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뭐 해?”문 앞에 서 있는 서준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심지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하연의 손을 확 낚아챘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연은 서준에게 끌려 방을 나섰다.“방금 그거 뭐야?”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 하연의 질문에 서준은 눈살을 찌푸릴 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뭘 봤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하연의 의심은 더해져만 갔다.심지어 이곳에 남모를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건 너무 이상하잖아.”하연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방금 본 걸 떠올리더니 결국 서준을 보며 물었다.“왜 서준 씨 흑백 사진이 벽에 걸려 있어? 뭐 귀신이라도 돼?”그 말에 서준은 버럭 화냈다.“헛소리하지 마. 잘못 본 거야.”“전말?”재차 질문하던 하연은 그제야 서준이 제 손목을 잡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이내 손을 뿌리쳤다.“생일 연회 이제 곧 시작해. 내려가자.”서준은 텅 빈 손을 바라보며 인내심 있게 말했다.하연은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내 본인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결론 지었다.‘한서준이 내 앞에 이렇게 있잖아. 그러니 그럴 리 없어.’“할머님은 어떠셔? 괜찮아?”“뭐라고?”“할머님이 편찮으시다고 해서 올라와 본 거야.”서준은 방금 전 상황을 설명하는 하연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할머니는 괜찮아. 다음에 다시는 여기 오지 마.”“응.”하연은 눈을 내길 깔고 짤막하게 대답했다.두 사람이 앞뒤로 나란히 서서 계단 입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정체 모를 물건이 하연을 향해 날아왔다.“조심해.”무의식적으로 반응한 서준은 하연의 팔을 잡아당기며 제 몸으로 무거운 물건을 막아냈다.그리고 다음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물건이 서준의 등에 떨어지더니 옷이 얼룩덜룩한 물감으로 완전히 뒤덮여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렸다.주위의 시선은 순간 서준에게 모였다. 다들 의아한 눈빛으로 처참한 몰골의 서준을 바라봤다.
“난 최하연만 있으면 돼.”그 말에 하연은 화가 치밀었다.“그건 안 될 것 같은데.”하연의 거절에 서준의 표정을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하연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은 유진을 따라 자리를 피했다.두 사람이 떠나자 강영숙이 얼른 다가와 하연을 걱정했다.“하연아, 괜찮니?”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몸은 괜찮으세요?”“나는 괜찮다. 늘 있는 일이라.”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설매가 7살 정도 되는 남자애의 귀를 잡아당기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 아이의 옷 역시 얼룩덜룩한 물감이 묻었고, 손에 붓 두개를 든 채 눈물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네가 한 짓 똑똑히 봐!”남자애는 꾸중을 듣자 지붕이 떠나갈 것처럼 엉엉 울었다.그걸 본 강영숙이 언짢은 표정으로 호통쳤다.“그만 해라. 창피한줄도 모르고.”이건 분명 하연을 겨냥했던 일인데, 왜 서준이 엉망이 되었는지 한설매는 의문이었다.심지어 서준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제 아들을 혼낼지도 모르기에 먼저 나서서 사과했다.“엄마, 죄송해요. 애가 철이 없어서 서준을 저렇게 만들 줄 누가 알았겠어요. 너그러이 용서해 줘요. 내가 이미 심하게 혼쭐냈으니.”어두운 표정의 강영숙은 한설매를 무시하며 하연을 제 쪽으로 끌어왔다.“가자, 하연아.”그 시각, 하연의 눈은 어두워졌다.심지어 마음속 한구석이 왠지 자꾸만 불안했다.한편, 방에 도착한 유진이 하인들을 쫓아내는 바람에 서준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유진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걸 모르는 서준은 곧바로 외투를 벗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하연이 그에게 달려들었다.“서준아, 내가 도와줄게.”유진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심지어 동작도 어찌나 빠른지 서준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외투를 벗겼다.이에 서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봤다.“누나도 그만 나가 봐.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서준이 거절 의사를 밝혔
