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을 내린 완선의 눈에는 매서운 빛이 언뜻 지나갔다.이 시각 완선은 마치 구멍에서 기회를 노리는 독사 같았다.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뛰어나와 상대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이다.완선은 서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귓속말로 속삭였다.“영상 찍는 거 잊지 마요. 난 최하연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져 영원히 B시에서 사라지는 거 꼭 봐야겠으니까.”서영은 몸을 흠칫 떨었다.왠지 이 순간 완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등골이 오싹했다.“전 그런 거 못 찍어요…”이제 막 말하려는 서영에게 완선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하, 못 찍어도 우리 더 이상 퇴로는 없어요. 우리 같은 배를 탄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잘 생각해요.”노골적인 협박에 서영은 하연이 있는 쪽을 슬쩍 바라봤다.그리고 다음 순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눈에 어둠이 드리웠다.그 시각, 클럽 2층.“상혁 선배, 선배가 여긴 어쩐 일이야?”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오며 가벼운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그 사람을 본 상혁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우아하게 손을 뻗어 인사를 받아주었다.“오랜만이네.”“오랜만이긴 하지. B시에 온 지 한참 됐으면서 나 보러 오지도 않고.”상혁에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어두운 불빛에 드리우면서 점점 얼굴이 드러났다. 살짝 경박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은 플레이보이가 따로 없었다.“그런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대? 여긴 어쩐 일이야?”심지훈은 거침없이 말했다.상혁의 대학 후배로 서로 알고 지내온 세월이 있는지라 두 사람은 사이가 매우 돈독하다.그동안 사정상 만나지 못했다가, 상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F국에서 발전할 기회를 포기하고 B시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진 터라 지훈은 무척 궁금했다.그렇게 얼음장 같던 상혁의 마음을 녹인 여자가 대체 누구일까 하고.“오늘 풍향을 묻는 거라면 동풍이 분다더라고. 삼국지 속 제갈량도 동풍이 불 걸 예상하고 그 기세를 빌어 사마의를 물리쳤잖아.”상혁은 자신 있는 말투로 농담을 내던졌다.그 말에 지훈은 눈을 반짝였다.“그런데 선배가 여자 하
상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그 시각, 하연은 박스 안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 심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가 하연에게 다가왔다.“고객님, 안녕하세요. 이건 저희 클럽에서 서비스로 드리는 음료이니 드셔 보세요.”웨이터는 하연이 거절할 새도 없이 음료를 하연 앞에 놓고 떠나갔다.하지만 하연이 잔에 입을 대기도 전에 상혁이 갑자기 나타나 하연을 막아섰다.“하연아!”상혁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조급했다.성큼성큼 하연의 앞에 다가온 상혁은 단번에 하연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갔다.그리고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하연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손을 뻗어 하연의 어깨를 감쌌다. 다른 사람의 눈에 무척이나 친근해 보일 동작이었다.그때, 상혁은 곧바로 하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컵에 뭐가 들어 있어.”간단한 한마디였음에도 하연은 그 뜻을 바로 이해하고 능청스럽게 물었다.“상혁 오빠? 어디 갔다 이제야 왔어요?”상혁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온 지 한참 됐어. 여기 사장이 내 대학 후배거든. 너도 가서 인사할래?”“좋아요.”하연은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약이 들어 있는 음료를 손에 든 채 상혁과 함께 홀을 떠났다.그 시각, 웨이터 한 명이 2층 룸 바닥에 무릎 꿇고 있다.“심 대표님, 저 정말 고의로 그런 게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웨이터 앞에서 지훈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제 구역에서 약을 타는 일이 벌어졌으니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죽으려고 환장했나?’“말해. 누구야? 얼마나 받았어?”압박감 있는 지훈의 말에 웨이터는 끝내 숨김없이 주머니에 있던 현금을 내놓으며 이실직고했다.