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깊은 잠에 빠진 하연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느릿느릿 잠에서 깨어났다.똑똑-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하연은 이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렸고,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그 동작 때문에 스르륵 흘러. 그제야 하연은 어젯밤 사무실에서 잠들었다는 걸 발견했다.“들어와요.”하연은 옷을 정리하고 난 뒤 문을 향해 말했다.말이 떨어지자마자 태훈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하연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최 대표님, 잘 주무셨어요?”“어, 그래.”하연이 짤막한 대답과 함께 의아한 눈빛을 보내오자 태훈은 얼른 설명했다.“이건 부 대표님이 저더러 준비하라고 한 거예요. 부 대표님 정말 세심한 분인 것 같아요. 대표님한테도 유독 신경 쓰는 것 같고요.”그 말에 얼굴이 붉어진 하연은 얼른 어색함을 숨기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랬더니 메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하연아, 잘 잤어? 내가 정 비서더러 아침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꼭 먹어.]그 말끝에는 웃는 얼굴이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그걸 본 하연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정말 가끔 보면 소녀 같다니까?’그 덕에 기분이 좋아진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아침 식사를 마친 하연은 디테일을 손보기 시작했다.그렇게 하루 종일 일만 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자, 하연은 디자인 원고를 들고 회사를 떠났다. 하연이 운전한 포르쉐가 회사를 떠나자마자 구석진 골목에 세워져 있던 벤틀리도 따라 시동을 걸었다.한창 운전하다가 주요 도로에 접어들 때, 하연은 무심코 제 뒤를 따라붙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그 차 번호가 너무나 익숙한 번호라는 걸 발견한 하연은 운전대를 꽉 쥐고는 엑셀을 밟았다.그러자 뒤따르던 서준도 엑셀을 밟으며 하연과 여전히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뒤 차가 끝까지 따라붙자 하연은 끝내 핸들을 꺾어 길가에 차를 세웠다.아니나 다를까, 그 차도 얼마 떨어진 곳에 그대로 멈춰 섰다.하연은 이내 차에서 내려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걸어와 그 차의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곧이어
서준도 질투했다는 걸 인정한다.심지어 부럽기까지 했다.“혹시 그 자식 좋아해?”서준은 하연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내뱉었다.“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라 한서준 씨랑 상관없잖아.”“그래?”서준은 하연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하연을 점점 차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하연은 이내 버둥대며 반항했다.“한서준, 이거 놔!”“말해. 부상혁 좋아하냐고.”“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내 자유야!”하연은 분노가 폭발했다.“말해! 최하연, 네 대답 듣고 싶어.”“좋아해. 아주 좋아해. 좋아서 미치겠어. 됐어?”하연은 끊임없이 발버둥 치며 마구 소리쳤다.그 말을 들은 순간, 시뻘겋게 충혈된 서준의 눈에 일순 절망이 스쳐 지났고, 심장은 마치 칼로 도려낸 듯 아파 났다.그 사이를 틈타, 하연은 서준한테서 벗어나 뒤로 물러서더니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게 한서준 씨랑 무슨 상관이지? 부상혁이 없다면 이상혁이 있을 거고, 이상혁이 없으면 장상혁이 있을 거야. 그게 누가 됐든 넌 절대 한서준 씨는 아닐 거야. 알겠어?”하연은 말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오랫동안 꾹꾹 눌러온 감정이 한순간 폭발했다.서준은 그 대답에 자조적인 미소를 짓더니 주먹으로 차 유리를 세게 내리쳤다. 그 순간 유리가 깨지며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고, 서준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하지만 하연은 보는 체도 하지 않고 뒤돌아 제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하연은 백미러로 서준을 봤지만 결국 고민도 없이 엑셀을 밟고 떠나버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지만 서준은 떠나가는 차를 바라보느라 완전히 무시했다.하지만 상대는 끈질기게 여러 번이나 전화를 걸어오자 결국 귀찮은 듯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이야?”“한 대표님, 민혜경 씨가 또 자살했다고 합니다.”‘또야?’서준은 입가에 비아냥 섞인 미소를 지었다.“좀 새로운 방법은 없대?”“아니, 이번에는 엄청
“오늘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투표권이 있으니, 표를 적게 받으면 바로 탈락이에요.”하연은 싱긋 미소 지었다. 지연과 경합하기로 결정했으니, 이런 룰은 당연히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원래부터 하연의 이런 태연하고 여유로운 느낌을 마음에 들어 하던 안형준은 만족하는 눈빛을 보냈다.지연은 하연을 오만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턱을 빳빳이 쳐들더니 자신 있게 제 디자인 원고를 꺼내 들었다.“최하연 씨도 도착했으니 모두 우리의 디자인을 봐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지연은 승권을 쥐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제 원고를 꺼내 들었다.지연이 자기의 디자인 원고를 빠짐없이 사람들 앞에 보여주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찬사를 보냈다.지연의 디자인 실력은 확실히 인정할만했다.디자인을 오래 한 게 작품에 한눈에 보이고, 디테일과 라인, 색상 처리 모두 우수했다.“역시 안 교수님 제자 답네. 이런 실력은 10년 정도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나오는 건데. 지연 양, 정말 놀랍네요.”“트렌드에도 부합되고 최근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인 데다 산듯하기까지 하니 지금 계절에 딱이네.”“흠잡을 데가 없는 디자인이야. 난 90점!”“...”지연은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며 어깨가 으쓱했다. 지연이 디자인한 옷은 모두 이번 패션쇼 주제와 부합되는 데다, 한 달 전부터 공을 들여 준비한 작품이다.때문에 사람들의 칭찬도 당연하게 느껴졌다.“교수님 생각은 어때요?”지연은 안형준한테 질문을 던졌다.지연의 디자인을 한번 훑은 안형준은 이미 마음속으로 점수를 매긴 상태다.물론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건 인정할 만했다.“아주 훌륭해. 사상도 진보적이고 스타일도 독특하고 기성복으로 만들면 시장 반응이 좋을 것 같아.”안형준의 평가를 듣자마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말했다.“그럼 저는 지연 양한테 투표하겠습니다.”“저도 지연 양한테 투표할게요.”“지연 양은 이 표를 가질 자격이 충분해요.”“...”눈 깜짝할 사
