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연을 닦달하자 서영은 으쓱한 듯 팔짱을 끼며 하연을 바라봤다.“사람들 말이 맞아. 최하연, 증거를 내놓지 않으면 나 신고할 거야.”서영은 핸드폰을 꺼내 흔들더니 전화할 것처럼 굴었다.서준이 옆에서 막으려 했지만 그게 서영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태현이 제 호주머니 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미리 녹음했던 걸 들려주려는 듯 하연을 바라봤다.하지만 하연은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로 마치 모든 게 손안에 있다는 듯 말했다.“한서영, 내가 정말 증거를 내놓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어떡하지? 난 항상 사전에 뭐든 준비해 놓는 습관이 있거든. 특히 내 작품에는 더더욱.”그 말을 듣는 순간 서영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뭐라고?”하연은 서영의 말을 무시한 채 사람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증거라면 있습니다. 바로 저 작품 속에.”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무슨 뜻이지? 그림은 특별한 거 없어 보이던데?”“그러니까. 그만 뜸 들이고 증거나 내놓으시죠?”“최하연 씨, 설마 그림에 워터마크라도 남겼단 말입니까?”하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네. 만약 한서영 씨가 제 작품을 대충 모방했다면 선명하지 않았을 테지만, 선 하나 빼놓지 않고 똑같이 복제했거든요. 그래서 아주 선명합니다.”말을 마친 하연은 앞으로 걸어가 그림을 손에 쥐더니 그걸 거꾸로 돌려놓은 채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여기 소매 부분 좀 보세요. 제가 디자인할 때 이곳에 표시를 남겨두는 습관이 있거든요. 여기 단추가 있는 부분에 CHY이라는 이니셜 보이시죠?”하연이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다시 보자 확실히 CHY라는 이니셜이 눈에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물론 색상이 아주 연했지만 확실히 새겨져 있었다.그 순간, 진실이 뭔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 판가름 났다.“헐, 진짜네! 어쩜 이니셜까지 똑같이 표절할 수 있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아무리 베껴도 그렇지 어쩜 이니셜까지 베껴? 정말 이것도 인재라면 인재야.”“아까 그렇게 억울
“안 교수님, 아닙니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제가 한순간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서영은 울며불며 애원했다.하지만 안형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한서영 씨, 내 제자로 대학원에 지원할 생각이라면 미리 포기하세요. 실력이 된다 해도 인간 됨됨이가 안 되는 사람은 절대 합격시켜 주지 않을 테니까.”‘어떡해, 이제 끝이야!’안형준에게 대놓고 거절을 받은 순간 서영에게는 이제 막다른 길만 놓였다. 이 바닥이 넓은 것도 아닌데, 앞으로 디자인 업계에 남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한참 동안 멍해 있던 이수애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달려 나와 사정했다.“안 교수님, 서영이 순간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반드시 노력하는 모습 보여드릴 겁니다.”그때 주태식이 끼어들었다.“됨됨이도 안 된 사람은 아무리 성적이 좋아봤자 소용없어요. 다른 전공 알아봐요.”“안 돼요! 안 교수님,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잖아요. 서영은 아직 어린데, 이대로 인생 망칠 순 없어요!”이수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애원했다.그걸 구경하고 있던 주위 사람들은 이수현 모녀에게 손가락질했고, 안형준은 아예 두 사람을 무시한 채 하연에게 걸어갔다.“하연 양이 디자이너 브랜드숍을 운영한다는 얘기는 진작 들었어요. B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라던데. 오늘 보니 역시나 헛소문이 아니네요. 디자인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앞으로 함께 손잡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교수는 하연의 침착하고 태연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태식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안 교수님!”심지어 이수애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안형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이에 이수애는 화가 난 듯 발을 굴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곧이어 주위 사람들도 안형준과 함께 흩어졌지만 오늘 있은 일은 날개라도 달린 듯 B시의 디자인 업계에 소문났
