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은 유신혁이 급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최 사장님, 걱정 마십시오. 이 밤이 지나면, 제가 알고 있는 기항 그룹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려드릴 테니까요. 반드시, DS그룹의 B시 지사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침을 흘릴 듯한 유신혁이 침대 머리맡에 숨겨 둔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즐기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야. 녹화해서 원할 때마다 감상해야지. 거물급 인사와만 놀던 여자가 이제는 나랑 놀아난다 이 말이야. 기분을 나쁘게 하면 영상을 빌미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해야겠어.’ 근질근질한 몸을 참을 수 없던 유신혁이 발가벗은 몸으로 아름다운 하연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이때, 하연이 탁자 위의 붉은 술병을 집어 들어 유신혁의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유신혁이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머리를 만지자, 손이 피투성이로 변했다. “아…….”“미친X, 네가 감히 나를 쳐?”유신혁이 곧바로 몇 걸음 나아가 하연을 향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유신혁의 주먹은 하연의 한 손에 의해 반격당하여 아래로 힘껏 꺾이고 말았다. 하연의 강한 힘으로 인해 유신혁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곧이어, 몇 걸음 뒤로 물러선 하연이 옆으로 달려들어 유신혁의 가슴을 걷어찼다. 하이힐의 가는 굽이 유신혁의 갈비뼈를 찔렀다. 방안에 두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유신혁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하연이 이렇게 나올 거라 생각지 못했던 유신혁은 공포에 질려, 피범벅이 된 얼굴로 가슴을 가린 채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하연이 그런 유신혁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진작 하연을 품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유신혁이었다. 그저 끝없는 공포만이 유신혁을 감쌌다. 유신혁이 두려움에 고개를 들고 말했다. “최 사장님, 몰라뵀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놓아주세요.”“그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침대 스킬에 관심이 많던 거 아니었나요? 벌써 시시해지셨어요?” 위엄으로 가득 찬 하연의 눈동자는 유신혁을 두렵게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시시
서준은 하연을 외면한 채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듯했다. 서준은 하연을 데려가기를 원했다. 하연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었다. 서준은 하연과 유신혁이 함께 있던 층에 도착하자마자 유신혁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하연은 아주 후련하고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서준은 자신이 하연을 의심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준의 가슴은 마치 무언가에 의해 찢긴 것처럼 간헐적으로 아파왔다.맞은편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하연의 차가운 눈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채찍이 되어 서준의 얼굴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서준은 하연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했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믿음, 이 역시 3년간의 결혼 생활동안 서준이 하연에게 주지 못한 것이었다. 하연이 호텔을 나서자, 구급차에서 내린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든 채 호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연은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호텔로 차를 보낼 것을 지시하면서 다시 한번 옆에 서있는 양복차림의 서준을 힐끗 보았다. “내가 데려다 줄게.” 서준은 덤덤한 말투로 하연에게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말했다.하연의 눈은 서늘함과 예리함으로 가득했다. “아니, 한 대표님 차를 더럽힐 수는 없지.” “내 잘못이야.”서준의 목소리에는 실의가 섞여 있었다.“서영이랑 혜경이가 한 일, 내가 대신 사과할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난 하연은 희미한 표정으로 거절을 표했다. “필요 없어.”“3년 동안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왜 나한테 말 한 번을 안 했어?”하연이 떠난 후에야, 서준은 비로소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일을 묻는 말투조차도, 서준은 조심스러웠다. 하연은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한서준, 지겹지도 않니? 이미 다 지난 일이야. 이제 와서 고민하면 무슨 소용이야? 진작에 했어야지! 과거는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인데 이제 와서 이런 것 고민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구. 여태 뭐 하다 이제 와서!”‘늦바람이 무섭다더니.’기사가 포르쉐를 몰고 하연을 데리러 왔다. 하연은