유진은 도망치듯 저에게서 멀어지는 서준을 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그제야 정신이 든 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주먹을 그러쥐었다.거절당했다는 분노를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낸 유진은 방금 전 계단 입구에서 하연을 감싸주던 서준의 모습을 떠올렸다.‘이미 이혼한 거 아니었어? 왜 아직도 애매하게 구는 건데?’유진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매서운 빛이 언뜻 지나갔다....샤워를 하고 옷을 새로 갈아입은 서준은 거실에 도착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하연을 찾았지만, 하연의 그림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그때 서준을 발견한 강영숙이 낮은 한숨을 쉬며 귀띔했다.“하연은 이미 떠났어.”그 말에 살짝 놀란 서준은 원망하는 투로 되물었다.“왜 붙잡지 않았어요?”“너 이 할미한테 솔직히 말해 봐. 대체 뭐하고 싶어?”강영숙의 말투는 매우 퉁명스러웠다.“여자도 아직 해결하지 않았으면서. 내 기억이 맞는다면, 네가 바람피워 그 계집 임신까지 시켰잖아.”지난 일을 언급하자 서준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강영숙은 평소에 서준을 아끼지만 이 일에서만큼은 서준을 지지할 수 없었다.“한번 배신하면 그 고통은 영원해. 하연이 너를 용서하면 남은 평생 후회하며 잘해줘야 할 거지만, 만약 하연이 이 일을 놓지 못한다면 절대 강요하지 마라. 두 사람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뜻일 테니.”서준은 강영숙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심지어 연회장에 남아 있을 기분이 사라져 곧장 제 방으로 돌아갔다.잠시 뒤, 서준의 방 베란다는 연기가 자욱했고, 바닥에는 온통 담배꽁초가 널렸다.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서준은 끝내 핸드폰을 꺼내 해외로 전화했다.“내가 조사하라던 건 어떻게 됐어?”상대방이 뭐라 말했는지 서준은 곧장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꺼버렸다.“알았어. 내가 바로 갈게.”이윽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그날 바로 해외로 떠났다....한씨 고택을 나온 하연은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는 대신 브랜드 디자이너 브랜드숍으로 향했다.한동안 오지 않았는데, 이곳의 장사는 여
“참, 네가 오니까 갑자기 생각났는데.”예나가 갑자기 하연의 생각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전에 어떤 고객님이 너를 콕 집어서 드레스 디자인해달라고 하더라고.”“무슨 디자인인데?”예나는 얼른 카운터에 보관하고 있던 고객 리스트를 하연에게 건넸다.“가격을 6억이나 제시했어. 시간도 빠듯한 게 아니고. 반년 내로 네가 시간 날 때 언제든 만들어만 주면 된다던데.”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리스트를 건네받았다.리스트에는 고객의 상세한 정보 대신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다.“뭐야? 신비주의 컨셉이래? 드레스에 대한 요구는 없고?”“말 안 하던데? 네가 시간 날 때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대. 받을 거야?”하연은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받아야지. 안 받을 이유가 없잖아. 우리 가게에 들어온 큰 주문인데. 이건 나한테 맡겨, 회사 일만 처리하면 내가 직접 연락할게.”“그래, 나야 당연히 네 의견에 찬성이지.”...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월요일.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한 하연은 공교롭게도 1층 로비에서 운석과 마주쳤다. 운석은 슈트 차림에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연을 본 순간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하이, 여신님!”싱글벙글 웃으며 하연에게 인사하는 운석의 모습은 다정한 미남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매너를 지키려는 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하연 씨도 회의에 참석하러 왔어요?”“네.”그 말에 운석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관계에 따르면 DS 그룹은 매주 월요일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는데, 하연은 지금껏 거의 참석한 적이 없다. 때문에 하연이 참석하는 게 의외라고 느껴졌다.“오늘 회의에서 주로 D시 프로젝트에 관해 다루잖아요. 아마 최종 예산안을 확정하고 내일 바로 입찰 진행할 거예요.”하연은 운석의 업무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운석은 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니까.하지만 이번 입찰이 중요한 건이다 끝내 보니 참지 못 하고
