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애는 말하면서 서영을 앞으로 밀었다.그러자 서영도 다급히 그 기회에 자기를 어필했다.“저 대학 졸업하면 교수님이 계신 대학원에 지원하려고 합니다. 교수님 밑에서 함께 디자인에 관해 공부하고 배우고 싶습니다.”안형준은 알았다는 듯 격려했다.“힘내요.”말을 마치고 떠나려는 안형준을 보자 이수애는 격동된 나머지 서영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서영아, 네가 뽑히는 건 문제없을 거야! 앞으로 꼭 노력해서 엄마 실망하게 하면 안 된다.”‘보아하니 안 교수님의 제자가 되는 건 이제 문제없겠어.’서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하연이 어두운 얼굴로 서영에게 다가왔다.그리고 서영이 무의식적으로 도망치려던 그때.“우리 예기해.”짤막한 한마디에 서영은 못이라도 박힌 듯 그대로 멈췄다.서영은 그 말을 무시하고 도망치려 했지만 발을 내딛기도 전에 하연이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왜? 찔려?”옆에 있던 이수애는 하연이 서영을 붙잡은 걸 보자 다급히 달려왔다.“최하연! 너 뭐 하는 거야? 당장 서영이 놓지 못해?”하연은 이수애를 무시하고 서영을 바라봤다.“마지막으로 기회 주는 거야. 얘기해.”주위 사람들은 두 사람의 모습에 모두 의아한 눈빛을 보내왔다.그걸 보자 서영은 깊은숨을 들이켜면서 한발 물러섰다.“엄마, 나 괜찮아. 우리 얘기하고 올게.”“그런데...”서영은 얼른 이수애를 안심시켰다.“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설마 나한테 무슨 짓이라고 하겠어?”그 말에 하연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서영은 겉보기와 달리 불안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옷깃을 꽉 그러쥐었다.홀을 나와 복도에 도착하자 하연은 발걸음을 멈췄다.“한서영, 방금 그 디자인 왜 너한테 있어?”그 말을 듣는 순간 서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올 게 왔구나.’‘하지만 원고도 내 손에 있는데 뭐 어쩔 건데? 이 디자인이 최하연 거라 해도 증명할 수는 없잖아.’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던 서영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무슨 말 하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네.’“한서영, 기회 줄게. 네가 직접 저 작품 전시회에서 내려달라고 해. 안 그러면 후회하게 할 테니까.”서영은 하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하연에게 원고도 없고 그렇다 할 증거도 없으니 쫄릴 것도 없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했다.“마음대로 하던가.”이 말을 끝으로 등을 곧게 펴고 도도하게 돌아선 서영은 문을 연 순간, 태현과 딱 맞닥뜨렸다.“태현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태현은 서영의 말을 무시한 채 멀리 떨어져 있는 하연에게 눈길을 주더니 무심코 물었다.“너 하연 씨랑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어?”서영은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태현 오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친하긴요. 최하연은 최씨 가문 아가씨인데, 저 같은 사람이 쳐다나 볼 수 있겠어요?”분명 겸손한 내용이었지만 들을수록 괴상야릇했다.“아하.”태현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서영도 곧바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태현을 지나쳤다.서영이 떠나자 태현은 고개를 숙여 제 핸드폰을 바라봤다. 액정에는 약 5분 정도 녹음된 녹음 파일이 있었다.태현은 어두운 눈빛으로 저장 버튼을 눌러 녹음 파일을 저장하고는 먼저 하연에게 인사했다.“하연 씨, 오랜만이네요.”태현은 오늘 여느 때처럼 하연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하연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약간 치켜 올리며 물었다.“안 교수님과는 무슨 사이예요?”태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성이 똑같다는 건 깊은 관계를 뜻하지 않겠어요? 왜요? 하연 씨도 우리 영감탱이 제자로 들어오게요? 하연 씨 이력이면 충분히 더 좋은 기회가 많을 텐데요.”하연은 이내 태현의 뜻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안형준과 안태현이 부자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렇군요.”“참, 하연 씨.”태현은 다시 하연을 불러 세웠다. 물론 지난날 자기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걸 인정하지만, 진심이 장황한 말보다 더 효과가 있다는 것쯤은 태현도 알고
상혁의 말에 하연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아니에요, 제 건 제가 직접 돌려받을게요.”하연은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서영을 빤히 바라봤다.이 시각, 서영은 환한 표정으로 업계 거물 인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심지어 멀찍이 서 있는 하연을 보더니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들었다.“한서영 씨, 안 교수님이 잠시 오라고 하십니다.”그때, 직원 한 명이 서영한테 걸어와 깍듯하게 말했다.“그래요, 바로 갈게요.”서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곧장 직원을 따라 전시장을 떠났다.그 시각, 친구들과 서영의 작품에 대해 논의하고 있던 안형준은 서영을 보자 얼른 소개했다.“내 친구 주 대표가 서영 양의 디자인에 관심이 생겨 디자인 컨셉과 계기에 대해 얘기 나누고 싶다더군.”“네, 안 교수님.”서영은 이내 옆에 있는 주태식을 바라보며 술술 설명하기 시작했다.“이 작품 주요하게 현시대 여성들의 독립을 컨셉으로 잡았고, 독립적인 여성을 표현하는 옷을 디자인하기 위해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완성했고요.”서영의 설명을 듣고 있던 주태식은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디자인 컨셉이 아주 독특하고 새롭네요. 작품도 사람의 이목을 끌고. 하지만...”주태식은 하던 말을 잠깐 멈췄다.그 모습에 서영이 다급하게 물었다.