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뜻이야?”서준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태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녹음을 꺼내 들었다.“자, 이게 내가 오늘 널 부른 이유야. 이 사건의 진실이기도 하고.”녹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서준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하연 씨도 서영한테 기회를 줬어. 서영이가 그걸 차버린 것도 모자라 도발한 거야.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끝없이 용서해 주고 포용할 수는 없어.”서준은 말없이 손을 그러쥐었다.그 순간 후회가 온몸을 휘감았다.서준은 처음으로 막막한 표정을 짓더니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뒤에야 중얼거렸다.“내가 오해했네...”...“최하연 씨, 잠깐만요.”하연이 떠나려고 할 때, 웬 젊은 남자가 뒤따라 달려왔다.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 하연이 어리둥절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죠?”“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저는 안 교수님의 조교입니다.”남자는 자기소개를 하면서 금색 글씨가 씌어 있는 초대장을 앞으로 내밀었다.“하연 씨, 이건 안 교수님 저더러 특별히 하연 씨한테 주라고 한 초대장입니다.”하연은 얼른 받아 안에 있는 초대장을 확인했다.“교수님께서 오늘 전시회에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여 죄송하다고 이걸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주말에 교수님께서 따로 파티를 열 건데 특별히 하연 씨를 초대하고 싶어 하셨고요.”하연의 눈에는 놀라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B시 디자인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중 한 분이신 안형준 교수의 초대장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하연은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주말에 꼭 참석할게요.”“네, 조심히 가세요.”돌아가는 길에 하연은 초대장을 확인하며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그걸 본 상혁이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하연아, 그 초대장이 그렇게 특별해? 얼굴에 아주 꽃이 피었네?”하연은 싱긋 미소 지었다.“이거 안 교수님 초대장이거든요.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거라고요.”“오! 그러면 엄청 귀한 건가 보네?”“그럼요. 아무튼 이걸 받을 수 있다는 게
방금 접한 소식을 떠올린 동후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한 대표님, 방금 교도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민혜경 씨가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그 한마디에 주위는 일순 잠잠해졌다.너무 오랫동안 혜경의 소식을 듣지 못한 이유 때문일까?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서준이 끝내 물었다.“어떻대?”“다행히 교도관이 제때 발견하여 병원으로 이송됐다고는 하지만,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 한대요.”혜경은 명확한 증거 때문에 10년이라는 유기징역을 선고받고, 지금은 교도소에서 지내고 있다. 게다가 민씨 가문은 이제 무너졌고 민진현도 실종된 상황이다.그때부터 서준은 한 번도 혜경을 만난 적이 없었다.“안 만난다고 답장해.”서준은 차갑게 말했다. “네, 한 대표님.”구동후가 떠나려 할 때, 서준이 그를 불렀다.“한서영 지금 어디 있어?”“지금 아마 집에 돌아가셨을 겁니다.”“서영이 사용하는 모든 카드 정지시켜. 일전 한 푼도 사용할 수 없도록.”동후는 의외의 대답에 놀란 듯했으나, 이내 서준의 명령을 따랐다.“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구동후가 떠난 뒤, 커다란 공간에 서준만 남았다. 도시의 불빛과 오가는 차를 보니 일순 외로움이 밀려왔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하연은 회사 일로 바삐 보내다가 겨우 주말을 맞이했다. 하연은 진작 정태훈더러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라고 일러두었다.그날 아침, 예나는 선물을 챙겨 스포츠카를 끌고 하연의 집 문 앞에 도착했다.[얼른 나와. 나 도착했어.]하연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여전히 잠이 덜 깬 상태로 예나의 문자를 확인했다.“이렇게 빨리 왔다고?”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어보니 역시나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였다.“하연, 좋은 아침!”예나는 기쁜 얼굴로 하연에게 인사했다.“이거 안 교수님 파티야. 늦게 가면 우리가 무례하다고 생각한다고.”“...”“얼른 준비해, 나 여기서 기다릴게.”예나의 독촉하에 하연은 최대한 빨리 씻은 후 집을 나섰다.안형준의 저택은 도시 동쪽에 있는 미리내빌리지다.예전에
