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하연과 마주칠 줄 몰랐던 유진은 깜짝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한 짓 때문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처음에는 눈을 피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인사를 건넸다.“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혹시 하연 씨도 입찰하러 온 거예요?”하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회사에서 진행하는 새 프로젝트 때문에 와본 거예요. 그런데 유진 언니는 언제부터 HS 그룹에서 일한 거예요?”하연이 이런 것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유진은 흠칫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설마 내가 데이터 훔친 거 아는 건 아니겠지?’유진은 긴장한 나머지 옷자락을 꽉 그러쥐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한참 됐어요. 하연 씨가 몰랐을 뿐이지.”“아.”하연은 무심결에 대답하며 거울 속에 비친 자기를 바라봤다.“D시 프로젝트 참 괜찮아요. 원유와 광업 모두 포함했으니 따내기만 하면 앞으로 5년 동안 회사 이익은 보장될 거거든요.”그 말을 듣자 유진은 이내 속으로 뿌듯해했다.“그래요? 뭐 마진이 크니까 입찰 성공하면 5년 동안 실적 걱정은 없겠네요.””네. 그래서 이 프로젝트 따네려고 직원들한테 그렇게 신경 쓰라고 신신당부했거든요.”하연은 한참 동안 말하다가 일부러 뜸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오늘도 따라올 생각은 없었는데, 직원이 실수하는 바람에 데이터를 수정했거든요. 그래서 지켜보려고 따라왔어요.”그 말에 유진의 기분은 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심지어 믿기지 않았는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데이터에 실수가 있었다고요?”하연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제 오후에 발견해서 수정했거든요. 그 덕분에 큰 손실을 면했지, 원래 데이터로 입찰했다면 입찰에 성공해도 손해 보거든요.”그 말을 들은 순간 유진은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그럼 데이터를 고쳤어요?”“네, 계산이 잘못됐으니까 수정했죠.”하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하지만 그 확답을 들은 유진은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다급히 화장실을 빠져나갔다.당황한 유진의 뒷모습을
유진은 하경진의 기세에 눌려 숨소리조차 마음껏 내지 못했다.곧이어 두 사람이 회의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입찰은 이미 시작되었다.“자, 이제 우리의 0781호 프로젝트 입찰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입찰에 참여한 기업으로는 HT 그룹, DS 그룹, HS 그룹, LT 그룹입니다...”한참 동안 멘트를 하던 사회자는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넘기며 끝내 마지막 결과를 발표했다.“이번 프로젝트를 따낸 기업은 DS 그룹입니다. 축하합니다...”사회자의 말이 떨어지자 하연과 운석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순간 현장에는 우레외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입찰이 끝난 뒤, 하경윤은 다급히 거래처에 전화를 걸었다.“이 대표님, 이번 입찰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합작 건은 무효화할 수 있을까요?”“네? 위약금이 100억이라고요? 이 대표님, 다시 한번 상의해 볼 수 있을까요?”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전화를 끊은 하경윤은 아예 폭주했다.“빌어먹을! 개자식!”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유진은 겁에 질려 숨을 죽였지만 하경윤은 이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한유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좀 봐!”분노 가득한 목소리에 유진은 몸을 떨며 끊임없이 설명했다.“대표님, 이건 제 탓이 아니에요. 다 최하연 짓이에요! 그년이 저한테 엿 먹인 거라고요. 그러니까 탓하려겨든 최하연을 탓하세요. 아!”“지금 책임 전가하는 거야? 한유진, 너 때문에 회사에서 자그마치 100억을 손해 봤어. 적어도 80프로는 네 책임이니 그 돈 마련하지 않으면 내가 네 가죽을 벗길 줄 알아!”하경윤은 악에 받쳐 소리치더니 유진을 확 밀쳐버렸다. 그 때문에 중심을 잃고 한참 동안 비틀거리던 유진은 넋을 잃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100억? 나한테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대표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대표님!”유진이 아무리 목 놓아 불러도 하경윤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유유히 떠나갔다.하경윤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하지만 유진이 덮치려는 찰나, 하연은 교묘하게 유진을 피해버렸다.“회사 기밀 빼돌리면 처벌받는 거 알죠? 내가 이 사진 경찰에 넘기면 어떨 것 같아요?”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하연을 바라봤다. 그러다 불신이 점점 당황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뭔가를 인식하고 사색이 된 채 애원하기 시작했다.“최하연, 제발. 제발 그러지 마.”만약 하연이 이 영상을 경찰에 넘기면 유진의 인생은 이대로 망한다.회사 기밀을 빼돌리는 건 절대로 경범죄로 치부할 수 없다. 심지어 그 금액에 따라 평생 콩밥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최하연, 하연 씨, 제발요. 