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하연은 친구 예나와 함께 명품 매장에 가서 주문해둔 물건을 찾기로 약속했다.가게에 들어서자 직원들은 그녀가 최하연이라는 것을 알고는 즉시 매장 매니저를 호출했다.매니저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최하연 고객님, 잠시만요. 고객님이 주문하신 보석은 너무 고가의 제품이라서 금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받으러 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제가 먼저 다른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괜찮습니다, 저희끼리 알아서 볼게요.”예나와 하연은 매장 곳곳을 한 바퀴 돌았지만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자기야, 1층의 옷은 별로 맘에 안드네. 다른 사람들이 다 고르고 나서 남은 것들 같아. 우리 2층으로 가 보자.”예나는 하연을 끌고 2층으로 갔다.매니저는 곤란해하며 말했다.“정말 죄송합니다. 2층은 여러 사모님들이 보고 계십니다. 지금 들어가서 보시는 것이 불편하실 겁니다.”하연은 매니저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알겠어요, 그럼 우리는 주문한 보석만 가지고 갈게요.”매니저는 매장의 상황을 잘 이해해준 하연에게 연거푸 감사인사를 했다. 이렇게 재산이 있으면서도 갑질을 하지 않는 고객은 드물었다.하연은 예나를 끌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즐겁게 핸드폰 게임 ‘에닝팡’을 즐겼다. 아래층에 있는 두 사람의 말소리는 펀칭된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전해졌고 이수애의 귀에까지 들렸다.이수애가 유리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고 하연을 발견하고는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옆에 동행한 귀부인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으며 이수애의 상황을 비꼬는 것을 잊지 않았다.“사모님 댁 한씨 집안 못된 며느리가 인터넷에서 이름도 다 공개되고, 무슨 일인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는데, 정말이예요?”“댁의 따님 서영이는 경찰서로 연행됐었잖아요, 이제 나왔어요?”상류층은 원래 강약약강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라, 모두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수애의 아픈 곳을 세게 찔렀다.이수애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악 물었다. 물컵을
“세상에 이렇게 비싼 목걸이가 어디 있어? 순 날강도 같으니라구!”이수애는 평소에는 고상하고 우아한 척 행동했지만 막상 하연과의 갈등 상황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뼛속 깊은 데부터 인색하고 쩨쩨함이 드러났다. 이수애의 날카롭고 째지는 목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매장 직원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매니저가 앞으로 나가서 설명했다.“사모님, 이 제품은 VERE와 우리 브랜드의 주문제작형 모델입니다. 위의 노란 빛을 띠는 다이아몬드는 일찍이 T국 여왕이 착용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이 가격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있습니다.”“내가 당신들이 물건 팔아먹으려고 하는 허튼소리를 믿을 것 같아? 차라리 죽은 사람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을 믿겠네. 정말 우리 같은 부자들 돈을 그렇게 쉽게 뜯어가려고?”이수애는 매장 매니저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매니저는 지금까지 일해오면서 진상부리는 고객들을 수없이 봤지만 이수애처럼 직설적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매니저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매장 직원들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하연은 조롱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고, 말투도 점점 차갑고 딱딱해졌다.“말씀하신 대로 저는 뭘 사도 상관없는데 뭘 머뭇거리시는 거예요? 빨리 결제하세요!”그녀는 위층에서 난간에 기대어 구경하는 재벌집 안주인들을 가리켰다.“지금 사모님이 하신 말씀은 B시의 명문가 사모님들 모두가 들었으니 억지 부리시면 안 됩니다.”이수애가 고개를 들자마자 2층에 함께 있었던 재벌 집안 안주인들이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는 얼굴들을 보았다.상황이 불리해지자 후회가 막심이었다. 체면을 되찾으려고 그런 건데 오히려 낯뜨거운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하연은 매장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침착하게 목걸이를 착용했다. 불빛 아래의 황금빛 다이아몬드는 반짝반짝 빛나고 눈부신 광채를 내는 것이 하연의 성격과 잘 어울려 보였다.예나는 하연 옆에서 한술 더 뜨며 맞장구를 쳤다.“역시 자기는 안목이 높다니깐.”또한 이수애를 향해 눈알을 부라
