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 하연! 너 기사 봤어?”전화를 받기 바쁘게 서여은의 흥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봤어. 정말 대단하던데!”하연은 서영과 완선이 찍힌 사진을 보며 기자의 촬영 실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어쩜 어느 것 하나 버릴 컷이 없이 이렇게 잘 나왔는지. 사진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하연의 대답에 여은은 싱긋 웃었다.“내가 이미 손써 뒀으니까 앞으로 사흘 동안 기사가 내려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다니 이 기회에 제대로 유명세를 누리게 해줘야지.”‘여은의 일 처리 능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매번 화끈하고 질질 끄는 법이 없어.’이렇게 좋은 친구를 뒀다는 것이 하연은 내심 든든했다.“고마워. B시에는 언제 돌아올 거야?”“여기 업무 끝나는 대로. 아마 이번 달 말쯤에는 들어갈 것 같아. 도착하는대로 너랑 예나한테 연락할게.”“그래. 우리가 널 위한 환영 파티 제대로 준비하게.”그 뒤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서영의 성 추문으로 HT그룹 주가는 여전히 하락하여 불과 반나절 만에 몇천억이라는 금액이 사라져 버렸다.HT그룹 맨 위층 사무실 안에서 동후는 최신 소식을 보고하고 있었다.“대표님, B시 모든 언론사에 연락하여 기사 철회할 거라는 확답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파급력이 너무 커서 인터넷에 떠도는 일부 게시물은 말끔히 지우지 못했어요. 게다가 누군가 손을 썼는지 인기 검색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현재 적지 않은 기자들이 대표님을 인터뷰하겠다며 회사 건물 아래에 모여 있어요.”동후는 말하면 말할수록 목소리를 점점 줄였다.서준의 머리에는 여전히 거즈가 감겨 있었지만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이건 HT그룹을 겨냥하는 게 틀림없다.이제껏 비즈니스 업계에서 구른 짬이 있기에 서준은 단번에 상대의 수법을 눈치채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봤어?”동후는 그 말에 서준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어물
“엄마, 나 이제 어떡해? 나 앞으로 어떡해?”서영은 울먹이며 이 한마디만 반복했다.이수애는 이런 딸이 가여웠는지 연신 위로를 건넸다.“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틀 뒤에 바로 출국해. 해외에서 몇 년 있다가 소문이 잠잠해져 사람들이 잊을 때쯤 다시 돌아와.”“흑흑흑, 엄마, 나 해외 가기 싫어. 안 갈래.”“현재 상황으로 출국 말고 답이 없어. 그래도 대학은 이미 자퇴했으니 오빠더러 해외 학교 알아보라고 할게.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와.”이수애는 한숨을 내쉬며 눈시울을 붉혔다.이미 너무 울어 두 눈이 퉁퉁 부었지만 서영은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울음을 멈추며 말했다.“엄마, 이거 최하연 짓이야! 틀림없어! 최하연이 나 이렇게 만들었어!”“뭐? 최하연이?”이수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그동안 너무 속상해 우는 데만 정신이 팔려 서영은 일이 왜 이 지경이 되어버렸는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호텔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 최하연에서 저와 구완선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다.‘이게 최하연 짓이 아니면 누구 짓인데?’“엄마, 이거 최하연 짓이야. 날 디자인 업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하고 학교도 자퇴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내 명예까지 더럽히려 한 거라고.”서영은 생각할수록 속상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하지만 이수애는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최하연? 최하연이 왜 이런 짓을 하는데? 아하, 널 망치면 우리 한씨 가문도 HT그룹도 망가지니까 그런 거네. 안 되겠어, 내 당장 그년을 찢어 죽일 거야!”이수애는 당장이라도 하연을 죽일 듯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침묵을 유지하던 강영숙이 버럭 소리쳤다.“그만해! 아직도 창피하지 않아?”그 말에 이수애는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어머님, 어머님도 방금 들었잖아요. 최하연이 우리 서영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어쩜 아직도 최하연 편을 드세요? 최하연은 이제 어머