“안 교수님이 오셨어!”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자 지연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안형준이 오는 쪽을 바라봤다.“교수님!”지연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하지만 안형준은 가볍게 고개만 까닥이고는 아예 지연을 지나쳐 하연 쪽으로 다가갔다.“하연 양.”“안 교수님.”놀란 듯 인사해 오는 하연을 보자 안형준은 싱긋 미소 지었다.“오늘 이 파티는 사적인 파티라 그렇게 예의 차릴 거 없어요.”안형준이 하연을 특별하게 대한다는 걸 사람이라면 모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때 뒷전에 밀려 있던 지연이 다급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교수님, 이 분이 전에 말씀하셨던 최하연 씨죠?”그러면서 먼저 하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반가워요. 저는 안 교수님의 제자 엄지연이라고 해요.”안형준은 상황을 보더니 이내 말을 보탰다.“지연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생이기도 해요. 디자인에 소질이 있으니 두 사람 앞으로 서로 배웠으면 좋겠네요.”하연은 손을 내밀며 지연의 손을 잡았다.“반가워요, 최하연이라고 해요.”두 사람은 그것으로 인사를 끝냈다.“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한 것은 B시에 있을 큰 행사 때문입니다.”안형준이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누군가가 불쑥 질문했다.“혹시 다음 달에 있을 패션쇼 때문인가요?”“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B시 패션업계의 유명한 디자이너분들이니 이번 패션쇼에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더니 귓속말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이게 B시에서 처음 열리는 패션쇼라 해외에서도 엄청 기대하고 있대. 만약 여기서 좋은 디자인을 선보이면 단번에 유명세를 타는 거야.”“예전에는 항상 해외에서만 진행되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B시에서 진행된대. 이건 참 자랑할 만한 일이지, 우리에게 영광이자 기회인 셈이니.”“우리나라 원소를 넣어 디자인하면 세상에 우리 문화도 널리 알릴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외국 사람들한테 우리 패션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줘야지.”예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뒤늦게 반응한 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저한테 쏠리자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려 하연은 곧장 대답했다.“저는 이번 패션쇼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여기 계신 선배님들이 저보다 훨씬 잘 아실 것 같은데요.”하연의 겸손한 태도에 안형준은 매우 만족했다.“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이 책임을 짊어질 수 있겠어요?”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안형준이 하연을 이렇게까지 믿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화만 보면 아예 이번 패션쇼를 하연에게 일임하는 거나 다름없었다.하지만 하연에게 그렇다 할 대표작이 없는데, 이러면 사람들이 불복할 게 뻔했다.상황에 놀란 하연이 갑자기 짊어지게 된 책임에 어안이 벙벙해 입을 열려고 할 때,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먼저 기회를 낚아챘다.“안 교수님, 아직 자격도 안 되는데,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일을 그르치면 어떡합니까?”“맞아요. 제자들 중에 꼽자면 지연 양이 메인 디자이너에 더 잘 어울리죠. 어찌 됐든 지연 양은 크고 작은 패션쇼를 많이 맡아본 적이 있고, 매번 완벽하게 완성했잖습니까.”“지연 양 디자인은 독특하여 우리 업계에서도 실력은 인정 받잖아요.”사람들은 하연보다는 지연을 더 믿고 있었다.심지어 약속일도 한 듯 하나 둘 지연을 위해 나섰다.어찌 됐든 하연을 접한 건, 그저 인터넷 찌라시뿐이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기도 했고, 하연의 나이가 너무 어린 데다, 그렇다 할 대표작도 없으니 당연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더욱 중요한 건 나중에 하연이 패션쇼를 망치면 하연의 체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체면이 깎이게 되는 것이니까.“안 교수님, 재고해 주십시오.”지연은 사람들의 말에 그제야 안심했다.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안형준의 안색을 살피다가 저를 위해 마지막 변론을 했다.“교수님, 저한테 기회 한 번만 주시면 안 될까요?”기대 가득 찬 지연의 눈빛만으로도 이번 메인