“이건... 청자기잖아?”“청자기를 패션에 녹아낸 건 또 처음 보네? 이렇게 놀라울 수가!”“우리나라의 독특한 원소를 섞어 우리만의 특색을 패션에 녹아 내다니, 놀랍군!”“어쩐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했더니. 저기 저거 보여요? 희곡 요소까지 섞었네요. 어쩜 이렇게 서로 다른 요소를 적절하게 섞을 수가 있지?”“이게 어떻게 옷입니까? 우리 선조의 전통문화를 선양하는 예술 작품이지. 이런 건 전시회에 전시해야죠.”“...”하연의 디자인을 본 순간 지연은 놀랍다는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HX국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지연은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현실을 자각한 순간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도 그럴 게, 지연의 작품은 해외에서 유행하는 요소를 섞어 전통문화는커녕 오히려 외국의 것을 선망하는 느낌을 준다. 심지어 조국 문화와 HX국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완전히 소홀히 했다.처음으로 국내에서 주최하는 패션쇼라면 당연히 본국의 문화를 널리 알려야 하는데, 그 하나만 놓고 봐도 지연의 작품은 완전히 주제에서 벗어났다.그 순간, 지연은 자기가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걸 인지했다.“안 교수님, 역시 전문가라 그런지 보는 눈이 남다르네요. 어디서 이렇게 훌륭한 인재를 발굴했나요?”“이렇게 대범하고 훌륭한 작품이야말로 우리 국민의 자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연 양은 이번 패션쇼 메인 디자이너로 손색없는 듯합니다.”“저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연 양에게 투표하겠습니다.”“저도 하연 양에게 투표하죠.”“...”군중의 눈은 역시나 맑고 깨끗했다.더 훌륭한 작품을 보자 사람들의 태도는 곧바로 바뀌었다.결국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연은 큰 표 차이로 경합에서 압승했고, 지연은 마음이 아팠지만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교수님, 제가 졌습니다. 최하연 씨, 이번 메인 디자이너는 하연 씨가 더 적합한 것 같네요.”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감사합니다.”“최하연 씨, 메인 디자이너가 되었으니 팀 잘 이끌어 이번 패션쇼 멋지게
그때 안형준이 말을 이었다.“내가 볼 때 따로 업체 구할 필요도 없을 것 같던데. 제작과 후속 주문 생산 모두 DS그룹에서 한 번 맡아봐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하연의 눈은 반짝 빛났다.이렇게 된다면 DS그룹 실적이 또 증가하는 셈이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연은 너무 벅차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고맙습니다, 안 교수님.”“나한테 뭐 그렇게 예의를 차려요? 나도 하연 양 같은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 이러는 건데. 하연 양 같은 인재를 썩히기 아까워서 그래요.”말 한마디 한마디 모두 저를 인정해 주는 안형준의 말에 하연은 조금 쑥스러워졌다.“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하하하, 정말 마음에 든다니까!”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이내 냄새를 맡았다.무려 2년 전부터 안형준이 마지막 제자를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에 디자인계 인재란 인재가 벌 떼처럼 모여들었던 적이 있다. 심지어 B시 수많은 대학의 디자인과 학생들이 안형준의 제자가 되기 위해 수도 없이 방문했었다.하지만 안형준은 누구 하나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그 기호를 하연이 차지한 듯싶다.그걸 본 사람들은 모두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며 좋은 운명을 갖고 태어난 하연을 부러워했다....그 시각, 서준이 병원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한 대표님, 오셨어요? 민혜경 씨 이제 무사해요. 방금 병실로 옮겨졌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서준은 발걸음을 우뚝 멈추며 비아냥거리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방금까지 위독하다더니 이렇게 빨리 괜찮아졌어?”동후도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사실 그도 혜경이 의사와 짜고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한 대표님, 민혜경 씨 보고 가지 않으세요?”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온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괜찮다면서. 그럼 됐잖아.”말을 마친 서준은 고민도 없이 뒤돌았지만 비서가 앞을 가로막았다.“한 대표님, 그래도 한 번 보고 가세요. 만약 대표님이 민혜경 씨 보고 가지 않으면 또 무슨 짓을 할
그러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나 연기한 거 아니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서준 씨 못 볼 것 같아서.”“보면 어쩔 건데? 아직도 내 앞에서 가식 떠는 거야?”서준은 눈에 드리운 증오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만약 민혜경만 아니었다면 그도 하연과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다.혜경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을 내밀어 서준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서준은 귀찮다는 듯 쳐냈다.그러자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왜? 이젠 손도 못 대게 하는 거야? 한씨 가문이 민씨 가문한테 빚졌다는 건 영원히 잊으면 안 돼! 그 빚은 평생 갚아야 한다고!”서준은 말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서준이 그동안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던 것도 이 이유로, 혜경도 이 이유 때문에 서준을 손아귀에 잡고 있었다.“말도 너무 여러 번 하면 효과가 없어.”서준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그러자 혜경은 더 이상 길이 없다는 듯 밀어붙였다.“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야. 서준 씨, 우리 거래하자.”