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현이가 고의로 그런 건 아니야. 너에 대해 오해해서 그런 거니까 더 이상 따지지 마.”실망스러운 마음이 컸던 서준은 하연의 발걸음을 따라잡고 하연의 팔을 잡았다.하연은 힘껏 서준의 팔을 뿌리쳤다.“한 대표님은 정말 얼굴도 두껍네요. 무슨 권리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서준은 하연의 좌우에 적의를 띤 여은과 예나를 보았다.“너는 마음이 태평양 같아서 안 된다니까. 우리가 친구처럼 잘 이야기해 볼게.”하연은 무신경하게 웃었고, 치켜뜬 눈에는 무관심이 가득했다.“나한테 전 남편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이혼하고 친구가 된다는 건 말도 안 되지.”하연이 이런 식으로 냉정하게 선을 긋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준은 여전히 담담히 대처할 수 없었다. 서준은 일부러 냉담한 척 말했다.“사과 성명은 내일 아침에 발표할 거고, 실시간 검색어는 내가 곧 내리게 할 겁니다.”“여기서 그럴듯하게 관대한 척할 필요는 없어요. 저 사람들이 나에게 이따위로 대하는 것은 모두 한 대표 묵인하에 된 것 아닌가요?”“내가?”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하연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운이 가득했다. 찬란한 눈동자는 한서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당신이 매번 나를 무시하는 그 태도 때문에 내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마음대로 짓밟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죠. 이제 와서 왜 갑자기 좋은 사람인 척인가요?”“당신 어머니와 여동생처럼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것보다 안태현에게 더러운 물을 뿌리는 것이 차라리 더 낫죠.”서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한씨 집안에서 서준은 여태껏 하연의 처지에 관심을 둔 적이 없어서 겉으로는 가족들이 별 갈등 없이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서준은 하연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둘은 부부 사이였지만 내내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서준의 어머니인 이수애는 줄곧 이 일을 트집 잡아 사사건건 하연을 괴롭혔다. 그러나 하지만 서준은 단 한 번도 하연의 입장에서 말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형제들이 항상 자기 앞에서 하연이 여
나운석이 이렇게 내뱉자 안에 앉아있던 커플들이 모두 보고 작은 소리로 흥분하여 청혼에 성공했는지 각자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하연과 운석의 반대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안태현과 그의 아내가 앉아 있었다.태현은 요 며칠 동안 간신히 아내를 달래서 함께 밖에서 저녁을 먹자고 해서 나왔다.그는 커플 전용식당에서 하연을 발견하고는 하연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운석의 뒷모습 사진을 찍어 서준에게로 전송했다.그러고 나서 한 마디 덧붙였다.[야, 네 전처가 또 새로운 사냥감을 찾았어. 몸매를 보니 꽤 멋지네.]회의 중이었던 서준은 메시지를 받고 얼굴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관자놀이가 불룩거렸다. 휴대전화를 탁자 위로 탁탁 신경질적으로 두드려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그는 의자 등받이에 걸린 외투를 들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여러분은 계속 회의 진행하십시오. 저는 일이 좀 있습니다.”곧이어 문을 밀고 떠나 식당으로 바로 달려갔다.운석은 몸을 곧게 펴고 정색하며 말했다.“여신님, 이전에 내가 대중 앞에서 고백한 행위는 확실히 무모했습니다. 나에 대한 인상이 더 나빠졌겠어요. 여기서 지금 사과드릴게요.”“사과받았고, 이제부터 안 그러면 됩니다.”그의 두 눈은 여느 때보다 진지하게 하연을 보고 있다.“하지만 당신에 대한 제 마음은 진심이라는 거 알아주세요.”“경매장에서 하연 씨의 몇 마디 말로 누군가가 거액을 들여 팔찌를 사게 했던 당신의 그 스마트함에 반했습니다.옥상에서 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흘리는 하연 씨 모습 보면서 많이 가슴 아팠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여자의 마음을 잘 알고 주변에 늘 여자들이 많은 것 같지만 그날 밤처럼 단 한 사람 마음이 신경 쓰인 건 처음이에요.나중에 B시로 다시 돌아왔을 때, 무대에서 하연 씨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완전히 빠져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었어요.”하연은 운석의 가슴을 후비는 고백을 듣고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서준은 바짝 마른 입술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한 마디를 뱉었다.“보면 모르겠냐?”