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접한 소식을 떠올린 동후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한 대표님, 방금 교도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민혜경 씨가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그 한마디에 주위는 일순 잠잠해졌다.너무 오랫동안 혜경의 소식을 듣지 못한 이유 때문일까?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서준이 끝내 물었다.“어떻대?”“다행히 교도관이 제때 발견하여 병원으로 이송됐다고는 하지만,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 한대요.”혜경은 명확한 증거 때문에 10년이라는 유기징역을 선고받고, 지금은 교도소에서 지내고 있다. 게다가 민씨 가문은 이제 무너졌고 민진현도 실종된 상황이다.그때부터 서준은 한 번도 혜경을 만난 적이 없었다.“안 만난다고 답장해.”서준은 차갑게 말했다. “네, 한 대표님.”구동후가 떠나려 할 때, 서준이 그를 불렀다.“한서영 지금 어디 있어?”“지금 아마 집에 돌아가셨을 겁니다.”“서영이 사용하는 모든 카드 정지시켜. 일전 한 푼도 사용할 수 없도록.”동후는 의외의 대답에 놀란 듯했으나, 이내 서준의 명령을 따랐다.“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구동후가 떠난 뒤, 커다란 공간에 서준만 남았다. 도시의 불빛과 오가는 차를 보니 일순 외로움이 밀려왔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하연은 회사 일로 바삐 보내다가 겨우 주말을 맞이했다. 하연은 진작 정태훈더러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라고 일러두었다.그날 아침, 예나는 선물을 챙겨 스포츠카를 끌고 하연의 집 문 앞에 도착했다.[얼른 나와. 나 도착했어.]하연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여전히 잠이 덜 깬 상태로 예나의 문자를 확인했다.“이렇게 빨리 왔다고?”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어보니 역시나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였다.“하연, 좋은 아침!”예나는 기쁜 얼굴로 하연에게 인사했다.“이거 안 교수님 파티야. 늦게 가면 우리가 무례하다고 생각한다고.”“...”“얼른 준비해, 나 여기서 기다릴게.”예나의 독촉하에 하연은 최대한 빨리 씻은 후 집을 나섰다.안형준의 저택은 도시 동쪽에 있는 미리내빌리지다.예전에
“안 교수님이 오셨어!”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자 지연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안형준이 오는 쪽을 바라봤다.“교수님!”지연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하지만 안형준은 가볍게 고개만 까닥이고는 아예 지연을 지나쳐 하연 쪽으로 다가갔다.“하연 양.”“안 교수님.”놀란 듯 인사해 오는 하연을 보자 안형준은 싱긋 미소 지었다.“오늘 이 파티는 사적인 파티라 그렇게 예의 차릴 거 없어요.”안형준이 하연을 특별하게 대한다는 걸 사람이라면 모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때 뒷전에 밀려 있던 지연이 다급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교수님, 이 분이 전에 말씀하셨던 최하연 씨죠?”그러면서 먼저 하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반가워요. 저는 안 교수님의 제자 엄지연이라고 해요.”안형준은 상황을 보더니 이내 말을 보탰다.“지연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생이기도 해요. 디자인에 소질이 있으니 두 사람 앞으로 서로 배웠으면 좋겠네요.”하연은 손을 내밀며 지연의 손을 잡았다.“반가워요, 최하연이라고 해요.”두 사람은 그것으로 인사를 끝냈다.“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한 것은 B시에 있을 큰 행사 때문입니다.”안형준이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누군가가 불쑥 질문했다.“혹시 다음 달에 있을 패션쇼 때문인가요?”“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B시 패션업계의 유명한 디자이너분들이니 이번 패션쇼에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더니 귓속말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이게 B시에서 처음 열리는 패션쇼라 해외에서도 엄청 기대하고 있대. 만약 여기서 좋은 디자인을 선보이면 단번에 유명세를 타는 거야.”“예전에는 항상 해외에서만 진행되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B시에서 진행된대. 이건 참 자랑할 만한 일이지, 우리에게 영광이자 기회인 셈이니.”“우리나라 원소를 넣어 디자인하면 세상에 우리 문화도 널리 알릴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외국 사람들한테 우리 패션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줘야지.”예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뒤늦게 반응한 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저한테 쏠리자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려 하연은 곧장 대답했다.“저는 이번 패션쇼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여기 계신 선배님들이 저보다 훨씬 잘 아실 것 같은데요.”하연의 겸손한 태도에 안형준은 매우 만족했다.“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이 책임을 짊어질 수 있겠어요?”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안형준이 하연을 이렇게까지 믿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화만 보면 아예 이번 패션쇼를 하연에게 일임하는 거나 다름없었다.하지만 하연에게 그렇다 할 대표작이 없는데, 이러면 사람들이 불복할 게 뻔했다.상황에 놀란 하연이 갑자기 짊어지게 된 책임에 어안이 벙벙해 입을 열려고 할 때,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먼저 기회를 낚아챘다.