하연이 편안하고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어제 구급차에 실려가셨는데 오늘 퇴원하시다니. 유 본부장님 정말 건강하시네요.” “최 사장님, 농담 마십시오. 저도 회사의 업무에 지장을 줄까 걱정했습니다.”유신혁은 머리에 거즈를 두르고 있었고, 양복 재킷 밑에는 여전히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유신혁이 뻔뻔스럽게 말했다.“어제 기항그룹의 내부 소식을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생각나 서둘러 회사로 달려왔습니다.”하연이 유신혁을 향해 앉으라며 날렵한 턱을 들어올려 소파를 가리켰다.‘절대 그냥 말 하지 않을 것 같이 하더니, 한 대 맞고 나니 드디어 입을 여는군.’ “기항그룹에서 오늘 나노 로봇에 관한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DS 그룹의 의료 개발 프로젝트와 약속이나 한 듯 일치하더군요,” 하연은 짜증이 나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쓸데없는 말만 하실 거면 나가보세요.” 하연의 말을 들은 유신혁은 온몸을 벌벌 떨며 하연은 위협을 입으로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즉시 요점만 골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항그룹이 이미 HT그룹을 찾아가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요 며칠 계약 절차를 밟고 있는 것 같더군요.”“HT그룹이요?” 하연은 의아해했다.유신혁이 지팡이를 짚은 채 하연에게 가까이 다가가 계속해서 말을 하려 했으나 하연이 눈빛으로 경고하자 즉시 한쪽으로 물러났다. “제가 들은 바로는, 기항 그룹과 HT그룹이 이틀 후, 교외 승마장에서 소규모 회의를 개최하고 그 때 최종적으로 계약을 확정한다고 합니다.”하연은 손에 든 금색 펜을 돌리다가 눈을 들어 유신혁에게 물었다. “믿을만한 정보예요?”“그럼요, 믿을만한 소식통입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음.” 하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수긍하는 듯했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기밀 정보가 이런 사람에게 알려진 거라면 틀림없이 고위층 인사와 관련된 것임이 분명해.’ 유신혁은 일찍이 하연의 미움을 샀다. 누구보다도 하연을 골탕먹이면 어떻게 되는지 잘
숨을 가라앉힌 하연이 휴대전화를 꺼내어 최근 D국으로 돌아온 하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는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운석이 D국의 멀쩡한 NW그룹의 대표 자리를 놔두고, DS그룹 B시 지사에 지원하여 일반 직원으로 일하기를 원한다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연은 반드시 큰오빠인 하민에게 전화를 걸어 NW그룹의 상황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하민이 전화를 받았다.[하연아, 나한테 전화를 다하고, 무슨 일이야?]전화기 너머의 하민의 말투는 세련되었지만 온화한 애교가 배어있었다. 하연은 한쪽에 어색하게 서 있는 투자팀 본부장 장영환을 보고 입을 가린 채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나운석, 그 녀석이 B시에 와서 우리 DS그룹 투자팀에 프로필을 넣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NW그룹이 파산이라도 한 거야?”하민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하민은 하연이 나운석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못되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아니야, 나 회장님께서 나운석을 B시로 파견하셨다고 들었어. 그런데 DS그룹에 지원할 줄은 나도 전혀 몰랐어.] “알았어, 당장 꺼지라고 할게.”[하연아, 진정해.]하민이 충고했다.[나운석의 실력은 이미 너도, 나도 잘 알고 있잖아. 진정한 벤처 고수인 나운석이 네 투자팀에 있다면, 올해 네 손익계산서는 반드시 주주들을 만족하게 할 거야.]하민의 말에 조금은 누그러진 하연이 남매 사이에서만 있을 법한 애교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운석이 나한테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어떡해?”[네 신분은 대외적으로 공개된 적 없잖아. 나운석은 네가 한서준과 결혼했던 최씨 가문의 넷째 딸이라는 건 몰라. 네가 굳이 말하지만 않으면, 어떻게 알겠어?” 하연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지자 하민이 덧붙였다.[B시DS그룹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나운석 같은 인재야. 너의 일방적인 감정 때문에 그렇게 우수한 인재를 거절한다는 게 아깝지 않아?] 하민은 하연을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하연의 현재 임무는 DS그룹의 B시 지사에서의 업무를