“하연 씨?” 나운석은 입을 크게 벌리고 하연을 가리켰고 또 서준을 가리켰다.“너?”결국 다시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나는...”“이게 다 무슨 일이야!”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운석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았다. 여신님을 위해 받아들여야 할 사실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태현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어리둥절한 운석 옆으로 다가왔다.“운석아, 친구의 아내를 속이면 안 되지. 너는 이번에 일을 너무 크게 벌였어.”운석은 갑자기 화가 났다.“이혼했다며! 이제 자유롭게 연애해도 되는 거 아냐?”운석이 한서준을 밀고 건성으로 말했다.“하연 씨 처음 알았을 때 네 전처인 줄 몰랐다.”하연은 침착하게 서준의 곁을 지나쳤다. 그러자 뒤에서 싸늘하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설명하면 되지 않아?”하연은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까?”하연은 말을 마치고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가지 마세요! 여기에 여기 세 사람과 무슨 일인지 같이 이야기해보고 오해도 풉시다.” 운석은 하연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서준은 어두워진 얼굴로 떠났고 안태현은 서준의 뒤를 쫓아갔다.운석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너무 혼란스럽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튿날 아침, 운석은 비서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하연의 사무실로 뛰어들었다.하연은 눈을 들기 귀찮아서 서류에 코를 박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뭐 하러 나한테 왔어요? 좋은 친구들은 운석 씨한테 손가락질 안 하나 봐요?”“밤새 못 자고 생각해 봤는데, 여전히 하연 씨를 포기할 수 없어요.” 운석은 꼿꼿이 서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그리고... 하연 씨에 대한 나의 감정이 더 확실해졌어요!”하연은 어이가 없었다.“이 정도로요?”하연의 기억 속의 이 사람은 천박하기 그지
[이런 불효 자식!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하연이잖아! 너와 정혼한 HT그룹 외동딸 최하연!]운석의 아버지 나훈철 회장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큰 목소리로 운석에게 고함을 질렀다.나훈철이 운석을 B시로 발령을 내주었던 것은 운석이 하연과 가깝게 지냈으면 하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민은 원래 나훈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 운석에게 하연이 누구인지 직접 알려주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운석이 DS그룹에 출근할 수 있도록 했다.‘이런 천하에 막돼먹은 아들놈이 여전히 눈치 없이 어른의 면전에서 보란 듯이 약속을 깨고, 아직도 하연이를 못난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다니!’나훈철은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고, 화면 밖으로 나가 운석을 직접 따끔하게 훈계하고 싶었다.운석이 일어서며 사람의 이목을 끄는 매력적인 눈으로 하연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운석은 정말 기억 속의 못난이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여신이 동명이인이 아닌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내가 추앙하는 나의 여신님이... 내가 죽어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그 혼인 상대였다니!”운석은 그 자리에서 펑 하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야. 사실일 리가 없어!”운석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을 한 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하연은 운석을 보면서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하연은 태블릿은 놓아둔 채, 혼자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웃었다.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도 늦지 않는 법이었다.‘저 원수가 지금처럼 겁에 질려 정신없는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1등짜리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훨씬 기쁘고 신나네!’때마침 하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큰오빠, 저한테 무슨 일 있으세요?” 최하연은 말투가 여유로웠다.[너는 파혼을 당했으면서 이렇게 큰일에 웃음이 나오니?]전화기 너머의 하민은 자신이 아끼던 여동생이 뜻밖에도 이렇게 운석에게 외모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약간 화가 났다.“물론 즐겁
