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아, 이 재수 없는 물건한테 대체 뭘 바라는 거니!”이수애가 앞으로 나아가 서준의 팔을 붙잡았다. 이수애는 자신의 아들인 서준이 최하연에게 이토록 부드러운 말투로 굽신거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여태까지 우리가 시키는 대로만 하던 얘가, 왜 이렇게 상황이 이렇게 변해버린 거지?’ 이수애가 얼굴을 찌푸리며 하연의 앞으로 다가와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너한테 더러운 물 좀 끼얹는 게 뭐 어때서? 네까짓 게 무슨 명예가 있니? 예전의 넌, 우리 가문 사람들이 삿대질을 하며 널 욕해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어!” 이수애는 최선을 다하여 발악을 하고 있었으나, 온 신경은 서준의 표정으로 향해 있었다. 서준의 안색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수애는 그제야 자신이 스스로 지난 3년간, 하연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폭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민이 참다못해 하연을 흘겨보며 말했다. “이 사람들이 네가 3년간 성심성의껏 모셨다던 시어머니와 시누이야? 네가 꼬박 3년을 바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네 눈으로 똑똑히 봐!” 하민은 궁지에 몰린 자신의 여동생이 다시 한번 잘못된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침울해지는 듯했다. “선택권은 다 너에게 있는 거야. 하지만, 최씨 가문의 체면을 구긴 것에 대해서는 오직 너에게만 책임을 물을 거야!”하연이 말했다. “큰오빠, 걱정 마.”하연이 이수애를 향해 차디찬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분명히 하죠. 따님이 제 일을 그르친 것이 맞다면, 배상하셔야 할 겁니다.”이수애가 조금도 꺼리지 않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배상을 하라고? 네 가게 따위가 가치가 있어 봤자지. 우리 한씨 가문이 그 정도 돈도 배상 못할 것 같아?”“600억, 배상할 수 있으시겠어요?” 하연이 천천히,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600억……?’하연이 제시한 어마어마한 배상 금액에 큰 충격을 받은 이수애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뭐?! 네 작디작은 브랜드숍이 그 정도의 값어치라는 게 말이나 되니? 내가 바보인 줄 알
바로 이때, 홀에 나타난 경찰들이 체포할 용의자의 위치를 확인한 후,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서영 씨, 민혜경 씨, 맞으시죠? 저희랑 같이 임의 동행해 주셔여야 겠습니다.” 서영과 혜경이 경찰에 연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달려오던 이수애가 실수로 자신의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져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끝내, 경찰은 서영과 혜경을 연행하여 자리를 떠났고, 이어 서준 역시 쓰러진 이수애를 부축하여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한바탕의 해프닝이 막을 내렸다. 한차례의 폭풍이 휩쓸고 간 홀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회가 시작되었다. 하민이 하연을 데리고 홀 중앙의 단상으로 걸어 올라가 사람들을 향해 하연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이쪽은 HT그룹 대표실 비서의 직무를 사직하고 현재는 우리 DS그룹 B시 지사의 CEO를 맡고 있는 최하연 씨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과 많은 협력을 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하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상 아래의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수군대기 시작했다.“최하연 씨, 승진이 정말 빠르네요. HT 그룹을 사직하고 바로 DS그룹의 지사로 가다니요. 도대체 최하민 대표님과 무슨 사이입니까?” “같은 성씨이긴 하지만, 가족관계는 아닐 거에요. 멀쩡한 최씨 가문의 따님이 B시로 시집을 가서는 3년간 다른 사람의 비서 생활을 했을 리가 없잖아요.” “뭐가 어찌 됐든, 저는 최하연 씨가 한씨 가문에서 너무도 억울한 나날들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최하연 씨가 바람을 피운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그럴만했던 것 같아요.“…….”하민이 든든하게 하연의 뒤를 받쳐준 덕에, 한씨 가문은 많은 B시의 유명인사들이 참석한 연회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치부를 폭로했다. 그에 따라, 실시간 검색어가 하연에게 끼친 부정적인 영향 또한 완전히 상쇄된 듯했다.현장에 있던 유명 인사들이 하연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러브콜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자, 하연은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같은 시각, 한씨 가문은 먹구름으로 뒤덮인 듯한 분위기였다. 서준은 어두운 얼굴로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준은 방금 경찰서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서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민혜경만이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비록 서준이 하연과 있던 자리에서 바로 디자이너 브랜드숍의 손실액을 깔끔하게 배상하긴 했으나, 사건에 연루된 금액이 너무도 컸던 탓인지, 하연 측은 결코 합의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한서영은 감옥에 수감되고 말 것이었다. 변호사는 한서영이 약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것이라 추측했다. 방금 깨어난 이수애는 자신의 딸이 3년간 감옥살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서준아, 이 어미 말 좀 들어보렴. 이대로 서영이가 감옥살이를 하게 둘 수는 없잖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이수애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서영이는 아직 어려, 그런 아이가 어떻게 범죄자들과 같이 먹고 자고 할 수 있겠어! 서영이는 결국 무너지고 말 거야!”“아들아, 최하연, 그 얘를 찾아가서 대화를 좀 나눠보렴. 잘 구슬려서 며칠만 까불게 두고, 최대한 합의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떻겠니, 응?” 이수애의 말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이수애는 이제야 패배를 인정하는 듯했다. 서준이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고 낮게 말했다.“조직폭력배와 손을 잡고 타인의 재산을 훼손하다니, 정말 대범하기 짝이 없군요. 이번에는 서영이가 지나쳤습니다!”서준이 하연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문제는 하연이 서준과의 대화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으며, 그저 한서영을 감옥에 보내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너,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서영이가 어린 나이에 감옥살이라도 하라는 거니?”이수애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서영이도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서영이도 당한 게 있으니까 홧김에 복수한 거 아니야! 다 그 얘 잘못이야! 서영이한테 잘못이 있다면 그 얘한테 당했
