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분 머리가 유리에 긁힌 외상이 존재하지만 이미 봉합하여 괜찮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뇌진탕 증세를 보이고 있으나 그 외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의사의 말에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서준이 괜찮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감사합니다, 선생님. 괜찮다니 다행이네요.”이수애도 그제야 안도한 듯 연신 고마움을 전했다.“환자분 이미 깨어났습니다. 곧 병실로 옮겨질 겁니다.”“아휴, 정말 다행이네요.”의사가 떠나간 뒤 간호사 몇 명이 곧 서준을 밀고 나왔다머리에 거즈를 두르고 얼굴 이곳저곳에 혈흔이 묻어 있는 서준은 예전의 멋진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다.수애는 서준을 보자마자 달려가 흐느꼈다.“아들, 괜찮아?”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서영도 얼른 관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오빠,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괜찮으니 망정이지.”“괜찮아, 걱정하지 마.”서준은 두 사람을 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하지만 이수애는 여전히 걱정을 떨쳐내지 못했다.“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어? 이게 어디 보통 일이야?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엄마는 어떻게 살라고?”이에 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하연에게 돌렸다.눈이 서로 마주쳤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준은 하연이 분명 앞에 서 있지만 왠지 멀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최하연.”“괜찮다니 됐어.”서준의 부름에 하연은 가볍게 대답했다.서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간호사가 그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서준을 병실로 옮겼다. 그동안 서준의 시선은 여전히 하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병실에 도착한 서준은 하연이 따라오지 않아 급한 마음에 일어서려 했지만 간호사가 막아 나섰다.“아직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는데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안정을 취하세요.”“괜찮아요.”서준은 상관없다는 듯 말하며 침대에서 내리려 했지만 이제 막 병실에 들어온 이수애가 깜짝 놀란 듯 달려왔다.“아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얼른 누워.”“최하연은 어디 있어요?”서준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적어도 이번 일로 하연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그때 하연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수표 한 장을 꺼내 들었다.그 순간 서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이게 지금 무슨 뜻이야?”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벤틀리 새거 하나 뽑으려면 적어도 10억은 필요할 거야. 나머지는 나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라고 생각해.”서준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40억? 지금 돈으로 갚겠다는 건가?’서준이 하연을 구한 건 순전히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그런데 그걸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나 보네?’서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연이 말을 이었다.“40억은 충분할 거야. 만약 모자란 것 같으면 원하는 금액 말해.”“최하연! 날 뭐라고 생각한 거야?”서준의 안색은 극도로 어두웠다.본인이 이렇게 다쳤는데, 예전의 감정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하연의 행동에 화가 났다.하지만 이수애와 서영은 넋이 나갔다.‘이제 최하연한테 40억은 돈도 아니라는 건가?’왠지 모르게 부러웠다.이런 걸 보면 하연의 집안이 좋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서준이 집안 경제권을 모두 관리한 뒤부터 이수애와 서영은 40억이 아니라 4억 원을 내놓는 것도 손이 떨리는 상황이라, 하연이 건네는 돈을 당장 받고 싶었다.“최하연,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이수애는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하연에게 걸어갔다.그러면서 시선은 수표에서 떼지 못했다. 심지어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했다.그걸 본 하연은 손에 들고 있던 수표를 이수애에게 건넸다.“받아요.”제 발로 굴러온 복에, 이수애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손을 뻗으려 한순간, 서준이 갑자기 소리쳤다.“이리 와요!”이수애는 너무 안타까웠다.40억이 적은 돈도 아니고, 공짜로 떨어진 걸 왜 싫다는 건지.그에 반해 서준은 하연의 행동에 화가 거꾸로 치밀었다. ‘지금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그때 이수애의 생각을 꿰뚫어 본 하연이 얼른 수표를 이수애의 호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여사님은 한