“안 교수님, 아직 자격도 안 되는데,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일을 그르치면 어떡합니까?”“맞아요. 제자들 중에 꼽자면 지연 양이 메인 디자이너에 더 잘 어울리죠. 어찌 됐든 지연 양은 크고 작은 패션쇼를 많이 맡아본 적이 있고, 매번 완벽하게 완성했잖습니까.”“지연 양 디자인은 독특하여 우리 업계에서도 실력은 인정 받잖아요.”사람들은 하연보다는 지연을 더 믿고 있었다.심지어 약속일도 한 듯 하나 둘 지연을 위해 나섰다.어찌 됐든 하연을 접한 건, 그저 인터넷 찌라시뿐이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기도 했고, 하연의 나이가 너무 어린 데다, 그렇다 할 대표작도 없으니 당연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더욱 중요한 건 나중에 하연이 패션쇼를 망치면 하연의 체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체면이 깎이게 되는 것이니까.“안 교수님, 재고해 주십시오.”지연은 사람들의 말에 그제야 안심했다.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안형준의 안색을 살피다가 저를 위해 마지막 변론을 했다.“교수님, 저한테 기회 한 번만 주시면 안 될까요?”기대 가득 찬 지연의 눈빛만으로도 이번 메인
지연은 뭐가 잘못됐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안형준이 저 대신 하연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스승과 제자의 감정에 금이 갔다고만 생각했다.이에 지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 섞인 태도로 밀어붙였다.“교수님이 눈여겨보시던 인재도 별거 없네요.”그 말을 듣는 순간 안형준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그리고 그와 동시, 하연도 결정을 내렸다.“엄지연 씨, 경합 받아들이겠습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배짱 하나는 칭찬할 만하네요. 하지만 제 말 고깝게 듣지는 말아줘요. 전 절대 봐주지 않을 테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거예요.”지연은 자기 실력에 매우 자신했다.그 말에 하연은 느긋하게 대답했다.“기대할게요. 하지만 지연 씨는 스승님에 대한 존중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네요.”지연의 낯빛은 순식간에 변했다.“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날 가르치죠?”하연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자격까지는 아니고, 그저 좋은 마음에 경고하는 겁니다.”방금 하연의 말에 체면이 깎인 지연은 이내 안형준을 바라봤다.“교수님, 저...”하지만 안형준은 손을 휘휘 저으며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됐어. 이젠 우리도 늙었으니 젊은이들한테 무대를 넘겨줘야 할 때도 됐지. 그러니까 실력 제대로 보여줘. 사람들도 공정한 눈을 갖고 있으니 승부는 반드시 갈라질 테니까.’지연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빛이 어두워지며 아차 싶었다.‘매번 이 승부욕이 문제네. 하지만 뭐, 이기면 되는 거니까. 내가 반드시 이길 거야.’“최하연 씨, 우리 실력으로 승부 봐요. 사흘 뒤, 어떤 작품 내놓는지 두고 볼게요. 저한테도 하연 씨 실력 한번 보여 줘봐요.”“그래요. 작품으로 승부 봐요.”하연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서로를 마주 보는 두 쌍의 눈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그리고 얼마 뒤, 지연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별의별 상황을 접한 적 있고 익숙해진 터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을 보자 오히려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했다.심
회사로 돌아온 하연은 최근 급하지 않은 일정을 모두 뒤로 미루거나 유미한테 맡기고는 이번 패션쇼와 관련된 자료를 열심히 공부했다.밖은 어느덧 어둠이 드리웠지만 DS그룹 맨 꼭대기 사무실은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서류 한 뭉치를 안고 온 상혁은 유리 창 너머에서 저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하연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이윽고 노크를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바닥에 널브러진 디자인 원고였다. 상혁이 허리를 숙여 한 장 한 장 열심히 줍는 동안, 하연은 펜 끝을 입에 물고 수심에 잠겨 있었다.그러다 상혁을 발견한 순간 모든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진 듯 투덜댔다.“상혁 오빠, 어떡해요? 저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요.”상혁은 원고를 모두 정리해 하연에게 다가갔다.“떠오르지 않으면 잠깐 휴식해. 자기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런데 벌써 하루가 지나갔어요. 이제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그래요.”상혁은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빼앗으며 일으켜 세웠다.“잠깐만 휴식해. 나랑 어디 같이 좀 다녀오자.”“네? 어디 가는데요?”하연이 어리둥절해서 물었지만 상혁은 뭔가 숨기기라도 하는 듯 아무 말 없이 하연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에 도착하자 상혁은 말없이 하연을 조수석에 태웠다. 그러자 참지 못한 하연이 끝내 물었다.“상혁 오빠, 어디 가는데요?”“가면 알아.”상혁은 여전히 뜸을 들이더니 시동을 걸었다.창밖으로 언뜻언뜻 지나가는 건물을 보며 살살 부는 밤바람을 쐬니 복잡했던 마음은 어느새 조금씩 차분해졌다.그렇게 한참 달리니 차는 도시를 지나 웬 고풍스러운 거리에 이르렀다.상혁이 주차 구역을 찾아 차를 세우는 사이, 하연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시립문화전당? 여긴 왜 왔어요?”상혁은 시동을 끄고 차 키를 뽑았다.“가자, 영감 찾으러.”하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상혁을 봤지만 끝내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
