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희는 등을 곧게 펴고 무대 뒤로 걸어갔다. 곧 비즈니스 포럼 개막식이 시작되었고, 사회자는 무대에서 유창하게 말을 이어가자 이내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우리 상업계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입니다. 평소대로 무작위로 한 분을 뽑아 경영 경험을 공유해 주시죠.”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연희는 무대 뒤에서 나와 하연을 쏘아보았다. 속으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며 연희는 방금 그 사모님들 쪽으로 가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곧 재밌는 걸 보게 될 거예요.”사모님들은 연희가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조언했다. “연희 씨,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파놓은 무덤에 본인이 들어갈 수도 있어요.”연희는 고개를 높이 들며 대꾸하지 않았고 그저 속으로 하연을 수치스럽게 만들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무대의 사회자가 하연을 주목했다.“오늘 이 자리에 대단한 분이 참석하셨습니다. 바로 DS그룹의 최하연 사장님입니다. 오늘 대표님을 무대에 모셔 경험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하연은 갑작스러운 호출에 잠시 당황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오빠는 이런 절차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 갑자기 자기를 무대로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이를 본 최하민은 눈빛이 어두워지며 비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비서도 당황하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하민은 하연을 바라보았고 곧 침착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필요 없어요.”하민이 말을 마치자마자 사회자가 계속해서 말했다.“여러분, 최하연 사장님을 모시겠습니다.”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현장은 뜨거운 박수로 가득 찼고, 모든 시선이 하연에게로 향했다. 하연은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우아했으며 하연의 시선이 한 바퀴 돌며 연희에게 멈췄다. 그리고 하연은 연희의 도발적인 눈빛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둘의 시선이 몇 초 동안 교차했다. 사모님들도 연희 옆에 서 있었고, 연희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연희 씨, 너무 노골적으로 겨냥하는 건 아니죠? 나중에
최하연은 곧바로 자신의 경영 경험에 대해 유창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연의 말은 유머러스 하면서도 재치가 넘쳤고, 과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의 균형을 완벽하게 유지했다.짧은 10분간의 설명이었지만, 청중들은 모두 집중해서 들었고, 설명이 끝난 후에도 잠시 멍하니 있다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최 사장님은 정말로 사업의 천재군요!”“사고가 명확하고, 완급 조절도 탁월하니 DS그룹을 그렇게 잘 운영하는 것도 당연해요.”“최 사장님은 정말 우리가 배워야 할 본보기입니다. 젊지만, 사업에 대한 통찰력이 매우 독특해요.”“최 사장님과 협력할 기회가 생긴다면, 정말 영광이겠죠!”주변의 찬사를 들으며 연희는 멍하니 있었다. 원래 연희는 최하연을 깜짝 놀라게 하려 했는데, 오히려 명성을 더욱 높여주는 계기가 되어버렸다.‘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잠깐만요!”연희는 소리쳐 막 무대에서 내려가려던 하연을 불러 세웠다. 이 순간, 연희는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말했다. “최 사장님, 질문이 몇 가지 있습니다. 답해 주시겠어요?”하연은 연희의 적대감을 느꼈지만,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 “질문이 있으면 바로 말씀하세요.”연희는 어릴 때부터 사업가 집안에서 자라며 경영에 대한 머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연희의 가족도 연희를 후계자로 키워왔다. 그랬기에 연희는 자신이 하연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 연희는 일부러 까다로운 질문을 골라 하연을 난처하게 만들고자 했다.“최 사장님, 현재 시장 경제가 불황인데, 주식 시장이 붕괴하고 펀드 시장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금 붕괴를 방지하고 현금 흐름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이 질문은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현재 대부분의 회사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연에게는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호감을 잃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연희는 질