오늘 서준이 하연을 구해주었다고 해도 전에 상처 주었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안 대표님, 평소 오지랖 부릴 바에 책이나 더 읽으세요.”하연의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그 뜻은 아주 명확했다.이에 태현은 가볍게 웃었다.“네, 뭐. 그럼 전 서준이 상태 확인하러 갈게요. 다음에 봐요.”그 말을 마친 뒤 태현은 도망치듯 떠나갔다.병원을 나서자마자 하연은 태훈의 연락을 받았다.“확인했습니다. 폭스바겐 차주는 엄지연이었어요. 오늘 차를 운전한 사람도 엄지연 본인이고요.”그 이름을 듣는 순간 하연은 콧방귀를 뀌었다.“그럼 내가 목적이었겠네.”“네! 하지만 고의적인 범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적으로 범행을 벌인 것 같습니다.”하연은 한참 동은 입을 꾹 다물고 고민하다가 되물었다.“엄지연 가족관계는 어때?”“조사해 봤더니 고아였어요.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라 자기 실력으로 민성시립대학에 입학했고, 재학하는 동안에는 재단의 지원을 받고 본인 스스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졸업까지 버텼더라고요.”‘이것만 보면 참 고군분투했네.’“엄지연은 지금 어디 있어?”“저희 쪽에서 잡아 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태훈은 물론 하연의 의견을 묻긴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최씨 집안 방식대로 처리한다면 지연이 한 짓은 아마 죽지 않으면 불구가 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뻔하다.때문에 하연의 명이 떨어지면 바로 부하들에게 일 처리를 맡길 생각이었다.“증거 수집해서 경찰서에 넘겨. 법대로 처리해.”“아가씨, 너무 쉽게 봐주는 거 아닙니까?”태훈의 놀란 듯한 말투에 하연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이게 가장 합법적이고 정당한 수단 아닌가?”이건 하연만의 처벌 방식이다.그렇다고 지연의 사정을 봐준 것도 아니다.하연은 저를 해치려 하는 사람에게마저 은혜를 베푸는 부처가 아니니까.하지만 지연의 디자인 능력은 확실히 인정할 만하고, 그동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을 게 뻔하다.게다가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오늘 이런 성과를 따내기까지
“응.”“빌어먹을. 뭐 이제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거야 뭐야? 설마 너 이 일로 한서준 용서한 건 아니지?”하연은 고개를 저었다.“빚은 갚았어.”“뭐로 갚았는데? 설마 몸으로 갚은 건 아니지? 내가 미리 말하는데, 너 만약 그 자식 용서하거나 다시 합치면 나... 진짜 확 죽어버리는 수가 있어.”“됐어.”하연은 얼른 예나를 붙잡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말했잖아. 난 이미 내려놓았다고. 예전 같은 일은 앞으로 없을 거야.”사뭇 진지한 말투에 예나는 바로 믿었다.“그래. 죽다 살아났는데 나쁜 기운 털어버리러 가자고.”하연은 갑자기 상혁과 한 약속이 생각나 바로 거절했다.“안돼. 나 상혁 오빠랑 약속 잡았어.”“쯧쯧, 상혁 오빠밖에 모르네. 같이 부르면 되잖아.”“그럼 내가 물어볼까?”하연이 망설이며 물었다.“묻긴 뭘 물어? 주소 보내주면 되는걸. 어디 오나 안 오나 봐 봐.”“...”예나는 저녁이 되자 클럽으로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내 말 들어. 지금은 모든 고민 털어버리고 나랑 같이 즐겨.”그러면서 하연을 기어코 무대로 끌고 갔다.신나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한참 동안 신나게 춤을 춘 하연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과일 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한편, 표절 사건 이후 낮에는 누군가 알아볼까 봐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서영은 오랜만에 밖을 나왔다.지금은 저녁인 데다 서준이 병원에 입원해 저를 감시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바람도 쐴 겸 나온 거였다.“위스키 한 잔이요.”“네, 잠시만 기다리세요.”의자에 앉아 바텐더에게 주문한 서영은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그러다 마침 하연이 눈에 들어온 순간,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오빠는 저 때문에 입원해 있는데, 감히 클럽에서 술 마시며 즐기고 있어?’물론 속으로는 구시렁댔지만 예전처럼 오만한 태도로 시비를 걸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서준에게 따끔한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다.서영은 속으로만 욕설을 퍼붓고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그러던 그때.“서영 씨? 정말