“최 사장님, 승마 솜씨가 훌륭하군요.”성재는 보이는 그대로 진심을 담아 하연을 칭찬했다. 누가 들어도 성재의 말을 인사치레가 아니었다.하연은 곁눈질로 한서준을 힐끗 보고 성재에게 말했다.“임 대표님, 잠깐 대표님과 단 둘이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기항그룹은 핵심 과학 기술 발전에 주력하는 회사이다.설립 이래 5년간 수많은 참신한 스마트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여 모든 분야의 찬사를 받았다.이번 나노로봇 기술은 전례없는 기술 혁신으로써 의료계 역사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난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하연은 기항그룹의 바로 이 점을 높게 평가하여 성재에게 협업을 제안하려고 했다.서준의 눈동자는 차갑고 목소리에는 이미 불쾌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기항그룹은 이미 HT그룹과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미 다 끝난 계약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하준의 시선이 계속 하연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멀리서 나타났을 때부터 서준은 하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그동안 하연은 서준이 보는 앞에서 말을 타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승마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이 여자에 대해서는……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군.’기항그룹과 HT그룹의 협력은 아직 비밀유지 단계에 있었다. 하연이 이렇게 빨리 소식을 듣고 개입하려 하는 모양새로 보아 앞으로 B시 재계에서 두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할 것으로 예상됐다.하연은 잠시 당황했다. 두 기업의 업무 진행이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짧은 며칠사이에 계약절차까지 이미 끝난 상태였다.마음속으로는 다소 화가 났지만, 홍조를 띤 하연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이 프로젝트에 저희 DS그룹이 함께 해도 될까요?”성재는 하연의 목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 그의 맑게 빛나는 두 눈동자를 보면 누구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현재 기항그룹이 이미 HT그룹의 투자를 받았는데, 투자자를 멋대로 추가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결정이 될 겁
서준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멈췄다.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시종일관 차갑고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이 여자는 정말 아름답고, 팔색조처럼 변화무쌍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이 여자가 내민 문제는 마치 함정처럼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남은 정이 있는지 없는지는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지금 서준은 이 결혼을 너무 쉽게 일찍 끝내 버린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하연은 눈을 아래로 깔고 가볍게 웃으며 미간의 서늘한 기운을 지웠다.“훗! 내가 잠깐 실언한 거예요, 한 대표님 같은 냉혈한이 그런 별볼일 없었던 과거에 매달릴 리가 있겠어요?”하연이 계속해서 말했다.“비즈니스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익이잖아요. 이 점은 내가 굳이 말할 것도 없을 거고. 한 대표님이 나보다 더 잘 알 거고.”“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서준의 얼굴빛이 더욱 어두워지고 그의 매서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더욱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하연은 전혀 서준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한 대표님이 지난날의 감정으로 DS그룹의 사업 참여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요?“저와 승마 시합을 하는 게 어때요?”머리카락 한 가닥이 뺨에 드리워져, 하연의 얼굴 전체에 자유분방함이 넘쳐 보였다.“당신이 이기면 DS그룹은 앞으로 절대 사업 참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내가 이기면 당신은 DS그룹의 참여에 동의하는 겁니다.”서준은 전문적으로 승마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문 선수 수준에 버금가는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하연은 오늘 아주 컨디션이 좋아서 반드시 그를 이기려고 할 것이다.임성재는 딱히 누구 편이라고 할 것이 없었지만 말 속에 자신의 진심을 분명히 드러냈다.“최 사장님의 진심은 제 눈에 너무 잘 보이고, 승마 기술도 특출하신 것 같습니다. 한 대표님이 승마실력에 얼마나 자신이 있는지가 오늘의 관건이겠군요.”서준이 눈썹을 살짝 찌푸릴 때 하연의 눈동자 색이