사모님의 말을 들으며 연희의 손가락은 깊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 송강석이 어디서 나타나 연희에게 다가왔다.짝-송강석이 연희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자 연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아버지, 왜 저를 때리세요!”송강석은 화가 치밀었는데 방금 최하민이 사람을 보내 경고했는데 연희가 최하연을 괴롭혔기 때문이었다.“송연희, 네가 감히 최하연을 괴롭히다니,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그런데 감히 최하연을 건드리다니!”연희는 얼굴을 감싸고 멍해 있었다. 평소 자신을 사랑해 주던 아버지가 이제는 하연 때문에 자신을 때리다니 믿을 수 없었다. 연희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 모든 것을 하연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송강석은 연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최하연을 건드리면 미래 테크놀로지는 끝장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한지 알아?”연희는 입술을 꽉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강석은 연희가 전혀 반성하지 않자,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수치스러운 짓 하지 말고, 당장 집에 가 있어!”그러자 연희는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 “아버지!”“아버지라고 부르지 마! 미래 테크놀로지가 안전해질 때까지 네 용돈도 모두 끊을 테니까.”그 말에 연희는 순간 힘이 빠졌으나 송강석은 연희를 돌볼 겨를도 없이, 하연을 찾아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하연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전혀 틈이 없었다. 하연은 모든 사업가와 대화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쉴 시간이 생겼다.하연은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사람들 속에서 계속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고 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 시선을 따라갔으나 곧 사라졌다. 하연은 그것이 자신의 착각일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때 한 사람이 기둥 뒤에서 나왔고 눈에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 있었다.“여신님, 방금 정말 멋졌어요!” 나운석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하연에게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고 눈에는
나운석은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것만큼 중요한 건 없어요.”“하지만 난 당신이 곧 진짜 사랑을 만날 거라고 생각해요.”이 말을 듣고 운석은 깜짝 놀랐다. “여신님, 농담이죠?”이에 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믿지 않죠?”“믿지 않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당신 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설레게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서요.”운석은 자조적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내 행복보다 당신의 행복이 더 중요하죠.”그래서 운석은 주저 없이 DS그룹을 떠나 하연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만 노력했고 본인의 행복은 이미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오늘 밤에 모임이 있는데 같이 올래요?”하연이 거절하려 했지만, 운석이 애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신님, 제발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 어르신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하연은 피식 웃었다. 천하무적 운석에게도 두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워서 결국 요청에 응했다. “좋아요.”그러자 운석은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저녁에 봐요.”...저녁이 되자 하연은 편한 옷차림으로 외출했다. 운석이 모임을 주최한 곳은 고급 바였고 하연이 도착했을 때, 운석은 이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신님, 이 쪽이에요!”하연은 운석을 따라 들어가 룸에 도착하니,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운석의 오랜 친구들이었고 대부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모두 하연을 보자마자 매우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하연 씨, 뭐 하고 싶으세요? 포커? 화투? 주사위?”하연은 가리지 않았기에 대답했다. “다 괜찮아요.”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함께 포커를 시작했다. 하연은 포커를 자주 치지 않았지만, 운이 좋아서 한 바퀴 돌고 나니 손에 쥔 칩이 두 배로 늘어났다. 하연은 조금 미안해 하며 화장실에 가겠다고 핑계를 대고, 운석에게 두 판을 대신 치게 했다. 하연은 룸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옥상으로 나갔는데 그때 갑자기
그 방 안의 남자도 밖으로 나왔다. 남자는 최하연을 보자마자 눈이 반짝였다.“와우, 이건 어디서 나온 보물이지?”그들 중 한 사람이 하연을 알아보고 나운석과 함께 들어온 손님이라고 조용히 말했다.“대호 형님, 이 사람은 나씨 집안 운석 도련님이 데려온 손님입니다.”남자는 운석의 이름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고 이내 하연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방금 뭘 봤고, 뭘 들었죠?”하연은 대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에 두려움 없이 말했다. “당신들이 정당하게 영업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은밀한 거래도 하는군요. 안에 있는 여자아이들은 모두 유괴해 온 거죠?”씩 웃는 남자의 눈에 잔혹함이 서려 있었다. “보아하니, 오늘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요. 뭐, 좋아요. 당신 같은 미인은 보기 드문 보물이니까요.”말을 마치고 대호는 부하들에게 손짓하여 하연을 잡으라고 명령했고 하연은 냉소했다.“날 잡으려면,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봐야겠죠.”