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나 연기한 거 아니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서준 씨 못 볼 것 같아서.”“보면 어쩔 건데? 아직도 내 앞에서 가식 떠는 거야?”서준은 눈에 드리운 증오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만약 민혜경만 아니었다면 그도 하연과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다.혜경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을 내밀어 서준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서준은 귀찮다는 듯 쳐냈다.그러자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왜? 이젠 손도 못 대게 하는 거야? 한씨 가문이 민씨 가문한테 빚졌다는 건 영원히 잊으면 안 돼! 그 빚은 평생 갚아야 한다고!”서준은 말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서준이 그동안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던 것도 이 이유로, 혜경도 이 이유 때문에 서준을 손아귀에 잡고 있었다.“말도 너무 여러 번 하면 효과가 없어.”서준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그러자 혜경은 더 이상 길이 없다는 듯 밀어붙였다.“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야. 서준 씨, 우리 거래하자.”혜경은 일부러 목소리를 내리깔더니 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낮게 말했다.“서준 씨가 우리 민씨 가문에 빚 갚으려는 거 알아. 그러니까 한꺼번에 갚을 기회를 줄게. 나 여기서 빼내 줘. 나 더 이상 감옥에 있기 싫어. 서준 씨가 내 목숨 살려주면 우리 두 가문 간의 빚은 없는 셈 쳐줄게.”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긴 했다.“서준 씨, 잘 생각해. 이건 한씨 가문에 아무 일도 아니잖아. 좋은 변호사 구해서 내 사건 뒤집어 줘, 날 미리 빼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하, 계속 죄짓고 다닐 거 아는데, 풀어달라고?”서준은 혜경의 요구가 우스웠다.그러나 혜경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아니야, 나 잘 살 거야. 이번에 나가면 B시도 떠날 거고, 다시 서준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최하연과 만나는 거 방해하지 않을게, 두 사람이 어떻게 살든 상관 안 해. 그냥 나 살길만 마련해줘.”하연을 언급하자 서준의 표정은 그제야 미세하게 변했다. 혜경 때문에
혜경은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당장이라도 하연을 갈가갈기 찢고 싶었다.여기까지 들은 서준은 미련도 없이 혜경을 밀어버렸다.혜경이 이렇게 지독한 말을 내뱉은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하지지만 서준은 더 이상 혜경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미련도 없이 뒤돌아섰다.심지어 등 뒤에서 혜경이 어떻게 소리치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병실을 나서자마자 복도에 있는 민진현과 마주친 서준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불과 몇 달 사이에 민진현은 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귀밑머리에 희끗희끗한 백발이 자라났고, 얼굴은 흙빛이 감돌았다.혜경이 광기를 부린 걸 알 리 없는 민진현은 두 사람이 얘기가 잘 된 줄 알고 싱긋 웃었다.살짝 치켜 올린 눈썹과 말아 올린 입꼬리, 여전히 반짝이는 눈을 보면 마치 방금 본 모습이 허상 같았다.“나도 혜경이 말에 동의하네.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지 않겠나? 아주 공평한 거래라고 생각하는데.”서준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계산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민 회장님. 나이도 있으신 분이 젊은 사람들 일에 끼어들어서야 되겠어요?”한창 얘기하던 서준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재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참, 잊을 뻔했네요. 민씨 가문이 요즘 일상생활도 어렵다면서요? 그런데 뭐, 괜찮아요. 70이 넘는 나이에 일자리 찾으러 다닌다고 비웃을 사람은 없으니까.”그 말은 민진현의 심기를 세게 긁어버렸다.“한서준... 이 못된 놈!”서준은 민진현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곧게 편 채로 미련없이 떠나갔다.차에 앉은 서준은 저도 모르게 창밖을 내다봤다.이제야 혜경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서준은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지난 3년 동안, 하연을 무시하고, 혜경 때문에 제 옆에서 밀어낸 걸 생각하니 서준은 저 자신이 한심했다.‘한서준, 너 정말 터무니없이 틀렸어.’이 순간, 서준은 하연이 무척 보고 싶었다. 곧이어