“할머니, 저도 알아요. 이 일은 제가 철저하게 조사할 거예요.”강영숙은 이 일을 서준에게 맡긴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그 제야 서준은 서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눈물범벅이 된 서영의 모습에도 서준은 마음 약해지지 않았다.“말해. 대체 어떻게 된 거야?”그 말에 서영은 단번에 울음을 멈추고 숨소리를 죽였다.서영은 서준한테 사실대로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연을 건드리지 말라는 서준의 경고도 무시한 채 일을 벌이고 오히려 이런 꼴을 당했으니 말이다.이 순간 서영은 서준을 마주할 면목도, 한씨 집안 식구를 마주할 면목도 없었다.심지어 사실대로 말하면 집에서조차 발붙이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엄마...”서영은 결국 이수애를 불렀다.하지만 이수애도 서준의 눈치를 보는 신세인지라 서영 편을 들어주지 못했다.“한서영, 사실대로 말해.”서준은 이미 인내심이 사라진 지 오래다.그걸 알기에 서영은 몸을 흠칫 떨었다.“오빠, 무서워. 그러지 마. 나도 피해자야. 어떻게 친오빠라는 사람이 동생 편도 들어주지 않아?”“한서영, 그만해.”서준은 여전히 분노를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주먹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손등에 핏줄이 튀어 올랐고, 안색 역시 어두웠다.“네가 최하연 건드렸어? 내 경고 잊은 거야?”이토록 무서운 서준의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서영은 몸을 흠칫 떨며 끝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아니야, 오빠.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 약은 구완선이 구해온 거야. 최하연 망가뜨리자고 계획한 것도 구완선이고. 나도 일이 이렇게 됐는지 정말 모른다고.”서영은 말할수록 서럽고 억울했다.이 일에 크게 관여하지도 않았는데 가장 비참한 꼴을 당했다는 게 분했다.“한마디만 해. 너도 끼어들었어?”서영은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려 했지만 서준의 카리스마에 눌려 겁에 질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걸 본 서준은 콧방귀를 뀌었다.“들었죠? 얘가 먼저 최하연 건드렸다잖아요. 최하연을 망가뜨리려고 하다가 결국 본인이 당한 거고.”서준은 또박또박
서영의 찌라시가 온라인상에서 일파만파 퍼지는 바람에 그 소문을 잠재우느라 서준은 다음 분기에 출시하려던 신제품을 미리 선보였고, 그와 동시에 나노 로봇에 관한 연구 성과도 함께 공유했다.그 효과는 아주 대단했다.서준의 빠른 대처 덕에 HT그룹 신제품에 관한 기사가 서영의 찌라시를 바로 덮어 버렸고, 바닥을 치고 있던 HT그룹 주식 역시 점점 상승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쯧, 역시 한서준은 한서준이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니까. 어쩜 이런 방법을 생각할 수가 있지?”예나가 감탄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은이 이내 대답했다.“자본가들이 흔히 하는 수법이지 뭐. 그런데 한서영이 해외로 쫓겨났대. 아마 당분간은 이런 일 벌이지 못할걸.”“하, 정말 어쩜 그렇게 비겁한 생각을 한대? 솔직히 한서영이 지금껏 한 짓만 생각하면 한서준이 너무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해.”“그래도 친동생이니 너무 모질게 굴지는 못하겠지.”두 사람은 한마디씩 주고받다가 동시에 하연을 바라봤다.이윽고 여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한서영은 이미 완전히 매장당했고. 구완선 쪽도 내가 미리 손써 뒀어. 아마 B시에서 일자리는 영원히 구하지 못할걸.”하연은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사람이라면 누구나 본인이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지. 그러니 두 글자로 요약하자면 그냥 쌤통인 거야.”그 말에 예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아주 명언이네 명언!”그때 여은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참, 패션쇼 준비는 어떻게 돼 가?”“디자인은 초보적으로 끝났어. 이제 생산 시작하면 아마 월말쯤에 완성될 거야.”이렇게 큰 패션쇼는 하연도 처음 맡아보는지라 세부 사항은 모두 태훈이 도와주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금껏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다.“와, 우리 하연이 대단하네. 자, 이리 와, 이 언니가 뽀뽀해 줄게.”당장이라도 하연을 덮칠 듯 얼굴을 갖다 대던 예나는 시선 속에 나타난 실루엣을 본 순간 싱긋 눈웃음을 쳤다.“저기 봐, 누가 왔나.”이윽고 그
하연은 흥분한 듯 말했다.이것 역시 상혁이 이곳에 온 목적이기도 하다.“이 한복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오늘 저녁 자선 경매 활동에 경매품으로 나올 거래.”그 말에 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뭘 멍하니 있어? 얼마가 됐든 무조건 사야지.”여은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그럼, 이 한복이 패션쇼에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무조건 손에 넣어야지.”한복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던 하연은 결심이 선 듯 천천히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상혁 오빠, 이렇게 해요.”“그래, 오늘 저녁 내가 같이 가줄게.”예나와 여은은 그 말에 다급히 끼어들었다.“그럼 우리도 갈래요.”...저녁 7시가 되자, 이번 자선 경매가 열리는 B시의 제일 경매장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이번 자선 경매 활동에 참석하는 사람은 모두 B시에서 알아주는 유명 인사들이다.같은 계열 색상의 커플룩을 입고 나타난 예나와 여은은 경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저 사람 B시 디자이너 브랜드숍의 장 사장아니야? 장 사장이 이런 곳에 다 오다니.”“그 옆에 사람도 낯이 익은데. 아! 생각났어. 보그 패션 잡지 편집장이잖아.”“두 사람 친구 사이였구나. 진짜 부럽다.”“우리도 가서 인사나 할까?”“...”