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은 하연을 단번에 정신 차리게 했다.“네?”하연과 서준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낀 운석은 서운한 듯 입을 열었다.“만약 다시 그 자식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하연 씨 선택 존중해 줄게요.”잔뜩 풀이 죽어 중얼거리는 운석을 보자 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그렇게 자신 없어요?”“경쟁 상대가 서준 그 자식이면 져도 쪽팔릴 건 없어요. 그런데 생각 잘해요, 두 사람 사이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거. 같이 있으려면 그 문제부터 해결해요.”하연은 다급히 운석의 말을 잘랐다.“누가 한서준이랑 다시 시작한다 그래요?”그 말에 운석은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가 그 자식이랑...”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적어도 아직은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어요.”“그렇다면 저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겠죠?”하연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잔뜩 흥분한 듯한 운석과 눈을 마주했다.그러면서 오늘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렸다.“운석 씨, 정말 제가 운석 씨의 남은 평생을 맡길만한 상대가 확실해요?”“100퍼센트 확실해요.”운석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저 하연 씨를 원해요. 예전에는 눈이 삐어 한번 놓쳤지만, 저와 약혼한 상대가 하연 씨인 줄 알았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하연은 눈을 내리깔았다.솔직히 운석이 저에 대한 마음은 그저 일시적인 것일 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단호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에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철저히 단념시킬 수밖에 없었다.“운석 씨, DS 그룹에서 나가요. 운석 씨처럼 능력 있는 사람은 더 큰 무대에 있어야 해요. NW그룹으로 돌아가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예요.”“지금 저 내쫓는 거예요?운석은 뭔가 알아차린 듯 되물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운석 씨가 여기 있는 거 너무 아까워서요.”“저는 상관없어요. 하연 씨 곁에만 남이 있을 수 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요.”하연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저는 운석 씨가 본인의 행복을 찾을 거라고 믿어요.”그 말에 운석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운석의 눈은 이미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그 뒤로 며칠 동안, 하연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패션쇼 준비 때문에 미루었던 일을 하느라 매일 야근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자 겨우 한숨 돌리게 되었다.토요일 이른 아침, 하연은 강영숙의 연락을 받았다.“하연아, 너 오늘 고택에 올 수 있어?”솔직히 하연도 조금은 망설여졌지만 강영숙의 말투에 섞인 기대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끝내 승낙했다.“당연하죠, 오늘 할머님 생신인데, 시간 맞춰 갈게요.”긍정적인 답변을 들은 강영숙을 얼굴에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으마.”전화를 끊은 하연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른 아침 창문으로 흘러든 햇살은 따뜻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임이 틀림없었다.하연은 금고에서 지난번 경매에서 낙찰받은 에메랄드 보석을 꺼내자마자 가정부 장순영을 불러왔다.“이모님, 이 선물 포장해 주세요.”“네, 아가씨.”장순영은 숙련된 동작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선물을 예쁘게 포장하였다.리본이 묶여 있는 선물 상자를 보며 하연은 싱긋 웃었다.“이모님 손재주가 참 좋으시네요.”“저를 너무 띄워주시네요. 그런데 오늘 어디 가세요?”하연은 오늘 운전할 차를 하나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한씨 고택에요.”그 대답에 장순영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한편 차고에서 흰색 마세라티를 고른 하연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홀연히 사라졌다.오늘 한씨 저택에는 알록달록한 등불과 장식들이 달려 있어 유난히 흥겨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강영숙의 생일은 한씨 가문의 중요한 생사인지라 커다란 저택 밖에 이른 아침부터 가종 외제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선물을 들고 방문한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거실 안.사람들은 모두 강영숙 주변에 모여