저녁에 하연은 친구 예나와 함께 명품 매장에 가서 주문해둔 물건을 찾기로 약속했다.가게에 들어서자 직원들은 그녀가 최하연이라는 것을 알고는 즉시 매장 매니저를 호출했다.매니저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최하연 고객님, 잠시만요. 고객님이 주문하신 보석은 너무 고가의 제품이라서 금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받으러 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제가 먼저 다른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괜찮습니다, 저희끼리 알아서 볼게요.”예나와 하연은 매장 곳곳을 한 바퀴 돌았지만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자기야, 1층의 옷은 별로 맘에 안드네. 다른 사람들이 다 고르고 나서 남은 것들 같아. 우리 2층으로 가 보자.”예나는 하연을 끌고 2층으로 갔다.매니저는 곤란해하며 말했다.“정말 죄송합니다. 2층은 여러 사모님들이 보고 계십니다. 지금 들어가서 보시는 것이 불편하실 겁니다.”하연은 매니저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알겠어요, 그럼 우리는 주문한 보석만 가지고 갈게요.”매니저는 매장의 상황을 잘 이해해준 하연에게 연거푸 감사인사를 했다. 이렇게 재산이 있으면서도 갑질을 하지 않는 고객은 드물었다.하연은 예나를 끌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즐겁게 핸드폰 게임 ‘에닝팡’을 즐겼다. 아래층에 있는 두 사람의 말소리는 펀칭된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전해졌고 이수애의 귀에까지 들렸다.이수애가 유리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고 하연을 발견하고는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옆에 동행한 귀부인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으며 이수애의 상황을 비꼬는 것을 잊지 않았다.“사모님 댁 한씨 집안 못된 며느리가 인터넷에서 이름도 다 공개되고, 무슨 일인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는데, 정말이예요?”“댁의 따님 서영이는 경찰서로 연행됐었잖아요, 이제 나왔어요?”상류층은 원래 강약약강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라, 모두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수애의 아픈 곳을 세게 찔렀다.이수애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악 물었다. 물컵을
“세상에 이렇게 비싼 목걸이가 어디 있어? 순 날강도 같으니라구!”이수애는 평소에는 고상하고 우아한 척 행동했지만 막상 하연과의 갈등 상황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뼛속 깊은 데부터 인색하고 쩨쩨함이 드러났다. 이수애의 날카롭고 째지는 목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매장 직원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매니저가 앞으로 나가서 설명했다.“사모님, 이 제품은 VERE와 우리 브랜드의 주문제작형 모델입니다. 위의 노란 빛을 띠는 다이아몬드는 일찍이 T국 여왕이 착용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이 가격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있습니다.”“내가 당신들이 물건 팔아먹으려고 하는 허튼소리를 믿을 것 같아? 차라리 죽은 사람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을 믿겠네. 정말 우리 같은 부자들 돈을 그렇게 쉽게 뜯어가려고?”이수애는 매장 매니저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매니저는 지금까지 일해오면서 진상부리는 고객들을 수없이 봤지만 이수애처럼 직설적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매니저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매장 직원들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하연은 조롱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고, 말투도 점점 차갑고 딱딱해졌다.“말씀하신 대로 저는 뭘 사도 상관없는데 뭘 머뭇거리시는 거예요? 빨리 결제하세요!”그녀는 위층에서 난간에 기대어 구경하는 재벌집 안주인들을 가리켰다.“지금 사모님이 하신 말씀은 B시의 명문가 사모님들 모두가 들었으니 억지 부리시면 안 됩니다.”이수애가 고개를 들자마자 2층에 함께 있었던 재벌 집안 안주인들이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는 얼굴들을 보았다.상황이 불리해지자 후회가 막심이었다. 체면을 되찾으려고 그런 건데 오히려 낯뜨거운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하연은 매장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침착하게 목걸이를 착용했다. 불빛 아래의 황금빛 다이아몬드는 반짝반짝 빛나고 눈부신 광채를 내는 것이 하연의 성격과 잘 어울려 보였다.예나는 하연 옆에서 한술 더 뜨며 맞장구를 쳤다.“역시 자기는 안목이 높다니깐.”또한 이수애를 향해 눈알을 부라