그거 경찰서에 넘기지 마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유진은 하연이 저를 용서하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애원했다.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석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아냥거렸다.“그러게 감당도 못 할 일을 왜 저질러? 이번이 처음 아닌 것 같던데.”유진은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어 황급히 하연의 팔을 잡고 저자세로 애원했다.“하연 씨 착한 사람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앞으로 하연 씨 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줄게요. 그 영상 파기만 해주면 뭐든 다 할 게요. 네?”하지만 유진의 애원에도 하연은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봤다.“한유진 씨,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여요?”유진은 마구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럴 리가요. 하연 씨, 내가 아니면 적도 한씨 가문 체면을 봐서라도, 한서준 체면을 봐서 용서해 줘요. 네?”하연은 너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한씨 가문? 한서준? 내가 왜 그들 체면을 봐줘야 하는데요?”“하연 씨 서준이랑 재결합하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유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그 말에 하연은 피식 웃었다.“지금껏 들어본 소리 중에서 제일 웃겼어요.”이윽고 잠깐 뜸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한유진 씨,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요. 사흘 내로 자수해요. 자수하지 않으면 내가 이 영상을 경찰서에 보낼 거예요. 그
최하민이 B시에 오는 건 아주 드문 일인데 오늘 인사도 없이 온 거라 하연은 놀란 듯 물었다.“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하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서류를 건네주었다.“이거 봐 봐. 한서준이 제출한 보석에 관한 자료와 민혜경의 감형에 관한 자료야. 민혜경을 감옥에서 빼내겠다는 목적이 아주 명확하더라고.”이 소식은 너무 갑작스러웠다.전에는 이런 낌새조차 없었는데 말이다.하연의 눈빛은 순간 차가워지더니 말없이 서류를 펼쳐봤다.“참 눈물겨운 사랑이네. 그새를 못 참고 자기 애인을 빼내려 하다니.”“민혜경이 그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 이렇게 쉽게 빼내도록 놔둘 수 없지.”한민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미리 손써 뒀어. 그런데 한서준의 태도도 완강해. 민혜경을 빼내려고 무척 애쓰는 것 같더라.”그러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그런데 나는 네 태도를 알고 싶어.”“한서준의 일은 나와는 상관없어요.”간단한 한마디로 서준과의 선을 긋는 하연을 보자 하민은 마음이 놓이는 듯 말했다.“이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죄를 지은 사람을 빼내려면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네.”하민이라면 하연도 100퍼센트 마음 놓을 수 있었다.말을 마친 하민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명령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머리를 돌렸다.“하연아, 너 요즘 나씨 집안 그 자식과 가까이 지내던데, 혹시...”“오빠.”하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연이 끼어들었다.“나씨 가문과 약속했던 결혼은 양가 부모님이 결정한 일이지 제 의견은 없었어요. 게다가 이제 약혼도 무산됐잖아요. 저와 운석 씨는 그저 친구예요.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하연의 말에 하민이 피식 웃었다.“정말 고작 친구라고? 나운석이 DS 그룹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이번에는 D시 프로젝트까지 따냈다던데, 그거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어?”“오빠,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그럼 부상혁
“하연아, 한번 실패했다고 자신을 부정하지 마. 넌 가장 좋은 걸 가질 자격이 있어.”그 말에 하연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따뜻해졌다.“알았어요. 오빠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하민은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빠한테까지 뭐 그런 말을 해? 감정은 본인이 가장 잘 알아. 그걸 똑바로 마주해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아.”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늘 하민이 유독 말이 많다는 게 느껴져 의아할 따름이었다.“오빠, 그런데 무슨 일로 오늘 이런 가십에 관심이 이렇게 많아요?”“그랬나? 나는 너를 관심하는 건데? 너한테 중차대한 문제인데 소홀히 할 수 없지. 이미 한번 당했으니 교훈을 얻어야 하기도 하고. 같은 곳에서 두 번 넘어질 수는 없잖아. 상대가 한서준만 아니면 네가 누구를 선택하든 가족 모두가 너를 지지할 거야.”하민의 태도는 최씨 집안 모든 사람의 태도이기도 하다.“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하연은 제 마음을 이미 훤히 알고 있는 듯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더니 한참 동안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 시각, DS 그룹.호현욱이 새로 산 옥 장식품을 갖고 놀 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누구지? 