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고로 하연이 다쳤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심지어 F국까지 쫓아갔었다.하지만 최씨 가문에서 하연을 너무 꼭꼭 숨긴 탓에 그곳에 있는 열흘 동안 하연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그리하여 귀국한 뒤, 서준은 DS 그룹 로비에서 줄곧 하연을 기다렸다.그때, 하연이 자기의 모든 감정을 숨긴 채 가볍게 말했다.“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건가? 미안하지만 난 그딴 관심 필요 없어.”“그래도 괜찮은 거 이렇게 확인해서 다행이야.”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서준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임성재와 합작하고 있는 나노기술 로봇 프로젝트가 현재 과열 단계야. 다음 달이면 신제품 런칭쇼가 있어. 이건 우리가 합작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니까 시간 나면 같이 보러 가자.”서준이 사업 얘기를 꺼내자 하연은 거절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건 하연의 프로젝트이기도 했으니까.“그래, 시간 내서 갈게.”방금 전 하연과 현욱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 서준은 대충 하연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대충 짐작했다.때문이 곧바로 화제를 그쪽으로 전환했다.“우리 HT 그룹에서 요즘 새로운 프로젝트 몇 개 준비하고 있으니 관심 있다면 협력할래?”하연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그 대답에 서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숨기며 눈을 내리깔았다.“그렇게 나랑 엮이기 싫어?”“왜 이래? 공과 사는 칼 같이 구분하던 사람이?”“아니면 나랑 협력할 용기도 없나?”“...”서준의 도발에 하연은 화를 내기는커녕 조금도 도용하지 않은 태도로 차분하게 말했다.“한 대표님 자신감은 역시 변함이 없네. 하지만 DS 그룹은 이미 FL그룹과 협력하기로 했어. 그러니 HT 그룹과는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너무나도 선명한 거절 의사에 서준은 코웃음을 쳤다.“FL그룹 이제 막 설립된 회사 아닌가? 아직 제대로 자리도 못 잡았는데 벌써 달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서준의 말속에는 경멸이 가득했다.“정말 예나 지금이나 남을 존중할 줄 모르네.”그 말에 서준의 표
그 말은 하연을 단번에 정신 차리게 했다.“네?”하연과 서준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낀 운석은 서운한 듯 입을 열었다.“만약 다시 그 자식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하연 씨 선택 존중해 줄게요.”잔뜩 풀이 죽어 중얼거리는 운석을 보자 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그렇게 자신 없어요?”“경쟁 상대가 서준 그 자식이면 져도 쪽팔릴 건 없어요. 그런데 생각 잘해요, 두 사람 사이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거. 같이 있으려면 그 문제부터 해결해요.”하연은 다급히 운석의 말을 잘랐다.“누가 한서준이랑 다시 시작한다 그래요?”그 말에 운석은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가 그 자식이랑...”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적어도 아직은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어요.”“그렇다면 저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겠죠?”하연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잔뜩 흥분한 듯한 운석과 눈을 마주했다.그러면서 오늘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렸다.“운석 씨, 정말 제가 운석 씨의 남은 평생을 맡길만한 상대가 확실해요?”“100퍼센트 확실해요.”운석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저 하연 씨를 원해요. 예전에는 눈이 삐어 한번 놓쳤지만, 저와 약혼한 상대가 하연 씨인 줄 알았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하연은 눈을 내리깔았다.솔직히 운석이 저에 대한 마음은 그저 일시적인 것일 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단호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에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철저히 단념시킬 수밖에 없었다.“운석 씨, DS 그룹에서 나가요. 운석 씨처럼 능력 있는 사람은 더 큰 무대에 있어야 해요. NW그룹으로 돌아가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예요.”“지금 저 내쫓는 거예요?운석은 뭔가 알아차린 듯 되물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운석 씨가 여기 있는 거 너무 아까워서요.”“저는 상관없어요. 하연 씨 곁에만 남이 있을 수 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요.”하연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저는 운석 씨가 본인의 행복을 찾을 거라고 믿어요.”그 말에 운석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운석의 눈은 이미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그 뒤로 며칠 동안, 하연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패션쇼 준비 때문에 미루었던 일을 하느라 매일 야근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자 겨우 한숨 돌리게 되었다.토요일 이른 아침, 하연은 강영숙의 연락을 받았다.“하연아, 너 오늘 고택에 올 수 있어?”솔직히 하연도 조금은 망설여졌지만 강영숙의 말투에 섞인 기대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끝내 승낙했다.“당연하죠, 오늘 할머님 생신인데, 시간 맞춰 갈게요.”긍정적인 답변을 들은 강영숙을 얼굴에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으마.”