혜경은 일부러 목소리를 내리깔더니 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낮게 말했다.“서준 씨가 우리 민씨 가문에 빚 갚으려는 거 알아. 그러니까 한꺼번에 갚을 기회를 줄게. 나 여기서 빼내 줘. 나 더 이상 감옥에 있기 싫어. 서준 씨가 내 목숨 살려주면 우리 두 가문 간의 빚은 없는 셈 쳐줄게.”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긴 했다.“서준 씨, 잘 생각해. 이건 한씨 가문에 아무 일도 아니잖아. 좋은 변호사 구해서 내 사건 뒤집어 줘, 날 미리 빼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하, 계속 죄짓고 다닐 거 아는데, 풀어달라고?”서준은 혜경의 요구가 우스웠다.그러나 혜경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아니야, 나 잘 살 거야. 이번에 나가면 B시도 떠날 거고, 다시 서준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최하연과 만나는 거 방해하지 않을게, 두 사람이 어떻게 살든 상관 안 해. 그냥 나 살길만 마련해줘.”하연을 언급하자 서준의 표정은 그제야 미세하게 변했다. 혜경 때문에
혜경은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당장이라도 하연을 갈가갈기 찢고 싶었다.여기까지 들은 서준은 미련도 없이 혜경을 밀어버렸다.혜경이 이렇게 지독한 말을 내뱉은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하지지만 서준은 더 이상 혜경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미련도 없이 뒤돌아섰다.심지어 등 뒤에서 혜경이 어떻게 소리치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병실을 나서자마자 복도에 있는 민진현과 마주친 서준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불과 몇 달 사이에 민진현은 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귀밑머리에 희끗희끗한 백발이 자라났고, 얼굴은 흙빛이 감돌았다.혜경이 광기를 부린 걸 알 리 없는 민진현은 두 사람이 얘기가 잘 된 줄 알고 싱긋 웃었다.살짝 치켜 올린 눈썹과 말아 올린 입꼬리, 여전히 반짝이는 눈을 보면 마치 방금 본 모습이 허상 같았다.“나도 혜경이 말에 동의하네.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지 않겠나? 아주 공평한 거래라고 생각하는데.”서준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계산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민 회장님. 나이도 있으신 분이 젊은 사람들 일에 끼어들어서야 되겠어요?”한창 얘기하던 서준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재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참, 잊을 뻔했네요. 민씨 가문이 요즘 일상생활도 어렵다면서요? 그런데 뭐, 괜찮아요. 70이 넘는 나이에 일자리 찾으러 다닌다고 비웃을 사람은 없으니까.”그 말은 민진현의 심기를 세게 긁어버렸다.“한서준... 이 못된 놈!”서준은 민진현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곧게 편 채로 미련없이 떠나갔다.차에 앉은 서준은 저도 모르게 창밖을 내다봤다.이제야 혜경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서준은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지난 3년 동안, 하연을 무시하고, 혜경 때문에 제 옆에서 밀어낸 걸 생각하니 서준은 저 자신이 한심했다.‘한서준, 너 정말 터무니없이 틀렸어.’이 순간, 서준은 하연이 무척 보고 싶었다. 곧이어
곧이어 지연은 하연을 망가트려야 한다는 충동에 저도 모르게 엑셀을 밟았다.이 순간, 지연의 머릿속에는 하연만 세상에서 사라지만 수석 디자이너 자리도, 교수님의 제자 자리도 자기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그래, 그렇게만 되면 이제 아무도 내 자리 못 넘봐.’지연은 핸들을 꽉 잡으며 계획을 세웠다.그때, 벤틀리 한 대가 갑자기 하연의 앞을 갈고 막았고, 그와 동시 지연의 동작도 그대로 멈췄다.동후를 시켜 하연의 위치를 파악한 서준은 거의 폭주하듯 여기까지 달려왔다.그러고 나서 차를 멈춰 세우고는 다급하게 차 문에서 내렸다.그걸 본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껌딱지야 뭐야? 왜 자꾸만 따라다녀?’“최하연!”하연을 본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서준의 마음은 순간 무너졌다.이 순간 서준은 하연에게 모든 걸 되갚아주고, 자기가 했던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한 대표님, 할 일이 그렇게 없어요?”하연은 서준과 말을 섞기도 싫은 듯 대충 물었다.그러자 서준이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최하연, 지난 일은 이미 다 지났으니 나랑 친구로 지낼 수는 없어?”하연은 심지어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지금 장난하는 건가? 나랑 한서준과 친구?’“한 대표님, 술 취했어요?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됐나?”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연을 그윽하게 바라봤다.“최하연, 내 말 끝까지 들어. 전에 민혜경 때문에 우리 사이 너무 많은 오해가 쌓였어. 이제 민혜경도 벌을 받았고, 나와 민혜경도 아무 사이 아니야. 그러니 너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 친구부터...”“하.”하연은 가볍게 웃었다.“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 친구 많아. 그리고 내가 친구 사귀는 기준이 많이 까다롭거든. 아무하고나 친구 안 해.”서준은 하연의 신랄한 풍자와 명확한 거절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그런데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만회하려고 친구로 지내자는 건데,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게 억울했다.“설마 내가 한서준 씨 미워하는 게 민혜경 때문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송혜선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솔직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채고 하나하나 넘겨봤다. 사진마다 담긴 장면이 송혜선을 점점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 최씨 가문의 귀한 딸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니,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사진 속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고한 분위기, 남다른 기품까지...비록 사진에는 전부 뒷모습만 담겨 있었지만,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송혜선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모든 사진을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친한 남녀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선을 넘은 정황은 없잖아. 