“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주태식은 깊은 고민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디자인은 별문제가 없지만 디자인 컨셉이 작품과는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제 이해가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그 말에 서영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주 대표님,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그 말씀은 제가 작품을 베끼기라도 했다는 겁니까?”주태식은 안형준의 체면을 봐서 고개를 젓더니 끝내 뜻을 굽혔다.“미안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하지만 서영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저를 의심한 사람 주 대표님이 처음은 아니에요.”이윽고 서영은 주위를
“이게 내가 디자인한 게 아니라면 증거를 내놔! 증거도 내놓지 못하면서 사람 비방하지 말고.”서영은 하연이 증거를 내놓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때문에 오히려 더 당당한 태도로 몰아붙였다. 그때 하연이 솔직하게 말했다.“확실히 실질적인 증거는 내놓을 수 없어.”“뭐야! 증거도 내놓지 못할 거면서 표절했다고 남을 모함한 거야?”“그러니까. 이건 그냥 모함이잖아.”“대단하신 최씨 가문 아가씨가 이런 사람일 줄이야.”“그건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 한서영이 예전에 최하연 시누이였잖아. 한서영한테 쌓인 게 많아 복수한 걸지도 모르지.”“헐,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서영은 여론이 제 쪽으로 기울자 배짱이 더 두둑해졌다.‘대중들 눈이 얼마나 밝은데. 최하연 내가 오늘 너 웃으면서 왔다가 울면서 돌아가게 해줄게.’“하, 증거가 없으면 나한테 사과해. 그러면 너 용서해 줄 테니까.”하연은 입가에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사과? 너한테 그럴 자격은 있고?”그 말을 들은 서영은 한순간 얼굴색이 어두워졌다.“최하연,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날 탓하지 마.”“내가 직접적인 증거는 내놓지 못하는 건 맞아. 이 작품의 원고도 없고. 네가 원고마저 훔쳐 갔으니까.”그 말에 서영은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하연에게 삿대질했다.“헛소리 지껄이지 마!”“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사실이 증명해 주겠지.”하연의 확신에 찬 말투에 사람들의 마음은 갈팡질팡했다.“설마 한서영이 정말 최하연 디자인 훔친 건 아닐까?”“그건 모르는 일이지.”“그런데 한서영이 저렇게 당당한 걸 봐서는 아닐 것 같은데.”하지만 사람들이 당당하다고 생각한 서영은 이미 당황하기 시작했다.“최하연, 헛소리 지껄이지 마. 내가 언제 네 디자인 훔쳤다고 그래?”“네가 디자인한 거라면 왜 디자인 컨셉도 제대로 설명 못 해? 이건 너무 이상하지 않아?”“누가 그래? 내가 설명하지 못했다고? 아까 분명 말했는데!”그때 옆에 있던 주태식이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제가 볼 때, 이 작품의 컨
그때, 얼굴이 흙빛이 되어버린 서영이 인정하지 못한다는 듯 끼어들었다.“최하연,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증거 있어? 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내놔! 증거도 없으면서 사람 모함하지 말고!”서영은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여전히 당당한 태도로 밀어붙이며 주변에서 의지할 사람을 찾았다.그러다 사람들 속에 있는 서준을 발견하고는 지푸라기라도 발견한 것처럼 서준한테 달려갔다.“오빠! 오빠 전처가 글쎄 나를 모함하는 거 있지! 분명 지난 일에 앙심을 품고 나한테 복수하려는 걸 거야. 사람들 앞에서 내 앞길 망치려고.”서준은 서영에게 끌려 하연의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연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그 순간 서준은 왠지 모르게 하연이 분명 앞에 서 있지만 저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런 상황에서 서영이 정말 디자인을 훔친 것이 밝혀지면 앞으로 영영 디자이너로서 이 바닥에 발을 붙이지 못할 거다. 그러면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것도 모두 물 건너갈 거고, 앞길도 한순간에 망치게 된다.서영의 오빠로서 서준은 사실이 무엇이든 하연이 서영을 망치게 둘 수 없었다.“최하연, 소란 그만 피워. 아직도 모자라?”하연은 일순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해 있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달되지 않았다.“소란? 한 대표님 눈에 제가 소란 피우는 거로 보이나 보죠? 아니면 표절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건가?”그 말을 듣는 순간 서준의 표정은 차가워졌다.“서영이 디자인 표절했다는 건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역시 예상했던 대로 서준은 서영을 감쌌다. ‘역시 가족이라는 건가?’“한 대표님, 이 세상에 오해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저...”“최하연! 너 꼭 서영의 앞날을 망쳐야겠어?”“그렇다면 어떡할 건데? 내가 부처님도 아니고 왜 계속 내가 봐줘야 하지?”서준은 이런 상황에서 하연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이내 어조를 누그러뜨렸다.“이 일은 그냥 넘어가자. 응?”하연은 이 상황이 웃음만 나왔다.‘진짜 웃기네.’
