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일이 아주 재미있어지지.”“...”전화를 끊은 유진은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짝였다.하연의 회사에 와서 이런 수확을 얻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최하연, 내일 입찰 처참하게 실패하게 해줄게.’...유진이 떠난 뒤, 운석은 타이밍 맞게 하연의 사무실에 들어왔다.이윽고 평소의 건들거니는 모습을 모두 감추고 사뭇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한유진은 여기 왜 왔어요?”하연은 눈을 들어 운석을 힐끗 보더니 농담하듯 말했다.“유진 언니한테 관심 있나 봐요?”“관심? 한유진한테 그럴 가치가 있기나 해요?”운석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하더니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 한유진 진짜 무서운 사람이에요. 조심해요.”이윽고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힐끗거렸다.“이번 D시 프로젝트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래서 모두 따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거고. 한유진이 뭔가 수작을 부릴까 봐 걱정이에요.”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연마저 운석의 말에 일순 엄숙해졌다.‘하긴 오늘 타이밍이 너무 기막히긴 했어.’잠깐 사색에 잠겨 있던 하연은 운석과 눈을 마주치더니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구석진 곳에 있는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뭘 했는지는 확인해 보면 되죠.”“...”다음 날 아침.하연의 집 앞에 주차된 빨간색 페라리 안에서, 운석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하연을 기다렸다.그로부터 약 반 시간 뒤, 흰 양복 차림의 하연이 나타나자 운석은 눈을 반짝이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차에서 내린 운석은 몸을 차에 반쯤 기댄 채로 하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하연 씨, 좋은 아침이에요.”운석을 본 순간 하연의 눈에는 의아한 기색이 드리웠다.“여긴 어떻게 왔어요?”“당연히 하연 씨 기사님이 되어주려고 직접 왔죠. 여신님, 차에 오르시죠.”운석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차 문을 열어주더니 안으로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하연은 싱긋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반갑습니다, 하 대표님.”“최 사장님 같은 젊은 인재가 회사를 이끈 덕에 요즘 DS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던데요.”“과찬입니다.”“최 사장님도 D시 프로젝트 입찰 건 때문에 오신 겁니까? 그럼 어디 한번 제대로 겨뤄봅시다.”“그래요, 각자 실력으로 경쟁합시다.”그때, 하영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사실 저희 그룹은 어제 이 프로젝트를 포기할까 했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꿨거든요.”그 말에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던 운석이 입을 열었다.“아주 자신만만하신가 봅니다?”하경윤은 너털웃음을 지었다.“그런 말은 아직 이르죠.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 아직 모르는 일인데.”“그럼 기대하겠습니다.”운석은 분명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심지어 하경윤에게 적개심을 느끼고 있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그럼 이따 봅시다.”그때, 하경윤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더니 인사를 남기고 거들먹거리며 떠나갔다.“제 추측이 맞다면 하 대표가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라이벌이죠?”덤덤하게 본질을 꿰뚫은 하연을 보며 운석은 감탄했다.“역시 여신님.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또 빈말 하네요. 좀 진지해져 봐요.”“사실인데.”1초 전만 해도 장난기를 띠고 있던 운석은 하경윤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다.“이미 성공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저 태도 좀 봐요. 오늘 저 자식이 원하는 대로 되면 꼬리가 아마 하늘을 찌를 거예요.”“그건 모르는 일이죠. 높은 곳에 있을수록 더 비참하게 떨어지는 법이니까.”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주최자가 배정한 자리에 앉았다.하지만 구석진 곳에서 유진이 저들을 보고 있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때, 하경윤이 유진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어때? 입찰서 바쳤어?”유진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걱정 말아요. 그런 간단한 일은 진작했으니까.”이에