서영이 어색하게 웃었다.“그럴 리가요. 전 얼마 전까지 외국에 있었어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은 믿지 마세요.”이수애 여사가 서준의 만류를 무릅쓰고 몰래 시아버지를 통해 일을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서영은 감옥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체조나 하는 신세였을 것이다.하연이 차갑게 서영을 힐끗 보았다.“감옥에서 나왔으면 개과천선해서 착하게 살아야지. 내 숍을 또 부수고 행패를 부리면 이번에는 초범이 아니라 재범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건데 겁도 없어. 너 알아서 해, 나는 모르니까.”“나 감옥에 안 갔다고! 귀먹었어?”서영은 참지 못하고 하연에게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다가 예나에게 가로막혔다.“지금 2 대 1인데, 몸 싸움하게?”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눈앞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분해서 씩씩거리고 이를 갈며 말했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너희들 숨기에는 이미 늦었어!”한서영은 한서준에게 절대 먼저 나서서 하연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다.“너 겁나는 거 다 알아. 우리 자기는 너 같은 계집애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예나가 의기양양하게 하연의 어깨에 기대어 말했다.서영은 마음속으로 화가 나서 두 주먹을 꼭 쥐었지만 화풀이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조용히 같이 왔던 일행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직원들은 서영과 함께 왔던 명문가 아가씨들이 이미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고, 아무도 서영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그 작은 무리로부터 배척당했다는 수치심이 들자, 서영은 여전히 분개한 눈빛으로 아직 매장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하연은 예나를 도와 팔찌 몇 개를 착용해 보았는데 모두 별로 맘에 들지 않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두 고객님, 혹시 팔찌 하나 더 안 가져가셨나요?” 직원의 눈은 친절한 거짓 웃음을 지었지만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뒤에 다른 직원 한 명이 달려왔다.“확실히 한 점이 부족한데, 직접 찾아
하연이 입가에 조롱하는 웃음을 띠며 서영의 앞에 섰다.“왜 멍하니 있어? 빨리 경찰에 신고해! 나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아.”서영은 초조해져서 온 얼굴이 땀투성이가 되어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어쩔 줄 몰라 했다.“내 가방 안에 있어야 할 팔찌가 왜 네 가방에 들어갔는지 궁금하니?”한서영은 순간 멍해졌다.“나는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네.”“너 정말 네가 내 가방에 물건을 넣는 걸 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해?”하연이 엄하게 물었다.서영이 목걸이를 훔쳐 하연의 가방에 넣을 때 하연은 마침 옆에 있던 거울을 통해 서영이 일을 꾸미는 것을 보았고, 서영이 몸을 돌릴 때 잽싸게 그 목걸이를 꺼내어 서영의 가방 안에 넣었다.예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고, 비로소 큰 그림의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한서영, 너, 너는 정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나이가 어린 데도 못된 짓을 꾸밀 생각을 해? 참 대단하다!”“지난번에 너를 구치소까지 보낼 생각은 아니었어. 근데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그 일에서 배운 게 하나도 없네. 그러면 내가 오늘 한씨 집안 대신 너 좀 따끔하게 가르쳐야겠다!”하연이 고개를 돌려 점원에게 말했다.“112로 신고해서 경찰 부르세요!”“신고하지 마. 경찰 부르지 말라고!”서영은 점원을 막고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게 했다.그 순간 서준으로부터 온 전화가 울리자 서영은 전화를 받고 울기 시작했다.“오빠,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 이 사람들이 나를 경찰로 넘기려고 해.”예나는 기가 찼다.“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잘못은 자기가 저질러놓고, 오히려 억울하다고 울고 있네.”서준은 마침 바로 근처에 있어서 몇 분 내로 금방 매장에 도착했다.들어오자마자 하연의 일행과 서영이 서서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오빠! 이 사람들이 여럿이서 나를 괴롭혀!”서영이 큰 소리로 울며 하연과 친구들을 가리켰다.서준의 냉엄한 눈빛으로 하연을 힐끗 쳐다보고, 얼굴을 돌려 차가운 목소리로 서영에게