사람들이 하연을 닦달하자 서영은 으쓱한 듯 팔짱을 끼며 하연을 바라봤다.“사람들 말이 맞아. 최하연, 증거를 내놓지 않으면 나 신고할 거야.”서영은 핸드폰을 꺼내 흔들더니 전화할 것처럼 굴었다.서준이 옆에서 막으려 했지만 그게 서영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태현이 제 호주머니 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미리 녹음했던 걸 들려주려는 듯 하연을 바라봤다.하지만 하연은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로 마치 모든 게 손안에 있다는 듯 말했다.“한서영, 내가 정말 증거를 내놓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어떡하지? 난 항상 사전에 뭐든 준비해 놓는 습관이 있거든. 특히 내 작품에는 더더욱.”그 말을 듣는 순간 서영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뭐라고?”하연은 서영의 말을 무시한 채 사람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증거라면 있습니다. 바로 저 작품 속에.”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무슨 뜻이지? 그림은 특별한 거 없어 보이던데?”“그러니까. 그만 뜸 들이고 증거나 내놓으시죠?”“최하연 씨, 설마 그림에 워터마크라도 남겼단 말입니까?”하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네. 만약 한서영 씨가 제 작품을 대충 모방했다면 선명하지 않았을 테지만, 선 하나 빼놓지 않고 똑같이 복제했거든요. 그래서 아주 선명합니다.”말을 마친 하연은 앞으로 걸어가 그림을 손에 쥐더니 그걸 거꾸로 돌려놓은 채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여기 소매 부분 좀 보세요. 제가 디자인할 때 이곳에 표시를 남겨두는 습관이 있거든요. 여기 단추가 있는 부분에 CHY이라는 이니셜 보이시죠?”하연이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다시 보자 확실히 CHY라는 이니셜이 눈에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물론 색상이 아주 연했지만 확실히 새겨져 있었다.그 순간, 진실이 뭔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 판가름 났다.“헐, 진짜네! 어쩜 이니셜까지 똑같이 표절할 수 있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아무리 베껴도 그렇지 어쩜 이니셜까지 베껴? 정말 이것도 인재라면 인재야.”“아까 그렇게 억울
“안 교수님, 아닙니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제가 한순간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서영은 울며불며 애원했다.하지만 안형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한서영 씨, 내 제자로 대학원에 지원할 생각이라면 미리 포기하세요. 실력이 된다 해도 인간 됨됨이가 안 되는 사람은 절대 합격시켜 주지 않을 테니까.”‘어떡해, 이제 끝이야!’안형준에게 대놓고 거절을 받은 순간 서영에게는 이제 막다른 길만 놓였다. 이 바닥이 넓은 것도 아닌데, 앞으로 디자인 업계에 남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한참 동안 멍해 있던 이수애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달려 나와 사정했다.“안 교수님, 서영이 순간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반드시 노력하는 모습 보여드릴 겁니다.”그때 주태식이 끼어들었다.“됨됨이도 안 된 사람은 아무리 성적이 좋아봤자 소용없어요. 다른 전공 알아봐요.”“안 돼요! 안 교수님,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잖아요. 서영은 아직 어린데, 이대로 인생 망칠 순 없어요!”이수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애원했다.그걸 구경하고 있던 주위 사람들은 이수현 모녀에게 손가락질했고, 안형준은 아예 두 사람을 무시한 채 하연에게 걸어갔다.“하연 양이 디자이너 브랜드숍을 운영한다는 얘기는 진작 들었어요. B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라던데. 오늘 보니 역시나 헛소문이 아니네요. 디자인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앞으로 함께 손잡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교수는 하연의 침착하고 태연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태식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안 교수님!”심지어 이수애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안형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이에 이수애는 화가 난 듯 발을 굴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곧이어 주위 사람들도 안형준과 함께 흩어졌지만 오늘 있은 일은 날개라도 달린 듯 B시의 디자인 업계에 소문났
서영은 그 말에 겁을 먹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서준이 정말 이렇게 화낼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엄마...”이수애도 서준이 이토록 모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다급하게 아들을 말렸다.“아들, 너 왜 이래?”“쟤가 이런 사고 친 거 어머니 탓도 있어요. 부모가 돼서 딸자식 너무 싸고돌면 자식 인생 망쳐요.”이수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아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이미 쪽팔릴 대로 팔린 서영은 황급히 도망쳤고, 이수애는 딸이 안 좋은 선택이라도 할까 봐 얼른 뒤쫓았다.“서영아, 엄마랑 같이 가.”하연은 서준의 가족 일에 관심이 없었지만 오늘 일은 그나마 통쾌했다.그때, 상혁이 하연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주며 위로했다.“사실이 밝혀졌으니 우린 이만 가자.”“네.”상혁은 떠나기 전 서준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런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는 눈빛에 서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보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걸 보는 게 더 거슬렸다.“최하연, 목적을 이뤄 아주 의기양양하지?”서준은 한 손을 제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비아냥거렸다.그 말에 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의기양양한 것까지는 없지만 기분 꽤 좋아. 그런데 이건 다 자업자득이야.”서준은 하연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예전의 하연은 이토록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지 않았었으니 말이다.“한서영이 이렇게 된 건 자업자득이 맞지만, 그래도 자비를 베풀 수는 있었잖아.”이게 바로 서준이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기억 속의 하연은 착하기만 해서 어린 여자애의 앞날까지 망칠 정도로 모질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는지.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한씨 가문은 앞으로 이 바닥에 발붙일 수도 없을 거다.“자비?”하연은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내가 자비를 베풀면 한서영이 고맙게 받아들일 것 같아?”서영이 얼마나 사람 속을 긁는데, 자비를 베푼다 해도 뻔뻔하게 굴 게 뻔하다.그때 상혁이 하연을 보호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서준