전화를 끊은 하연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른 아침 창문으로 흘러든 햇살은 따뜻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임이 틀림없었다.하연은 금고에서 지난번 경매에서 낙찰받은 에메랄드 보석을 꺼내자마자 가정부 장순영을 불러왔다.“이모님, 이 선물 포장해 주세요.”“네, 아가씨.”장순영은 숙련된 동작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선물을 예쁘게 포장하였다.리본이 묶여 있는 선물 상자를 보며 하연은 싱긋 웃었다.“이모님 손재주가 참 좋으시네요.”“저를 너무 띄워주시네요. 그런데 오늘 어디 가세요?”하연은 오늘 운전할 차를 하나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한씨 고택에요.”그 대답에 장순영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한편 차고에서 흰색 마세라티를 고른 하연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홀연히 사라졌다.오늘 한씨 저택에는 알록달록한 등불과 장식들이 달려 있어 유난히 흥겨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강영숙의 생일은 한씨 가문의 중요한 생사인지라 커다란 저택 밖에 이른 아침부터 가종 외제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선물을 들고 방문한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거실 안.사람들은 모두 강영숙 주변에 모여
그것도 능력 있고 훌륭한 아들.그에 반해, 고민정은 평생 딸 하나뿐이니 당연히 이수애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마저 두 사람 사이에는 스파크가 튀었다.“내가 우리 유진이 짝 찾아주는 게 뭐 어쨌다고 그래? 동성한테 피해라도 줬어? 그러고 보니, 서준이가 서영이 A국으로 쫓아냈다며? 그 일에나 신경 쓸 것이지.”고민정이 그 말을 꺼낸 순간 이수애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그도 그럴 게, 이 일만 생각하면 이수애는 가슴이 바늘에 찔리는 듯 아팠다.“그저 당분간만 그곳에 있는 거거든요? 조만간 돌아올 거예요.”자존심을 굽히지 못하고 되받아치던 이수애는 말하면 말할수록 자신감이 사라져 결국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싸움에서 이긴 고민정은 기세등등해서 다시 강영숙의 팔짱을 꼈다.“어머님,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봐주세요. FL그룹 대표 부상혁이 그렇게 인물도 훤칠하고 능력도 뛰어나대요. 고작 몇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쓰러져가는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울만큼 대단하다네요...”“됐다.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하자.”결국 참다 못한 강영숙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고민정은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네, 그래요.”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시선을 제 딸 유진에게로 돌렸다.“유진아, 이 총각 좀 봐봐. 부상혁이라고, 네 이상형에 딱 맞는 스타일이야.”정작 당사자인 유진은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 한참 뒤, 서준을 본 순간 어두웠던 유진의 눈은 반짝 빛났다.“엄마, 저 잠깐 갔다 올게요.”이윽고 유진은 빠른 걸음으로 서준에게 다가갔다.“서준아.”서준은 저에게 다가온 상대를 확인하자 얼른 인사했다.“유진 누나, 왔어?”유진은 서준의 사촌 누나이지만 나이는 고작 2달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때문에 유진은 서준을 항상 동갑내기라고 여겨왔다.그런데 그런 상대에게 누나라는 호칭을 듣자 유진은 입을 삐죽거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몇 번을 말해?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
서준의 반응에 태현은 참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전에 하연 씨한테 온갖 트집을 잡고, 하연 씨를 두고 바람피울 때는 그런생각 한 번도 안 했으면서, 고작 몇 마디 했다고 이런다고? 한서준, 너 너무 뒷북치는 거 아니야?”“너 오늘 말 많다?”대놓고 동문서답을 하는 서준의 모습에 태현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해 얼른 서준의 어깨를 감쌌다.“이봐, 친구. 너 설마 누구 기다리는 거야?”태현이 말한 사람은 당연히 하연이다.하지만 이번에도 서준은 직접적인 대답은 내놓지 않았다.“아주 한가하지?”“에이, 한가하다니.”태현은 다급히 부정했다.“그냥 조금 궁금해서 그러지. 그런데 충고 한마디만 할게. 지금이라도 네 마음 알았으면 하연 씨한테 진심을 보여줘. 전에 잘못한 건 인정하고, 때리면 맞고 잘못하면 고쳐야지.”태현은 웃음기 가득 머금은 눈으로 서준을 바라봤다.“아무튼, 하연 씨한테 잘해.”그 말에 서준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그런 것까지 가르칠 필요는 없거든.”그렇게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흰색 마세라티가 눈에 띄자 태현은 휘파람을 불며 서준을 툭툭 건드렸다.“야, 왔어.”곧이어 주차를 마친 하연이 선물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오늘 한씨 고택에 방문한 손님들은 대부분 한씨 집안 친척들이기에 하연과 서준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특히 두 사람의 이혼은 B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기에, 하연이 나타난 순간 사람들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 채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최하연이 여긴 어떻게 왔대?”“두 사람 이혼한 거 아니었어? 설마 재결합했나?”“최하연이 최씨 가문 아가씨인 게 밝혀졌잖아. 최씨 가문이 어떤 가문이야, 한씨 가문도 최씨 가문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고. 한서주은 대체 전생에 무슨 공을 세웠길래 최하연과 결혼했지?”“...”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지만 하연은 개의치 않았다. 몸에 딱 달라붙는 긴 드레스는 하연의 늘씬한 몸매를 더욱 잘 부각했고, 높은 하이힐을 신은 덕에 분위기마저 모든 사람을 압도했다.