그것도 능력 있고 훌륭한 아들.그에 반해, 고민정은 평생 딸 하나뿐이니 당연히 이수애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마저 두 사람 사이에는 스파크가 튀었다.“내가 우리 유진이 짝 찾아주는 게 뭐 어쨌다고 그래? 동성한테 피해라도 줬어? 그러고 보니, 서준이가 서영이 A국으로 쫓아냈다며? 그 일에나 신경 쓸 것이지.”고민정이 그 말을 꺼낸 순간 이수애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그도 그럴 게, 이 일만 생각하면 이수애는 가슴이 바늘에 찔리는 듯 아팠다.“그저 당분간만 그곳에 있는 거거든요? 조만간 돌아올 거예요.”자존심을 굽히지 못하고 되받아치던 이수애는 말하면 말할수록 자신감이 사라져 결국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싸움에서 이긴 고민정은 기세등등해서 다시 강영숙의 팔짱을 꼈다.“어머님,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봐주세요. FL그룹 대표 부상혁이 그렇게 인물도 훤칠하고 능력도 뛰어나대요. 고작 몇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쓰러져가는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울만큼 대단하다네요...”“됐다.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하자.”결국 참다 못한 강영숙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고민정은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네, 그래요.”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시선을 제 딸 유진에게로 돌렸다.“유진아, 이 총각 좀 봐봐. 부상혁이라고, 네 이상형에 딱 맞는 스타일이야.”정작 당사자인 유진은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 한참 뒤, 서준을 본 순간 어두웠던 유진의 눈은 반짝 빛났다.“엄마, 저 잠깐 갔다 올게요.”이윽고 유진은 빠른 걸음으로 서준에게 다가갔다.“서준아.”서준은 저에게 다가온 상대를 확인하자 얼른 인사했다.“유진 누나, 왔어?”유진은 서준의 사촌 누나이지만 나이는 고작 2달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때문에 유진은 서준을 항상 동갑내기라고 여겨왔다.그런데 그런 상대에게 누나라는 호칭을 듣자 유진은 입을 삐죽거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몇 번을 말해?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
서준의 반응에 태현은 참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전에 하연 씨한테 온갖 트집을 잡고, 하연 씨를 두고 바람피울 때는 그런생각 한 번도 안 했으면서, 고작 몇 마디 했다고 이런다고? 한서준, 너 너무 뒷북치는 거 아니야?”“너 오늘 말 많다?”대놓고 동문서답을 하는 서준의 모습에 태현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해 얼른 서준의 어깨를 감쌌다.“이봐, 친구. 너 설마 누구 기다리는 거야?”태현이 말한 사람은 당연히 하연이다.하지만 이번에도 서준은 직접적인 대답은 내놓지 않았다.“아주 한가하지?”“에이, 한가하다니.”태현은 다급히 부정했다.“그냥 조금 궁금해서 그러지. 그런데 충고 한마디만 할게. 지금이라도 네 마음 알았으면 하연 씨한테 진심을 보여줘. 전에 잘못한 건 인정하고, 때리면 맞고 잘못하면 고쳐야지.”태현은 웃음기 가득 머금은 눈으로 서준을 바라봤다.“아무튼, 하연 씨한테 잘해.”그 말에 서준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그런 것까지 가르칠 필요는 없거든.”그렇게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흰색 마세라티가 눈에 띄자 태현은 휘파람을 불며 서준을 툭툭 건드렸다.“야, 왔어.”곧이어 주차를 마친 하연이 선물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오늘 한씨 고택에 방문한 손님들은 대부분 한씨 집안 친척들이기에 하연과 서준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특히 두 사람의 이혼은 B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기에, 하연이 나타난 순간 사람들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 채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최하연이 여긴 어떻게 왔대?”“두 사람 이혼한 거 아니었어? 설마 재결합했나?”“최하연이 최씨 가문 아가씨인 게 밝혀졌잖아. 최씨 가문이 어떤 가문이야, 한씨 가문도 최씨 가문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고. 한서주은 대체 전생에 무슨 공을 세웠길래 최하연과 결혼했지?”“...”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지만 하연은 개의치 않았다. 몸에 딱 달라붙는 긴 드레스는 하연의 늘씬한 몸매를 더욱 잘 부각했고, 높은 하이힐을 신은 덕에 분위기마저 모든 사람을 압도했다.