적지 않은 사람은 명성이 자자한 두 사람과 친해지려는 목적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고, 말재주가 뛰어난 데다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성격 덕에 예나와 여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명함을 받게 되었다.한편, 하연이 상혁의 팔짱을 낀 채 경매장에 나타난 순간,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었다.그도 그럴 게, 오늘의 하연은 너무 아름다웠다.하늘거리는 드레스는 하연의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최대한으로 끌어냈고, 역시 명문가 아가씨가 아니랄까 봐 사람을 끌어당기는 아우라를 내뿜었다.게다가 하연 옆에 선 상혁마저 워낙 뛰어나니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 모두 하연과 서준이 결혼했던 사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 순
이미 많은 상황을 겪어 본 터라 제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는 상혁의 말에도 설아는 화내지 않았다.“이해해요. 사무가 다망한 분이니 잊을 수 있죠. 저는 한설아라고 해요. 전에 FL그룹 창립 파티에서 뵌 적이 있는데.”상대의 설명에도 상혁은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아, 죄송해요. 기억나지 않네요.”거절 의사가 다분한 직설적인 말에 설아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어색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옆에서 지켜보던 하연이 오히려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 솔직히 상혁이 이런 미녀의 대시에도 꿈쩍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때, 검은색 수제 양복 차림의 서준이 경매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서준은 그동안 HT그룹 평판이 바닥에 떨어진 터라 다시 명성을 되찾을 목적으로 이번 자선 경매 활동에 참석한 거다.이번 기회에 기부도 하고 HT그룹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새롭게 각인시키려고.“한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주최자는 서준에게도 공손하고 깍듯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은 HT그룹 명예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서준은 여전히 B시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고, 한씨 가문 역시 B시에서는 손꼽히는 가문이기에 일개 주최자가 감히 무례를 범할 수 없었다.때문에 주최자는 서준을 맨 앞줄로 안내했다. 그것도 마침 하연과 상혁의 옆자리에.하연은 본 순간 서준의 시선은 한 시도 하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상혁의 옆에 꼭 붙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안색과 눈빛이 이내 어두워지더니 곧장 제 자리에 앉았다.“우선 오늘 저희 경매장을 찾아 주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 밤 벌어들인 수입은 전액 적십자사에 기부되어 독거노인과 고아를 돕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경매사의 말이 끝나자 현장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이어서 바로 오늘 밤의 첫 번째 경매품을 소개하겠습니다. JY그룹에서 기부해 준 팔찌, 2000만 원부터 호가 진행하겠습니다.”“2200만.”“2600만.”“3000만.”“...”잇따른 호가에 팔찌의 가격은
“기껏해야 1억짜리 시계가 4억까지 불리다니, 정말 놀랍네.”“호가한 사람이 누군지 봐봐. 최하연이잖아. 돈이 넘쳐날 정도로 많은 최씨 집안 아가씨잖아.”“하긴, 4억이 뭐 돈으로 보이겠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설아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번호판을 들었다.“6억!”경매사는 흥분한 듯 분위기를 고조로 이끌었다.“자, 6억 나왔습니다!”그때 하연이 다시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10억!”“와!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시계 하나에 10억? 이게 말이 돼?”“아무리 돈이 넘쳐 흘러도 그렇지.”“너희가 뭘 알아? 이건 어디까지나 자선 경매이니 기부하고 싶은 만큼 가격 부르는 거겠지.”“...”그때 상혁이 이해되지 않는 듯 하연에게 속삭였다.“이제 그만해.”하연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가격은 손목시계의 원래 가격을 훨씬 초월하는 가격이었다.하지만 하연은 상혁을 위로하듯 말했다.“괜찮아요.”하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설아가 다시 가격을 불렀다.“12억!”심지어 가격을 부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마치 12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16억!”하연이 곧바로 따라 가격을 덧붙이자 설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발을 굴렀다.“20억!”이 가격은 단연 최고가라고 말할 수 있었다.심지어 앞서 나온 경매품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최고가이기도 하기에 현장 분위기는 단번에 끓어올랐다.“한설아 마친 거 아니야? 20억을 주고 시계 하나를 산다고?”“뭐 돈이 넘쳐흘러 쓸 곳이 없나 보지.”“설마 눈치 못 챘어? 한설아와 최하연 경쟁하는 거 같지 않아?”