“그 여자가 준 돈은 이게 다예요. 호빠남 하나 찾아다가 이분이 음료 마시면 옆 호텔 8888호실로 데려가라고 했어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지훈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말을 마친 하연의 시선은 곧바로 완선 옆에 있는 서영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시큰둥한 듯 콧방귀를 뀌었다.“보아하니 두 사람이 함께 짜고 벌인 짓인 듯하네요.상혁도 이미 서영을 확인했다. 벌써 몇 번이나 인내심을 긁는 서영을 봐줄 이유가 더더욱 없어졌다.“나한테 맡겨.”그때 하연이 상혁을 막아섰다.“두 사람이 저를 괴롭히려 한 거니까 제가 처리할게요.”상혁은 하연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옆에 있던 지훈도 알겠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하연 씨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무조건 도와줄 테니까.”하연의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간단해요. 똑같이 돌려주려고요.”말을 마친 하연은 약을 탄 음료를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게 그렇게 좋은 거라면 직접 먹게 하면 되겠네요.”“그래요. 그거라면 저한테 맡겨줘요.”지훈은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그 시각, 아무리 둘러봐도 하연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완선은 당연히 계획이 성공했다고 자신했다. 이에 으쓱한 나머지 얼른 웨이터를 불러 양주 한 병을 주문했다.“최하연은 지금쯤 호텔에 있을 거예요. 반 시간 뒤에 재밌는 구경하러 가자고요.”완선은 제 잔을 들어 올리더니 서영의 빈 잔도 채워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서영은 오히려 불안하기만 했다.“이러는 거 좀 아닌 것 같아요.”이에 완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잔을 비웠다.“이게 뭐 어때서요? 최하연한테 경고해야 할 거 아니에요. 행동에 대가가 따른다는 거, 아무나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거 보여줘야죠. 제가 이미 기자와 유명한 인플루언서한테 미리 흘려 놨으니까 현장이 생방송으로 공개되면 최하연은 끝장이에요.”서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완선의 수법이 비겁하고 지독하긴 하지만 속이 후련한 건 사실이었다. ‘그동안 날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번에 아주 제대로 당해 봐.’‘이전에는 제대로 복수할 거니까.’‘구완선이 제발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 할
“저기요,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그때 웨이터 한 명이 서영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물었다.서영은 머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지만 시선이 웨이터에게 닿는 순간 몸이 점점 타오르기 시작했다.서영은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무의식적으로 웨이터에게 달라붙었다.“더워...”“옆에 바로 호텔이 있는데, 제가 안내할까요?”서영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웨이터를 따라 클럽을 나섰다.그 시각, 2층 룸 안.“심 대표님, 명하신 대로 일 처리 마쳤습니다.”직원의 말에 지훈은 하연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제가 도울 일 더 있나요?”하연은 술이 담긴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입가에는 위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고마워요. 이제 남은 건 저들이 판 함정이 얼마나 깊은지 구경할 일만 남았네요.”지훈은 하연의 말에 몸을 흠칫 떨었다.‘역시 누구를 건드려도 여자는 건드리지 말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네.’“그런데, 여기 술 참 괜찮네요.”그때 하연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지훈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하연 씨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새로운 술도 많이 들여올 테니 언제든 마시러 와요.”이윽고 상혁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아무튼 선배가 계산할 테니까, 제일 좋은 술은 항상 하연 씨를 위해 남겨둘게요.”“역시 장사꾼은 다리네요. 어디 가서 손해 안 보겠어요.”하연의 말에 상혁은 부채질하듯 말을 보탰다.“에이, 그래도 두 사람 결혼할 때 술은 제가 다 살게요.”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연은 목구멍이 화끈거려 저도 모르게 기침을 해댔다.옆에 있던 상혁이 지훈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지만 지훈은 대수롭지 않은 듯 속으로 구시렁거렸다.‘이거 진심인데.’“하연 씨, 말 나온 김에 날짜 잡는 건 어때요?”하연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하지만 말을 내뱉기도 전에 상혁이 얼른 나서 하연의 손을 잡았다.“하연아, 집에 바래다줄게.”설명할 기회를
