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을 내린 완선의 눈에는 매서운 빛이 언뜻 지나갔다.이 시각 완선은 마치 구멍에서 기회를 노리는 독사 같았다.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뛰어나와 상대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이다.완선은 서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귓속말로 속삭였다.“영상 찍는 거 잊지 마요. 난 최하연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져 영원히 B시에서 사라지는 거 꼭 봐야겠으니까.”서영은 몸을 흠칫 떨었다.왠지 이 순간 완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등골이 오싹했다.“전 그런 거 못 찍어요…”이제 막 말하려는 서영에게 완선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하, 못 찍어도 우리 더 이상 퇴로는 없어요. 우리 같은 배를 탄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잘 생각해요.”노골적인 협박에 서영은 하연이 있는 쪽을 슬쩍 바라봤다.그리고 다음 순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눈에 어둠이 드리웠다.그 시각, 클럽 2층.“상혁 선배, 선배가 여긴 어쩐 일이야?”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오며 가벼운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그 사람을 본 상혁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우아하게 손을 뻗어 인사를 받아주었다.“오랜만이네.”“오랜만이긴 하지. B시에 온 지 한참 됐으면서 나 보러 오지도 않고.”상혁에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어두운 불빛에 드리우면서 점점 얼굴이 드러났다. 살짝 경박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은 플레이보이가 따로 없었다.“그런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대? 여긴 어쩐 일이야?”심지훈은 거침없이 말했다.상혁의 대학 후배로 서로 알고 지내온 세월이 있는지라 두 사람은 사이가 매우 돈독하다.그동안 사정상 만나지 못했다가, 상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F국에서 발전할 기회를 포기하고 B시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진 터라 지훈은 무척 궁금했다.그렇게 얼음장 같던 상혁의 마음을 녹인 여자가 대체 누구일까 하고.“오늘 풍향을 묻는 거라면 동풍이 분다더라고. 삼국지 속 제갈량도 동풍이 불 걸 예상하고 그 기세를 빌어 사마의를 물리쳤잖아.”상혁은 자신 있는 말투로 농담을 내던졌다.그 말에 지훈은 눈을 반짝였다.“그런데 선배가 여자 하
상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그 시각, 하연은 박스 안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 심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가 하연에게 다가왔다.“고객님, 안녕하세요. 이건 저희 클럽에서 서비스로 드리는 음료이니 드셔 보세요.”웨이터는 하연이 거절할 새도 없이 음료를 하연 앞에 놓고 떠나갔다.하지만 하연이 잔에 입을 대기도 전에 상혁이 갑자기 나타나 하연을 막아섰다.“하연아!”상혁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조급했다.성큼성큼 하연의 앞에 다가온 상혁은 단번에 하연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갔다.그리고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하연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손을 뻗어 하연의 어깨를 감쌌다. 다른 사람의 눈에 무척이나 친근해 보일 동작이었다.그때, 상혁은 곧바로 하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컵에 뭐가 들어 있어.”간단한 한마디였음에도 하연은 그 뜻을 바로 이해하고 능청스럽게 물었다.“상혁 오빠? 어디 갔다 이제야 왔어요?”상혁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온 지 한참 됐어. 여기 사장이 내 대학 후배거든. 너도 가서 인사할래?”“좋아요.”하연은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약이 들어 있는 음료를 손에 든 채 상혁과 함께 홀을 떠났다.그 시각, 웨이터 한 명이 2층 룸 바닥에 무릎 꿇고 있다.“심 대표님, 저 정말 고의로 그런 게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웨이터 앞에서 지훈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제 구역에서 약을 타는 일이 벌어졌으니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죽으려고 환장했나?’“말해. 누구야? 얼마나 받았어?”압박감 있는 지훈의 말에 웨이터는 끝내 숨김없이 주머니에 있던 현금을 내놓으며 이실직고했다.