곧이어 지연은 하연을 망가트려야 한다는 충동에 저도 모르게 엑셀을 밟았다.이 순간, 지연의 머릿속에는 하연만 세상에서 사라지만 수석 디자이너 자리도, 교수님의 제자 자리도 자기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그래, 그렇게만 되면 이제 아무도 내 자리 못 넘봐.’지연은 핸들을 꽉 잡으며 계획을 세웠다.그때, 벤틀리 한 대가 갑자기 하연의 앞을 갈고 막았고, 그와 동시 지연의 동작도 그대로 멈췄다.동후를 시켜 하연의 위치를 파악한 서준은 거의 폭주하듯 여기까지 달려왔다.그러고 나서 차를 멈춰 세우고는 다급하게 차 문에서 내렸다.그걸 본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껌딱지야 뭐야? 왜 자꾸만 따라다녀?’“최하연!”하연을 본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서준의 마음은 순간 무너졌다.이 순간 서준은 하연에게 모든 걸 되갚아주고, 자기가 했던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한 대표님, 할 일이 그렇게 없어요?”하연은 서준과 말을 섞기도 싫은 듯 대충 물었다.그러자 서준이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최하연, 지난 일은 이미 다 지났으니 나랑 친구로 지낼 수는 없어?”하연은 심지어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지금 장난하는 건가? 나랑 한서준과 친구?’“한 대표님, 술 취했어요?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됐나?”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연을 그윽하게 바라봤다.“최하연, 내 말 끝까지 들어. 전에 민혜경 때문에 우리 사이 너무 많은 오해가 쌓였어. 이제 민혜경도 벌을 받았고, 나와 민혜경도 아무 사이 아니야. 그러니 너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 친구부터...”“하.”하연은 가볍게 웃었다.“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 친구 많아. 그리고 내가 친구 사귀는 기준이 많이 까다롭거든. 아무하고나 친구 안 해.”서준은 하연의 신랄한 풍자와 명확한 거절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그런데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만회하려고 친구로 지내자는 건데,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게 억울했다.“설마 내가 한서준 씨 미워하는 게 민혜경 때문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서준은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이래서 기회조차 안 주는 거였어?’서준은 이제야 상황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번져, 하연을 영영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처음 느껴보는 이런 감각에 서준은 당황하기만 했다.그런데 그때.지연의 차가 갑자기 서준의 옆을 쌩하고 지났다.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리고 돌아본 서준은 하연이 떠나간 방향으로 뒤쫓는 차량을 보며 왠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곧이어 서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뒤를 쫓았다.그 시각, 하연은 운전을 하면서 예나와 통화하는 중이었다.“내 디자인이 뽑혔어. 올해 B시에서 진행하는 패션쇼 수석 디자이너 자리도 따냈어.”그 소식에 예나는 제 일처럼 기뻐했다.“어머! 너무 잘됐다! 오늘 저녁 축하 파티 어때?”하연이 다급히 대답했다.“나 저녁에 상혁 오빠랑 약속 잡았어.”“오? 뭐야, 뭐야? 당장 사실대로 말해.”하연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무슨 생각 하는 거야? 우리 친남매 같은 사이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하지만 그걸 믿을 예나가 아니었다.“쯧쯧, 이런 건 원래 당사자가 모르는 거야! 그런데 상혁 오빠라면 네 그 전남편보다 백배는 낫지 않아? 너 눈은 제대로 달렸냐? 그런 남자 만나더니, 이번에 이렇게 좋은 남자 놓쳐봐, 앞으로 평생 노처녀로 살아야 할 거야.”“그럼 노처녀로 평생 살지 뭐.”하연의 농담에 예나는 다급하게 말했다.“야! 최하연, 너 솔직히 말해. 설마 아직도 한서준 그 자식 마음에 두고 있는 거 아니지?”“아니야.”“그럼 왜 이러는데?”하연은 입을 꾹 다물고 멀리 내다봤다. 이제 서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한 건 확실했지만, 3년이란 세월을 허비하고 그렇게 험난한 결혼 생활을 하고 나니 더 이상 사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야, 말해 봐!”“됐어. 감정은 순리에 따르는 거야. 지금은 그냥 내 회사 실적 올리고, 이번 패션쇼 성공적으로 이끄는 게 목표야.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려고.”말이 끝나자마자 하연의