“부자들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우린 그냥 구경이나 하자고.”“...”하지만 이번에 설아는 가격을 부르자마자 하연이 뒤따르기를 기다렸다.20억은 이미 설아의 예산을 초과한 금액이라 하연이 가격을 더 부르면 포기할 생각이었다.“네, 20억 나왔습니다!”경매사는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자, 다음으로 소개할 경매품은 청자를 주제로 한 조선시대 한복입니다. 소장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1억부터 호가 시작하겠습니다.”“1억 1천만!”“1억 2천만!”“1억 4천만!”“...”얼마 지나지 않아 한복의 가격은 단번에 2억으로 치솟았다.그때 하연이 때마침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3억!”주위 사람들은 하연이 경매에 참가하자 하나 둘 번호판을 내려놓으며 자진 포기했다.하지만 그때, 서준이 갑자기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3억 6천만!”이건 오늘 밤 서준이 처음으로 호가한 가격이었지만, 공교롭게도 하필이면 한복 한 벌을 두고 하연과 경쟁해야 했다.“헐, 이건 또 무슨 명장면이래? 한 대표님과 최하연이 붙었는데?”“전처와 전남편의 싸움이라, 과연 누가 이길까?”“갑자기 기대되는데?”“...”서준이 갑자기 경매에 뛰어들 줄 몰랐던 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로 뒤따랐다.“4억 4천만!”그러자 서준 역시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6억!”가격을 외치는 서준의 모습은 마치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오늘 서준이 경매에 참석한 목적은 사실 이 한복 때문이다.그도 그럴 게, 이 한복은 한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것이니까.심지어 강영숙이 결혼할 때 혼수로 가져왔던 가보인데, HT그룹 창립 초기 회사 상황이 어려워 경매에 내놓았었다.나중에 HT그룹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났을 때 서준은 줄곧 이 한복을 다시 사들이려고 했으니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면서 비매품으로 전해진 터라 어찌할 수 없었다.그런데 오늘 그 한복이 경매로 나왔으니 서준은 반드시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8억!”물론 하연 역시 이 한복이 필요했다.이번 패션쇼에 이 한복을 선보일 수 있다면 그 효과는 엄청날 거니까.“12억!”엎치락뒤치락 가격을 부르는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몇억, 몇십억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듯.“16억!”“20억!”“28억!”“...”그러다 가격이 40억까지 치솟았을 때, 서준은 눈살을 찌푸린 채 하연을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송혜선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솔직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채고 하나하나 넘겨봤다. 사진마다 담긴 장면이 송혜선을 점점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 최씨 가문의 귀한 딸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니,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사진 속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고한 분위기, 남다른 기품까지...비록 사진에는 전부 뒷모습만 담겨 있었지만,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송혜선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모든 사진을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친한 남녀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선을 넘은 정황은 없잖아. 겉보기엔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정다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설 탐정을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사진 속 ‘한명준’이라는 남자와 하연 이 둘 사이에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님, 이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다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바로 B시 한씨 가문의 사람이란다.” “B시 한씨 가문?”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하연의 전 남편이 한씨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한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최하연의 전남편은 감옥에 간 걸로 아는데, 또 다른 한씨 가문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복잡한 사연이 많았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다영은 하연과 ‘한명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일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부상혁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남자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