“그 여자가 준 돈은 이게 다예요. 호빠남 하나 찾아다가 이분이 음료 마시면 옆 호텔 8888호실로 데려가라고 했어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지훈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말을 마친 하연의 시선은 곧바로 완선 옆에 있는 서영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시큰둥한 듯 콧방귀를 뀌었다.“보아하니 두 사람이 함께 짜고 벌인 짓인 듯하네요.상혁도 이미 서영을 확인했다. 벌써 몇 번이나 인내심을 긁는 서영을 봐줄 이유가 더더욱 없어졌다.“나한테 맡겨.”그때 하연이 상혁을 막아섰다.“두 사람이 저를 괴롭히려 한 거니까 제가 처리할게요.”상혁은 하연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옆에 있던 지훈도 알겠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하연 씨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무조건 도와줄 테니까.”하연의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간단해요. 똑같이 돌려주려고요.”말을 마친 하연은 약을 탄 음료를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게 그렇게 좋은 거라면 직접 먹게 하면 되겠네요.”“그래요. 그거라면 저한테 맡겨줘요.”지훈은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그 시각, 아무리 둘러봐도 하연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완선은 당연히 계획이 성공했다고 자신했다. 이에 으쓱한 나머지 얼른 웨이터를 불러 양주 한 병을 주문했다.“최하연은 지금쯤 호텔에 있을 거예요. 반 시간 뒤에 재밌는 구경하러 가자고요.”완선은 제 잔을 들어 올리더니 서영의 빈 잔도 채워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서영은 오히려 불안하기만 했다.“이러는 거 좀 아닌 것 같아요.”이에 완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잔을 비웠다.“이게 뭐 어때서요? 최하연한테 경고해야 할 거 아니에요. 행동에 대가가 따른다는 거, 아무나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거 보여줘야죠. 제가 이미 기자와 유명한 인플루언서한테 미리 흘려 놨으니까 현장이 생방송으로 공개되면 최하연은 끝장이에요.”서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완선의 수법이 비겁하고 지독하긴 하지만 속이 후련한 건 사실이었다. ‘그동안 날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번에 아주 제대로 당해 봐.’‘이전에는 제대로 복수할 거니까.’‘구완선이 제발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 할
“저기요,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그때 웨이터 한 명이 서영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물었다.서영은 머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지만 시선이 웨이터에게 닿는 순간 몸이 점점 타오르기 시작했다.서영은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무의식적으로 웨이터에게 달라붙었다.“더워...”“옆에 바로 호텔이 있는데, 제가 안내할까요?”서영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웨이터를 따라 클럽을 나섰다.그 시각, 2층 룸 안.“심 대표님, 명하신 대로 일 처리 마쳤습니다.”직원의 말에 지훈은 하연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제가 도울 일 더 있나요?”하연은 술이 담긴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입가에는 위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고마워요. 이제 남은 건 저들이 판 함정이 얼마나 깊은지 구경할 일만 남았네요.”지훈은 하연의 말에 몸을 흠칫 떨었다.‘역시 누구를 건드려도 여자는 건드리지 말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네.’“그런데, 여기 술 참 괜찮네요.”그때 하연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지훈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하연 씨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새로운 술도 많이 들여올 테니 언제든 마시러 와요.”이윽고 상혁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아무튼 선배가 계산할 테니까, 제일 좋은 술은 항상 하연 씨를 위해 남겨둘게요.”“역시 장사꾼은 다리네요. 어디 가서 손해 안 보겠어요.”하연의 말에 상혁은 부채질하듯 말을 보탰다.“에이, 그래도 두 사람 결혼할 때 술은 제가 다 살게요.”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연은 목구멍이 화끈거려 저도 모르게 기침을 해댔다.옆에 있던 상혁이 지훈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지만 지훈은 대수롭지 않은 듯 속으로 구시렁거렸다.‘이거 진심인데.’“하연 씨, 말 나온 김에 날짜 잡는 건 어때요?”하연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하지만 말을 내뱉기도 전에 상혁이 얼른 나서 하연의 손을 잡았다.“하연아, 집에 바래다줄게.”설명할 기회를
