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은 싱긋 웃었다.“응, 다른 거 더 볼래?”하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이것보다 더 재밌는 것도 있어요?”상혁은 또 뜸 들였다.“이따가 보면 알아.”곧이어 상혁은 하연을 데리고 반대편 거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경극 공연이 한창이었다.”하연은 상혁과 함께 자수공방에 들러 여러 가지 자수 작품을 보며 고전 문화를 느꼈다.그러다 맨 마지막에 도자기 공방에 들러 진열된 청자기를 보던 중, 하연은 눈이 번쩍이더니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나 이제 오빠가 왜 여기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아요.”청자기를 구경하던 하연은 저녁에 봤던 각종 공연과 하루 중일 연구했던 패션쇼 자료를 떠올리며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펜, 빨리 펜 줘요!”상혁은 다급히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만년필을 꺼내 하연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종이가 없자 하연은 애가 탔다.“어떡해요? 나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릴 데가 없어요!”하연은 말하면서 다시 도자기 공방으로 뛰어 들어가 안에 있던 티슈를 꺼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공방 주인은 그 상황을 보자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지금 뭐 하는 거죠?”그때 상혁이 지갑에서 현금 한 움큼을 꺼내 건네자 주인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하연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진지하게 머릿속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그려냈고, 상혁은 옆에서 조용히 함께 있어 주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원고 하나가 뚝딱 완성되자 하연은 그걸 들고 자랑하듯 상혁 앞에 대고 흔들었다.“자요! 청자기를 주제로 한 옷이에요. 어때요?”워낙 그림 솜씨가 좋은 데다, 청자기라는 독특한 원소가 섞이니 유니크 하면서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작품이 탄생하여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아주 좋아!”하연은 활짝 웃었다.“이번 패션쇼는 우리나라뿐마 아니라 해외 패션계에서도 과심을 갖고 있대요. 그러니까 이건 분명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이 기회에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패션에 섞으면 아
그날 밤, 깊은 잠에 빠진 하연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느릿느릿 잠에서 깨어났다.똑똑-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하연은 이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렸고,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그 동작 때문에 스르륵 흘러. 그제야 하연은 어젯밤 사무실에서 잠들었다는 걸 발견했다.“들어와요.”하연은 옷을 정리하고 난 뒤 문을 향해 말했다.말이 떨어지자마자 태훈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하연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최 대표님, 잘 주무셨어요?”“어, 그래.”하연이 짤막한 대답과 함께 의아한 눈빛을 보내오자 태훈은 얼른 설명했다.“이건 부 대표님이 저더러 준비하라고 한 거예요. 부 대표님 정말 세심한 분인 것 같아요. 대표님한테도 유독 신경 쓰는 것 같고요.”그 말에 얼굴이 붉어진 하연은 얼른 어색함을 숨기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랬더니 메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하연아, 잘 잤어? 내가 정 비서더러 아침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꼭 먹어.]그 말끝에는 웃는 얼굴이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그걸 본 하연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정말 가끔 보면 소녀 같다니까?’그 덕에 기분이 좋아진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아침 식사를 마친 하연은 디테일을 손보기 시작했다.그렇게 하루 종일 일만 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자, 하연은 디자인 원고를 들고 회사를 떠났다. 하연이 운전한 포르쉐가 회사를 떠나자마자 구석진 골목에 세워져 있던 벤틀리도 따라 시동을 걸었다.한창 운전하다가 주요 도로에 접어들 때, 하연은 무심코 제 뒤를 따라붙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그 차 번호가 너무나 익숙한 번호라는 걸 발견한 하연은 운전대를 꽉 쥐고는 엑셀을 밟았다.그러자 뒤따르던 서준도 엑셀을 밟으며 하연과 여전히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뒤 차가 끝까지 따라붙자 하연은 끝내 핸들을 꺾어 길가에 차를 세웠다.아니나 다를까, 그 차도 얼마 떨어진 곳에 그대로 멈춰 섰다.하연은 이내 차에서 내려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걸어와 그 차의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곧이어
