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하연의 주위에 모여들어 떠받드는 걸 보자 강영숙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거실 구석에 앉아 있는 이수애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이 사람들이 권세에 빌붙으려 한다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예전에 이수애가 잘나갈 때는 하나같이 그녀를 추켜세우며 빌붙으려 하던 사람들이니. 하지만 지금 그 태도가 180도로 변해 모두 하연에게 몰려들었다.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이수애는 딸 서영이 더 그리웠다.지금 서영은 A국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하연은 너무 잘나가고 있었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어머님, 최하연은 이제 우리 집 식구도 아닌데, 왜 초대했어요?”그 말에 강영숙은 이내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하연은 내가 초대한 손님이다. 내 손님에 네가 왜 토를 달지? 그럴 시간이 있으면 주방에서 일이나 좀 거들어라.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강영숙의 강경한 태도에 이수애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더니 곧장 뒤돌아 주방으로 걸어갔다.그제야 강영숙이 손을 뻗어 아픈 가슴께를 꾹꾹 눌렀다. ‘고질병이 또 도졌나 보네.’강영숙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리고 그때.“하연 씨.”유진이 사람들을 가로 지나 하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연은 그나마 유진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도 그럴 게, 서준의 사촌 누나인 유진은 다른 식구들처럼 하연을 괴롭힌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유진 언니.”“하연 씨, 너무 많이 변해서 몰라보겠네요.”유진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어오자 하연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언니야말로 점점 예뻐지네요.”그때 유진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을 보탰다.“방금 할머니가 몸이 편찮아 보이던데, 또 고질병이 도진 것 같아요.”강영숙이 편찮다는 말에 하연은 이내 걱정했다.“할머님은 괜찮으세요?”그 말에 유진은 주위를 빙 둘러보며 무심코 말했다.“어? 이상하다? 위층에 올라간 지 한참이 되는데 왜 안 돌아오셨지?”하연은 순간 걱정이 한층 더해졌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서로 대화하는 손
“지금 여기서 뭐 해?”문 앞에 서 있는 서준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심지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하연의 손을 확 낚아챘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연은 서준에게 끌려 방을 나섰다.“방금 그거 뭐야?”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 하연의 질문에 서준은 눈살을 찌푸릴 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뭘 봤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하연의 의심은 더해져만 갔다.심지어 이곳에 남모를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건 너무 이상하잖아.”하연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방금 본 걸 떠올리더니 결국 서준을 보며 물었다.“왜 서준 씨 흑백 사진이 벽에 걸려 있어? 뭐 귀신이라도 돼?”그 말에 서준은 버럭 화냈다.“헛소리하지 마. 잘못 본 거야.”“전말?”재차 질문하던 하연은 그제야 서준이 제 손목을 잡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이내 손을 뿌리쳤다.“생일 연회 이제 곧 시작해. 내려가자.”서준은 텅 빈 손을 바라보며 인내심 있게 말했다.하연은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내 본인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결론 지었다.‘한서준이 내 앞에 이렇게 있잖아. 그러니 그럴 리 없어.’“할머님은 어떠셔? 괜찮아?”“뭐라고?”“할머님이 편찮으시다고 해서 올라와 본 거야.”서준은 방금 전 상황을 설명하는 하연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할머니는 괜찮아. 다음에 다시는 여기 오지 마.”“응.”하연은 눈을 내길 깔고 짤막하게 대답했다.두 사람이 앞뒤로 나란히 서서 계단 입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정체 모를 물건이 하연을 향해 날아왔다.“조심해.”무의식적으로 반응한 서준은 하연의 팔을 잡아당기며 제 몸으로 무거운 물건을 막아냈다.그리고 다음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물건이 서준의 등에 떨어지더니 옷이 얼룩덜룩한 물감으로 완전히 뒤덮여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렸다.주위의 시선은 순간 서준에게 모였다. 다들 의아한 눈빛으로 처참한 몰골의 서준을 바라봤다.