적에 대한 인자함은 자신에 대한 잔인함이나 마찬가지다.이건 하민이 하연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나머지 일은 내게 맡겨. 넌 마음 놓고 패션쇼 준비에만 신경 써.”“네.”하연이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명문가 아가씨의 음란한 사생활’. ‘3P 현장 사진’ 등과 같은 검색어가 인기 검색어 순위를 차지했다.그 시각, 호텔 8888호실 문 앞에는 B시 유명 매체의 기자들이 모여 굳게 닫힌 문 쪽을 향해 카메라와 마이크를 대고 있었다.“톱스타가 이 안에서 새로 사귄 남자 친구와 밤을 보냈다는데, 이따가 문 열리면 현장 제대로 찍어.”한 기자의 말에 다른 언론사 기자가 끼어들었다.“톱스타는 무슨, 그저 최근에 인기 좀 얻은 신인 여배우라던데?”“에이, 내가 제보받은 건 유명 여배우 불륜 현장이라던데?”“...”서로 다른 정보에 기자들도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왜 모두 다른 제보를 받았는지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방 안 상황에 대한 호기심은 한 층 더 생긴 상태였다.심지어 최근 핫한 채널을 운영하는 인플루언서들마저 카메라를 켠 채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여러분, 이 방 안에 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지 다들 궁금하시죠? 잠시 뒤 밝혀질 예정이니 구독과 좋아요, 알람 설정 잊지 마세요.”그때, 누군가 먼저 건의했다.“뭐가 됐든 문 열어서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르지 않겠어요?”그 의견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의했다.곧이어 누군가 호텔 직원을 불러왔고, 직원은 심각한 듯한 상황에 노크를 해보더니 기척이 들리지 않자 아예 카드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그 순간, 기자들은 벌 떼같이 방 안으로 달려들어 침대를 향해 셔터 세례를 날렸다.어수선한 방안 상태만 봐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생각지 못한 건, 이불 위로 세 개의 머리가 나와 있다는 거였다. 여자 두 명에 남자 한 명이 나란히 누워 있는 광경을 본 순간 사람들은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헉! 이게 무슨 상황이지?”“대박, 세 명이었어?
그 순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서영을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대박, 명문가 아가씨들은 모두 이렇게 화끈하게 노나?”“뭘 멍때리고 있어? 얼른 찍어. 이 사지만 건지면 앞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다고.”“HT그룹도 이젠 끝났네.”“...”사람들의 대화에 서영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이렇게 된 거야?’어수선한 광경에 화가 치민 서영은 그대로 쓰러졌다.그 사이 완선은 도망치려 했지만 도저히 옷을 찾을 수 없는 데다 현재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 도망치지 못한 채 번쩍거리는 카메라 불빛을 견뎌야만 했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완선은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카메라를 들이밀며 생방송을 하는 인플루언서 때문에 방 안 광경은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퍼져 두 사람은 순간 사라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헐, 저 사람 정말 한씨 가문 아가씨 맞아? 몸매 진짜 끝내주네.][여자 둘에 남자 하나? 너무 화끈한 거 아니야? 이런 걸 생방송으로 볼 수 있다니 웬만한 야동 못지않네.][한씨 가문 아가씨와 하룻밤 보내는 건 대체 얼마지? 나도 한번 체험해 보고 싶네.][윗댓님, 잘못 말한 거 아니에요? 한씨 가문 아가씨랑 자면 얼마 받느냐가 맞겠죠. 저 가운데 남자 그쪽 업계 사람이거든요. 어찌 보면 본업 한 거나 다름없죠.][와! 한씨 가문 아가씨도 성매매를 하다니.]...인터넷에는 여러 가지 말이 떠돌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두 듣기 거북할 정도의 희롱 섞인 말과 악플들뿐이라는 거였다.병원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던 서준은 동후의 연락을 받은 순간 얼굴이 잿빛이 되어 버럭 화를 냈다.“뭐라고? 대체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전화 건너편에 있는 동후도 무척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사진이 너무 빨리 퍼져 회사 홍보팀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그 말에 서준은 끝내 폭발했다.“5분 줄 테니까 모든 기사 당장 내려. 당장!”동