“한서준!”하연이 목청이 쉬어라 소리쳤지만 서준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한편, 운전석에 앉아 있던 지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멍해졌다.그도 그럴 게, 중도에 갑자기 다른 차가 뛰어들어 하연을 구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하지만 더 이상 현장에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판단하에 지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망가진 차를 끌고 쏜살같이 현장에서 도망쳤다.“여보세요? 구급 센터죠? 여기 교통사고가 났어요. 빈강로 3단...”하연은 애써 진정하며 구급차를 불렀지만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서준을 보자 두 손이 떨렸다.다행히 구급차는 곧바로 도착했고, 서준은 제때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병원 복도에 도착하자 하연은 점차 진정을 되찾고 태훈에게 전화했다.“정비서, 나 교통사고 났어.”전화 건너편에 있던 태훈은 그 말에 벌떡 일어났다.“몸은 어때요? 지금 어딘데요? 제가 바로 갈게요.”“괜찮아.”하연은 눈을 들어 굳게 닫힌 응급실 문을 보며 조금 전 교통사고의 장면을 떠올렸다.그 폭스바겐은 분명 하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만약 서준이 갑자기 나타나 그 차를 막지 않았다면 지금 누워있는 건 아마 하연이 되었을 거다.하연은 어두운 눈으로 말을 이었다.“사고 낸 차량이 폭스바겐이야. 당장 그 차주 개인정보부터 알아봐 줘. 바로 뺑소니쳤는데 이거 단순한 사고가 아니야.”“알았어요. 바로 알아볼게요.”전화를 끊고 벽에 기대 기다리고 있던 하연은 뭔가 결심한 듯 핸드폰을 꽉 쥐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씨 집안 사람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맨 앞에서 달려오던 이수애는 하연을 보자 바로 폭발했다.“최하연! 이 여우 같은 년! 내 아들 교통사고 난 게 너 때문이지? 넌 역시 우리 집이랑 안 맞아. 이혼도 한 마당에 아직도 서준 옆에 계속 붙어 있었던 거였어? 우리 아들이 너 때문에 죽어야 그만할 거야?”“...”조용하던 복도에 온통 이수애의 욕설이 울려 퍼졌다.옆에 있는 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죽일 듯한 눈빛으로 하연을 노려
“환자분 머리가 유리에 긁힌 외상이 존재하지만 이미 봉합하여 괜찮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뇌진탕 증세를 보이고 있으나 그 외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의사의 말에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서준이 괜찮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감사합니다, 선생님. 괜찮다니 다행이네요.”이수애도 그제야 안도한 듯 연신 고마움을 전했다.“환자분 이미 깨어났습니다. 곧 병실로 옮겨질 겁니다.”“아휴, 정말 다행이네요.”의사가 떠나간 뒤 간호사 몇 명이 곧 서준을 밀고 나왔다머리에 거즈를 두르고 얼굴 이곳저곳에 혈흔이 묻어 있는 서준은 예전의 멋진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다.수애는 서준을 보자마자 달려가 흐느꼈다.“아들, 괜찮아?”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서영도 얼른 관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오빠,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괜찮으니 망정이지.”“괜찮아, 걱정하지 마.”서준은 두 사람을 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하지만 이수애는 여전히 걱정을 떨쳐내지 못했다.“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어? 이게 어디 보통 일이야?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엄마는 어떻게 살라고?”이에 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하연에게 돌렸다.눈이 서로 마주쳤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준은 하연이 분명 앞에 서 있지만 왠지 멀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최하연.”“괜찮다니 됐어.”서준의 부름에 하연은 가볍게 대답했다.서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간호사가 그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서준을 병실로 옮겼다. 그동안 서준의 시선은 여전히 하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병실에 도착한 서준은 하연이 따라오지 않아 급한 마음에 일어서려 했지만 간호사가 막아 나섰다.“아직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는데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안정을 취하세요.”“괜찮아요.”서준은 상관없다는 듯 말하며 침대에서 내리려 했지만 이제 막 병실에 들어온 이수애가 깜짝 놀란 듯 달려왔다.“아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얼른 누워.”“최하연은 어디 있어요?”