상혁은 싱긋 웃었다.“응, 다른 거 더 볼래?”하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이것보다 더 재밌는 것도 있어요?”상혁은 또 뜸 들였다.“이따가 보면 알아.”곧이어 상혁은 하연을 데리고 반대편 거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경극 공연이 한창이었다.”하연은 상혁과 함께 자수공방에 들러 여러 가지 자수 작품을 보며 고전 문화를 느꼈다.그러다 맨 마지막에 도자기 공방에 들러 진열된 청자기를 보던 중, 하연은 눈이 번쩍이더니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나 이제 오빠가 왜 여기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아요.”청자기를 구경하던 하연은 저녁에 봤던 각종 공연과 하루 중일 연구했던 패션쇼 자료를 떠올리며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펜, 빨리 펜 줘요!”상혁은 다급히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만년필을 꺼내 하연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종이가 없자 하연은 애가 탔다.“어떡해요? 나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릴 데가 없어요!”하연은 말하면서 다시 도자기 공방으로 뛰어 들어가 안에 있던 티슈를 꺼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공방 주인은 그 상황을 보자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지금 뭐 하는 거죠?”그때 상혁이 지갑에서 현금 한 움큼을 꺼내 건네자 주인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하연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진지하게 머릿속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그려냈고, 상혁은 옆에서 조용히 함께 있어 주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원고 하나가 뚝딱 완성되자 하연은 그걸 들고 자랑하듯 상혁 앞에 대고 흔들었다.“자요! 청자기를 주제로 한 옷이에요. 어때요?”워낙 그림 솜씨가 좋은 데다, 청자기라는 독특한 원소가 섞이니 유니크 하면서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작품이 탄생하여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아주 좋아!”하연은 활짝 웃었다.“이번 패션쇼는 우리나라뿐마 아니라 해외 패션계에서도 과심을 갖고 있대요. 그러니까 이건 분명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이 기회에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패션에 섞으면 아
그날 밤, 깊은 잠에 빠진 하연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느릿느릿 잠에서 깨어났다.똑똑-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하연은 이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렸고,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그 동작 때문에 스르륵 흘러. 그제야 하연은 어젯밤 사무실에서 잠들었다는 걸 발견했다.“들어와요.”하연은 옷을 정리하고 난 뒤 문을 향해 말했다.말이 떨어지자마자 태훈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하연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최 대표님, 잘 주무셨어요?”“어, 그래.”하연이 짤막한 대답과 함께 의아한 눈빛을 보내오자 태훈은 얼른 설명했다.“이건 부 대표님이 저더러 준비하라고 한 거예요. 부 대표님 정말 세심한 분인 것 같아요. 대표님한테도 유독 신경 쓰는 것 같고요.”그 말에 얼굴이 붉어진 하연은 얼른 어색함을 숨기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랬더니 메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하연아, 잘 잤어? 내가 정 비서더러 아침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꼭 먹어.]그 말끝에는 웃는 얼굴이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그걸 본 하연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정말 가끔 보면 소녀 같다니까?’그 덕에 기분이 좋아진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아침 식사를 마친 하연은 디테일을 손보기 시작했다.그렇게 하루 종일 일만 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자, 하연은 디자인 원고를 들고 회사를 떠났다. 하연이 운전한 포르쉐가 회사를 떠나자마자 구석진 골목에 세워져 있던 벤틀리도 따라 시동을 걸었다.한창 운전하다가 주요 도로에 접어들 때, 하연은 무심코 제 뒤를 따라붙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그 차 번호가 너무나 익숙한 번호라는 걸 발견한 하연은 운전대를 꽉 쥐고는 엑셀을 밟았다.그러자 뒤따르던 서준도 엑셀을 밟으며 하연과 여전히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뒤 차가 끝까지 따라붙자 하연은 끝내 핸들을 꺾어 길가에 차를 세웠다.아니나 다를까, 그 차도 얼마 떨어진 곳에 그대로 멈춰 섰다.하연은 이내 차에서 내려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걸어와 그 차의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곧이어
