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의 말을 들으며 연희의 손가락은 깊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 송강석이 어디서 나타나 연희에게 다가왔다.짝-송강석이 연희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자 연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아버지, 왜 저를 때리세요!”송강석은 화가 치밀었는데 방금 최하민이 사람을 보내 경고했는데 연희가 최하연을 괴롭혔기 때문이었다.“송연희, 네가 감히 최하연을 괴롭히다니,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그런데 감히 최하연을 건드리다니!”연희는 얼굴을 감싸고 멍해 있었다. 평소 자신을 사랑해 주던 아버지가 이제는 하연 때문에 자신을 때리다니 믿을 수 없었다. 연희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 모든 것을 하연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송강석은 연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최하연을 건드리면 미래 테크놀로지는 끝장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한지 알아?”연희는 입술을 꽉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강석은 연희가 전혀 반성하지 않자,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수치스러운 짓 하지 말고, 당장 집에 가 있어!”그러자 연희는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 “아버지!”“아버지라고 부르지 마! 미래 테크놀로지가 안전해질 때까지 네 용돈도 모두 끊을 테니까.”그 말에 연희는 순간 힘이 빠졌으나 송강석은 연희를 돌볼 겨를도 없이, 하연을 찾아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하연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전혀 틈이 없었다. 하연은 모든 사업가와 대화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쉴 시간이 생겼다.하연은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사람들 속에서 계속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고 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 시선을 따라갔으나 곧 사라졌다. 하연은 그것이 자신의 착각일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때 한 사람이 기둥 뒤에서 나왔고 눈에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 있었다.“여신님, 방금 정말 멋졌어요!” 나운석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하연에게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고 눈에는
나운석은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것만큼 중요한 건 없어요.”“하지만 난 당신이 곧 진짜 사랑을 만날 거라고 생각해요.”이 말을 듣고 운석은 깜짝 놀랐다. “여신님, 농담이죠?”이에 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믿지 않죠?”“믿지 않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당신 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설레게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서요.”운석은 자조적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내 행복보다 당신의 행복이 더 중요하죠.”그래서 운석은 주저 없이 DS그룹을 떠나 하연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만 노력했고 본인의 행복은 이미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오늘 밤에 모임이 있는데 같이 올래요?”하연이 거절하려 했지만, 운석이 애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신님, 제발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 어르신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하연은 피식 웃었다. 천하무적 운석에게도 두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워서 결국 요청에 응했다. “좋아요.”그러자 운석은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저녁에 봐요.”...저녁이 되자 하연은 편한 옷차림으로 외출했다. 운석이 모임을 주최한 곳은 고급 바였고 하연이 도착했을 때, 운석은 이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신님, 이 쪽이에요!”하연은 운석을 따라 들어가 룸에 도착하니,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운석의 오랜 친구들이었고 대부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모두 하연을 보자마자 매우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하연 씨, 뭐 하고 싶으세요? 포커? 화투? 주사위?”하연은 가리지 않았기에 대답했다. “다 괜찮아요.”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함께 포커를 시작했다. 하연은 포커를 자주 치지 않았지만, 운이 좋아서 한 바퀴 돌고 나니 손에 쥔 칩이 두 배로 늘어났다. 하연은 조금 미안해 하며 화장실에 가겠다고 핑계를 대고, 운석에게 두 판을 대신 치게 했다. 하연은 룸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옥상으로 나갔는데 그때 갑자기
그 방 안의 남자도 밖으로 나왔다. 남자는 최하연을 보자마자 눈이 반짝였다.“와우, 이건 어디서 나온 보물이지?”그들 중 한 사람이 하연을 알아보고 나운석과 함께 들어온 손님이라고 조용히 말했다.“대호 형님, 이 사람은 나씨 집안 운석 도련님이 데려온 손님입니다.”남자는 운석의 이름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고 이내 하연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방금 뭘 봤고, 뭘 들었죠?”하연은 대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에 두려움 없이 말했다. “당신들이 정당하게 영업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은밀한 거래도 하는군요. 안에 있는 여자아이들은 모두 유괴해 온 거죠?”씩 웃는 남자의 눈에 잔혹함이 서려 있었다. “보아하니, 오늘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요. 뭐, 좋아요. 당신 같은 미인은 보기 드문 보물이니까요.”말을 마치고 대호는 부하들에게 손짓하여 하연을 잡으라고 명령했고 하연은 냉소했다.“날 잡으려면,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봐야겠죠.”말이 끝나자마자, 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날렵하게 한 남자의 다리를 걷어차 후퇴하게 했다. 전혀 주저함이 없었고 하연은 단번에 상대를 몇 걸음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러자 대호는 흥미를 느끼며 말했다. “보아하니, 여기서 싸우려는 모양이네요!”대호는 직접 나서서 최하연을 잡으려고 했고 동작은 매우 거칠었다. 단 두 세 번의 공격에 하연은 열세에 처했지만, 하연은 남자의 약점을 발견하고 몸을 돌려 급소를 찼다.순간, 남자는 아래를 움켜쥐고 얼굴이 새빨개졌다.“잡아라! 당장 잡아!”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오자, 하연은 알아차렸다. 자기 혼자서는 이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저 없이 틈을 타서 출구로 달렸다. 그러나 출구에 도착했을 때,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하하하, 도망가 봐요!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 보세요!”남자는 냉소하며 천천히 하연을 포위했고 하연은 그들이 주의를 돌리기 전에 손목의 긴급 버튼을 눌렀다.“여자와 아이들을 유괴하는 것