들어와.”곧이어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혁욱의 비서 정민호가 들어와 보고했다.“이사님, 우리 회사에서 D시 프로젝트를 따냈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호현욱은 손에 쥐고 놀던 옥을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러고 나서야 수십억을 제 손으로 내던졌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눈빛이 어두워졌다. 솔직히 가슴에서 피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뭐라고? 프로젝트를 따내?”“네. 입찰 현장에서 전해 들은 소식입니다. 우리 회사가 따냈다더군요.”호현욱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하연이 이토록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D시 프로젝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핵심 사업의 규모가 크고, 주기가 길며 이윤까지 높다. 고작 이 프로젝트 하나만 해도 DS 그룹 이윤의 10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대로 가면 하연은 내기에서 이기게 될 거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 않은 이상 호현욱 역시 쉽게 포기할 수 없다.“급할 거 뭐 있어? 아직 반년이나 있잖아. 이번 프로젝트 마지막까지 성공하기 쉽지 않아. 프로젝트 하나 망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호현욱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 눈빛을 흐렸다. 비즈니스 업계에 수년간 발을 담근 그가 어린 계집에게 질 수는 없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운석 그 자식을 쫓아내야겠어.”“이사님,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호현욱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말해봐. 무슨 방법인데?”민호는 그 말에 이내 호현욱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호현욱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내 밑에서 몇 년 일하더니 많이 배웠네. 그럼 그대로 진행해.”“네, 이사님.”...저녁, 선샤인 바.하연은 운석을 위한 축하 파티를 열기 위해 회사의 동료들을 모두 불러 보아 현장은 매우 시끌벅적했다.“나 본부장님이 이번 D시 프로젝트를 따낸 걸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나 본부장님 축하해요.”“최 사장님 축하해요.”“자, 그럼 DS 그룹의 점점 더 나아지는 앞날을 위하여!”“...”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자 하연은 직원들이 편하게 놀지 못할까 봐 적당한 핑계를 대고 먼저 일어섰다.운석은 그런 하연이 걱정되어 발 빠르게 나섰다.“바래다줄게요.”“아니에요. 운석 씨 축하 파티인데 함께 놀아요. 저는 대리 부르면 되니까.”“그럼 문 앞까지 바래다줄게요.”결국 운석의 고집을 꺾지 못한 하연은 운석과 앞뒤로 나란히 서서 바를 나섰다.“얼른 들어가요. 대리 기사가 곧 도착한대요.”“아니에요. 차에 타는 것까지 보고 갈게요.”하연의 거절에 운석은 괜찮다는 듯 말했다.이번에도 운석의 고집을 꺾지 못한 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그 틈에 운석이 무심코 말을 꺼냈다.“제가 DS에 온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돼가네요. 시간 참 빨라요. 처음
“가서 저 여자 핸드폰 빼앗아.”말이 떨어지자 양아치처럼 생긴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차 유리를 몽둥이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쨍그랑 소리가 들리면서 유리 파편이 하연에게 튀었고, 차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이봐, 핸드폰 이리 내!”말을 마친 한 놈이 머리를 차 안으로 쑥 들이밀며 하연의 손에 든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다.하연은 얼른 그 사람을 피하고는 발로 남자의 머리를 차버렸다. 그 순간 남자의 코로 피 두 줄이 흘러내렸다.“당신들 길 한복판에서 뭐 하는 짓들이야?”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이게 어디서! 죽으려고!”이윽고 소리치며 또다시 앞으로 달려들었다.하지만 그때, 뒤에서 달려오던 검은색 승용차 몇 대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안에서 경호원들이 우르르 내려 놈들을 포위했다.훈련된 용병처럼 신속하게 나타난 경호원들은 평균 185 넘는 키에 커다란 덩치를 가졌다. 그 모습에 센 척하던 청년들도 순식간에 겁을 먹고 줄행랑쳤다.“뭣들 하고 있어? 도망쳐!”하지만 아쉽게도 진작 포위되어 한 놈도 도망갈 수 없었다.심지어 방금 하연에게 센척하던 남자도 너무 놀라 연신 뒷걸음쳤다.그때, 맨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이 빠른 걸음으로 하연 앞에 달려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아가씨, 괜찮으십니까?”하연은 굳은 표정으로 제 몸에 떨어졌던 유리 파편을 툭툭 털어냈다. 분명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했고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아가씨, 이자들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저지른 일의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할 겁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하연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그러면서 양아치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놈들은 그 기세에 눌려 흠칫 몸을 떨었다.“아까 보니 내 핸드폰에 관심이 많은가 봐? 여기 특별한 거 없을 텐데?”하연의 말에 놈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그도 그럴 게, 분명 연약한 여자를 처리하면 된다고 했었는데, 왜 지