“그런데 하연아, 지금은 네가 DS 그룹 대표라며? 정말 대단하네. 네 고모부가 얼마 전에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바람에 지금 일자리를 찾지 못했거든. 그러니까 DS 그룹에서 자리 좀 마련해주면 안 될까?”하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대답할 가치가 없어 침묵을 지켰더니 한설매는 오히려 더 무리한 부탁을 해왔다.“사실 고모부가 예전 회사에서 팀장이었거든. 그러니까 DS 그룹에 가면 사장직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영숙은 기가 차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때, 침묵을 유지하던 하연이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왜 한씨 집안 사라들한테 부탁하지 않으세요? HT 그룹 같은 큰 회사에서 일자리 하나 마련하는 건 큰일도 아닐 텐데. 저희 회사 같은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귀한 분을 모시겠어요.”거침없는 하연의 말에 한설매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하연의 말은 하필 한설매의 아픈 곳을 콕콕 건드렸다. 애초에 HT 그룹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하연에게 머리를 숙이며 부탁할 일 같은 건 없었을 테니까.이건 다 남편이 못나 능력도 없는 바람에 서준에게 이미 퇴짜 맞은 탓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한설매는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최하연! 네가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아? 일자리 좀 소개해 달라고 한 거 가지고 잘난 척은, 그러니까 서준이한테 이혼이나 당하지.”“한설매!”강영숙은 끝내 참지 못하고 어두운 얼굴로 한설매를 호통쳤다.순간 막내딸이라고 오냐오냐 키웠던 것마저 후회되었다.“그 입 다물어.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강영숙에게 꾸중을 들은 한설매는 바로 불만을 표했다.“엄마! 제가 뭘 어쨌다고! 도움 좀 청한 거잖아요. 한 가족끼리 돕고 사는 게 뭐 어때서요.”“어쩜 이렇게 뻔뻔해?”강영숙의 말에 얼굴이 잿빛이 된 한설매는 콧방귀를 뀌고는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나갔다.그제야 강영숙은 하연에게 다급히 사과했다.“하연아, 설매 말은 마음 쓰지 마.”“전 괜찮아요.”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하지만 하연이 하루아침에 갑부의 손녀가 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연의 환심을 사려고 먼저 다가가 아부하고 있다.이 모습을 보니 유진은 배알이 꼬였다.“작은고모, 혹시 한서영이 왜 A국으로 쫓겨난 줄 아세요?”한설매는 결혼을 한 뒤 본가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서영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그저 A국으로 유학을 보냈다는 이수애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그런데 A국이 어떤 곳인가? 한씨 가문이 설사 망했다 할지라도 자식을 A국으로 유학 보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한설매는 내막을 모르기에 궁금한 듯 되물었다.“무슨 속사정이라도 있는 거야?”유진은 이내 사람들에게 둘러 싸인 하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이유라 할 게 있겠어요? 다 최하연 때문이죠.”“최하연? 최하연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유진은 하연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는 눈빛으로 한설매를 바라봤다.“전에 둘째 숙모와 한서영이 최하연을 어떻게 괴롭혔는지 잊었어요? 최하연은 그걸 복수하려고 때를 기다린 거예요. 그리고 하루아침에 한서영한테 그 본대를 보여줬잖아요. 서준이 직접 명령을 내렸대요. 남은 평생 한서영이 귀국하지 못하도록.”그 말을 들은 한설매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최하연이 그 정도로 뒤끝이 있다고?”돌이켜 보면 한설매도 하연을 남자 덕에 팔자 폈다고 종종 모욕했었다. 그러니 하연이 만약 그때 일을 복수한다면 한설매는 분명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작은고모가 몰라서 그렇지 이번 일로 피해 본 사람 한서영뿐만이 아니에요. 둘째 숙모도 당했거든요.”“뭐? 둘째 언니는 그래도 최하연 시어머니였잖아, 게다가 어르신이고! 그런데 어떻게 감히! 이젠 위아래도 없다 이거야?”유진은 한참 부채질하다가 기회를 보더니 마지막 한마디를 투척했다.“두 사람 지금은 이혼했잖아요. 그러니 둘째 숙모도 이제는 시어머니가 아니죠. 그래서 저렇게 거리낄 게 없는 거고. 그러니 작은고모한테는 어떻게 대하겠어요.”그 순간, 한설매는 덜컥 겁이 났다.한설매가 결혼한
모든 사람이 하연의 주위에 모여들어 떠받드는 걸 보자 강영숙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거실 구석에 앉아 있는 이수애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이 사람들이 권세에 빌붙으려 한다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예전에 이수애가 잘나갈 때는 하나같이 그녀를 추켜세우며 빌붙으려 하던 사람들이니. 하지만 지금 그 태도가 180도로 변해 모두 하연에게 몰려들었다.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이수애는 딸 서영이 더 그리웠다.지금 서영은 A국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하연은 너무 잘나가고 있었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어머님, 최하연은 이제 우리 집 식구도 아닌데, 왜 초대했어요?”그 말에 강영숙은 이내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하연은 내가 초대한 손님이다. 내 손님에 네가 왜 토를 달지? 그럴 시간이 있으면 주방에서 일이나 좀 거들어라.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강영숙의 강경한 태도에 이수애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더니 곧장 뒤돌아 주방으로 걸어갔다.그제야 강영숙이 손을 뻗어 아픈 가슴께를 꾹꾹 눌렀다. ‘고질병이 또 도졌나 보네.’강영숙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리고 그때.“하연 씨.”