“어떡해요? 내일 아침이면 우리 모두 끌려갈 텐데,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겠죠.”“흑흑, 죽기 싫어! 누가 우리 좀 구해줘요!”말이 끝나자 흐느낌이 이어졌다. 최하연은 이 모습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어두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하연은 흐느낌이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곧 아주 침착한 눈빛과 마주쳤는데 이 눈빛은 슬픔이 가득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다.그 소녀는 열일곱에서 열 여덟 살 정도로 보였으나, 성인과 같은 침착함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으로 최하연을 바라보며, 마치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둘 다 말을 하지 않았고 몇 분이 지난 후, 소녀가 입을 열었는데 불확실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우리를 구해낼 수 있나요?”그러자 하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어줘요, 꼭 구해 줄게요.”이 말은 구원의 빛처럼 소녀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소녀는 하연이 묶여 있는 모습을 보고 희망이 끊어졌다. 하연은 시선을 낮춰 자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보았다. 그리고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묶다니, 너무 허술했다. 곧이어, 하연은 손을 움직여 빠르고 깔끔하게 밧줄을 풀었다. 하연의 동작은 유려하고 신속했으며, 모두가 놀랐다.“정말로 풀었어요!”“정말 대단해요.”하연은 손짓으로 조용히 하라고 했다. “말하지 마세요!”이에 사람들은 이해하고 희망의 빛을 띠며, 아까 흐느끼던 여자도 얼굴의 눈물자국을 닦아냈다. 하연은 아무 말없이 다가가서 하나씩 밧줄을 풀어주자 곧 모두가 자유로워졌다. 아까 침착했던 소녀는 이제 하연을 경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언니, 제 이름은 하선유예요. 나가게 되면 꼭 보답할 게요.”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선유의 말을 마음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선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선유야. 우린 반드시 나갈 수 있을 거야.”선유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하연은 모두를 모아 작은
이 말에 여자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는데, 아마 대부분 채찍 맛을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그때, 권대호가 앞으로 나왔다. 대호는 최하연을 보며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꽤 능력 있네요. 십여 분 만에 도망쳐 나오다니요.”하연은 대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를 풀어줘요. 그렇지 않으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예요.”그러자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웃기는 소리! 우리를 풀어주라고? 꿈도 꾸지 마.”대호는 손짓하며 보디가드들을 앞으로 불렀다. 그때, 한 부하가 다급히 달려왔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 술집이 포위당했습니다.”대호는 얼굴이 굳어지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최씨 집안의 사람들이에요! 재벌 최씨 집안의 사람들이라고요!”이에 대호는 부하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최씨 집안? 우리가 그 집안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지? 왜 우리 영역에 와 있는 거야?”“저도 모릅니다, 형님! 그 집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그들이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훈련된 전문가들이에요.”대호는 이를 갈며 말했다. “제길! 우리가 최씨 집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우리 일을 방해하려는 거지?”대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하연에게 멈췄다. 그리고 하연을 주의 깊게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혹시 그쪽이 최씨 집안 딸이예요?”그러자 하연은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밖에는 하민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F 국 경찰도 있으니까요.”“여성과 아동을 유괴하는 것은 중범죄예요. 지금 증거가 확보되었으니, 당신들은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거예요.”뒤에 있는 여성들은 최하연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경찰이 왔어요! 우리 나갈 수 있어요!”대호는 화가 치밀어 올라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나를 감옥에 보내려면,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봐야겠죠!”곧이어 대호는 하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내 손을 빠져나간 여자는 없었어요. 경찰 몇 명이 온다고 해서 당신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권대호 씨, 사람 풀어줘요.”“물론 그래야죠. 가세요.”하연의 말에 대호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대호의 태도에 화가 난 하연은 목소리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지금 내 말 못 알아듣는 겁니까?”“최하연 씨, 무례하게 굴었던 건 어디까지나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저도 큰돈 들여 산 건데, 이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대호의 표정은 갑자기 사뭇 진지해졌다.