했다.“오리지널 맛도 괜찮고, 여러가지가 섞인 맛도 좋을 것 같아요. 둘 다 드셔보세요.” “그럼 두 가지 맛으로 각각 한 그릇씩 주세요!” 슬기는 메뉴를 탁 닫으며 밝게 말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석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그가 나가는 것을 슬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석이 자리를 떠나 자, 슬기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두 분의 오붓한 자리를 불편하게 해서요. 집안에서 주선한 선 자리를 억지로 나온 거라...” 여자의 말투에서 묘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슬기는 문득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혁은 그녀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온전히 하연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슬기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눈빛을 외면했다. “그나저나, 하연 씨.” 슬기가 화제를 돌렸다. “최근 하연 씨가 뒤로 물러나고 회사를 최하성 씨에게 맡겼다고 들었어요.”
“하연 씨, 우리 같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슬기는 예상 밖의 대답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연 씨, 이제 저 같은 ‘라이벌’에게 경계심이 풀린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제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할지?” 슬기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그러나 하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주 대표님,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으시면 옆에 있는 분 눈치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슬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 집에서 주선한 맞선일 뿐이라 별로 신경 안 써요. 첫 만남이기도 하고요.”그 순간 뒤에 있던 지한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 대표님,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부 대표님’이라는 말은, 그가 이미 상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한은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곧 혼사를 통해 막대한 사업적 결합을 이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에 지한은 적잖이 긴장했다.“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지한이 하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주슬기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지한은 그저 형식적인 맞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그때 상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SW그룹의 도련님을, 여기서 다 만나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단 한마디로 심지한의 배경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지한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부 대표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
최근 몇 년 동안 H시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번화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도시 풍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상혁은 차를 몰고 하연과 함께 요즘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유명 먹거리 거리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먹거리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양옆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상인들은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다.한참을 걷던 중, ‘10년 전통 국밥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깔끔하고 정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 인테리어는 오래된 가게답지 않게 세련되었고, 메뉴는 벽에 붙어 있어 가격이 한눈에 들어왔다.상혁이 가게를 한참 바라보는 사이, 하연은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기다릴 새도 없이 외쳤다. “사장님, 여기 대표 국밥 하나요!” 사장님은 빠르게 주문을 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못 드시는 재료 있으세요?”“짜지 않게 해주시고, 후추는 빼주세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하연이 주문을 마치자 사장님은 상혁을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뭘로 드릴까요?”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사장님의 깍듯한 존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가게의 음식 나오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국밥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어.” 상혁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상혁은 까다로운 식습관을 가진 어머니인 조진숙의 영향으로 엄격하게 관리된 음식을 먹으며 자라, 이런 길거리 음식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