“난 최하연만 있으면 돼.”그 말에 하연은 화가 치밀었다.“그건 안 될 것 같은데.”하연의 거절에 서준의 표정을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하연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은 유진을 따라 자리를 피했다.두 사람이 떠나자 강영숙이 얼른 다가와 하연을 걱정했다.“하연아, 괜찮니?”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몸은 괜찮으세요?”“나는 괜찮다. 늘 있는 일이라.”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설매가 7살 정도 되는 남자애의 귀를 잡아당기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 아이의 옷 역시 얼룩덜룩한 물감이 묻었고, 손에 붓 두개를 든 채 눈물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네가 한 짓 똑똑히 봐!”남자애는 꾸중을 듣자 지붕이 떠나갈 것처럼 엉엉 울었다.그걸 본 강영숙이 언짢은 표정으로 호통쳤다.“그만 해라. 창피한줄도 모르고.”이건 분명 하연을 겨냥했던 일인데, 왜 서준이 엉망이 되었는지 한설매는 의문이었다.심지어 서준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제 아들을 혼낼지도 모르기에 먼저 나서서 사과했다.“엄마, 죄송해요. 애가 철이 없어서 서준을 저렇게 만들 줄 누가 알았겠어요. 너그러이 용서해 줘요. 내가 이미 심하게 혼쭐냈으니.”어두운 표정의 강영숙은 한설매를 무시하며 하연을 제 쪽으로 끌어왔다.“가자, 하연아.”그 시각, 하연의 눈은 어두워졌다.심지어 마음속 한구석이 왠지 자꾸만 불안했다.한편, 방에 도착한 유진이 하인들을 쫓아내는 바람에 서준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유진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걸 모르는 서준은 곧바로 외투를 벗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하연이 그에게 달려들었다.“서준아, 내가 도와줄게.”유진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심지어 동작도 어찌나 빠른지 서준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외투를 벗겼다.이에 서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봤다.“누나도 그만 나가 봐.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서준이 거절 의사를 밝혔
유진은 도망치듯 저에게서 멀어지는 서준을 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그제야 정신이 든 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주먹을 그러쥐었다.거절당했다는 분노를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낸 유진은 방금 전 계단 입구에서 하연을 감싸주던 서준의 모습을 떠올렸다.‘이미 이혼한 거 아니었어? 왜 아직도 애매하게 구는 건데?’유진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매서운 빛이 언뜻 지나갔다....샤워를 하고 옷을 새로 갈아입은 서준은 거실에 도착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하연을 찾았지만, 하연의 그림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그때 서준을 발견한 강영숙이 낮은 한숨을 쉬며 귀띔했다.“하연은 이미 떠났어.”그 말에 살짝 놀란 서준은 원망하는 투로 되물었다.“왜 붙잡지 않았어요?”“너 이 할미한테 솔직히 말해 봐. 대체 뭐하고 싶어?”강영숙의 말투는 매우 퉁명스러웠다.“여자도 아직 해결하지 않았으면서. 내 기억이 맞는다면, 네가 바람피워 그 계집 임신까지 시켰잖아.”지난 일을 언급하자 서준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강영숙은 평소에 서준을 아끼지만 이 일에서만큼은 서준을 지지할 수 없었다.“한번 배신하면 그 고통은 영원해. 하연이 너를 용서하면 남은 평생 후회하며 잘해줘야 할 거지만, 만약 하연이 이 일을 놓지 못한다면 절대 강요하지 마라. 두 사람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뜻일 테니.”서준은 강영숙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심지어 연회장에 남아 있을 기분이 사라져 곧장 제 방으로 돌아갔다.잠시 뒤, 서준의 방 베란다는 연기가 자욱했고, 바닥에는 온통 담배꽁초가 널렸다.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서준은 끝내 핸드폰을 꺼내 해외로 전화했다.“내가 조사하라던 건 어떻게 됐어?”상대방이 뭐라 말했는지 서준은 곧장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꺼버렸다.“알았어. 내가 바로 갈게.”이윽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그날 바로 해외로 떠났다....한씨 고택을 나온 하연은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는 대신 브랜드 디자이너 브랜드숍으로 향했다.한동안 오지 않았는데, 이곳의 장사는 여
“참, 네가 오니까 갑자기 생각났는데.”예나가 갑자기 하연의 생각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전에 어떤 고객님이 너를 콕 집어서 드레스 디자인해달라고 하더라고.”“무슨 디자인인데?”예나는 얼른 카운터에 보관하고 있던 고객 리스트를 하연에게 건넸다.“가격을 6억이나 제시했어. 시간도 빠듯한 게 아니고. 반년 내로 네가 시간 날 때 언제든 만들어만 주면 된다던데.”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리스트를 건네받았다.리스트에는 고객의 상세한 정보 대신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다.“뭐야? 신비주의 컨셉이래? 드레스에 대한 요구는 없고?”“말 안 하던데? 네가 시간 날 때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대. 받을 거야?”하연은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받아야지. 안 받을 이유가 없잖아. 우리 가게에 들어온 큰 주문인데. 이건 나한테 맡겨, 회사 일만 처리하면 내가 직접 연락할게.”