지연은 뭐가 잘못됐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안형준이 저 대신 하연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스승과 제자의 감정에 금이 갔다고만 생각했다.이에 지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 섞인 태도로 밀어붙였다.“교수님이 눈여겨보시던 인재도 별거 없네요.”그 말을 듣는 순간 안형준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그리고 그와 동시, 하연도 결정을 내렸다.“엄지연 씨, 경합 받아들이겠습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배짱 하나는 칭찬할 만하네요. 하지만 제 말 고깝게 듣지는 말아줘요. 전 절대 봐주지 않을 테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거예요.”지연은 자기 실력에 매우 자신했다.그 말에 하연은 느긋하게 대답했다.“기대할게요. 하지만 지연 씨는 스승님에 대한 존중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네요.”지연의 낯빛은 순식간에 변했다.“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날 가르치죠?”하연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자격까지는 아니고, 그저 좋은 마음에 경고하는 겁니다.”방금 하연의 말에 체면이 깎인 지연은 이내 안형준을 바라봤다.“교수님, 저...”하지만 안형준은 손을 휘휘 저으며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됐어. 이젠 우리도 늙었으니 젊은이들한테 무대를 넘겨줘야 할 때도 됐지. 그러니까 실력 제대로 보여줘. 사람들도 공정한 눈을 갖고 있으니 승부는 반드시 갈라질 테니까.’지연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빛이 어두워지며 아차 싶었다.‘매번 이 승부욕이 문제네. 하지만 뭐, 이기면 되는 거니까. 내가 반드시 이길 거야.’“최하연 씨, 우리 실력으로 승부 봐요. 사흘 뒤, 어떤 작품 내놓는지 두고 볼게요. 저한테도 하연 씨 실력 한번 보여 줘봐요.”“그래요. 작품으로 승부 봐요.”하연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서로를 마주 보는 두 쌍의 눈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그리고 얼마 뒤, 지연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별의별 상황을 접한 적 있고 익숙해진 터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을 보자 오히려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했다.심
회사로 돌아온 하연은 최근 급하지 않은 일정을 모두 뒤로 미루거나 유미한테 맡기고는 이번 패션쇼와 관련된 자료를 열심히 공부했다.밖은 어느덧 어둠이 드리웠지만 DS그룹 맨 꼭대기 사무실은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서류 한 뭉치를 안고 온 상혁은 유리 창 너머에서 저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하연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이윽고 노크를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바닥에 널브러진 디자인 원고였다. 상혁이 허리를 숙여 한 장 한 장 열심히 줍는 동안, 하연은 펜 끝을 입에 물고 수심에 잠겨 있었다.그러다 상혁을 발견한 순간 모든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진 듯 투덜댔다.“상혁 오빠, 어떡해요? 저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요.”상혁은 원고를 모두 정리해 하연에게 다가갔다.“떠오르지 않으면 잠깐 휴식해. 자기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런데 벌써 하루가 지나갔어요. 이제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그래요.”상혁은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빼앗으며 일으켜 세웠다.“잠깐만 휴식해. 나랑 어디 같이 좀 다녀오자.”“네? 어디 가는데요?”하연이 어리둥절해서 물었지만 상혁은 뭔가 숨기기라도 하는 듯 아무 말 없이 하연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에 도착하자 상혁은 말없이 하연을 조수석에 태웠다. 그러자 참지 못한 하연이 끝내 물었다.“상혁 오빠, 어디 가는데요?”“가면 알아.”상혁은 여전히 뜸을 들이더니 시동을 걸었다.창밖으로 언뜻언뜻 지나가는 건물을 보며 살살 부는 밤바람을 쐬니 복잡했던 마음은 어느새 조금씩 차분해졌다.그렇게 한참 달리니 차는 도시를 지나 웬 고풍스러운 거리에 이르렀다.상혁이 주차 구역을 찾아 차를 세우는 사이, 하연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시립문화전당? 여긴 왜 왔어요?”상혁은 시동을 끄고 차 키를 뽑았다.“가자, 영감 찾으러.”하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상혁을 봤지만 끝내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