“최하연이 얼마나 대단한데요. 보통 사람이 어디 당해낼 수나 있겠어요?”물론 하연에 대한 불만은 많았지만, 서영은 하연을 더 이상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서준이 그 사실을 알면 더 이상 B시에서 지낼 수 없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완선은 이를 갈았다.“최하연만 아니었다면 저도 직장을 잃지 않았을 거예요. 이제 할 일이 없어 매일 술집에만 틀어박혀 있다니, 최하연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니까요. 서영 씨도 최하연이 밉죠?”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와선과 하연의 원한에 발 담그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그렇게 미우면 어디 한번 혼내줘 봐요.”완선은 그 말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러다가 서영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시 물었다.“서영 씨도 최하연 밉지 않아요?”서영은 고개를 저었다.“미워도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니 속으로만 미워해야지 어쩌겠어요.”완선은 코웃음을 쳤다.“설마 지금 겁나서 이러는 거예요? 아니면 또 최하연한테 질까 봐 그러나?”그 말에 서영은 순간 욱했다.하연과 맞붙었다 하면 매번 처참하게 패했던 게 여전히 속에 남아 있는 건 사실이다.‘왜 최하연은 원하는 걸 다 이룰 수 있는 건데?’될 수만 있다면 서영도 하연을 단단히 혼내 주고 싶다.하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닌지라 본인이 하연을 이길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때문에 상대에게 이용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얼른 분노를 거두었다.“하, 그렇게 자신 있으면 본인이 나설 것이지 왜 저는 끌어들여요?”‘내가 걸려들 줄 알아?’완선은 서영의 태도에 이내 설득했다.“혼자 해서 안 되면 힘을 합쳐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정말 관심 없어요?”그 말에 서영은 이내 흥미가 생겼다.본인 하나로는 하연을 이길 수 없지만 완선을 끌어들이면 승산이 더 큰 건 확실했다.어찌 됐던 그동안 하연한테 당한 건 갚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곧바로 머리를 내밀었다.“뭘 할 생각인데요?”완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원샷하더니 호주머니에서
명을 내린 완선의 눈에는 매서운 빛이 언뜻 지나갔다.이 시각 완선은 마치 구멍에서 기회를 노리는 독사 같았다.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뛰어나와 상대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이다.완선은 서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귓속말로 속삭였다.“영상 찍는 거 잊지 마요. 난 최하연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져 영원히 B시에서 사라지는 거 꼭 봐야겠으니까.”서영은 몸을 흠칫 떨었다.왠지 이 순간 완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등골이 오싹했다.“전 그런 거 못 찍어요…”이제 막 말하려는 서영에게 완선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하, 못 찍어도 우리 더 이상 퇴로는 없어요. 우리 같은 배를 탄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잘 생각해요.”노골적인 협박에 서영은 하연이 있는 쪽을 슬쩍 바라봤다.그리고 다음 순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눈에 어둠이 드리웠다.그 시각, 클럽 2층.“상혁 선배, 선배가 여긴 어쩐 일이야?”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오며 가벼운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그 사람을 본 상혁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우아하게 손을 뻗어 인사를 받아주었다.“오랜만이네.”“오랜만이긴 하지. B시에 온 지 한참 됐으면서 나 보러 오지도 않고.”상혁에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어두운 불빛에 드리우면서 점점 얼굴이 드러났다. 살짝 경박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은 플레이보이가 따로 없었다.“그런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대? 여긴 어쩐 일이야?”심지훈은 거침없이 말했다.상혁의 대학 후배로 서로 알고 지내온 세월이 있는지라 두 사람은 사이가 매우 돈독하다.그동안 사정상 만나지 못했다가, 상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F국에서 발전할 기회를 포기하고 B시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진 터라 지훈은 무척 궁금했다.그렇게 얼음장 같던 상혁의 마음을 녹인 여자가 대체 누구일까 하고.“오늘 풍향을 묻는 거라면 동풍이 분다더라고. 삼국지 속 제갈량도 동풍이 불 걸 예상하고 그 기세를 빌어 사마의를 물리쳤잖아.”상혁은 자신 있는 말투로 농담을 내던졌다.그 말에 지훈은 눈을 반짝였다.“그런데 선배가 여자 하