서준도 질투했다는 걸 인정한다.심지어 부럽기까지 했다.“혹시 그 자식 좋아해?”서준은 하연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내뱉었다.“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라 한서준 씨랑 상관없잖아.”“그래?”서준은 하연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하연을 점점 차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하연은 이내 버둥대며 반항했다.“한서준, 이거 놔!”“말해. 부상혁 좋아하냐고.”“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내 자유야!”하연은 분노가 폭발했다.“말해! 최하연, 네 대답 듣고 싶어.”“좋아해. 아주 좋아해. 좋아서 미치겠어. 됐어?”하연은 끊임없이 발버둥 치며 마구 소리쳤다.그 말을 들은 순간, 시뻘겋게 충혈된 서준의 눈에 일순 절망이 스쳐 지났고, 심장은 마치 칼로 도려낸 듯 아파 났다.그 사이를 틈타, 하연은 서준한테서 벗어나 뒤로 물러서더니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게 한서준 씨랑 무슨 상관이지? 부상혁이 없다면 이상혁이 있을 거고, 이상혁이 없으면 장상혁이 있을 거야. 그게 누가 됐든 넌 절대 한서준 씨는 아닐 거야. 알겠어?”하연은 말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오랫동안 꾹꾹 눌러온 감정이 한순간 폭발했다.서준은 그 대답에 자조적인 미소를 짓더니 주먹으로 차 유리를 세게 내리쳤다. 그 순간 유리가 깨지며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고, 서준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하지만 하연은 보는 체도 하지 않고 뒤돌아 제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하연은 백미러로 서준을 봤지만 결국 고민도 없이 엑셀을 밟고 떠나버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지만 서준은 떠나가는 차를 바라보느라 완전히 무시했다.하지만 상대는 끈질기게 여러 번이나 전화를 걸어오자 결국 귀찮은 듯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이야?”“한 대표님, 민혜경 씨가 또 자살했다고 합니다.”‘또야?’서준은 입가에 비아냥 섞인 미소를 지었다.“좀 새로운 방법은 없대?”“아니, 이번에는 엄청
“오늘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투표권이 있으니, 표를 적게 받으면 바로 탈락이에요.”하연은 싱긋 미소 지었다. 지연과 경합하기로 결정했으니, 이런 룰은 당연히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원래부터 하연의 이런 태연하고 여유로운 느낌을 마음에 들어 하던 안형준은 만족하는 눈빛을 보냈다.지연은 하연을 오만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턱을 빳빳이 쳐들더니 자신 있게 제 디자인 원고를 꺼내 들었다.“최하연 씨도 도착했으니 모두 우리의 디자인을 봐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지연은 승권을 쥐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제 원고를 꺼내 들었다.지연이 자기의 디자인 원고를 빠짐없이 사람들 앞에 보여주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찬사를 보냈다.지연의 디자인 실력은 확실히 인정할만했다.디자인을 오래 한 게 작품에 한눈에 보이고, 디테일과 라인, 색상 처리 모두 우수했다.“역시 안 교수님 제자 답네. 이런 실력은 10년 정도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나오는 건데. 지연 양, 정말 놀랍네요.”“트렌드에도 부합되고 최근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인 데다 산듯하기까지 하니 지금 계절에 딱이네.”“흠잡을 데가 없는 디자인이야. 난 90점!”“...”지연은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며 어깨가 으쓱했다. 지연이 디자인한 옷은 모두 이번 패션쇼 주제와 부합되는 데다, 한 달 전부터 공을 들여 준비한 작품이다.때문에 사람들의 칭찬도 당연하게 느껴졌다.“교수님 생각은 어때요?”지연은 안형준한테 질문을 던졌다.지연의 디자인을 한번 훑은 안형준은 이미 마음속으로 점수를 매긴 상태다.물론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건 인정할 만했다.“아주 훌륭해. 사상도 진보적이고 스타일도 독특하고 기성복으로 만들면 시장 반응이 좋을 것 같아.”안형준의 평가를 듣자마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말했다.“그럼 저는 지연 양한테 투표하겠습니다.”“저도 지연 양한테 투표할게요.”“지연 양은 이 표를 가질 자격이 충분해요.”“...”눈 깜짝할 사