송혜선은 태동이 불안해졌지만, 병원에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조봉규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돌아오자, 송혜선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아, 의사가 말했잖아. 임신 기간은 많이 지나서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고 지금처럼 자극을 받으면 쉽게 자궁 수축이 일어나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봉규의 말에 송혜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천천히 물었다. “그 사람... 아직 안 왔어?”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당연히 부동건을 뜻했다. 조봉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송혜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에 남준이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 때문이야.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손을 천천히 배 위로 가져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동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 너머로 송혜선이 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걸음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송혜선은 몸을 돌려 등을 돌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은 다급해지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봐.” 옆에 있던 조봉규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부동건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자극?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순간, 송혜선은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부동건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자 송혜선은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뭐긴 뭐겠어요! 내가 다 들었어요. 이사회에
떠나기 전, 부동건은 마지막으로 남준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비록 너를 본사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지사의 전망은 여전히 밝다. 남준아, 이 기회를 잘 살려 내가 기울인 정성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이사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떠났다. 순식간에 넓은 회의실에는 상혁과 남준 단둘만 남게 되었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준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이겼네요, 형님.”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결국 그렇게 말할 거면서 원래부터 누구의 것이었는지, 오늘로 분명해졌을 뿐이다.” 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대꾸했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승패는 병가상사일 뿐, 그저 순간의 결과에 불과하겠지요.” 상혁은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동남아 시장은 기회의 땅이지. 남준아, 이 기회를 잘 활용해라. 너의 전임자였던 정규인의 사례처럼 성급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상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참, 깜빡할 뻔했네. 정규인의 사건이 곧 재판에 들어간다고 하더라.” 남준의 얼굴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빨리?’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남준은 곧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꿰뚫은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규인의 입은 아직 단단히 닫혀 있지. 지금까지는 별다른 중요한 정보는 불지 않았다고 하던데. 하지만...” “하지만 뭐 말입니까?” 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형님, 말씀은 끝까지 하셔야죠.” 상혁은 몇 걸음을 걸어 남준의 바로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고경수는 제법 많은 걸 실토했다고 하던데. 정규인은 거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 거야. 게다가 정규인의 아내가 뭔가 중요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하고... 그게 네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부동건과 부남준의 대립을 본 이사회 임원들은 공기의 분위기를 읽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부동건의 목소리가 임원들을 붙잡았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분들입니다.