서준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적어도 이번 일로 하연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그때 하연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수표 한 장을 꺼내 들었다.그 순간 서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이게 지금 무슨 뜻이야?”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벤틀리 새거 하나 뽑으려면 적어도 10억은 필요할 거야. 나머지는 나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라고 생각해.”서준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40억? 지금 돈으로 갚겠다는 건가?’서준이 하연을 구한 건 순전히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그런데 그걸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나 보네?’서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연이 말을 이었다.“40억은 충분할 거야. 만약 모자란 것 같으면 원하는 금액 말해.”“최하연! 날 뭐라고 생각한 거야?”서준의 안색은 극도로 어두웠다.본인이 이렇게 다쳤는데, 예전의 감정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하연의 행동에 화가 났다.하지만 이수애와 서영은 넋이 나갔다.‘이제 최하연한테 40억은 돈도 아니라는 건가?’왠지 모르게 부러웠다.이런 걸 보면 하연의 집안이 좋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서준이 집안 경제권을 모두 관리한 뒤부터 이수애와 서영은 40억이 아니라 4억 원을 내놓는 것도 손이 떨리는 상황이라, 하연이 건네는 돈을 당장 받고 싶었다.“최하연,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이수애는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하연에게 걸어갔다.그러면서 시선은 수표에서 떼지 못했다. 심지어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했다.그걸 본 하연은 손에 들고 있던 수표를 이수애에게 건넸다.“받아요.”제 발로 굴러온 복에, 이수애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손을 뻗으려 한순간, 서준이 갑자기 소리쳤다.“이리 와요!”이수애는 너무 안타까웠다.40억이 적은 돈도 아니고, 공짜로 떨어진 걸 왜 싫다는 건지.그에 반해 서준은 하연의 행동에 화가 거꾸로 치밀었다. ‘지금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그때 이수애의 생각을 꿰뚫어 본 하연이 얼른 수표를 이수애의 호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여사님은 한
오늘 서준이 하연을 구해주었다고 해도 전에 상처 주었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안 대표님, 평소 오지랖 부릴 바에 책이나 더 읽으세요.”하연의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그 뜻은 아주 명확했다.이에 태현은 가볍게 웃었다.“네, 뭐. 그럼 전 서준이 상태 확인하러 갈게요. 다음에 봐요.”그 말을 마친 뒤 태현은 도망치듯 떠나갔다.병원을 나서자마자 하연은 태훈의 연락을 받았다.“확인했습니다. 폭스바겐 차주는 엄지연이었어요. 오늘 차를 운전한 사람도 엄지연 본인이고요.”그 이름을 듣는 순간 하연은 콧방귀를 뀌었다.“그럼 내가 목적이었겠네.”“네! 하지만 고의적인 범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적으로 범행을 벌인 것 같습니다.”하연은 한참 동은 입을 꾹 다물고 고민하다가 되물었다.“엄지연 가족관계는 어때?”“조사해 봤더니 고아였어요.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라 자기 실력으로 민성시립대학에 입학했고, 재학하는 동안에는 재단의 지원을 받고 본인 스스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졸업까지 버텼더라고요.”‘이것만 보면 참 고군분투했네.’“엄지연은 지금 어디 있어?”“저희 쪽에서 잡아 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태훈은 물론 하연의 의견을 묻긴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최씨 집안 방식대로 처리한다면 지연이 한 짓은 아마 죽지 않으면 불구가 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뻔하다.때문에 하연의 명이 떨어지면 바로 부하들에게 일 처리를 맡길 생각이었다.“증거 수집해서 경찰서에 넘겨. 법대로 처리해.”“아가씨, 너무 쉽게 봐주는 거 아닙니까?”태훈의 놀란 듯한 말투에 하연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이게 가장 합법적이고 정당한 수단 아닌가?”이건 하연만의 처벌 방식이다.그렇다고 지연의 사정을 봐준 것도 아니다.하연은 저를 해치려 하는 사람에게마저 은혜를 베푸는 부처가 아니니까.하지만 지연의 디자인 능력은 확실히 인정할 만하고, 그동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을 게 뻔하다.게다가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오늘 이런 성과를 따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