서준도 질투했다는 걸 인정한다.심지어 부럽기까지 했다.“혹시 그 자식 좋아해?”서준은 하연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내뱉었다.“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라 한서준 씨랑 상관없잖아.”“그래?”서준은 하연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하연을 점점 차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하연은 이내 버둥대며 반항했다.“한서준, 이거 놔!”“말해. 부상혁 좋아하냐고.”“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내 자유야!”하연은 분노가 폭발했다.“말해! 최하연, 네 대답 듣고 싶어.”“좋아해. 아주 좋아해. 좋아서 미치겠어. 됐어?”하연은 끊임없이 발버둥 치며 마구 소리쳤다.그 말을 들은 순간, 시뻘겋게 충혈된 서준의 눈에 일순 절망이 스쳐 지났고, 심장은 마치 칼로 도려낸 듯 아파 났다.그 사이를 틈타, 하연은 서준한테서 벗어나 뒤로 물러서더니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게 한서준 씨랑 무슨 상관이지? 부상혁이 없다면 이상혁이 있을 거고, 이상혁이 없으면 장상혁이 있을 거야. 그게 누가 됐든 넌 절대 한서준 씨는 아닐 거야. 알겠어?”하연은 말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오랫동안 꾹꾹 눌러온 감정이 한순간 폭발했다.서준은 그 대답에 자조적인 미소를 짓더니 주먹으로 차 유리를 세게 내리쳤다. 그 순간 유리가 깨지며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고, 서준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하지만 하연은 보는 체도 하지 않고 뒤돌아 제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하연은 백미러로 서준을 봤지만 결국 고민도 없이 엑셀을 밟고 떠나버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지만 서준은 떠나가는 차를 바라보느라 완전히 무시했다.하지만 상대는 끈질기게 여러 번이나 전화를 걸어오자 결국 귀찮은 듯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이야?”“한 대표님, 민혜경 씨가 또 자살했다고 합니다.”‘또야?’서준은 입가에 비아냥 섞인 미소를 지었다.“좀 새로운 방법은 없대?”“아니, 이번에는 엄청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
송혜선은 태동이 불안해졌지만, 병원에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조봉규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돌아오자, 송혜선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아, 의사가 말했잖아. 임신 기간은 많이 지나서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고 지금처럼 자극을 받으면 쉽게 자궁 수축이 일어나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봉규의 말에 송혜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천천히 물었다. “그 사람... 아직 안 왔어?”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당연히 부동건을 뜻했다. 조봉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송혜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에 남준이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 때문이야.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손을 천천히 배 위로 가져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동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 너머로 송혜선이 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걸음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송혜선은 몸을 돌려 등을 돌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은 다급해지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봐.” 옆에 있던 조봉규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부동건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자극?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순간, 송혜선은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부동건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자 송혜선은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뭐긴 뭐겠어요! 내가 다 들었어요. 이사회에
떠나기 전, 부동건은 마지막으로 남준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비록 너를 본사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지사의 전망은 여전히 밝다. 남준아, 이 기회를 잘 살려 내가 기울인 정성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이사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떠났다. 순식간에 넓은 회의실에는 상혁과 남준 단둘만 남게 되었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준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이겼네요, 형님.”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결국 그렇게 말할 거면서 원래부터 누구의 것이었는지, 오늘로 분명해졌을 뿐이다.” 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대꾸했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승패는 병가상사일 뿐, 그저 순간의 결과에 불과하겠지요.” 상혁은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동남아 시장은 기회의 땅이지. 남준아, 이 기회를 잘 활용해라. 너의 전임자였던 정규인의 사례처럼 성급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상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참, 깜빡할 뻔했네. 정규인의 사건이 곧 재판에 들어간다고 하더라.” 