이곳에서 하연과 마주칠 줄 몰랐던 유진은 깜짝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한 짓 때문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처음에는 눈을 피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인사를 건넸다.“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혹시 하연 씨도 입찰하러 온 거예요?”하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회사에서 진행하는 새 프로젝트 때문에 와본 거예요. 그런데 유진 언니는 언제부터 HS 그룹에서 일한 거예요?”하연이 이런 것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유진은 흠칫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설마 내가 데이터 훔친 거 아는 건 아니겠지?’유진은 긴장한 나머지 옷자락을 꽉 그러쥐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한참 됐어요. 하연 씨가 몰랐을 뿐이지.”“아.”하연은 무심결에 대답하며 거울 속에 비친 자기를 바라봤다.“D시 프로젝트 참 괜찮아요. 원유와 광업 모두 포함했으니 따내기만 하면 앞으로 5년 동안 회사 이익은 보장될 거거든요.”그 말을 듣자 유진은 이내 속으로 뿌듯해했다.“그래요? 뭐 마진이 크니까 입찰 성공하면 5년 동안 실적 걱정은 없겠네요.””네. 그래서 이 프로젝트 따네려고 직원들한테 그렇게 신경 쓰라고 신신당부했거든요.”하연은 한참 동안 말하다가 일부러 뜸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오늘도 따라올 생각은 없었는데, 직원이 실수하는 바람에 데이터를 수정했거든요. 그래서 지켜보려고 따라왔어요.”그 말에 유진의 기분은 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심지어 믿기지 않았는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데이터에 실수가 있었다고요?”하연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제 오후에 발견해서 수정했거든요. 그 덕분에 큰 손실을 면했지, 원래 데이터로 입찰했다면 입찰에 성공해도 손해 보거든요.”그 말을 들은 순간 유진은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그럼 데이터를 고쳤어요?”“네, 계산이 잘못됐으니까 수정했죠.”하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하지만 그 확답을 들은 유진은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다급히 화장실을 빠져나갔다.당황한 유진의 뒷모습을
유진은 하경진의 기세에 눌려 숨소리조차 마음껏 내지 못했다.곧이어 두 사람이 회의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입찰은 이미 시작되었다.“자, 이제 우리의 0781호 프로젝트 입찰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입찰에 참여한 기업으로는 HT 그룹, DS 그룹, HS 그룹, LT 그룹입니다...”한참 동안 멘트를 하던 사회자는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넘기며 끝내 마지막 결과를 발표했다.“이번 프로젝트를 따낸 기업은 DS 그룹입니다. 축하합니다...”사회자의 말이 떨어지자 하연과 운석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순간 현장에는 우레외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입찰이 끝난 뒤, 하경윤은 다급히 거래처에 전화를 걸었다.“이 대표님, 이번 입찰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합작 건은 무효화할 수 있을까요?”“네? 위약금이 100억이라고요? 이 대표님, 다시 한번 상의해 볼 수 있을까요?”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전화를 끊은 하경윤은 아예 폭주했다.“빌어먹을! 개자식!”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유진은 겁에 질려 숨을 죽였지만 하경윤은 이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한유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좀 봐!”분노 가득한 목소리에 유진은 몸을 떨며 끊임없이 설명했다.“대표님, 이건 제 탓이 아니에요. 다 최하연 짓이에요! 그년이 저한테 엿 먹인 거라고요. 그러니까 탓하려겨든 최하연을 탓하세요. 아!”“지금 책임 전가하는 거야? 한유진, 너 때문에 회사에서 자그마치 100억을 손해 봤어. 적어도 80프로는 네 책임이니 그 돈 마련하지 않으면 내가 네 가죽을 벗길 줄 알아!”하경윤은 악에 받쳐 소리치더니 유진을 확 밀쳐버렸다. 그 때문에 중심을 잃고 한참 동안 비틀거리던 유진은 넋을 잃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100억? 나한테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대표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대표님!”유진이 아무리 목 놓아 불러도 하경윤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유유히 떠나갔다.하경윤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하지만 유진이 덮치려는 찰나, 하연은 교묘하게 유진을 피해버렸다.“회사 기밀 빼돌리면 처벌받는 거 알죠? 내가 이 사진 경찰에 넘기면 어떨 것 같아요?”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하연을 바라봤다. 그러다 불신이 점점 당황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뭔가를 인식하고 사색이 된 채 애원하기 시작했다.“최하연, 제발. 제발 그러지 마.”만약 하연이 이 영상을 경찰에 넘기면 유진의 인생은 이대로 망한다.회사 기밀을 빼돌리는 건 절대로 경범죄로 치부할 수 없다. 심지어 그 금액에 따라 평생 콩밥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최하연, 하연 씨, 제발요. 그거 경찰서에 넘기지 마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유진은 하연이 저를 용서하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애원했다.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석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아냥거렸다.“그러게 감당도 못 할 일을 왜 저질러? 이번이 처음 아닌 것 같던데.”유진은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어 황급히 하연의 팔을 잡고 저자세로 애원했다.