하지만 하연은 대호에게 조금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손해? 끝까지 가보자는 겁니까?”대호가 하연을 당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많은 여자를 포기하자니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최하연 씨, 우리 서로 이익 충돌도 없는데 이러는 거 너무 선 넘는 거 아닙니까? 사과의 의미로 이들 중 한 명을 선택해 데려가세요. 제 성의 표시라고 해두죠.”“말했을 텐데요. 모두 풀어주라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하연의 태도에 대호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부하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대호 형님, 그만합시다. 최씨 가문이 이번 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요. 밖에 특공대도 와 있어요. 얼른 피하지 않으면 콩밥 먹을 수 있다고요.”그 말을 들은 순간 대호는 더 이상 시간 끌 여유가 없어졌다.심지어 이젠 하연과 협상할 카드마저 사라진 셈이다.“최하연 씨, 이번에는 그쪽 체면 봐줄 거지만 이 빚 조만간 확실히 받을 겁니다.”이 말만 남긴 채, 대호는 여자들을 지킬 사람 몇 명을 남겨두고 부하들을 데리고 다급히 떠나버렸다.곧 현장에 도착한 하민과 태훈은 방을 한 칸 한 칸 다 뒤져본 뒤에야 겨우 하연을 찾았다.“하연아 괜찮아?”하민의 말투에는 걱정과 초조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오빠, 저쪽 두목이 도망쳤어요.”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하연을 하민은 곧바로 달래주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이미 뒤쫓으라고 일러뒀어.”“오빠, 권대호는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어요. 얼마나 많은 부녀와 아이들이 그놈 손에 당했는
무사한 하연을 보자 걱정했던 운석도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그제야 하연의 옆에 있는 여자애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넌 누구야?”그 물음에 선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운석을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운석은 그제야 여자애를 열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귀엽고도 예쁘장한 여자애를 보자 운석은 손을 뻗어 선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괜찮아. 이제 곧 가족 만날 거야.”하지만 선유는 몸을 피하며 운석의 손길을 피했다.“만지지 마요!”도도하고 차가운 여자애의 태도에 운석은 실소했다.“꼬마야, 너 아직 미성년자지?”그 말에 선유는 버럭 화를 냈다.“누가 미성년자라는 거예요? 저 20살이거든요.”‘20살?’‘아무리 봐도 발육이 채 안 된 것 같은데?’운석은 의심이 들었지만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타일렀다.“앞으로 혼자 밖에 나다니지 마. 지금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오늘 우리 여신님 만난 거 운 좋은 줄 알아. 인신매매범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너를 데려다 장기 빼낼 수도 있다고.”선유는 잔뜩 긴장한 채 뭔가를 참는 듯했다.그걸 보고 이상함을 느낀 운석이 이내 물었다.“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선유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바로 쓰러졌다. 다행히 눈치 빠른 운석이 얼른 잡아주어 넘어지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야, 정신 차려봐. 괜찮아?”운석은 높은 소리로 선유를 불렀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선유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다.검사 결과 선유의 몸 곳곳에 채찍 흔이 발견되었고, 특히 등 쪽 상처는 이미 곪아 옷에 붙어있었다.게다가 치료하는 내내 선유는 아프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이 모든 걸 알게 된 운석은 인신매매범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이렇게 어린애도 때리다니. 개자식들 사람이야?”하연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인신매매범은 원래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은 총살해야 해
“혹시 HL 산업은행 하민철 은행장님이세요?”“네.”하민철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그때 옆에 있던 운석이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그러면 혹시 하선유 친척이신가요?”“선유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그 말에 하연은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 게, 선유가 HL 산업은행 은행장 딸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하 은행장님, 안녕하세요.”하지만 이내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하민철에게 인사했다. 마치 여장부 같은 기품 넘치는 하연의 모습에 하민철인 찬사의 미소를 보냈다.“예의 차릴 것 없어요.”“하 은행장님, 선유가 외상을 입어 상처가 감염되었습니다. 치료를 받아 생명의 위험은 없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하민철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선유 상태는 전에 알아봤어요. 이번에 우리 선유 구해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럼 선유는 은행장님께 맡기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잠깐만요.”하민철이 눈빛을 보내자 집사가 얼른 백지수표를 꺼내 하연에게 건넸다.“최하연 씨, 이건 우리 은행장님의 작은 성의이니 받아 주세요.”하연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아닙니다. 필요 없으니 가져가세요.”그 모습에 하민철도 자기가 너무 당돌했다는 걸 느꼈다. 그도 그럴 게, 천하의 최씨 가문 아가씨가 이런 적은 돈에 혹할 리 없으니까.“미안합니다. 습관이 되어 버렸어요.”“괜찮습니다.”하민철은 이내 집사더러 수표를 회수하라고 지시했다.“받지 않겠다고 하니 오늘 일은 내가 신세 진 거로 하고, 앞으로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HL 산업은행 은행장을 빚지게 만드는 게 백지 수표보다는 훨씬 값어치 있었다.특히 사업가에게 은행의 지지가 있다면 앞으로 일하는 데도 훨씬 편해질 터였다.“필요하다면 절대 사양하지 않고 도움 청하겠습니다.”하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솔직함은 하민철에게 아주 잘 먹혔다. 하연 같은 젊은이는 하민철도 오랜만에 보는 거였으니.“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하연의 인사에 하민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