“최 사장님, 승마 솜씨가 훌륭하군요.”성재는 보이는 그대로 진심을 담아 하연을 칭찬했다. 누가 들어도 성재의 말을 인사치레가 아니었다.하연은 곁눈질로 한서준을 힐끗 보고 성재에게 말했다.“임 대표님, 잠깐 대표님과 단 둘이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기항그룹은 핵심 과학 기술 발전에 주력하는 회사이다.설립 이래 5년간 수많은 참신한 스마트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여 모든 분야의 찬사를 받았다.이번 나노로봇 기술은 전례없는 기술 혁신으로써 의료계 역사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난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하연은 기항그룹의 바로 이 점을 높게 평가하여 성재에게 협업을 제안하려고 했다.서준의 눈동자는 차갑고 목소리에는 이미 불쾌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기항그룹은 이미 HT그룹과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미 다 끝난 계약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하준의 시선이 계속 하연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멀리서 나타났을 때부터 서준은 하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그동안 하연은 서준이 보는 앞에서 말을 타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승마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이 여자에 대해서는……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군.’기항그룹과 HT그룹의 협력은 아직 비밀유지 단계에 있었다. 하연이 이렇게 빨리 소식을 듣고 개입하려 하는 모양새로 보아 앞으로 B시 재계에서 두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할 것으로 예상됐다.하연은 잠시 당황했다. 두 기업의 업무 진행이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짧은 며칠사이에 계약절차까지 이미 끝난 상태였다.마음속으로는 다소 화가 났지만, 홍조를 띤 하연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이 프로젝트에 저희 DS그룹이 함께 해도 될까요?”성재는 하연의 목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 그의 맑게 빛나는 두 눈동자를 보면 누구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현재 기항그룹이 이미 HT그룹의 투자를 받았는데, 투자자를 멋대로 추가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결정이 될 겁
서준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멈췄다.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시종일관 차갑고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이 여자는 정말 아름답고, 팔색조처럼 변화무쌍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이 여자가 내민 문제는 마치 함정처럼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남은 정이 있는지 없는지는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지금 서준은 이 결혼을 너무 쉽게 일찍 끝내 버린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하연은 눈을 아래로 깔고 가볍게 웃으며 미간의 서늘한 기운을 지웠다.“훗! 내가 잠깐 실언한 거예요, 한 대표님 같은 냉혈한이 그런 별볼일 없었던 과거에 매달릴 리가 있겠어요?”하연이 계속해서 말했다.“비즈니스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익이잖아요. 이 점은 내가 굳이 말할 것도 없을 거고. 한 대표님이 나보다 더 잘 알 거고.”“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서준의 얼굴빛이 더욱 어두워지고 그의 매서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더욱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하연은 전혀 서준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한 대표님이 지난날의 감정으로 DS그룹의 사업 참여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요?“저와 승마 시합을 하는 게 어때요?”머리카락 한 가닥이 뺨에 드리워져, 하연의 얼굴 전체에 자유분방함이 넘쳐 보였다.“당신이 이기면 DS그룹은 앞으로 절대 사업 참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내가 이기면 당신은 DS그룹의 참여에 동의하는 겁니다.”서준은 전문적으로 승마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문 선수 수준에 버금가는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하연은 오늘 아주 컨디션이 좋아서 반드시 그를 이기려고 할 것이다.임성재는 딱히 누구 편이라고 할 것이 없었지만 말 속에 자신의 진심을 분명히 드러냈다.“최 사장님의 진심은 제 눈에 너무 잘 보이고, 승마 기술도 특출하신 것 같습니다. 한 대표님이 승마실력에 얼마나 자신이 있는지가 오늘의 관건이겠군요.”서준이 눈썹을 살짝 찌푸릴 때 하연의 눈동자 색이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