“구 실장이 이미 F국 측 병원에 연락해 뒀어. 3일 뒤에 출국해.”출국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민혜경의 두 눈은 당황한 기색으로 가득해졌다. 민혜경이 이내 간절한 목소리로 서준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서준 씨, 나, 나, 가고 싶지 않아. 아기랑, 서준 씨랑 B시에 있을래.”서준의 어두운 얼굴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굳건했다. 혜경이 앞으로 나아가 서준의 팔을 붙잡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아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언니, 민혜주도 좀 생각해 줘. 한씨 집안의 일로 세상을 떠났잖아. 언니를 생각하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혜주 일을 생각하면 분명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혜경이 넌 떠나야 해.” 서준의 말을 들은 혜경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된 탓에 집에 있는 것이 너무도 답답한 서준이었다. 때마침, 나운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서준아, 실시간 검색어 봤어?] 수화기 너머의 운석이 물었다.서준은 운석이 하연과 관련된 기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오보야, 경찰도 이미 철수했어.”[너, 나랑 다른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확인해 봐, 너희 집에 관련된 내용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서 엄청나게 욕먹고 있으니까. 회사 홍보팀한테 빨리 처리하라고 해.]운석과의 전화를 끊은 서준이 재빨리 뉴스 기사를 확인해보았다. 기사를 확인한 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준의 두 눈동자에서는 광풍과 소나기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최하연,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반격한다고?’ ‘혜경이가 자신에 대한 허위 기사를 날조하여 인터넷에 게시하니까, 우리 가문에 본때라도 보여주려고 바로 대응해 오는 거야?’ 서준이 즉시 동후에게 전화를 걸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온 기사를 내리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동후에게서는 기사를 내릴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위클리 뉴스의 편집장이 반드시 한씨 가문에 관한 기사를 3일간 실시간 검색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다른 언론은 손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저 여자…….’무대 위의 사랑스러운 여자를 본 운석이 발걸음을 멈추었다.그 여자가 부르고 있는 노래는 유명한 발라드, ‘바람’이었다. 그녀의 신비로운 목소리가 바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살며시 의자에 앉은 그 여자의 아름다운 뺨으로 한 줄기의 조명이 내려왔다. 곧이어 그 여자의 검은 머리칼이 흔들리고, 붉은 입술이 열렸다. 그 여자의 감미로운 노랫소리는 청중들로 하여금 시공간을 넘나드는 느낌이 들게 했다. 그 여자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운석의 귀를 파고들자, 운석의 머릿속에 발코니에서 울던 하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밤,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고 있던 하연의 눈은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운석은 자신의 가슴에 직격탄을 날리는 듯한 하연의 아름다움 모습에 매료되어, 눈도 한번 깜빡거리지 않은 채 하연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자기야, 너무 감동적이라 눈물이 날 지경이야! 신나는 노래 좀 불러봐!” 무대 아래의 예나가 하연에게 소리쳤다.하연이 무대 아래의 친구들을 향해 윙크를 했다. “그래, 알았어.”곧이어 하연은 ‘사랑해'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는 하연의 얼굴에는 생동감 있는 웃음이 가득했다. 거기에 발로 장단을 맞추는 모습까지 더해지자 전체적으로 대단히 세련되고 매력 있어 보였다. 노래의 가사는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노래의 품격 역시 소탈했다. 무대 아래, 모든 청중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 청중들은 하연이 부르는 노래의 선율에 몸을 맡긴 채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연이 노랫소리로 인해 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운석의 머릿속에 오동나무가 즐비한 F국의 한 거리가 펼쳐졌다. 운석은 자신의 손을 잡은 채 그 거리를 걷고 있는 하연의 모습을 상상했다. 한마디로, 하연에게 완전히 매료되어버린 운석이었다. 운석은 여태 하연과 같이 자신의 심장을 파고들 정도로 아름답고 다채로운 모습을 가진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운석은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를