남준의 얼굴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빨리?’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남준은 곧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꿰뚫은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규인의 입은 아직 단단히 닫혀 있지. 지금까지는 별다른 중요한 정보는 불지 않았다고 하던데. 하지만...” “하지만 뭐 말입니까?” 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형님, 말씀은 끝까지 하셔야죠.” 상혁은 몇 걸음을 걸어 남준의 바로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고경수는 제법 많은 걸 실토했다고 하던데. 정규인은 거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 거야. 게다가 정규인의 아내가 뭔가 중요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하고... 그게 네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부동건과 부남준의 대립을 본 이사회 임원들은 공기의 분위기를 읽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부동건의 목소리가 임원들을 붙잡았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분들입니다.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동건의 한 마디에, 임원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부동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깊은 회한과 슬픔을 내비쳤다. 부씨 가문 형제가 서로 다투는 모습은 부동건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미 이렇게 된 김에, 오늘 여러분께 제 마음속에 있는 말 몇 마디 전하고자 합니다.” “회장님,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우리는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장 이사가 먼저 나서서 지지를 표명하자, 다른 이사들도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DL그룹이 누구에게 넘어가든, 우리는 최선을 다해 협력할 것입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이사회의 임원들은 이제 그의 뜻과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한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부동건은 주석 자리에 앉아, 깊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항상 두 형제가 화합하고 협력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부동건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고요한 숨을 내쉬었다. 이내 시선을 돌려 상혁을 바라보았다.상혁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냉담한 태도를 풍기고 있었다. “동남아 시장에서 남준이가 해낸 일은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시장을 안정시키고 발전시킨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남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진수용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정지철의 허위 비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형님의 결백이 밝혀진 셈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사회에서 우리가 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DL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후계자를 확정하는 것입니다.” 남준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남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 이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진실은 이미 밝혀졌으니, 이제 우리 모두 이 일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 이사는 고개를 돌려 이사회 임원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부상혁 대표님이 결백하다면, DL그룹의 수장을 계속 맡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부상혁 대표님을 계속 지지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이건 부동건 회장님께서도 바라셨을 일일 겁니다.” 지 이사 역시 곧바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사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다른 이사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발언 이후, 나머지 이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맞습니다.” “저도 부상혁 대표님을 지지합니다.”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했던 왕 이사 마저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세 명의 이사가 상혁에게 지지를 보내며, 상혁과 남준 형제간의 대립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그러나 조금 전까지 남준을 지지하던 진수용과 오국정은 서로 눈을 마주친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이 두 사람도 상황이 끝났음을 깨달았다.하지만 직장에서 마지막 순간에 배신하는 것은 큰 금기 이기때문에 진수용과 오국정은 처음부터 잘못된 편을 들었기에, 끝까지 그 길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너무도 빠르게 뒤바뀌었고, 남준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이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한 표는 여기 없었다. 바로 부동건의 손에 있었다. 남준은 부동건을 배제하고 네 표를 확보해 승리를 확정 지으려 했으나,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