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동건의 한 마디에, 임원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부동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깊은 회한과 슬픔을 내비쳤다. 부씨 가문 형제가 서로 다투는 모습은 부동건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미 이렇게 된 김에, 오늘 여러분께 제 마음속에 있는 말 몇 마디 전하고자 합니다.” “회장님,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우리는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장 이사가 먼저 나서서 지지를 표명하자, 다른 이사들도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DL그룹이 누구에게 넘어가든, 우리는 최선을 다해 협력할 것입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이사회의 임원들은 이제 그의 뜻과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한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부동건은 주석 자리에 앉아, 깊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항상 두 형제가 화합하고 협력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부동건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고요한 숨을 내쉬었다. 이내 시선을 돌려 상혁을 바라보았다.상혁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냉담한 태도를 풍기고 있었다. “동남아 시장에서 남준이가 해낸 일은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시장을 안정시키고 발전시킨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남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진수용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정지철의 허위 비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형님의 결백이 밝혀진 셈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사회에서 우리가 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DL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후계자를 확정하는 것입니다.” 남준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남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 이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진실은 이미 밝혀졌으니, 이제 우리 모두 이 일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 이사는 고개를 돌려 이사회 임원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부상혁 대표님이 결백하다면, DL그룹의 수장을 계속 맡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부상혁 대표님을 계속 지지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이건 부동건 회장님께서도 바라셨을 일일 겁니다.” 지 이사 역시 곧바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사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다른 이사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발언 이후, 나머지 이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맞습니다.” “저도 부상혁 대표님을 지지합니다.”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했던 왕 이사 마저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세 명의 이사가 상혁에게 지지를 보내며, 상혁과 남준 형제간의 대립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그러나 조금 전까지 남준을 지지하던 진수용과 오국정은 서로 눈을 마주친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이 두 사람도 상황이 끝났음을 깨달았다.하지만 직장에서 마지막 순간에 배신하는 것은 큰 금기 이기때문에 진수용과 오국정은 처음부터 잘못된 편을 들었기에, 끝까지 그 길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너무도 빠르게 뒤바뀌었고, 남준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이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한 표는 여기 없었다. 바로 부동건의 손에 있었다. 남준은 부동건을 배제하고 네 표를 확보해 승리를 확정 지으려 했으나,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
“이럴 수는 없어...!” 정지철이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뒤에 있던 의자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의자의 손잡이를 꽉 잡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계약들이 모두 가짜라는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위조된 계약서였다고?” 그의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지철은 점차 자신을 의심하며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만약 이 계약들이 위조된 것이라면? 도장이 가짜라면? 그렇다면 그의 모든 비난은 단지 무효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문서 위조라는 중대한 범죄가 될 수 있을 텐데...’“아니야, 아니야.” 정지철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지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기엔 뭔가 문제가 있어.” 