나운석의 프로젝트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회의가 끝난 뒤 하연은 먼저 회의실에 나왔고, 태훈이 그녀와 약 반 발짝 떨어진 거리를 우유지하며 업무를 보고했다.그러다 두 사람이 이제 막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하연 씨!”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더니 유진이 웃는 얼굴로 하연에게 걸어왔다.유진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하연은 놀랍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게, 서준과 이혼하고 난 뒤 한씨 집안 식구들과는 깨끗하게 관계를 정리하여 친척들과는 한 번도 왕래한 적이 없다.‘여기는 갑자기 왜 왔지?’하연은 의문이 앞섰지만 예의를 지키며 인사했다.“유진 언니,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그 말에 유진이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건넸다.“할머니가 나한테 삼계탕 심부름시키더라고. 하연 씨 가져다주라고.”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류를 덮어 이내 태훈에게 건넸다.“방금 말한 대로 진행해.”“네, 사장님.”태훈이 떠나자 하연은 그제야 시선을 유진에게 옮겼다.“들어와서 앉아요.”유진은 하연의 초대에 응하고는 이내 그녀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솔직히 유진은 180도로 변한 하연의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예전에는 항상 저자세로 순종적인 모습만 보였었는데, DS 그룹 대표가 된 지금은 오히려 유진을 누르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하연에게 압도당한다는 느낌은 전에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데 말이다.“하연 씨, 참 많이 변했네요.”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유진은 감탄했다.“아니에요, 일할 때만 이래요.”하연은 겸손하게 대답했다.“앉아요.”소파에 앉은 유진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하연에게 건넸다.“먹어 봐요. 할머니가 특별히 부탁한 거니까.”이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감 느껴지는 말투로 대답했다.“할머님께 고맙다고 전해줘요. 이렇게까지 마음 쓰실 줄 몰랐는데.”그러자 유진은 싱긋 웃었다.“고맙긴요. 할머니한테 하연 씨는 친손녀나 다름없는데요. 서준과 이혼했어도, 그건 변함없어요.”하연은 그 말에 표정을 가다듬으며 아무
“하연 씨가 서준과 재결합하지 않아도 나한테는 영원한 동생이나 마찬가지예요.”유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무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하연은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티슈로 입을 닦고 나서야 대답했다.“들어와요.”그 말이 떨어지자 운석은 서류뭉치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다른 손님이 있는 걸 발견하자 사뭇 진지한 태도로 변했다.“최 사장님, 말씀하신 서류예요. 확인 부탁드립니다.”보기 드문 운석의 진지한 태도에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테이블 위에 올려 둬요.”“그래요.”하지만 그때, 운석을 본 유진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나운석, 네가 왜 여기 있어?”그 말에 운석 역시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봤다. 서준의 오랜 친구로서 운석은 당연히 유진을 알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유진에 관한 비밀도 알고 있다.하지만 유진을 본 운석은 그저 겉웃음만 지어 보였다.“나 DS 그룹에서 일해.”그 말에 유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NW그룹 후계자가 남의 밑에서, 그것도 DS 그룹에서 일을 하다니.유진은 더 묻고 싶었지만 운석은 그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하연을 보며 말했다.“최 사장님,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그래요.”운석이 떠나자 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심지어 은연중에 운석의 태도가 예전처럼 살갑지 않다는 것도 어느 정도 느꼈다.“유진 언니, 왜 그래요?”유진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묻자 유진은 다급히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마셨어요? 저 잠깐 설거지하러 갔다 올게요.”“아니에요. 제가 할게요.”하연은 그릇과 보온병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자 커다란 사무실 안에 일순 유진만 남게 되었다.그 틈에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운석이 방금 가져온 서류를 확인했다.그리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 눈에 흥분의 빛이 언뜻 지나갔다.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서류를 한 장 한 장 펼치며 사진을 찍어 대더니 하연이 돌아오기 전