“하연 씨 착한 사람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앞으로 하연 씨 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줄게요. 그 영상 파기만 해주면 뭐든 다 할 게요. 네?”하지만 유진의 애원에도 하연은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봤다.“한유진 씨,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여요?”유진은 마구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럴 리가요. 하연 씨, 내가 아니면 적도 한씨 가문 체면을 봐서라도, 한서준 체면을 봐서 용서해 줘요. 네?”하연은 너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한씨 가문? 한서준? 내가 왜 그들 체면을 봐줘야 하는데요?”“하연 씨 서준이랑 재결합하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유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그 말에 하연은 피식 웃었다.“지금껏 들어본 소리 중에서 제일 웃겼어요.”이윽고 잠깐 뜸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한유진 씨,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요. 사흘 내로 자수해요. 자수하지 않으면 내가 이 영상을 경찰서에 보낼 거예요. 그
최하민이 B시에 오는 건 아주 드문 일인데 오늘 인사도 없이 온 거라 하연은 놀란 듯 물었다.“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하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서류를 건네주었다.“이거 봐 봐. 한서준이 제출한 보석에 관한 자료와 민혜경의 감형에 관한 자료야. 민혜경을 감옥에서 빼내겠다는 목적이 아주 명확하더라고.”이 소식은 너무 갑작스러웠다.전에는 이런 낌새조차 없었는데 말이다.하연의 눈빛은 순간 차가워지더니 말없이 서류를 펼쳐봤다.“참 눈물겨운 사랑이네. 그새를 못 참고 자기 애인을 빼내려 하다니.”“민혜경이 그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 이렇게 쉽게 빼내도록 놔둘 수 없지.”한민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미리 손써 뒀어. 그런데 한서준의 태도도 완강해. 민혜경을 빼내려고 무척 애쓰는 것 같더라.”그러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그런데 나는 네 태도를 알고 싶어.”“한서준의 일은 나와는 상관없어요.”간단한 한마디로 서준과의 선을 긋는 하연을 보자 하민은 마음이 놓이는 듯 말했다.“이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죄를 지은 사람을 빼내려면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네.”하민이라면 하연도 100퍼센트 마음 놓을 수 있었다.말을 마친 하민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명령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머리를 돌렸다.“하연아, 너 요즘 나씨 집안 그 자식과 가까이 지내던데, 혹시...”“오빠.”하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연이 끼어들었다.“나씨 가문과 약속했던 결혼은 양가 부모님이 결정한 일이지 제 의견은 없었어요. 게다가 이제 약혼도 무산됐잖아요. 저와 운석 씨는 그저 친구예요.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하연의 말에 하민이 피식 웃었다.“정말 고작 친구라고? 나운석이 DS 그룹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이번에는 D시 프로젝트까지 따냈다던데, 그거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어?”“오빠,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그럼 부상혁
“하연아, 한번 실패했다고 자신을 부정하지 마. 넌 가장 좋은 걸 가질 자격이 있어.”그 말에 하연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따뜻해졌다.“알았어요. 오빠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하민은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빠한테까지 뭐 그런 말을 해? 감정은 본인이 가장 잘 알아. 그걸 똑바로 마주해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아.”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늘 하민이 유독 말이 많다는 게 느껴져 의아할 따름이었다.“오빠, 그런데 무슨 일로 오늘 이런 가십에 관심이 이렇게 많아요?”“그랬나? 나는 너를 관심하는 건데? 너한테 중차대한 문제인데 소홀히 할 수 없지. 이미 한번 당했으니 교훈을 얻어야 하기도 하고. 같은 곳에서 두 번 넘어질 수는 없잖아. 상대가 한서준만 아니면 네가 누구를 선택하든 가족 모두가 너를 지지할 거야.”하민의 태도는 최씨 집안 모든 사람의 태도이기도 하다.“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하연은 제 마음을 이미 훤히 알고 있는 듯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더니 한참 동안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 시각, DS 그룹.호현욱이 새로 산 옥 장식품을 갖고 놀 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누구지? 들어와.”곧이어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혁욱의 비서 정민호가 들어와 보고했다.“이사님, 우리 회사에서 D시 프로젝트를 따냈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호현욱은 손에 쥐고 놀던 옥을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러고 나서야 수십억을 제 손으로 내던졌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눈빛이 어두워졌다. 