“그래, 나야 당연히 네 의견에 찬성이지.”...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월요일.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한 하연은 공교롭게도 1층 로비에서 운석과 마주쳤다. 운석은 슈트 차림에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연을 본 순간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하이, 여신님!”싱글벙글 웃으며 하연에게 인사하는 운석의 모습은 다정한 미남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매너를 지키려는 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하연 씨도 회의에 참석하러 왔어요?”“네.”그 말에 운석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관계에 따르면 DS 그룹은 매주 월요일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는데, 하연은 지금껏 거의 참석한 적이 없다. 때문에 하연이 참석하는 게 의외라고 느껴졌다.“오늘 회의에서 주로 D시 프로젝트에 관해 다루잖아요. 아마 최종 예산안을 확정하고 내일 바로 입찰 진행할 거예요.”하연은 운석의 업무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운석은 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니까.하지만 이번 입찰이 중요한 건이다 끝내 보니 참지 못 하고
나운석의 프로젝트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회의가 끝난 뒤 하연은 먼저 회의실에 나왔고, 태훈이 그녀와 약 반 발짝 떨어진 거리를 우유지하며 업무를 보고했다.그러다 두 사람이 이제 막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하연 씨!”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더니 유진이 웃는 얼굴로 하연에게 걸어왔다.유진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하연은 놀랍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게, 서준과 이혼하고 난 뒤 한씨 집안 식구들과는 깨끗하게 관계를 정리하여 친척들과는 한 번도 왕래한 적이 없다.‘여기는 갑자기 왜 왔지?’하연은 의문이 앞섰지만 예의를 지키며 인사했다.“유진 언니,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그 말에 유진이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건넸다.“할머니가 나한테 삼계탕 심부름시키더라고. 하연 씨 가져다주라고.”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류를 덮어 이내 태훈에게 건넸다.“방금 말한 대로 진행해.”“네, 사장님.”태훈이 떠나자 하연은 그제야 시선을 유진에게 옮겼다.“들어와서 앉아요.”유진은 하연의 초대에 응하고는 이내 그녀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솔직히 유진은 180도로 변한 하연의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예전에는 항상 저자세로 순종적인 모습만 보였었는데, DS 그룹 대표가 된 지금은 오히려 유진을 누르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하연에게 압도당한다는 느낌은 전에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데 말이다.“하연 씨, 참 많이 변했네요.”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유진은 감탄했다.“아니에요, 일할 때만 이래요.”하연은 겸손하게 대답했다.“앉아요.”소파에 앉은 유진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하연에게 건넸다.“먹어 봐요. 할머니가 특별히 부탁한 거니까.”이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감 느껴지는 말투로 대답했다.“할머님께 고맙다고 전해줘요. 이렇게까지 마음 쓰실 줄 몰랐는데.”그러자 유진은 싱긋 웃었다.“고맙긴요. 할머니한테 하연 씨는 친손녀나 다름없는데요. 서준과 이혼했어도, 그건 변함없어요.”하연은 그 말에 표정을 가다듬으며 아무
“하연 씨가 서준과 재결합하지 않아도 나한테는 영원한 동생이나 마찬가지예요.”유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무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하연은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티슈로 입을 닦고 나서야 대답했다.“들어와요.”그 말이 떨어지자 운석은 서류뭉치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다른 손님이 있는 걸 발견하자 사뭇 진지한 태도로 변했다.“최 사장님, 말씀하신 서류예요. 확인 부탁드립니다.”보기 드문 운석의 진지한 태도에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테이블 위에 올려 둬요.”“그래요.”하지만 그때, 운석을 본 유진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나운석, 네가 왜 여기 있어?”그 말에 운석 역시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봤다. 서준의 오랜 친구로서 운석은 당연히 유진을 알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유진에 관한 비밀도 알고 있다.하지만 유진을 본 운석은 그저 겉웃음만 지어 보였다.“나 DS 그룹에서 일해.”그 말에 유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NW그룹 후계자가 남의 밑에서, 그것도 DS 그룹에서 일을 하다니.유진은 더 묻고 싶었지만 운석은 그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하연을 보며 말했다.“최 사장님,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그래요.”운석이 떠나자 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심지어 은연중에 운석의 태도가 예전처럼 살갑지 않다는 것도 어느 정도 느꼈다.“유진 언니, 왜 그래요?”유진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묻자 유진은 다급히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마셨어요? 저 잠깐 설거지하러 갔다 올게요.”“아니에요. 제가 할게요.”하연은 그릇과 보온병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자 커다란 사무실 안에 일순 유진만 남게 되었다.그 틈에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운석이 방금 가져온 서류를 확인했다.그리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 눈에 흥분의 빛이 언뜻 지나갔다.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서류를 한 장 한 장 펼치며 사진을 찍어 대더니 하연이 돌아오기 전