유진이 사람들을 가로 지나 하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연은 그나마 유진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도 그럴 게, 서준의 사촌 누나인 유진은 다른 식구들처럼 하연을 괴롭힌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유진 언니.”“하연 씨, 너무 많이 변해서 몰라보겠네요.”유진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어오자 하연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언니야말로 점점 예뻐지네요.”그때 유진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을 보탰다.“방금 할머니가 몸이 편찮아 보이던데, 또 고질병이 도진 것 같아요.”강영숙이 편찮다는 말에 하연은 이내 걱정했다.“할머님은 괜찮으세요?”그 말에 유진은 주위를 빙 둘러보며 무심코 말했다.“어? 이상하다? 위층에 올라간 지 한참이 되는데 왜 안 돌아오셨지?”하연은 순간 걱정이 한층 더해졌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서로 대화하는 손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
송혜선은 태동이 불안해졌지만, 병원에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조봉규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돌아오자, 송혜선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아, 의사가 말했잖아. 임신 기간은 많이 지나서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고 지금처럼 자극을 받으면 쉽게 자궁 수축이 일어나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봉규의 말에 송혜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천천히 물었다. “그 사람... 아직 안 왔어?”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당연히 부동건을 뜻했다. 조봉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송혜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에 남준이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 때문이야.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손을 천천히 배 위로 가져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동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 너머로 송혜선이 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걸음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송혜선은 몸을 돌려 등을 돌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은 다급해지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봐.” 옆에 있던 조봉규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부동건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자극?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순간, 송혜선은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부동건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자 송혜선은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뭐긴 뭐겠어요! 내가 다 들었어요. 이사회에
떠나기 전, 부동건은 마지막으로 남준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비록 너를 본사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지사의 전망은 여전히 밝다. 남준아, 이 기회를 잘 살려 내가 기울인 정성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이사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떠났다. 순식간에 넓은 회의실에는 상혁과 남준 단둘만 남게 되었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준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이겼네요, 형님.”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결국 그렇게 말할 거면서 원래부터 누구의 것이었는지, 오늘로 분명해졌을 뿐이다.” 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대꾸했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승패는 병가상사일 뿐, 그저 순간의 결과에 불과하겠지요.” 상혁은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동남아 시장은 기회의 땅이지. 남준아, 이 기회를 잘 활용해라. 너의 전임자였던 정규인의 사례처럼 성급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상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참, 깜빡할 뻔했네. 정규인의 사건이 곧 재판에 들어간다고 하더라.” 남준의 얼굴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빨리?’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남준은 곧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꿰뚫은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규인의 입은 아직 단단히 닫혀 있지. 지금까지는 별다른 중요한 정보는 불지 않았다고 하던데. 하지만...” “하지만 뭐 말입니까?” 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형님, 말씀은 끝까지 하셔야죠.” 상혁은 몇 걸음을 걸어 남준의 바로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고경수는 제법 많은 걸 실토했다고 하던데. 정규인은 거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 거야. 게다가 정규인의 아내가 뭔가 중요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하고... 그게 네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