서영은 그 말에 겁을 먹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서준이 정말 이렇게 화낼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엄마...”이수애도 서준이 이토록 모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다급하게 아들을 말렸다.“아들, 너 왜 이래?”“쟤가 이런 사고 친 거 어머니 탓도 있어요. 부모가 돼서 딸자식 너무 싸고돌면 자식 인생 망쳐요.”이수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아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이미 쪽팔릴 대로 팔린 서영은 황급히 도망쳤고, 이수애는 딸이 안 좋은 선택이라도 할까 봐 얼른 뒤쫓았다.“서영아, 엄마랑 같이 가.”하연은 서준의 가족 일에 관심이 없었지만 오늘 일은 그나마 통쾌했다.그때, 상혁이 하연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주며 위로했다.“사실이 밝혀졌으니 우린 이만 가자.”“네.”상혁은 떠나기 전 서준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런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는 눈빛에 서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보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걸 보는 게 더 거슬렸다.“최하연, 목적을 이뤄 아주 의기양양하지?”서준은 한 손을 제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비아냥거렸다.그 말에 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의기양양한 것까지는 없지만 기분 꽤 좋아. 그런데 이건 다 자업자득이야.”서준은 하연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예전의 하연은 이토록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지 않았었으니 말이다.“한서영이 이렇게 된 건 자업자득이 맞지만, 그래도 자비를 베풀 수는 있었잖아.”이게 바로 서준이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기억 속의 하연은 착하기만 해서 어린 여자애의 앞날까지 망칠 정도로 모질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는지.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한씨 가문은 앞으로 이 바닥에 발붙일 수도 없을 거다.“자비?”하연은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내가 자비를 베풀면 한서영이 고맙게 받아들일 것 같아?”서영이 얼마나 사람 속을 긁는데, 자비를 베푼다 해도 뻔뻔하게 굴 게 뻔하다.그때 상혁이 하연을 보호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서준
“무슨 뜻이야?”서준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태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녹음을 꺼내 들었다.“자, 이게 내가 오늘 널 부른 이유야. 이 사건의 진실이기도 하고.”녹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서준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하연 씨도 서영한테 기회를 줬어. 서영이가 그걸 차버린 것도 모자라 도발한 거야.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끝없이 용서해 주고 포용할 수는 없어.”서준은 말없이 손을 그러쥐었다.그 순간 후회가 온몸을 휘감았다.서준은 처음으로 막막한 표정을 짓더니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뒤에야 중얼거렸다.“내가 오해했네...”...“최하연 씨, 잠깐만요.”하연이 떠나려고 할 때, 웬 젊은 남자가 뒤따라 달려왔다.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 하연이 어리둥절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죠?”“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저는 안 교수님의 조교입니다.”남자는 자기소개를 하면서 금색 글씨가 씌어 있는 초대장을 앞으로 내밀었다.“하연 씨, 이건 안 교수님 저더러 특별히 하연 씨한테 주라고 한 초대장입니다.”하연은 얼른 받아 안에 있는 초대장을 확인했다.“교수님께서 오늘 전시회에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여 죄송하다고 이걸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주말에 교수님께서 따로 파티를 열 건데 특별히 하연 씨를 초대하고 싶어 하셨고요.”하연의 눈에는 놀라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B시 디자인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중 한 분이신 안형준 교수의 초대장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하연은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주말에 꼭 참석할게요.”“네, 조심히 가세요.”돌아가는 길에 하연은 초대장을 확인하며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그걸 본 상혁이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하연아, 그 초대장이 그렇게 특별해? 얼굴에 아주 꽃이 피었네?”하연은 싱긋 미소 지었다.“이거 안 교수님 초대장이거든요.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거라고요.”“오! 그러면 엄청 귀한 건가 보네?”“그럼요. 아무튼 이걸 받을 수 있다는 게