“너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일이 아주 재미있어지지.”“...”전화를 끊은 유진은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짝였다.하연의 회사에 와서 이런 수확을 얻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최하연, 내일 입찰 처참하게 실패하게 해줄게.’...유진이 떠난 뒤, 운석은 타이밍 맞게 하연의 사무실에 들어왔다.이윽고 평소의 건들거니는 모습을 모두 감추고 사뭇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한유진은 여기 왜 왔어요?”하연은 눈을 들어 운석을 힐끗 보더니 농담하듯 말했다.“유진 언니한테 관심 있나 봐요?”“관심? 한유진한테 그럴 가치가 있기나 해요?”운석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하더니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 한유진 진짜 무서운 사람이에요. 조심해요.”이윽고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힐끗거렸다.“이번 D시 프로젝트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래서 모두 따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거고. 한유진이 뭔가 수작을 부릴까 봐 걱정이에요.”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연마저 운석의 말에 일순 엄숙해졌다.‘하긴 오늘 타이밍이 너무 기막히긴 했어.’잠깐 사색에 잠겨 있던 하연은 운석과 눈을 마주치더니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구석진 곳에 있는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뭘 했는지는 확인해 보면 되죠.”“...”다음 날 아침.하연의 집 앞에 주차된 빨간색 페라리 안에서, 운석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하연을 기다렸다.그로부터 약 반 시간 뒤, 흰 양복 차림의 하연이 나타나자 운석은 눈을 반짝이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차에서 내린 운석은 몸을 차에 반쯤 기댄 채로 하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하연 씨, 좋은 아침이에요.”운석을 본 순간 하연의 눈에는 의아한 기색이 드리웠다.“여긴 어떻게 왔어요?”“당연히 하연 씨 기사님이 되어주려고 직접 왔죠. 여신님, 차에 오르시죠.”운석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차 문을 열어주더니 안으로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불길한 예감이 부동건의 마음 한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는 조진숙을 매섭게 응시하며, 진실을 쫓아가려 했다.“빚은 갚아야 하고, 사람을 죽였으면 그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지. 이번엔, 저승사자라도 그 애를 못 구해.”조진숙은 단도직입적으로 진실을 꺼내놓았다.“당신이 그 귀하디귀한 막내아들이, 고경수 딸을 죽였어. 그 교통사고, 전부 부남준이 계획한 일이야.”“지금은 모든 증거가 경찰 손에 들어갔고, 고경수 집안도 전부 알아버렸어. 딸을 먼저 보낸 부모가, 가만히 있겠어? 반드시 그 애한테서 정의의 심판을 받아내겠지.”부동건의 몸이 비틀거렸다.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충격이 가득했다.“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남준에 대한 부동건의 인식은 그저 ‘야망이 좀 있는 아들’일 뿐이었다. 부동건이 동남아시아 사업권을 남준에게 통째로 넘겨준 것도, 송혜선과 남준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해주려 했던 것도, 다 막내아들을 위해서였다. ‘내가 뭘 놓친 거지? 어떻게 그런 짓을...?’“그뿐만이 아냐. 약혼식 당일에 하연이를 납치했다는 사실도 몰랐지? 상혁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으면, 최씨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망신당했을지 그건 알고 있어?”조진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동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이건... 너무 심각해.’ 그 어떤 상황도 예측하지 못했던 부동건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미친 자식...!”부동건은 책상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흔들리는 가슴과 거칠어진 숨결은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하지만 조진숙은 그런 전남편을 보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형사사건이야. 증거도 확실하고, 죄도 여러 개. 법대로라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당신의 막내아들 부남준이가 어떤 판결을 받게 될지...”부동건은 몇 걸음 뒷걸음치더니,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굴엔 절망과 피로가 교차하고 있었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