서영은 하연 앞에 가기 싫어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목소리는 모깃소리만큼 작았다.“그게..., 미안하게 됐어.”예나가 화가 나서 거칠게 말했다.“더 크게 말해, 안 들려!”한서영은 두 손을 꼭 맞잡고 눈을 딱 감고 조금 더 크게 말했다.“미안하다고 말했잖아! 미안하다고!”“됐지?” 서영은 고개를 돌려 서준을 보았다.“오빠.”서영의 표정이 우는 것보다 더 딱해 보였다.서준은 차갑게 말했다.“나 말고 하연 씨에게 사과해야지.”서영은 어쩔 수 없이 하연 쪽으로 몇 발짝 걸어갔다.“사과했으면 됐지, 뭐 하러 경찰까지 불러 조사를 받게 하냐고? 사과만 하면 경찰 조사 안 받아도 된다는 건가? 한 대표님, 너무 이기적이시네.”하연이 붉은 입술로 서준을 비웃었다. 서준은 하연의 이런 태도 때문에 전혀 상황을 종잡을 수 없었다.“괜히 도둑으로 몰려서 꼼짝없이 잡혀갈 뻔했는데, 명문가 한씨 집안사람이면 말 한마디로 죽음도 면하는 금수저인 거야?”가족들이 하도 오냐오냐하며 키워서 서영의 못된 행동은 어른이 되어서 점점 더 심해졌다. 하연은 서영을 혼쭐낼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가흔은 하연의 태도에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미친 듯이 울고 발광하는 서영을 또 한 번 연행해갔다.서영이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서준의 얼굴이 걱정 때문에 어두워졌다.“작은 다이아몬드 팔찌 하나 때문에 이렇게 문제를 키울 필요가 있나?”서준이 하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언제부터 이렇게 몰인정한 사람이 됐지?”이혼 전, 하연은 서준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참았었지만, 이혼하자마자 완전히 한씨 집안사람들이 원수처럼 느껴졌다. 이혼 후에 돌변한 하연의 태도 때문에 서준은 하연이 점점 더 낯설게 보였다.서준은 서영에게 사과도 시켰고, 목걸이 값을 직접 지불해서 하연에게 사주겠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성에 안 차는지 계속 불만인 하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래?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잘 몰랐던 거지.” 서준은
가흔은 전시회에 온 대중들의 반응을 보고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하연이 압도하는 이 무대의 연출은 너무 완벽했다.반대쪽에서 무대를 보던 운석은 이때 그 누구보다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하연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한동안 온통 서글프고 실의에 빠져 지냈다. 운명의 장난이라 생각했다. 자기 손으로 너무나 완벽한 운명의 상대를 밀쳐낸 것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했다.운석은 한때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 하연을 잊기로 결정했다.그러나 하연이 등장하는 것을 본 후, 다시 참지 못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그날 밤 건물 옥상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엄마, 저것 봐, 또 그 재수 없는 계집애야!” 구석에 앉아있던 서영이 이수애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며 말했다.이수애는 말투가 매우 좋지 않다.“네가 말 안 해줘도, 나도 다 보여.”“그래.” 서영은 입을 다물었다. 서영은 두번이나 감옥에 들어간 일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비참하게 욕을 먹었다. 지금은 가족들 앞에서 마음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이수애는 그 ‘바다의 눈물'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를 악물고 이 목걸이를 사서 잃었던 명예를 되찾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최근 한씨 집안의 위상이 땅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수애는 명품 매장에서 하연의 VVIP카드로 한번 모욕을 당했고, 서영은 다이아몬드 팔찌 건으로 경찰서에 두 번이나 연행되었다.최근 B시 상류층 여성모임에서 이수애와 서영의 평판은 형편없었다. 사람들이 서영과 이수애 하면 돈도 없고, 부자인 척하며, 좀도둑질이나 한다는 몇 가지 단어를 떠올리는 상황이었다.마지막 전시품이라 최하연은 스탠드에서 내려온 후에도 푸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풀지 않았다.가흔은 총 디자이너로서 내빈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VERE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묵묵히 고생해 주신 스태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물론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