핸드폰의 알림 소리가 울리자, 하연이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하성이 보내온 문자였다. [우리 하연이, 오빠 안 보고 싶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이 셋째 오빠가 네가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조만간 F국에서 보자.] 하연이 온몸에 돋아난 닭살을 떨쳐내며 자판을 두드리며 답장을 보냈다. [안 보고 싶거든!]답장을 보낸 하연이 고개를 돌려 비서에게 지시했다. “저를 대신해서 서명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꽃은 회사의 여직원들에게 나눠주세요.”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비서가 하연의 사무실을 떠났다.하연은 계속해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때, 개발팀의 본부장인 유신혁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책상으로 다가와 하연에게 파일을 건네는 유신혁의 눈동자가 총명함으로 가득했다.“이번 달의 이윤표입니다. 한 번 보시죠.”아직 파일을 받아들지 않은 하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유신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유 부장님이 직접 오시다니, 무슨 일입니까?”하연이 유신혁의 손에 있던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제 비서에게 맡기시면 될 일입니다. 이렇게 번거롭게 하지 않으셔도 돼요.”유신혁의 얼굴에 웃음이 깊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긴장한 기색도 역력해지는 듯했다. “사장님, 지난번 회의 때는 제가 실수했습니다.”하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괜찮습니다, 그냥 말씀해 보세요.”“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죄송해서, 오늘 저녁에 제가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 수 있을까 하고…… 어떠십니까?” “제가 기항 그룹의 최신 소식을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과 개인적으로 공유하고 싶습니다.” 몸을 낮추며 굽신거리는 유신혁의 모습은, 지난번 회의실에서 하연을 향해 칼을 겨누며 날뛰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거짓이 많은, 변덕스러운 사람이야.’하연이 두 손을 깍지 낀 채, 유신혁을 꿰뚫어 보았다. “좋아요, 오늘 저녁에 뵙죠.”하연이 기항 그룹의 성재와 친분을 쌓자마자, 유신혁은 하연이 기항 그룹에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짙은 담배 냄새가 엄습해오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당겨 앉아 유신혁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연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유신혁의 이빨 사이로 새까맣고도 누런 치석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하연은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지는 듯했다.하연은 겉으로는 사람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중년의 남성이 사실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운 남자라는 것을 미쳐 생각지 못한 듯했다.“뭐 하시는 겁니까? 제가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까?” 하연이 최대한 숨을 참고 유신혁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사장님께서는 한서준의 침대에서 겨우 기어 내려와, 눈 깜짝할 사이에 DS그룹의 최하민 대표라는 배를 타셨지요. 그렇게 B시에 돌아오시자마자 우리 같은 원로 직원들은 발밑에 두시다니, 최 사장님, 정말 탄복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연의 입가에 썩소가 번졌다. 하연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가, 칭찬을 하기 위해서였습니까?”“물론 아닙니다. 저는 단지 한서준과 놀던 여자는 다른 여자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유신혁이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노골적인 표현을 내뱉으며 하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유신혁은 며칠 전, 하연에 의해 체면을 구긴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각 부서의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일침을 가했어. 능력이 출중한 여자임이 분명해.’ 이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유신혁의 위기감을 가중시켰다. 하연이 차가운 표정으로 유신혁의 말을 곱씹으며 말했다. “유 부장님, 여태 저를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여자가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잠자리 솜씨가 좋아 높은 자리에 앉았을 뿐이겠지요.” 유신혁은 여성에 대한 뚜렷한 차별을 드러냈다. 급기야 하연은 DS그룹 HR의 안목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우리 그룹에 섞여 있었다니.’ “사장님과 한 대표, 두 사람의 결혼 비화를 좀 듣고 싶군요. 아, 침대 위에서 내는 그 아름다운 소리까
분노에 가득 찬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뒤를 쫓아 호텔로 향하려 했다. 태현이 말했다. “봐, 내 말이 맞지? 남녀가 이렇게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밥 먹은 다음, 호텔을 가는 게 아니라면 어디로 가겠냐?”태현이 서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서준아, 바람기가 많은 여자일 뿐이야. 그냥 내버려둬.” 태현의 위로에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서준이 결국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혼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DS그룹의 최하민 대표와 결탁한 것도 모자라, 부하직원하고 놀아나기까지 하겠다고?”‘최하연, 나랑 이혼하고 변해버린 거야, 아니면 원래 이렇게 방탕한 여자였던 거야?’‘ 호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유신혁이 기다렸다는 듯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연도 유신혁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가 오르려던 그 순간, 서준이 하연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겼다.“얘기 좀 하자.”유신혁과 함께 호텔 방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붙잡는 서준을 본 하연은 순간 황홀감을 느꼈다. 그러나, 곧 이성을 부여잡고 눈앞의 서준을 똑똑히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한서준 씨, 정말 한가한가 봐? 난 일이 있어서 이만.” ‘우연의 일치일 뿐이야.’‘날 따라온 건 아닐 거야.’“두 분, 먼저 이야기 나누시죠.” 