한씨 가문 첫째네 저택.그 시각, 한유진은 핸드폰을 쥐고 한 곳을 계속 맴돌고 있다, 어찌나 초조했는지 콧잔등에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벽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아직도 그 양아치 놈들한테서 소식이 없으니 그럴 만도.인내심이 바닥 난 유진은 결국 신발을 챙겨 신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문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오자 유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호식아, 어떻게 됐어?”호식이라 불리는 양아치는 헬멧을 벗고 무표정한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유진 누나, 미안해요.”그 말에 유진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되물었다.“왜 미안하다는 거야? 설마 실패했어? 그럴 리 없는 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여자 하나 못 처리했다고?”호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정보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무슨 뜻이야?”“미안해요. 전에 줬던 4천만 원은 돌려줄게요. 하지만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 할 것 같아요.”“그게 무슨 뜻이야?”유진이 어리둥절해하자 호식이 손을 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돈을 받았으면 일 처리해 주는 게 우리 바닥 룰이라. 우리는 룰대로 하는 거예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뒤에서 양아치 몇 명이 더 나타나 유진을 덥석 잡았다.“호식,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너 최하연 돈 받았어? 그년이 얼마 줬어? 내가 두 배 줄게.”“이건 돈 무제가 아니에요.”호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똘마니들이 유진을 밧줄로 묶었다.“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당장 안 풀어? 나 한씨 가문 사람이야!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심지어 유진이 아무리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 봤지만 양아치들은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그때 참다못한 호식이 끝내 입을 열었다.“야, 저 여자 너무 시끄러워. 입 좀 막아.”“호식,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호식...”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테이프로 유진의 입을 막았다.이윽고 유진을 경찰서로 끌고 가더니 호식이 직접 경찰한테 CCTV 증거 자료를 넘겨주었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송혜선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솔직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채고 하나하나 넘겨봤다. 사진마다 담긴 장면이 송혜선을 점점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 최씨 가문의 귀한 딸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니,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사진 속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고한 분위기, 남다른 기품까지...비록 사진에는 전부 뒷모습만 담겨 있었지만,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송혜선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모든 사진을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친한 남녀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선을 넘은 정황은 없잖아. 겉보기엔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정다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설 탐정을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사진 속 ‘한명준’이라는 남자와 하연 이 둘 사이에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님, 이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다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바로 B시 한씨 가문의 사람이란다.” “B시 한씨 가문?”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하연의 전 남편이 한씨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한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최하연의 전남편은 감옥에 간 걸로 아는데, 또 다른 한씨 가문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복잡한 사연이 많았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다영은 하연과 ‘한명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일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부상혁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남자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