그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너야. 그래, 너 맞지! 이 모든 게 네가 한 짓이야.” 정지철은 무언가 깨달은 듯,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혼자서 고함을 질렀다. 그의 떨리는 손을 들어 상혁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 모든 게 네가 만든 함정이야! 내가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린 거잖아. 너야말로 이 모든 사건의 주범이야! 이건 모두 네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계산한 일이야!” 정지철의 비난에도 상혁은 아무런 동요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혁은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했다. 정지철은 모든 걸 잃은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으며 머릿속에서 최근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는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어쩐지...’정지철은 이번에 이렇게 순조롭게 모든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상혁은 항상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쉽게 약점을 잡히게 놔둘 리가 없었
“여러분, 장 이사님 말씀은 믿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부남준 상무님을 믿어야 합니다. 부남준 상무님은 틀림없이 DL그룹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 능력이 있습니다.” 정지철은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곧바로 단호한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그만하세요! 부상혁 대표님도 아직 입을 열지 않으셨는데, 왜 혼자 그렇게 떠들고 계십니까? 오히려 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지 이사의 태도는 단호했고, 정지철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침착하게 상황을 관망하던 상혁은 미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흥미진진한 연극을 관람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 이사님께서 오늘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은 남준이를 위해서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오늘의 이사회는 처음부터 정지철이 모든 것을 걸고 온 자리였다. 그는 이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단호한 태도로 상혁을 바라보며 외쳤다. “부상혁 대표님, 명백한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더는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상혁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들은 듯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 말씀은 너무 과장됐군요. 변명이라뇨? 저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정 이사님께서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셨으니 저 역시 뒤처질 수 없죠.” 이 말을 듣자, 원신민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신속하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화면에 자료를 띄웠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정도까지 이야기가 나온 만큼, 저도 여러분께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남준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긴장감에 휩싸였다.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오늘 모든 일이 물 흐르듯이 지나치게 순조롭게 흘러갔고,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상혁의 침착한 태도를 보며 남준은 그동안의 안일함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형님, 준비하신 자료가 무엇입니까?” 남준은
진수용은 이름이 불리자 몸이 떨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입을 열었지만, 평소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고 목소리는 떨렸다. “제 생각에는... 결국 이 회사도 부씨 가문의 사업 아닙니까? 부상혁 대표님이든 부남준 상무님이든, 누구든 이끌 자격이 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부남준 상무님이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진수용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마치 모든 게 조심스러워 보였다. 정지철은 진수용의 대답에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진 이사님도 입장을 밝히셨으니,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그는 시선을 옆에 있던 오랜 동료인 오국정 이사에게 돌렸다. 오국정은 이미 자신이 정지철의 편에 서 있었기에, 이제 와서 그 배에서 내릴 방법은 없었으니, 말없이 손을 들어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두 명의 이사가 찬성 의견을 내었다. 정지철은 즉시 손을 들어 자신의 표까지 추가했다. “제도 여기에 한 표 합니다!” 이렇게 세 표가 확보되었다. 이제 한 표만 더 얻으면, 남준의 승리는 확정적이었다. 정지철의 얼굴에는 승리의 기쁨이 가득했다. 그는 흐름을 타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 이사님, 장 이사님,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두 사람은 정지철이 미리 접촉한 인물들이었기에 그는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기대에 찬 눈빛이 그들에게 쏟아졌다. 