유신혁이 안색을 바꾸어 공손하게 서준의 비위를 맞추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눈을 가늘게 뜬 서준이 유신혁이 탄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감히 최하연의 몸에 손을 대려 하다니. 오늘은 절대 그럴 수 없지.’ 서준은 하연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 통증을 느낀 하연이 힘껏 서준을 밀쳐냈다. “빨리 용건이나 말해!”“왜 저런 쓰레기랑 잠자리를 하려는 거야?”서준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으며, 말투는 따지는 듯했다. 유신혁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B시에서 이미 소문이 자자했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자일 뿐인데, 너무 똑똑하면 손해만 볼 뿐이에요.” 남준이 허징인에게 다가가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이제 줘야 하지 않겠어요?” 허징인은 차갑게 비웃으며 얼굴을 굳혔다. “뭐가 그렇게 겁나십니까, 상무님? 제가 약속을 어길까 봐요? 아니면... 그 물건들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요?” “그건 사모님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죠.” 남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징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고, 속으로는 분이 차올랐지만, 상황을 감안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최선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상무님. 이미 약속한 이상, 전 제 말을 반드시 지킬 겁니다.” 허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남준과 눈을 맞췄다. “상무님도 본인의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남준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가 반은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드릴게요.” “안 돼요!” 남준이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사모님한테는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허징인은 눈을 감고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절 죽이세요. 하지만 제가 죽으면 그 물건들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두세요.” “엄마!” 곁에 있던 민찬이 울먹이며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무서워요!” 허징인은 민찬을 꼭 안으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물러서면 끝장이야. 적어도 내 아이는 지켜야 해.’ “상무님,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남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묵했다. 남자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잠시 후 말했다. “죽음도 불사하다니, 사모님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
집에 돌아온 하연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침실 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하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가정부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문틈 사이로 방 안의 하연을 흘깃 바라보며 손으로 가정부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가정부가 물러난 뒤, 상혁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상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는데, 원신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그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상혁은 짧은 문장을 확인한 뒤,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우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마치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이내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하연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상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할 때 마셔.”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우유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회사에 좀 다녀올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상혁은 하연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이 밤중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하연은 살짝 의아해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자는 고개를 숙여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이 난 참 행복해.” 상혁의 눈에는 하연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이 행복이 오래가길,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하연은 상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안기며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요. 정말 행복해