상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그 시각, 하연은 박스 안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 심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가 하연에게 다가왔다.“고객님, 안녕하세요. 이건 저희 클럽에서 서비스로 드리는 음료이니 드셔 보세요.”웨이터는 하연이 거절할 새도 없이 음료를 하연 앞에 놓고 떠나갔다.하지만 하연이 잔에 입을 대기도 전에 상혁이 갑자기 나타나 하연을 막아섰다.“하연아!”상혁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조급했다.성큼성큼 하연의 앞에 다가온 상혁은 단번에 하연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갔다.그리고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하연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손을 뻗어 하연의 어깨를 감쌌다. 다른 사람의 눈에 무척이나 친근해 보일 동작이었다.그때, 상혁은 곧바로 하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컵에 뭐가 들어 있어.”간단한 한마디였음에도 하연은 그 뜻을 바로 이해하고 능청스럽게 물었다.“상혁 오빠? 어디 갔다 이제야 왔어요?”상혁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온 지 한참 됐어. 여기 사장이 내 대학 후배거든. 너도 가서 인사할래?”“좋아요.”하연은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약이 들어 있는 음료를 손에 든 채 상혁과 함께 홀을 떠났다.그 시각, 웨이터 한 명이 2층 룸 바닥에 무릎 꿇고 있다.“심 대표님, 저 정말 고의로 그런 게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웨이터 앞에서 지훈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제 구역에서 약을 타는 일이 벌어졌으니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죽으려고 환장했나?’“말해. 누구야? 얼마나 받았어?”압박감 있는 지훈의 말에 웨이터는 끝내 숨김없이 주머니에 있던 현금을 내놓으며 이실직고했다.“그 여자가 준 돈은 이게 다예요. 호빠남 하나 찾아다가 이분이 음료 마시면 옆 호텔 8888호실로 데려가라고 했어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지훈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말을 마친 하연의 시선은 곧바로 완선 옆에 있는 서영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시큰둥한 듯 콧방귀를 뀌었다.“보아하니 두 사람이 함께 짜고 벌인 짓인 듯하네요.상혁도 이미 서영을 확인했다. 벌써 몇 번이나 인내심을 긁는 서영을 봐줄 이유가 더더욱 없어졌다.“나한테 맡겨.”그때 하연이 상혁을 막아섰다.“두 사람이 저를 괴롭히려 한 거니까 제가 처리할게요.”상혁은 하연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옆에 있던 지훈도 알겠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하연 씨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무조건 도와줄 테니까.”하연의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간단해요. 똑같이 돌려주려고요.”말을 마친 하연은 약을 탄 음료를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게 그렇게 좋은 거라면 직접 먹게 하면 되겠네요.”“그래요. 그거라면 저한테 맡겨줘요.”지훈은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그 시각, 아무리 둘러봐도 하연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완선은 당연히 계획이 성공했다고 자신했다. 이에 으쓱한 나머지 얼른 웨이터를 불러 양주 한 병을 주문했다.“최하연은 지금쯤 호텔에 있을 거예요. 반 시간 뒤에 재밌는 구경하러 가자고요.”완선은 제 잔을 들어 올리더니 서영의 빈 잔도 채워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서영은 오히려 불안하기만 했다.“이러는 거 좀 아닌 것 같아요.”이에 완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잔을 비웠다.“이게 뭐 어때서요? 최하연한테 경고해야 할 거 아니에요. 행동에 대가가 따른다는 거, 아무나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거 보여줘야죠. 제가 이미 기자와 유명한 인플루언서한테 미리 흘려 놨으니까 현장이 생방송으로 공개되면 최하연은 끝장이에요.”서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완선의 수법이 비겁하고 지독하긴 하지만 속이 후련한 건 사실이었다. ‘그동안 날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번에 아주 제대로 당해 봐.’‘이전에는 제대로 복수할 거니까.’‘구완선이 제발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 할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