말이 끝나자마자, 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날렵하게 한 남자의 다리를 걷어차 후퇴하게 했다. 전혀 주저함이 없었고 하연은 단번에 상대를 몇 걸음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러자 대호는 흥미를 느끼며 말했다. “보아하니, 여기서 싸우려는 모양이네요!”대호는 직접 나서서 최하연을 잡으려고 했고 동작은 매우 거칠었다. 단 두 세 번의 공격에 하연은 열세에 처했지만, 하연은 남자의 약점을 발견하고 몸을 돌려 급소를 찼다.순간, 남자는 아래를 움켜쥐고 얼굴이 새빨개졌다.“잡아라! 당장 잡아!”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오자, 하연은 알아차렸다. 자기 혼자서는 이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저 없이 틈을 타서 출구로 달렸다. 그러나 출구에 도착했을 때,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하하하, 도망가 봐요!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 보세요!”남자는 냉소하며 천천히 하연을 포위했고 하연은 그들이 주의를 돌리기 전에 손목의 긴급 버튼을 눌렀다.“여자와 아이들을 유괴하는 것
“어떡해요? 내일 아침이면 우리 모두 끌려갈 텐데,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겠죠.”“흑흑, 죽기 싫어! 누가 우리 좀 구해줘요!”말이 끝나자 흐느낌이 이어졌다. 최하연은 이 모습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어두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하연은 흐느낌이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곧 아주 침착한 눈빛과 마주쳤는데 이 눈빛은 슬픔이 가득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다.그 소녀는 열일곱에서 열 여덟 살 정도로 보였으나, 성인과 같은 침착함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으로 최하연을 바라보며, 마치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둘 다 말을 하지 않았고 몇 분이 지난 후, 소녀가 입을 열었는데 불확실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우리를 구해낼 수 있나요?”그러자 하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어줘요, 꼭 구해 줄게요.”이 말은 구원의 빛처럼 소녀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소녀는 하연이 묶여 있는 모습을 보고 희망이 끊어졌다. 하연은 시선을 낮춰 자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보았다. 그리고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묶다니, 너무 허술했다. 곧이어, 하연은 손을 움직여 빠르고 깔끔하게 밧줄을 풀었다. 하연의 동작은 유려하고 신속했으며, 모두가 놀랐다.“정말로 풀었어요!”“정말 대단해요.”하연은 손짓으로 조용히 하라고 했다. “말하지 마세요!”이에 사람들은 이해하고 희망의 빛을 띠며, 아까 흐느끼던 여자도 얼굴의 눈물자국을 닦아냈다. 하연은 아무 말없이 다가가서 하나씩 밧줄을 풀어주자 곧 모두가 자유로워졌다. 아까 침착했던 소녀는 이제 하연을 경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언니, 제 이름은 하선유예요. 나가게 되면 꼭 보답할 게요.”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선유의 말을 마음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선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선유야. 우린 반드시 나갈 수 있을 거야.”선유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하연은 모두를 모아 작은
이 말에 여자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는데, 아마 대부분 채찍 맛을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그때, 권대호가 앞으로 나왔다. 대호는 최하연을 보며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꽤 능력 있네요. 십여 분 만에 도망쳐 나오다니요.”하연은 대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를 풀어줘요. 그렇지 않으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예요.”그러자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웃기는 소리! 우리를 풀어주라고? 꿈도 꾸지 마.”대호는 손짓하며 보디가드들을 앞으로 불렀다. 그때, 한 부하가 다급히 달려왔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 술집이 포위당했습니다.”대호는 얼굴이 굳어지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최씨 집안의 사람들이에요! 재벌 최씨 집안의 사람들이라고요!”이에 대호는 부하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최씨 집안? 우리가 그 집안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지? 왜 우리 영역에 와 있는 거야?”“저도 모릅니다, 형님! 그 집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그들이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훈련된 전문가들이에요.”대호는 이를 갈며 말했다. “제길! 우리가 최씨 집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우리 일을 방해하려는 거지?”대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하연에게 멈췄다. 그리고 하연을 주의 깊게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혹시 그쪽이 최씨 집안 딸이예요?”그러자 하연은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밖에는 하민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F 국 경찰도 있으니까요.”“여성과 아동을 유괴하는 것은 중범죄예요. 