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혁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한 줄기 차가운 빛... 하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가려졌다. “지석 도련님 말씀대로, 형제간에는 서로 도와야 하는 법이죠.” “다만, 부씨 가문의 일을 굳이 외부인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상혁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기운에 압도된 지석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석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슬기가 먼저 나섰다. “하연 씨, 여기 메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맛이 괜찮아요? 추천 좀 해주세요.” 슬기의 말에 하연은 조용히 상혁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자, 상혁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너무 날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 별일도 아닌 걸로 걱정하는 하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상혁은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이 그제야 안심이 되어 바로 슬기에게 메뉴를 추천했다.“오리지널 맛도 괜찮고, 여러가지가 섞인 맛도 좋을 것 같아요. 둘 다 드셔보세요.” “그럼 두 가지 맛으로 각각 한 그릇씩 주세요!” 슬기는 메뉴를 탁 닫으며 밝게 말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석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그가 나가는 것을 슬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석이 자리를 떠나 자, 슬기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두 분의 오붓한 자리를 불편하게 해서요. 집안에서 주선한 선 자리를 억지로 나온 거라...” 여자의 말투에서 묘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슬기는 문득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혁은 그녀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온전히 하연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슬기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눈빛을 외면했다. “그나저나, 하연 씨.” 슬기가 화제를 돌렸다. “최근 하연 씨가 뒤로 물러나고 회사를 최하성 씨에게 맡겼다고 들었어요.”
“하연 씨, 우리 같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슬기는 예상 밖의 대답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연 씨, 이제 저 같은 ‘라이벌’에게 경계심이 풀린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제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할지?” 슬기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그러나 하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주 대표님,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으시면 옆에 있는 분 눈치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슬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 집에서 주선한 맞선일 뿐이라 별로 신경 안 써요. 첫 만남이기도 하고요.”그 순간 뒤에 있던 지한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 대표님,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부 대표님’이라는 말은, 그가 이미 상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한은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곧 혼사를 통해 막대한 사업적 결합을 이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에 지한은 적잖이 긴장했다.“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지한이 하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주슬기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지한은 그저 형식적인 맞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그때 상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SW그룹의 도련님을, 여기서 다 만나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단 한마디로 심지한의 배경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지한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부 대표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
최근 몇 년 동안 H시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번화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도시 풍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상혁은 차를 몰고 하연과 함께 요즘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유명 먹거리 거리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먹거리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양옆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상인들은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다.한참을 걷던 중, ‘10년 전통 국밥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깔끔하고 정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 인테리어는 오래된 가게답지 않게 세련되었고, 메뉴는 벽에 붙어 있어 가격이 한눈에 들어왔다.상혁이 가게를 한참 바라보는 사이, 하연은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기다릴 새도 없이 외쳤다. “사장님, 여기 대표 국밥 하나요!” 사장님은 빠르게 주문을 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못 드시는 재료 있으세요?”“짜지 않게 해주시고, 후추는 빼주세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하연이 주문을 마치자 사장님은 상혁을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뭘로 드릴까요?”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사장님의 깍듯한 존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가게의 음식 나오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국밥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어.” 상혁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상혁은 까다로운 식습관을 가진 어머니인 조진숙의 영향으로 엄격하게 관리된 음식을 먹으며 자라, 이런 길거리 음식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