겉보기엔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정다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설 탐정을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사진 속 ‘한명준’이라는 남자와 하연 이 둘 사이에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님, 이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다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바로 B시 한씨 가문의 사람이란다.” “B시 한씨 가문?”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하연의 전 남편이 한씨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한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최하연의 전남편은 감옥에 간 걸로 아는데, 또 다른 한씨 가문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복잡한 사연이 많았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다영은 하연과 ‘한명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일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부상혁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남자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자일 뿐인데, 너무 똑똑하면 손해만 볼 뿐이에요.” 남준이 허징인에게 다가가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이제 줘야 하지 않겠어요?” 허징인은 차갑게 비웃으며 얼굴을 굳혔다. “뭐가 그렇게 겁나십니까, 상무님? 제가 약속을 어길까 봐요? 아니면... 그 물건들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요?” “그건 사모님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죠.” 남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징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고, 속으로는 분이 차올랐지만, 상황을 감안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최선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상무님. 이미 약속한 이상, 전 제 말을 반드시 지킬 겁니다.” 허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남준과 눈을 맞췄다. “상무님도 본인의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남준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가 반은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드릴게요.” “안 돼요!” 남준이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사모님한테는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허징인은 눈을 감고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절 죽이세요. 하지만 제가 죽으면 그 물건들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두세요.” “엄마!” 곁에 있던 민찬이 울먹이며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무서워요!” 허징인은 민찬을 꼭 안으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물러서면 끝장이야. 적어도 내 아이는 지켜야 해.’ “상무님,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남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묵했다. 남자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잠시 후 말했다. “죽음도 불사하다니, 사모님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
집에 돌아온 하연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침실 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하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가정부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문틈 사이로 방 안의 하연을 흘깃 바라보며 손으로 가정부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가정부가 물러난 뒤, 상혁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상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는데, 원신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그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상혁은 짧은 문장을 확인한 뒤,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우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마치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이내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하연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상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할 때 마셔.”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우유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회사에 좀 다녀올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상혁은 하연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이 밤중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하연은 살짝 의아해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자는 고개를 숙여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이 난 참 행복해.” 상혁의 눈에는 하연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이 행복이 오래가길,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하연은 상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안기며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요. 정말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