“그런데 하연아, 지금은 네가 DS 그룹 대표라며? 정말 대단하네. 네 고모부가 얼마 전에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바람에 지금 일자리를 찾지 못했거든. 그러니까 DS 그룹에서 자리 좀 마련해주면 안 될까?”하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대답할 가치가 없어 침묵을 지켰더니 한설매는 오히려 더 무리한 부탁을 해왔다.“사실 고모부가 예전 회사에서 팀장이었거든. 그러니까 DS 그룹에 가면 사장직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영숙은 기가 차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때, 침묵을 유지하던 하연이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왜 한씨 집안 사라들한테 부탁하지 않으세요? HT 그룹 같은 큰 회사에서 일자리 하나 마련하는 건 큰일도 아닐 텐데. 저희 회사 같은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귀한 분을 모시겠어요.”거침없는 하연의 말에 한설매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하연의 말은 하필 한설매의 아픈 곳을 콕콕 건드렸다. 애초에 HT 그룹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하연에게 머리를 숙이며 부탁할 일 같은 건 없었을 테니까.이건 다 남편이 못나 능력도 없는 바람에 서준에게 이미 퇴짜 맞은 탓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한설매는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최하연! 네가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아? 일자리 좀 소개해 달라고 한 거 가지고 잘난 척은, 그러니까 서준이한테 이혼이나 당하지.”“한설매!”강영숙은 끝내 참지 못하고 어두운 얼굴로 한설매를 호통쳤다.순간 막내딸이라고 오냐오냐 키웠던 것마저 후회되었다.“그 입 다물어.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강영숙에게 꾸중을 들은 한설매는 바로 불만을 표했다.“엄마! 제가 뭘 어쨌다고! 도움 좀 청한 거잖아요. 한 가족끼리 돕고 사는 게 뭐 어때서요.”“어쩜 이렇게 뻔뻔해?”강영숙의 말에 얼굴이 잿빛이 된 한설매는 콧방귀를 뀌고는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나갔다.그제야 강영숙은 하연에게 다급히 사과했다.“하연아, 설매 말은 마음 쓰지 마.”“전 괜찮아요.”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하지만 하연이 하루아침에 갑부의 손녀가 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연의 환심을 사려고 먼저 다가가 아부하고 있다.이 모습을 보니 유진은 배알이 꼬였다.“작은고모, 혹시 한서영이 왜 A국으로 쫓겨난 줄 아세요?”한설매는 결혼을 한 뒤 본가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서영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그저 A국으로 유학을 보냈다는 이수애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그런데 A국이 어떤 곳인가? 한씨 가문이 설사 망했다 할지라도 자식을 A국으로 유학 보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한설매는 내막을 모르기에 궁금한 듯 되물었다.“무슨 속사정이라도 있는 거야?”유진은 이내 사람들에게 둘러 싸인 하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이유라 할 게 있겠어요? 다 최하연 때문이죠.”“최하연? 최하연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유진은 하연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는 눈빛으로 한설매를 바라봤다.“전에 둘째 숙모와 한서영이 최하연을 어떻게 괴롭혔는지 잊었어요? 최하연은 그걸 복수하려고 때를 기다린 거예요. 그리고 하루아침에 한서영한테 그 본대를 보여줬잖아요. 서준이 직접 명령을 내렸대요. 남은 평생 한서영이 귀국하지 못하도록.”그 말을 들은 한설매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최하연이 그 정도로 뒤끝이 있다고?”돌이켜 보면 한설매도 하연을 남자 덕에 팔자 폈다고 종종 모욕했었다. 그러니 하연이 만약 그때 일을 복수한다면 한설매는 분명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작은고모가 몰라서 그렇지 이번 일로 피해 본 사람 한서영뿐만이 아니에요. 둘째 숙모도 당했거든요.”“뭐? 둘째 언니는 그래도 최하연 시어머니였잖아, 게다가 어르신이고! 그런데 어떻게 감히! 이젠 위아래도 없다 이거야?”유진은 한참 부채질하다가 기회를 보더니 마지막 한마디를 투척했다.“두 사람 지금은 이혼했잖아요. 그러니 둘째 숙모도 이제는 시어머니가 아니죠. 그래서 저렇게 거리낄 게 없는 거고. 그러니 작은고모한테는 어떻게 대하겠어요.”그 순간, 한설매는 덜컥 겁이 났다.한설매가 결혼한
모든 사람이 하연의 주위에 모여들어 떠받드는 걸 보자 강영숙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거실 구석에 앉아 있는 이수애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이 사람들이 권세에 빌붙으려 한다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예전에 이수애가 잘나갈 때는 하나같이 그녀를 추켜세우며 빌붙으려 하던 사람들이니. 하지만 지금 그 태도가 180도로 변해 모두 하연에게 몰려들었다.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이수애는 딸 서영이 더 그리웠다.지금 서영은 A국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하연은 너무 잘나가고 있었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어머님, 최하연은 이제 우리 집 식구도 아닌데, 왜 초대했어요?”그 말에 강영숙은 이내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하연은 내가 초대한 손님이다. 내 손님에 네가 왜 토를 달지? 그럴 시간이 있으면 주방에서 일이나 좀 거들어라.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강영숙의 강경한 태도에 이수애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더니 곧장 뒤돌아 주방으로 걸어갔다.그제야 강영숙이 손을 뻗어 아픈 가슴께를 꾹꾹 눌렀다. ‘고질병이 또 도졌나 보네.’강영숙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리고 그때.“하연 씨.”