“이건... 청자기잖아?”“청자기를 패션에 녹아낸 건 또 처음 보네? 이렇게 놀라울 수가!”“우리나라의 독특한 원소를 섞어 우리만의 특색을 패션에 녹아 내다니, 놀랍군!”“어쩐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했더니. 저기 저거 보여요? 희곡 요소까지 섞었네요. 어쩜 이렇게 서로 다른 요소를 적절하게 섞을 수가 있지?”“이게 어떻게 옷입니까? 우리 선조의 전통문화를 선양하는 예술 작품이지. 이런 건 전시회에 전시해야죠.”“...”하연의 디자인을 본 순간 지연은 놀랍다는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HX국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지연은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현실을 자각한 순간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도 그럴 게, 지연의 작품은 해외에서 유행하는 요소를 섞어 전통문화는커녕 오히려 외국의 것을 선망하는 느낌을 준다. 심지어 조국 문화와 HX국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완전히 소홀히 했다.처음으로 국내에서 주최하는 패션쇼라면 당연히 본국의 문화를 널리 알려야 하는데, 그 하나만 놓고 봐도 지연의 작품은 완전히 주제에서 벗어났다.그 순간, 지연은 자기가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걸 인지했다.“안 교수님, 역시 전문가라 그런지 보는 눈이 남다르네요. 어디서 이렇게 훌륭한 인재를 발굴했나요?”“이렇게 대범하고 훌륭한 작품이야말로 우리 국민의 자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연 양은 이번 패션쇼 메인 디자이너로 손색없는 듯합니다.”“저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연 양에게 투표하겠습니다.”“저도 하연 양에게 투표하죠.”“...”군중의 눈은 역시나 맑고 깨끗했다.더 훌륭한 작품을 보자 사람들의 태도는 곧바로 바뀌었다.결국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연은 큰 표 차이로 경합에서 압승했고, 지연은 마음이 아팠지만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교수님, 제가 졌습니다. 최하연 씨, 이번 메인 디자이너는 하연 씨가 더 적합한 것 같네요.”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감사합니다.”“최하연 씨, 메인 디자이너가 되었으니 팀 잘 이끌어 이번 패션쇼 멋지게
그때 안형준이 말을 이었다.“내가 볼 때 따로 업체 구할 필요도 없을 것 같던데. 제작과 후속 주문 생산 모두 DS그룹에서 한 번 맡아봐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하연의 눈은 반짝 빛났다.이렇게 된다면 DS그룹 실적이 또 증가하는 셈이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연은 너무 벅차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고맙습니다, 안 교수님.”“나한테 뭐 그렇게 예의를 차려요? 나도 하연 양 같은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 이러는 건데. 하연 양 같은 인재를 썩히기 아까워서 그래요.”말 한마디 한마디 모두 저를 인정해 주는 안형준의 말에 하연은 조금 쑥스러워졌다.“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하하하, 정말 마음에 든다니까!”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이내 냄새를 맡았다.무려 2년 전부터 안형준이 마지막 제자를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에 디자인계 인재란 인재가 벌 떼처럼 모여들었던 적이 있다. 심지어 B시 수많은 대학의 디자인과 학생들이 안형준의 제자가 되기 위해 수도 없이 방문했었다.하지만 안형준은 누구 하나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그 기호를 하연이 차지한 듯싶다.그걸 본 사람들은 모두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며 좋은 운명을 갖고 태어난 하연을 부러워했다....그 시각, 서준이 병원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한 대표님, 오셨어요? 민혜경 씨 이제 무사해요. 방금 병실로 옮겨졌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서준은 발걸음을 우뚝 멈추며 비아냥거리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방금까지 위독하다더니 이렇게 빨리 괜찮아졌어?”동후도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사실 그도 혜경이 의사와 짜고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한 대표님, 민혜경 씨 보고 가지 않으세요?”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온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괜찮다면서. 그럼 됐잖아.”말을 마친 서준은 고민도 없이 뒤돌았지만 비서가 앞을 가로막았다.“한 대표님, 그래도 한 번 보고 가세요. 만약 대표님이 민혜경 씨 보고 가지 않으면 또 무슨 짓을 할