적에 대한 인자함은 자신에 대한 잔인함이나 마찬가지다.이건 하민이 하연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나머지 일은 내게 맡겨. 넌 마음 놓고 패션쇼 준비에만 신경 써.”“네.”하연이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명문가 아가씨의 음란한 사생활’. ‘3P 현장 사진’ 등과 같은 검색어가 인기 검색어 순위를 차지했다.그 시각, 호텔 8888호실 문 앞에는 B시 유명 매체의 기자들이 모여 굳게 닫힌 문 쪽을 향해 카메라와 마이크를 대고 있었다.“톱스타가 이 안에서 새로 사귄 남자 친구와 밤을 보냈다는데, 이따가 문 열리면 현장 제대로 찍어.”한 기자의 말에 다른 언론사 기자가 끼어들었다.“톱스타는 무슨, 그저 최근에 인기 좀 얻은 신인 여배우라던데?”“에이, 내가 제보받은 건 유명 여배우 불륜 현장이라던데?”“...”서로 다른 정보에 기자들도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왜 모두 다른 제보를 받았는지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방 안 상황에 대한 호기심은 한 층 더 생긴 상태였다.심지어 최근 핫한 채널을 운영하는 인플루언서들마저 카메라를 켠 채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여러분, 이 방 안에 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지 다들 궁금하시죠? 잠시 뒤 밝혀질 예정이니 구독과 좋아요, 알람 설정 잊지 마세요.”그때, 누군가 먼저 건의했다.“뭐가 됐든 문 열어서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르지 않겠어요?”그 의견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의했다.곧이어 누군가 호텔 직원을 불러왔고, 직원은 심각한 듯한 상황에 노크를 해보더니 기척이 들리지 않자 아예 카드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그 순간, 기자들은 벌 떼같이 방 안으로 달려들어 침대를 향해 셔터 세례를 날렸다.어수선한 방안 상태만 봐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생각지 못한 건, 이불 위로 세 개의 머리가 나와 있다는 거였다. 여자 두 명에 남자 한 명이 나란히 누워 있는 광경을 본 순간 사람들은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헉! 이게 무슨 상황이지?”“대박, 세 명이었어?
그 순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서영을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대박, 명문가 아가씨들은 모두 이렇게 화끈하게 노나?”“뭘 멍때리고 있어? 얼른 찍어. 이 사지만 건지면 앞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다고.”“HT그룹도 이젠 끝났네.”“...”사람들의 대화에 서영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이렇게 된 거야?’어수선한 광경에 화가 치민 서영은 그대로 쓰러졌다.그 사이 완선은 도망치려 했지만 도저히 옷을 찾을 수 없는 데다 현재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 도망치지 못한 채 번쩍거리는 카메라 불빛을 견뎌야만 했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완선은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카메라를 들이밀며 생방송을 하는 인플루언서 때문에 방 안 광경은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퍼져 두 사람은 순간 사라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헐, 저 사람 정말 한씨 가문 아가씨 맞아? 몸매 진짜 끝내주네.][여자 둘에 남자 하나? 너무 화끈한 거 아니야? 이런 걸 생방송으로 볼 수 있다니 웬만한 야동 못지않네.][한씨 가문 아가씨와 하룻밤 보내는 건 대체 얼마지? 나도 한번 체험해 보고 싶네.][윗댓님, 잘못 말한 거 아니에요? 한씨 가문 아가씨랑 자면 얼마 받느냐가 맞겠죠. 저 가운데 남자 그쪽 업계 사람이거든요. 어찌 보면 본업 한 거나 다름없죠.][와! 한씨 가문 아가씨도 성매매를 하다니.]...인터넷에는 여러 가지 말이 떠돌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두 듣기 거북할 정도의 희롱 섞인 말과 악플들뿐이라는 거였다.병원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던 서준은 동후의 연락을 받은 순간 얼굴이 잿빛이 되어 버럭 화를 냈다.“뭐라고? 대체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전화 건너편에 있는 동후도 무척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사진이 너무 빨리 퍼져 회사 홍보팀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그 말에 서준은 끝내 폭발했다.“5분 줄 테니까 모든 기사 당장 내려. 당장!”동