유진이 사람들을 가로 지나 하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연은 그나마 유진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도 그럴 게, 서준의 사촌 누나인 유진은 다른 식구들처럼 하연을 괴롭힌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유진 언니.”“하연 씨, 너무 많이 변해서 몰라보겠네요.”유진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어오자 하연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언니야말로 점점 예뻐지네요.”그때 유진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을 보탰다.“방금 할머니가 몸이 편찮아 보이던데, 또 고질병이 도진 것 같아요.”강영숙이 편찮다는 말에 하연은 이내 걱정했다.“할머님은 괜찮으세요?”그 말에 유진은 주위를 빙 둘러보며 무심코 말했다.“어? 이상하다? 위층에 올라간 지 한참이 되는데 왜 안 돌아오셨지?”하연은 순간 걱정이 한층 더해졌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서로 대화하는 손
“지금 여기서 뭐 해?”문 앞에 서 있는 서준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심지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하연의 손을 확 낚아챘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연은 서준에게 끌려 방을 나섰다.“방금 그거 뭐야?”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 하연의 질문에 서준은 눈살을 찌푸릴 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뭘 봤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하연의 의심은 더해져만 갔다.심지어 이곳에 남모를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건 너무 이상하잖아.”하연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방금 본 걸 떠올리더니 결국 서준을 보며 물었다.“왜 서준 씨 흑백 사진이 벽에 걸려 있어? 뭐 귀신이라도 돼?”그 말에 서준은 버럭 화냈다.“헛소리하지 마. 잘못 본 거야.”“전말?”재차 질문하던 하연은 그제야 서준이 제 손목을 잡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이내 손을 뿌리쳤다.“생일 연회 이제 곧 시작해. 내려가자.”서준은 텅 빈 손을 바라보며 인내심 있게 말했다.하연은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내 본인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결론 지었다.‘한서준이 내 앞에 이렇게 있잖아. 그러니 그럴 리 없어.’“할머님은 어떠셔? 괜찮아?”“뭐라고?”“할머님이 편찮으시다고 해서 올라와 본 거야.”서준은 방금 전 상황을 설명하는 하연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할머니는 괜찮아. 다음에 다시는 여기 오지 마.”“응.”하연은 눈을 내길 깔고 짤막하게 대답했다.두 사람이 앞뒤로 나란히 서서 계단 입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정체 모를 물건이 하연을 향해 날아왔다.“조심해.”무의식적으로 반응한 서준은 하연의 팔을 잡아당기며 제 몸으로 무거운 물건을 막아냈다.그리고 다음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물건이 서준의 등에 떨어지더니 옷이 얼룩덜룩한 물감으로 완전히 뒤덮여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렸다.주위의 시선은 순간 서준에게 모였다. 다들 의아한 눈빛으로 처참한 몰골의 서준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연지 씨가 부상혁 대표 곁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사실상 부 대표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던데... 그런데 지금은 부남준 상무를 위해 일하고 있네.”“내가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그렇게 부씨 가문의 두 형제 사이를 능숙하게 오갈 수 있는 거지?” 세븐이 입을 열자, 연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 말투와 어조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부상혁 대표는 원래 이런 말투로 말하지 않아.”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 끄시지.” 그리고 이어서 단호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이나 제대로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약점 보였다가 후회하지 말고.”그러나 세븐은 개의치 않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지 씨, 정말 부상혁 대표에 대해 꽤 잘 아는 것 같단 말이야?” “그건 당신이 궁금해할 필요 없고.” 연지는 냉랭하게 받아쳤다. 오늘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세븐은커녕 이 공간에 발 들이는 것조차 끔찍했을 것이다.“그리고 부남준 상무님이 하신 말씀 잊지 마. 본인이 할 일이나 제대로 해.” 세븐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살짝 올렸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지는 손목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곧 예식이 시작돼. 모든 건 계획대로 진행하면 돼.” “걱정 마. 발목 잡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대답은 나쁘지 않았다. “차 안에서 얌전히 있어. 내 연락 기다려.” 마지막으로 단단히 일러둔 후, 연지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호텔 안. 비록 약혼식이지만,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이들 모두 이를 굉장히 중시했다. 사소한 부분까지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로비의 장식만 봐도, 백 명이 넘는 직원들이 작년부터 준비해 온 결과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홀 중앙에는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대리석 바닥에 비친 금빛 패턴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관을 이루었다. 하객들은 이미 자리를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