그러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나 연기한 거 아니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서준 씨 못 볼 것 같아서.”“보면 어쩔 건데? 아직도 내 앞에서 가식 떠는 거야?”서준은 눈에 드리운 증오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만약 민혜경만 아니었다면 그도 하연과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다.혜경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을 내밀어 서준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서준은 귀찮다는 듯 쳐냈다.그러자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왜? 이젠 손도 못 대게 하는 거야? 한씨 가문이 민씨 가문한테 빚졌다는 건 영원히 잊으면 안 돼! 그 빚은 평생 갚아야 한다고!”서준은 말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서준이 그동안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던 것도 이 이유로, 혜경도 이 이유 때문에 서준을 손아귀에 잡고 있었다.“말도 너무 여러 번 하면 효과가 없어.”서준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그러자 혜경은 더 이상 길이 없다는 듯 밀어붙였다.“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야. 서준 씨, 우리 거래하자.”혜경은 일부러 목소리를 내리깔더니 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낮게 말했다.“서준 씨가 우리 민씨 가문에 빚 갚으려는 거 알아. 그러니까 한꺼번에 갚을 기회를 줄게. 나 여기서 빼내 줘. 나 더 이상 감옥에 있기 싫어. 서준 씨가 내 목숨 살려주면 우리 두 가문 간의 빚은 없는 셈 쳐줄게.”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긴 했다.“서준 씨, 잘 생각해. 이건 한씨 가문에 아무 일도 아니잖아. 좋은 변호사 구해서 내 사건 뒤집어 줘, 날 미리 빼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하, 계속 죄짓고 다닐 거 아는데, 풀어달라고?”서준은 혜경의 요구가 우스웠다.그러나 혜경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아니야, 나 잘 살 거야. 이번에 나가면 B시도 떠날 거고, 다시 서준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최하연과 만나는 거 방해하지 않을게, 두 사람이 어떻게 살든 상관 안 해. 그냥 나 살길만 마련해줘.”하연을 언급하자 서준의 표정은 그제야 미세하게 변했다. 혜경 때문에
혜경은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당장이라도 하연을 갈가갈기 찢고 싶었다.여기까지 들은 서준은 미련도 없이 혜경을 밀어버렸다.혜경이 이렇게 지독한 말을 내뱉은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하지지만 서준은 더 이상 혜경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미련도 없이 뒤돌아섰다.심지어 등 뒤에서 혜경이 어떻게 소리치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병실을 나서자마자 복도에 있는 민진현과 마주친 서준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불과 몇 달 사이에 민진현은 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귀밑머리에 희끗희끗한 백발이 자라났고, 얼굴은 흙빛이 감돌았다.혜경이 광기를 부린 걸 알 리 없는 민진현은 두 사람이 얘기가 잘 된 줄 알고 싱긋 웃었다.살짝 치켜 올린 눈썹과 말아 올린 입꼬리, 여전히 반짝이는 눈을 보면 마치 방금 본 모습이 허상 같았다.“나도 혜경이 말에 동의하네.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지 않겠나? 아주 공평한 거래라고 생각하는데.”서준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계산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민 회장님. 나이도 있으신 분이 젊은 사람들 일에 끼어들어서야 되겠어요?”한창 얘기하던 서준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재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참, 잊을 뻔했네요. 민씨 가문이 요즘 일상생활도 어렵다면서요? 그런데 뭐, 괜찮아요. 70이 넘는 나이에 일자리 찾으러 다닌다고 비웃을 사람은 없으니까.”그 말은 민진현의 심기를 세게 긁어버렸다.“한서준... 이 못된 놈!”서준은 민진현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곧게 편 채로 미련없이 떠나갔다.차에 앉은 서준은 저도 모르게 창밖을 내다봤다.이제야 혜경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서준은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지난 3년 동안, 하연을 무시하고, 혜경 때문에 제 옆에서 밀어낸 걸 생각하니 서준은 저 자신이 한심했다.‘한서준, 너 정말 터무니없이 틀렸어.’이 순간, 서준은 하연이 무척 보고 싶었다. 곧이어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