하연은 두 번째 바퀴에서 이겼는지는 개의치 않고, 마지막 세 번째 커브길에 집중해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다시 서준을 한 걸음 차이로 제치고, 결국 먼저 결승점에 도착했다.이 소리 없는 대결은 결국 하연의 승리로 끝이 났다.계속해서 손에 땀을 쥐고 있던 관중석의 사람들의 하연의 승리에 환호를 표했다.경마란 그런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속도를 줄여가며 한 바퀴 더 달리고 난 후, 하연은 서준 앞에서 멈추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이목구비가 날렵한 하연의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해졌다. 헬멧을 벗으니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흩어졌다. 짜릿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목소리에는 아직 경기 중의 흥분이 남아 있었다.“한 대표님이 졌네요.”하연은 일찍이 여왕이 개최하는 ‘여왕컵' 승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여왕의 찬사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하연은 어릴 때부터 말을 타는 것을 매우 좋아했는데, 이 때문에 최하민은 특별히 하연을 위해 진귀한 말을 구입하여 수많은 승마 챔피언을 초청하여 함께 훈련하게 했다.15살 때 하연의 애완동물은 천만 원이 넘는 I 국에서 수입한 황금빛 말이었다.이런 실전이 매우 중요한 종목에서 하연이 서준처럼 감독에게 레슨이나 받는 얼치기 선수에게 질 리가 없었다.이전에는 부드럽고 순종적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강한 면을 숨겨왔었다. 이는 단지 서준이 자신을 한 번만이라도 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우습기 짝이 없었다.서준의 마음속에서는 하연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서준의 복잡한 눈빛이 하연에게 몇 초간 머물렀다가 다시 거둬들여졌다.“당신, 언제 승마를 배운 거야?”좀 전에 하연이 말을 타고 나타났을 때는 하연이 원래 말을 탈 줄 알았다는 사실에 놀랐는데, 이제는 하연이 뜻밖에도 정상급에 도달한 전공자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눈앞의 하연은 야생마처럼 자유분방하고 가시 돋친 장미 같은 존재였다. 하연의 일거수일투
태현은 서준의 성토에 순간 당황했다. 서준은 하연에게 져서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나는 저 바람기 있는 여자를 상대도 안 하고 싶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네.”“그래?”하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태현이 깜짝 놀랐다.그는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며 당황하여 말했다.“소리도 없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당사자가 여기 있는데 바로 물어보면 되잖아?”하연은 팔짱을 끼고 똑바로 섰다. 눈동자 속의 상대를 압도하는 기세는 예전 그대로였다. ‘내가 방금 자기를 욕한 걸 들었나?’서준은 조용히 한쪽에 비껴 서서, 관심 없는 척 하연을 여러 번 곁눈질했다.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서준의 마음은 매우 복잡했다.“쳇, 원래 당신 같은 여자한테는 관심 없었어. 네 돈줄이나 얼른 찾아가.” 태현은 하연에게 가라고 손을 휘저으며 제멋대로 깔보는 투로 말했다.하연은 하이힐 신은 발로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갔다. 하연의 이 기세 때문에 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아무도 말 안 해줘? 안태현 씨, 당신이 다른 사람을 험담할 때 말이야... 정말 동네 노점상 같다는 거.”태현은 갑자기 화가 났다.“최하연 씨! 이혼하고도 내 친구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내 친구들의 일에 방해나 하고 다니고 말이야! 최하연 씨 같은 계집애들 이미 충분히 많이 봐왔어, 그런 당신이 나를 비웃어? 정말 어이가 없어서 웃겨 죽겠네.”마침 이때 청소부가 청소차를 밀고 지나가자 하연은 바닥 발 매트를 닦은 걸레를 빤 오수가 든 통을 들어 태현의 몸에 끼얹었다.태현은 오늘 리넨 소재의 흰색 양복을 입었는데 하연이 뿌린 오수에 온통 젖어 위아래로 옷 색깔이 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속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그야말로 완전히 다 벗은 것보다 훨씬 더 못한, 참으로 딱한 상황이었다.그는 한 손으로는 상반신을 가리려고 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반신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허둥지둥해서 웃음을 자아냈다.“최하연! 당신이 감히 나한테 덤벼?”