“너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일이 아주 재미있어지지.”“...”전화를 끊은 유진은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짝였다.하연의 회사에 와서 이런 수확을 얻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최하연, 내일 입찰 처참하게 실패하게 해줄게.’...유진이 떠난 뒤, 운석은 타이밍 맞게 하연의 사무실에 들어왔다.이윽고 평소의 건들거니는 모습을 모두 감추고 사뭇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한유진은 여기 왜 왔어요?”하연은 눈을 들어 운석을 힐끗 보더니 농담하듯 말했다.“유진 언니한테 관심 있나 봐요?”“관심? 한유진한테 그럴 가치가 있기나 해요?”운석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하더니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 한유진 진짜 무서운 사람이에요. 조심해요.”이윽고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힐끗거렸다.“이번 D시 프로젝트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래서 모두 따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거고. 한유진이 뭔가 수작을 부릴까 봐 걱정이에요.”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연마저 운석의 말에 일순 엄숙해졌다.‘하긴 오늘 타이밍이 너무 기막히긴 했어.’잠깐 사색에 잠겨 있던 하연은 운석과 눈을 마주치더니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구석진 곳에 있는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뭘 했는지는 확인해 보면 되죠.”“...”다음 날 아침.하연의 집 앞에 주차된 빨간색 페라리 안에서, 운석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하연을 기다렸다.그로부터 약 반 시간 뒤, 흰 양복 차림의 하연이 나타나자 운석은 눈을 반짝이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차에서 내린 운석은 몸을 차에 반쯤 기댄 채로 하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하연 씨, 좋은 아침이에요.”운석을 본 순간 하연의 눈에는 의아한 기색이 드리웠다.“여긴 어떻게 왔어요?”“당연히 하연 씨 기사님이 되어주려고 직접 왔죠. 여신님, 차에 오르시죠.”운석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차 문을 열어주더니 안으로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하연은 싱긋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반갑습니다, 하 대표님.”“최 사장님 같은 젊은 인재가 회사를 이끈 덕에 요즘 DS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던데요.”“과찬입니다.”“최 사장님도 D시 프로젝트 입찰 건 때문에 오신 겁니까? 그럼 어디 한번 제대로 겨뤄봅시다.”“그래요, 각자 실력으로 경쟁합시다.”그때, 하영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사실 저희 그룹은 어제 이 프로젝트를 포기할까 했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꿨거든요.”그 말에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던 운석이 입을 열었다.“아주 자신만만하신가 봅니다?”하경윤은 너털웃음을 지었다.“그런 말은 아직 이르죠.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 아직 모르는 일인데.”“그럼 기대하겠습니다.”운석은 분명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심지어 하경윤에게 적개심을 느끼고 있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그럼 이따 봅시다.”그때, 하경윤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더니 인사를 남기고 거들먹거리며 떠나갔다.“제 추측이 맞다면 하 대표가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라이벌이죠?”덤덤하게 본질을 꿰뚫은 하연을 보며 운석은 감탄했다.“역시 여신님.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또 빈말 하네요. 좀 진지해져 봐요.”“사실인데.”1초 전만 해도 장난기를 띠고 있던 운석은 하경윤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다.“이미 성공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저 태도 좀 봐요. 오늘 저 자식이 원하는 대로 되면 꼬리가 아마 하늘을 찌를 거예요.”“그건 모르는 일이죠. 높은 곳에 있을수록 더 비참하게 떨어지는 법이니까.”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주최자가 배정한 자리에 앉았다.하지만 구석진 곳에서 유진이 저들을 보고 있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때, 하경윤이 유진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어때? 입찰서 바쳤어?”유진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걱정 말아요. 그런 간단한 일은 진작했으니까.”이에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