방금 접한 소식을 떠올린 동후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한 대표님, 방금 교도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민혜경 씨가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그 한마디에 주위는 일순 잠잠해졌다.너무 오랫동안 혜경의 소식을 듣지 못한 이유 때문일까?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서준이 끝내 물었다.“어떻대?”“다행히 교도관이 제때 발견하여 병원으로 이송됐다고는 하지만,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 한대요.”혜경은 명확한 증거 때문에 10년이라는 유기징역을 선고받고, 지금은 교도소에서 지내고 있다. 게다가 민씨 가문은 이제 무너졌고 민진현도 실종된 상황이다.그때부터 서준은 한 번도 혜경을 만난 적이 없었다.“안 만난다고 답장해.”서준은 차갑게 말했다. “네, 한 대표님.”구동후가 떠나려 할 때, 서준이 그를 불렀다.“한서영 지금 어디 있어?”“지금 아마 집에 돌아가셨을 겁니다.”“서영이 사용하는 모든 카드 정지시켜. 일전 한 푼도 사용할 수 없도록.”동후는 의외의 대답에 놀란 듯했으나, 이내 서준의 명령을 따랐다.“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구동후가 떠난 뒤, 커다란 공간에 서준만 남았다. 도시의 불빛과 오가는 차를 보니 일순 외로움이 밀려왔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하연은 회사 일로 바삐 보내다가 겨우 주말을 맞이했다. 하연은 진작 정태훈더러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라고 일러두었다.그날 아침, 예나는 선물을 챙겨 스포츠카를 끌고 하연의 집 문 앞에 도착했다.[얼른 나와. 나 도착했어.]하연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여전히 잠이 덜 깬 상태로 예나의 문자를 확인했다.“이렇게 빨리 왔다고?”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어보니 역시나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였다.“하연, 좋은 아침!”예나는 기쁜 얼굴로 하연에게 인사했다.“이거 안 교수님 파티야. 늦게 가면 우리가 무례하다고 생각한다고.”“...”“얼른 준비해, 나 여기서 기다릴게.”예나의 독촉하에 하연은 최대한 빨리 씻은 후 집을 나섰다.안형준의 저택은 도시 동쪽에 있는 미리내빌리지다.예전에
“안 교수님이 오셨어!”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자 지연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안형준이 오는 쪽을 바라봤다.“교수님!”지연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하지만 안형준은 가볍게 고개만 까닥이고는 아예 지연을 지나쳐 하연 쪽으로 다가갔다.“하연 양.”“안 교수님.”놀란 듯 인사해 오는 하연을 보자 안형준은 싱긋 미소 지었다.“오늘 이 파티는 사적인 파티라 그렇게 예의 차릴 거 없어요.”안형준이 하연을 특별하게 대한다는 걸 사람이라면 모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때 뒷전에 밀려 있던 지연이 다급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교수님, 이 분이 전에 말씀하셨던 최하연 씨죠?”그러면서 먼저 하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반가워요. 저는 안 교수님의 제자 엄지연이라고 해요.”안형준은 상황을 보더니 이내 말을 보탰다.“지연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생이기도 해요. 디자인에 소질이 있으니 두 사람 앞으로 서로 배웠으면 좋겠네요.”하연은 손을 내밀며 지연의 손을 잡았다.“반가워요, 최하연이라고 해요.”두 사람은 그것으로 인사를 끝냈다.“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한 것은 B시에 있을 큰 행사 때문입니다.”안형준이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누군가가 불쑥 질문했다.“혹시 다음 달에 있을 패션쇼 때문인가요?”“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B시 패션업계의 유명한 디자이너분들이니 이번 패션쇼에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더니 귓속말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이게 B시에서 처음 열리는 패션쇼라 해외에서도 엄청 기대하고 있대. 만약 여기서 좋은 디자인을 선보이면 단번에 유명세를 타는 거야.”“예전에는 항상 해외에서만 진행되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B시에서 진행된대. 이건 참 자랑할 만한 일이지, 우리에게 영광이자 기회인 셈이니.”“우리나라 원소를 넣어 디자인하면 세상에 우리 문화도 널리 알릴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외국 사람들한테 우리 패션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줘야지.”