‘오해라니? 선 넘네.’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모욕했던 일들이 지금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절대 별일 아닌 것처럼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지.’“공교롭게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나는 성격은 좋은데 뒤끝 작렬이지.’하연은 큰오빠의 설명을 떠올리자 운석을 놀리는 일이 재미있어졌다. 운석은 하연이 누군지도 모른 채 관심을 보였고 하연은 그런 운석의 모습을 즐겼다.“나한테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시겠어요?”운석은 하연의 말을 전혀 듣지도 않고 직접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부드러운 빛을 띤 옥팔찌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 가치가 상당했다. 지난번 민혜경의 경매 낙찰 금액보다 수백 배 더 비싸 보였다.“지난번 일에 대한 감사의 선물인데, 마음에 드는지 한번 보세요.”이 옥팔찌는 운석이 오래 시간을 들여 직접 골랐다. 여러 보석 전문가들을 청해 보석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배우고 나서 장만한 상품이었다. 팔찌의 퀄리티로 보나, 가격으로 보나 그야말로 운석의 정성이 가득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가져가세요, 저는 이런 거 필요 없어요.”“나의 여신님,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운석은 다시 한번 하연에게 마음을 고백했다.운석은 온몸에 눈부신 자신감이 흐르고, 용모도 준수하고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운석과 원수진 사람일지라도 그의 소탈하고 제멋대로인 매력에 흠뻑 빠질 정도다. 그러나 지금 운석의 앞에 있는 사람은 하연이었다.“저는 아니에요.”“왜죠?”“내 스타일이 아니에요.”하연의 말 한마디에 운석은 상처받은 것 같았다. ‘여신도 자기 이상형이 있었군. 흠...”운석은 하연의 이상형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기로 했다.“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하연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혹시 나중에 내 아이의 아이큐에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요.”운석은 마치 엄청난 농담을 들은 것 같았다. 운석은 실제로 IQ 167의 천재였다.“저를 거절하는 이유가 아이큐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사장님.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막았지만 워낙 완력으로 들이닥쳐서...”비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뒤따라 들어왔다.하연이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아, 문 닫아.”유신혁의 갈비뼈 골절 회복이 빠르고, 얼굴의 상처도 대부분 아물었다.“사장님, 기항그룹과의 프로젝트 계획서를 봤는데, 거기 내 이름이 안 보이네요? 누락된 것 아닌가요?”하연은 만년필을 손가락으로 돌리면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빠뜨린 거 아니고, 내가 유신혁 씨 이름 빼라고 했어요.”“사장님, 이것은 애초에 약속했던 겁니다.” 유신혁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음흉한 것이 가득했다.“아쉬울 때는 이용하고, 쓸모없으면 그냥 버리는 거 너무 모양 빠지는 거 아닙니까?”하연은 예리한 눈빛으로 유신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유신혁 씨는 내가 당신 상관이라는 것을 잊은 거 아니죠? 내 판단에 따라 내가 결정하고 책임도 내가 집니다.”유신혁은 하연에게 잘 보이는 것에 실패하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최 사장님, 저한테 너무 함부로 하지 마세요.”“그래? 그러면 내 결정 안 따를 겁니까?”하연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두꺼운 사진 한 묶음을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 날렵한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유 부장 같은 사람이 기항그룹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면 적지 않은 분란이 일어났을 것 같네요.”유신혁이 책상 위의 사진을 들고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온몸에 힘이 빠져 후들거리고 공포에 질려 하연을 바라보았다.“이거 다 어디서 났어요?”“아직 보여줄 게 많이 남았는데, 유 부장한테 내가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까?”“아니, 됐습...”순식간에 유신혁의 기세가 꺾였다.하연의 가녀린 손가락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연의 입술 사이에는 유신혁에 대한 비웃음이 가득했다.“내 짐작이 맞네요. 몰카를 찍은 게 처음이 아니더군요.”“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 연락처 다 가지고 있어요. 이 여자들과 유신혁 씨와의 관계가 사생활이겠지만 이게 다 몰카로 찍혔다는 것을 알면, 이 여자들 모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