“하연, 하연! 너 기사 봤어?”전화를 받기 바쁘게 서여은의 흥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봤어. 정말 대단하던데!”하연은 서영과 완선이 찍힌 사진을 보며 기자의 촬영 실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어쩜 어느 것 하나 버릴 컷이 없이 이렇게 잘 나왔는지. 사진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하연의 대답에 여은은 싱긋 웃었다.“내가 이미 손써 뒀으니까 앞으로 사흘 동안 기사가 내려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다니 이 기회에 제대로 유명세를 누리게 해줘야지.”‘여은의 일 처리 능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매번 화끈하고 질질 끄는 법이 없어.’이렇게 좋은 친구를 뒀다는 것이 하연은 내심 든든했다.“고마워. B시에는 언제 돌아올 거야?”“여기 업무 끝나는 대로. 아마 이번 달 말쯤에는 들어갈 것 같아. 도착하는대로 너랑 예나한테 연락할게.”“그래. 우리가 널 위한 환영 파티 제대로 준비하게.”그 뒤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서영의 성 추문으로 HT그룹 주가는 여전히 하락하여 불과 반나절 만에 몇천억이라는 금액이 사라져 버렸다.HT그룹 맨 위층 사무실 안에서 동후는 최신 소식을 보고하고 있었다.“대표님, B시 모든 언론사에 연락하여 기사 철회할 거라는 확답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파급력이 너무 커서 인터넷에 떠도는 일부 게시물은 말끔히 지우지 못했어요. 게다가 누군가 손을 썼는지 인기 검색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현재 적지 않은 기자들이 대표님을 인터뷰하겠다며 회사 건물 아래에 모여 있어요.”동후는 말하면 말할수록 목소리를 점점 줄였다.서준의 머리에는 여전히 거즈가 감겨 있었지만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이건 HT그룹을 겨냥하는 게 틀림없다.이제껏 비즈니스 업계에서 구른 짬이 있기에 서준은 단번에 상대의 수법을 눈치채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봤어?”동후는 그 말에 서준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어물
“엄마, 나 이제 어떡해? 나 앞으로 어떡해?”서영은 울먹이며 이 한마디만 반복했다.이수애는 이런 딸이 가여웠는지 연신 위로를 건넸다.“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틀 뒤에 바로 출국해. 해외에서 몇 년 있다가 소문이 잠잠해져 사람들이 잊을 때쯤 다시 돌아와.”“흑흑흑, 엄마, 나 해외 가기 싫어. 안 갈래.”“현재 상황으로 출국 말고 답이 없어. 그래도 대학은 이미 자퇴했으니 오빠더러 해외 학교 알아보라고 할게.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와.”이수애는 한숨을 내쉬며 눈시울을 붉혔다.이미 너무 울어 두 눈이 퉁퉁 부었지만 서영은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울음을 멈추며 말했다.“엄마, 이거 최하연 짓이야! 틀림없어! 최하연이 나 이렇게 만들었어!”“뭐? 최하연이?”이수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그동안 너무 속상해 우는 데만 정신이 팔려 서영은 일이 왜 이 지경이 되어버렸는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호텔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 최하연에서 저와 구완선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다.‘이게 최하연 짓이 아니면 누구 짓인데?’“엄마, 이거 최하연 짓이야. 날 디자인 업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하고 학교도 자퇴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내 명예까지 더럽히려 한 거라고.”서영은 생각할수록 속상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하지만 이수애는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최하연? 최하연이 왜 이런 짓을 하는데? 아하, 널 망치면 우리 한씨 가문도 HT그룹도 망가지니까 그런 거네. 안 되겠어, 내 당장 그년을 찢어 죽일 거야!”이수애는 당장이라도 하연을 죽일 듯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침묵을 유지하던 강영숙이 버럭 소리쳤다.“그만해! 아직도 창피하지 않아?”그 말에 이수애는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어머님, 어머님도 방금 들었잖아요. 최하연이 우리 서영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어쩜 아직도 최하연 편을 드세요? 최하연은 이제 어머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