“이럴 수는 없어...!” 정지철이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뒤에 있던 의자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의자의 손잡이를 꽉 잡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계약들이 모두 가짜라는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위조된 계약서였다고?” 그의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지철은 점차 자신을 의심하며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만약 이 계약들이 위조된 것이라면? 도장이 가짜라면? 그렇다면 그의 모든 비난은 단지 무효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문서 위조라는 중대한 범죄가 될 수 있을 텐데...’“아니야, 아니야.” 정지철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지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기엔 뭔가 문제가 있어.” 그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너야. 그래, 너 맞지! 이 모든 게 네가 한 짓이야.” 정지철은 무언가 깨달은 듯,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혼자서 고함을 질렀다. 그의 떨리는 손을 들어 상혁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 모든 게 네가 만든 함정이야! 내가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린 거잖아. 너야말로 이 모든 사건의 주범이야! 이건 모두 네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계산한 일이야!” 정지철의 비난에도 상혁은 아무런 동요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혁은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했다. 정지철은 모든 걸 잃은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으며 머릿속에서 최근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는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어쩐지...’정지철은 이번에 이렇게 순조롭게 모든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상혁은 항상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쉽게 약점을 잡히게 놔둘 리가 없었
“여러분, 장 이사님 말씀은 믿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부남준 상무님을 믿어야 합니다. 부남준 상무님은 틀림없이 DL그룹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 능력이 있습니다.” 정지철은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곧바로 단호한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그만하세요! 부상혁 대표님도 아직 입을 열지 않으셨는데, 왜 혼자 그렇게 떠들고 계십니까? 오히려 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지 이사의 태도는 단호했고, 정지철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침착하게 상황을 관망하던 상혁은 미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흥미진진한 연극을 관람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 이사님께서 오늘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은 남준이를 위해서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오늘의 이사회는 처음부터 정지철이 모든 것을 걸고 온 자리였다. 그는 이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단호한 태도로 상혁을 바라보며 외쳤다. “부상혁 대표님, 명백한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더는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상혁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들은 듯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 말씀은 너무 과장됐군요. 변명이라뇨? 저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정 이사님께서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셨으니 저 역시 뒤처질 수 없죠.” 이 말을 듣자, 원신민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신속하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화면에 자료를 띄웠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정도까지 이야기가 나온 만큼, 저도 여러분께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남준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긴장감에 휩싸였다.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오늘 모든 일이 물 흐르듯이 지나치게 순조롭게 흘러갔고,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상혁의 침착한 태도를 보며 남준은 그동안의 안일함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형님, 준비하신 자료가 무엇입니까?” 남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