예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뒤늦게 반응한 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저한테 쏠리자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려 하연은 곧장 대답했다.“저는 이번 패션쇼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여기 계신 선배님들이 저보다 훨씬 잘 아실 것 같은데요.”하연의 겸손한 태도에 안형준은 매우 만족했다.“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이 책임을 짊어질 수 있겠어요?”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안형준이 하연을 이렇게까지 믿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화만 보면 아예 이번 패션쇼를 하연에게 일임하는 거나 다름없었다.하지만 하연에게 그렇다 할 대표작이 없는데, 이러면 사람들이 불복할 게 뻔했다.상황에 놀란 하연이 갑자기 짊어지게 된 책임에 어안이 벙벙해 입을 열려고 할 때,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먼저 기회를 낚아챘다.“안 교수님, 아직 자격도 안 되는데,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일을 그르치면 어떡합니까?”“맞아요. 제자들 중에 꼽자면 지연 양이 메인 디자이너에 더 잘 어울리죠. 어찌 됐든 지연 양은 크고 작은 패션쇼를 많이 맡아본 적이 있고, 매번 완벽하게 완성했잖습니까.”“지연 양 디자인은 독특하여 우리 업계에서도 실력은 인정 받잖아요.”사람들은 하연보다는 지연을 더 믿고 있었다.심지어 약속일도 한 듯 하나 둘 지연을 위해 나섰다.어찌 됐든 하연을 접한 건, 그저 인터넷 찌라시뿐이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기도 했고, 하연의 나이가 너무 어린 데다, 그렇다 할 대표작도 없으니 당연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더욱 중요한 건 나중에 하연이 패션쇼를 망치면 하연의 체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체면이 깎이게 되는 것이니까.“안 교수님, 재고해 주십시오.”지연은 사람들의 말에 그제야 안심했다.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안형준의 안색을 살피다가 저를 위해 마지막 변론을 했다.“교수님, 저한테 기회 한 번만 주시면 안 될까요?”기대 가득 찬 지연의 눈빛만으로도 이번 메인
지연은 뭐가 잘못됐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안형준이 저 대신 하연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스승과 제자의 감정에 금이 갔다고만 생각했다.이에 지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 섞인 태도로 밀어붙였다.“교수님이 눈여겨보시던 인재도 별거 없네요.”그 말을 듣는 순간 안형준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그리고 그와 동시, 하연도 결정을 내렸다.“엄지연 씨, 경합 받아들이겠습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배짱 하나는 칭찬할 만하네요. 하지만 제 말 고깝게 듣지는 말아줘요. 전 절대 봐주지 않을 테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거예요.”지연은 자기 실력에 매우 자신했다.그 말에 하연은 느긋하게 대답했다.“기대할게요. 하지만 지연 씨는 스승님에 대한 존중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네요.”지연의 낯빛은 순식간에 변했다.“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날 가르치죠?”하연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자격까지는 아니고, 그저 좋은 마음에 경고하는 겁니다.”방금 하연의 말에 체면이 깎인 지연은 이내 안형준을 바라봤다.“교수님, 저...”하지만 안형준은 손을 휘휘 저으며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됐어. 이젠 우리도 늙었으니 젊은이들한테 무대를 넘겨줘야 할 때도 됐지. 그러니까 실력 제대로 보여줘. 사람들도 공정한 눈을 갖고 있으니 승부는 반드시 갈라질 테니까.’지연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빛이 어두워지며 아차 싶었다.‘매번 이 승부욕이 문제네. 하지만 뭐, 이기면 되는 거니까. 내가 반드시 이길 거야.’“최하연 씨, 우리 실력으로 승부 봐요. 사흘 뒤, 어떤 작품 내놓는지 두고 볼게요. 저한테도 하연 씨 실력 한번 보여 줘봐요.”“그래요. 작품으로 승부 봐요.”하연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서로를 마주 보는 두 쌍의 눈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그리고 얼마 뒤, 지연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별의별 상황을 접한 적 있고 익숙해진 터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을 보자 오히려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했다.심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