지금 증거가 확보되었으니, 당신들은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거예요.”뒤에 있는 여성들은 최하연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경찰이 왔어요! 우리 나갈 수 있어요!”대호는 화가 치밀어 올라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나를 감옥에 보내려면,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봐야겠죠!”곧이어 대호는 하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내 손을 빠져나간 여자는 없었어요. 경찰 몇 명이 온다고 해서 당신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권대호 씨, 사람 풀어줘요.”“물론 그래야죠. 가세요.”하연의 말에 대호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대호의 태도에 화가 난 하연은 목소리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지금 내 말 못 알아듣는 겁니까?”“최하연 씨, 무례하게 굴었던 건 어디까지나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저도 큰돈 들여 산 건데, 이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대호의 표정은 갑자기 사뭇 진지해졌다.하지만 하연은 대호에게 조금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손해? 끝까지 가보자는 겁니까?”대호가 하연을 당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많은 여자를 포기하자니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최하연 씨, 우리 서로 이익 충돌도 없는데 이러는 거 너무 선 넘는 거 아닙니까? 사과의 의미로 이들 중 한 명을 선택해 데려가세요. 제 성의 표시라고 해두죠.”“말했을 텐데요. 모두 풀어주라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하연의 태도에 대호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부하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대호 형님, 그만합시다. 최씨 가문이 이번 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요. 밖에 특공대도 와 있어요. 얼른 피하지 않으면 콩밥 먹을 수 있다고요.”그 말을 들은 순간 대호는 더 이상 시간 끌 여유가 없어졌다.심지어 이젠 하연과 협상할 카드마저 사라진 셈이다.“최하연 씨, 이번에는 그쪽 체면 봐줄 거지만 이 빚 조만간 확실히 받을 겁니다.”이 말만 남긴 채, 대호는 여자들을 지킬 사람 몇 명을 남겨두고 부하들을 데리고 다급히 떠나버렸다.곧 현장에 도착한 하민과 태훈은 방을 한 칸 한 칸 다 뒤져본 뒤에야 겨우 하연을 찾았다.“하연아 괜찮아?”하민의 말투에는 걱정과 초조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오빠, 저쪽 두목이 도망쳤어요.”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하연을 하민은 곧바로 달래주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이미 뒤쫓으라고 일러뒀어.”“오빠, 권대호는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어요. 얼마나 많은 부녀와 아이들이 그놈 손에 당했는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송혜선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솔직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채고 하나하나 넘겨봤다. 사진마다 담긴 장면이 송혜선을 점점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 최씨 가문의 귀한 딸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니,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사진 속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고한 분위기, 남다른 기품까지...비록 사진에는 전부 뒷모습만 담겨 있었지만,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송혜선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모든 사진을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친한 남녀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선을 넘은 정황은 없잖아. 겉보기엔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정다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설 탐정을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사진 속 ‘한명준’이라는 남자와 하연 이 둘 사이에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님, 이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다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바로 B시 한씨 가문의 사람이란다.” “B시 한씨 가문?”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하연의 전 남편이 한씨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한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최하연의 전남편은 감옥에 간 걸로 아는데, 또 다른 한씨 가문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복잡한 사연이 많았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다영은 하연과 ‘한명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일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부상혁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남자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