상혁은 싱긋 웃었다.“응, 다른 거 더 볼래?”하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이것보다 더 재밌는 것도 있어요?”상혁은 또 뜸 들였다.“이따가 보면 알아.”곧이어 상혁은 하연을 데리고 반대편 거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경극 공연이 한창이었다.”하연은 상혁과 함께 자수공방에 들러 여러 가지 자수 작품을 보며 고전 문화를 느꼈다.그러다 맨 마지막에 도자기 공방에 들러 진열된 청자기를 보던 중, 하연은 눈이 번쩍이더니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나 이제 오빠가 왜 여기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아요.”청자기를 구경하던 하연은 저녁에 봤던 각종 공연과 하루 중일 연구했던 패션쇼 자료를 떠올리며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펜, 빨리 펜 줘요!”상혁은 다급히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만년필을 꺼내 하연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종이가 없자 하연은 애가 탔다.“어떡해요? 나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릴 데가 없어요!”하연은 말하면서 다시 도자기 공방으로 뛰어 들어가 안에 있던 티슈를 꺼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공방 주인은 그 상황을 보자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지금 뭐 하는 거죠?”그때 상혁이 지갑에서 현금 한 움큼을 꺼내 건네자 주인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하연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진지하게 머릿속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그려냈고, 상혁은 옆에서 조용히 함께 있어 주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원고 하나가 뚝딱 완성되자 하연은 그걸 들고 자랑하듯 상혁 앞에 대고 흔들었다.“자요! 청자기를 주제로 한 옷이에요. 어때요?”워낙 그림 솜씨가 좋은 데다, 청자기라는 독특한 원소가 섞이니 유니크 하면서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작품이 탄생하여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아주 좋아!”하연은 활짝 웃었다.“이번 패션쇼는 우리나라뿐마 아니라 해외 패션계에서도 과심을 갖고 있대요. 그러니까 이건 분명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이 기회에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패션에 섞으면 아
그날 밤, 깊은 잠에 빠진 하연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느릿느릿 잠에서 깨어났다.똑똑-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하연은 이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렸고,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그 동작 때문에 스르륵 흘러. 그제야 하연은 어젯밤 사무실에서 잠들었다는 걸 발견했다.“들어와요.”하연은 옷을 정리하고 난 뒤 문을 향해 말했다.말이 떨어지자마자 태훈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하연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최 대표님, 잘 주무셨어요?”“어, 그래.”하연이 짤막한 대답과 함께 의아한 눈빛을 보내오자 태훈은 얼른 설명했다.“이건 부 대표님이 저더러 준비하라고 한 거예요. 부 대표님 정말 세심한 분인 것 같아요. 대표님한테도 유독 신경 쓰는 것 같고요.”그 말에 얼굴이 붉어진 하연은 얼른 어색함을 숨기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랬더니 메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하연아, 잘 잤어? 내가 정 비서더러 아침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꼭 먹어.]그 말끝에는 웃는 얼굴이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그걸 본 하연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정말 가끔 보면 소녀 같다니까?’그 덕에 기분이 좋아진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아침 식사를 마친 하연은 디테일을 손보기 시작했다.그렇게 하루 종일 일만 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자, 하연은 디자인 원고를 들고 회사를 떠났다. 하연이 운전한 포르쉐가 회사를 떠나자마자 구석진 골목에 세워져 있던 벤틀리도 따라 시동을 걸었다.한창 운전하다가 주요 도로에 접어들 때, 하연은 무심코 제 뒤를 따라붙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그 차 번호가 너무나 익숙한 번호라는 걸 발견한 하연은 운전대를 꽉 쥐고는 엑셀을 밟았다.그러자 뒤따르던 서준도 엑셀을 밟으며 하연과 여전히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뒤 차가 끝까지 따라붙자 하연은 끝내 핸들을 꺾어 길가에 차를 세웠다.아니나 다를까, 그 차도 얼마 떨어진 곳에 그대로 멈춰 섰다.하연은 이내 차에서 내려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걸어와 그 차의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곧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