솔직히 가슴에서 피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뭐라고? 프로젝트를 따내?”“네. 입찰 현장에서 전해 들은 소식입니다. 우리 회사가 따냈다더군요.”호현욱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하연이 이토록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D시 프로젝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핵심 사업의 규모가 크고, 주기가 길며 이윤까지 높다. 고작 이 프로젝트 하나만 해도 DS 그룹 이윤의 10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대로 가면 하연은 내기에서 이기게 될 거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 않은 이상 호현욱 역시 쉽게 포기할 수 없다.“급할 거 뭐 있어? 아직 반년이나 있잖아. 이번 프로젝트 마지막까지 성공하기 쉽지 않아. 프로젝트 하나 망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호현욱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 눈빛을 흐렸다. 비즈니스 업계에 수년간 발을 담근 그가 어린 계집에게 질 수는 없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운석 그 자식을 쫓아내야겠어.”“이사님,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호현욱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말해봐. 무슨 방법인데?”민호는 그 말에 이내 호현욱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호현욱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내 밑에서 몇 년 일하더니 많이 배웠네. 그럼 그대로 진행해.”“네, 이사님.”...저녁, 선샤인 바.하연은 운석을 위한 축하 파티를 열기 위해 회사의 동료들을 모두 불러 보아 현장은 매우 시끌벅적했다.“나 본부장님이 이번 D시 프로젝트를 따낸 걸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나 본부장님 축하해요.”“최 사장님 축하해요.”“자, 그럼 DS 그룹의 점점 더 나아지는 앞날을 위하여!”“...”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자 하연은 직원들이 편하게 놀지 못할까 봐 적당한 핑계를 대고 먼저 일어섰다.운석은 그런 하연이 걱정되어 발 빠르게 나섰다.“바래다줄게요.”“아니에요. 운석 씨 축하 파티인데 함께 놀아요. 저는 대리 부르면 되니까.”“그럼 문 앞까지 바래다줄게요.”결국 운석의 고집을 꺾지 못한 하연은 운석과 앞뒤로 나란히 서서 바를 나섰다.“얼른 들어가요. 대리 기사가 곧 도착한대요.”“아니에요. 차에 타는 것까지 보고 갈게요.”하연의 거절에 운석은 괜찮다는 듯 말했다.이번에도 운석의 고집을 꺾지 못한 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그 틈에 운석이 무심코 말을 꺼냈다.“제가 DS에 온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돼가네요. 시간 참 빨라요. 처음
“그러고 보니, 연지 씨가 부상혁 대표 곁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사실상 부 대표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던데... 그런데 지금은 부남준 상무를 위해 일하고 있네.”“내가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그렇게 부씨 가문의 두 형제 사이를 능숙하게 오갈 수 있는 거지?” 세븐이 입을 열자, 연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 말투와 어조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부상혁 대표는 원래 이런 말투로 말하지 않아.”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 끄시지.” 그리고 이어서 단호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이나 제대로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약점 보였다가 후회하지 말고.”그러나 세븐은 개의치 않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지 씨, 정말 부상혁 대표에 대해 꽤 잘 아는 것 같단 말이야?” “그건 당신이 궁금해할 필요 없고.” 연지는 냉랭하게 받아쳤다. 오늘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세븐은커녕 이 공간에 발 들이는 것조차 끔찍했을 것이다.“그리고 부남준 상무님이 하신 말씀 잊지 마. 본인이 할 일이나 제대로 해.” 세븐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살짝 올렸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지는 손목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곧 예식이 시작돼. 모든 건 계획대로 진행하면 돼.” “걱정 마. 발목 잡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대답은 나쁘지 않았다. “차 안에서 얌전히 있어. 내 연락 기다려.” 마지막으로 단단히 일러둔 후, 연지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호텔 안. 비록 약혼식이지만,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이들 모두 이를 굉장히 중시했다. 사소한 부분까지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로비의 장식만 봐도, 백 명이 넘는 직원들이 작년부터 준비해 온 결과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홀 중앙에는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대리석 바닥에 비친 금빛 패턴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관을 이루었다. 하객들은 이미 자리를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