심지어 남준 또한 승리를 확신한 듯, 이미 얼굴에는 승리자의 여유로운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지 이사는 나이가 지긋한 이사로, 처음부터 태도가 한결같이 신중하고 겸손했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안경을 고쳐 쓰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DL그룹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문제를 이렇게 성급히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부상혁 대표님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순서 아닐까요?” 장 이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지 이사를 따랐다. “맞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일방적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부상혁 대표님께서 무슨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셨다는 겁니까?” “부상혁 대표님은 수년간 회사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오셨습니다. 단 한 번도 실수를 저지르신 적이 없고, 연말 배당금도 매년 증가했습니다. 설마 밥그릇 들고 밥 먹다가 내려놓고 욕하는 그런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려는 건 아니시겠죠?” “어떤 일을 하시더라도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허위 사실을 날조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명백한 명예훼손입니다.” “...” 이사회 멤버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내며 정지철의 주장에 의문을 표했다. 회의실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고, 정지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만약 남준이 정지철의 팔을 잡아 말리지 않았다면, 정지철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흥!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면 제가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여러분, 직접 확인해 보시죠!” 정지철은 화를 참지 못하고 준비해 온 증거를 스크린에 띄웠다. 자료에는 하나하나 세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부상혁 대표님이 그동안 진행하신 사업을 살펴보면, 최근 몇 가지 사례에서 문제점이 적지 않습니다. 이중계약, 탈세, 심지어 공무원을 뒷돈으로 매수한 정황까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련 부서의 승인을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주식 시장에서의 불법 거래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같이 법을 어긴 행위들입니다. 제가 경찰에 신고만 하면, 부상혁 대표님은 감옥 신세를 면치 못할 겁니다.” 정지철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은 다시 적막해졌다. 모두가 스크린을 응시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크린의 내용을 확인한 이사들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 대표님, 뭐라고 설명 좀 해 보세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셨습니까?” “이제 우리 회사는 끝났군요. 완전히 끝입니다.” “다행히도 부동건 회장님께서 아직 전권을 넘기지 않으셨으니, 우리 회사에는
남준은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형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설마 제가 여기 나타나는 걸 바라지 않으신 건 아니겠죠?” “남준아, 오해는 하지 마.” 상혁은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서두르다 보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그건 아주 기본적인 이치인 건 알고 있지? 이런 건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네가 이미 잘 알 테지.” 상혁의 목소리에는 권력자의 위엄이 담겨 있었다. 주변은 단숨에 조용해졌다. 남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네. 그렇다면 제가 직접 이 기간 동안의 성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남준은 현재 본사에서 직무가 정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의 특별한 신분, 즉 부씨 가문의 차남이라는 타이틀이 있는 이상 누구도 쉽게 반박하지 못했으니, 그저 본능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상혁에게 향했다. 상혁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그만큼 자신이 있다면, 기회를 주는 것도 좋겠지. 모두들 잘 듣고, 부남준 상무의 성과를 한번 확인해 보시죠.”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사들 역시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그럼 수고 좀 해주시죠, 상무님.” “상무님, 부탁드립니다.” 원신민이 손짓으로 자리 앞으로 안내했다. 남준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주석 자리 앞으로 나아가 이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귀중한 기회를 주신 이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대형 스크린에 데이터 화면이 띄워졌다. 남준은 차분하고 조리 있게 설명을 이어갔고, 그의 발표 내용은 듣는 이들에게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사들 사이에서는 소곤 소곤거리는 칭찬이 터져 나왔다. “역시 상무님 이십니다. 이런 능력과 수완을 보니, 정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