“하연, 하연! 너 기사 봤어?”전화를 받기 바쁘게 서여은의 흥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봤어. 정말 대단하던데!”하연은 서영과 완선이 찍힌 사진을 보며 기자의 촬영 실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어쩜 어느 것 하나 버릴 컷이 없이 이렇게 잘 나왔는지. 사진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하연의 대답에 여은은 싱긋 웃었다.“내가 이미 손써 뒀으니까 앞으로 사흘 동안 기사가 내려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다니 이 기회에 제대로 유명세를 누리게 해줘야지.”‘여은의 일 처리 능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매번 화끈하고 질질 끄는 법이 없어.’이렇게 좋은 친구를 뒀다는 것이 하연은 내심 든든했다.“고마워. B시에는 언제 돌아올 거야?”“여기 업무 끝나는 대로. 아마 이번 달 말쯤에는 들어갈 것 같아. 도착하는대로 너랑 예나한테 연락할게.”“그래. 우리가 널 위한 환영 파티 제대로 준비하게.”그 뒤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서영의 성 추문으로 HT그룹 주가는 여전히 하락하여 불과 반나절 만에 몇천억이라는 금액이 사라져 버렸다.HT그룹 맨 위층 사무실 안에서 동후는 최신 소식을 보고하고 있었다.“대표님, B시 모든 언론사에 연락하여 기사 철회할 거라는 확답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파급력이 너무 커서 인터넷에 떠도는 일부 게시물은 말끔히 지우지 못했어요. 게다가 누군가 손을 썼는지 인기 검색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현재 적지 않은 기자들이 대표님을 인터뷰하겠다며 회사 건물 아래에 모여 있어요.”동후는 말하면 말할수록 목소리를 점점 줄였다.서준의 머리에는 여전히 거즈가 감겨 있었지만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이건 HT그룹을 겨냥하는 게 틀림없다.이제껏 비즈니스 업계에서 구른 짬이 있기에 서준은 단번에 상대의 수법을 눈치채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봤어?”동후는 그 말에 서준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어물
“엄마, 나 이제 어떡해? 나 앞으로 어떡해?”서영은 울먹이며 이 한마디만 반복했다.이수애는 이런 딸이 가여웠는지 연신 위로를 건넸다.“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틀 뒤에 바로 출국해. 해외에서 몇 년 있다가 소문이 잠잠해져 사람들이 잊을 때쯤 다시 돌아와.”“흑흑흑, 엄마, 나 해외 가기 싫어. 안 갈래.”“현재 상황으로 출국 말고 답이 없어. 그래도 대학은 이미 자퇴했으니 오빠더러 해외 학교 알아보라고 할게.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와.”이수애는 한숨을 내쉬며 눈시울을 붉혔다.이미 너무 울어 두 눈이 퉁퉁 부었지만 서영은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울음을 멈추며 말했다.“엄마, 이거 최하연 짓이야! 틀림없어! 최하연이 나 이렇게 만들었어!”“뭐? 최하연이?”이수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그동안 너무 속상해 우는 데만 정신이 팔려 서영은 일이 왜 이 지경이 되어버렸는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호텔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 최하연에서 저와 구완선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다.‘이게 최하연 짓이 아니면 누구 짓인데?’“엄마, 이거 최하연 짓이야. 날 디자인 업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하고 학교도 자퇴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내 명예까지 더럽히려 한 거라고.”서영은 생각할수록 속상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하지만 이수애는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최하연? 최하연이 왜 이런 짓을 하는데? 아하, 널 망치면 우리 한씨 가문도 HT그룹도 망가지니까 그런 거네. 안 되겠어, 내 당장 그년을 찢어 죽일 거야!”이수애는 당장이라도 하연을 죽일 듯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침묵을 유지하던 강영숙이 버럭 소리쳤다.“그만해! 아직도 창피하지 않아?”그 말에 이수애는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어머님, 어머님도 방금 들었잖아요. 최하연이 우리 서영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어쩜 아직도 최하연 편을 드세요? 최하연은 이제 어머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