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네.’“한서영, 기회 줄게. 네가 직접 저 작품 전시회에서 내려달라고 해. 안 그러면 후회하게 할 테니까.”서영은 하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하연에게 원고도 없고 그렇다 할 증거도 없으니 쫄릴 것도 없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했다.“마음대로 하던가.”이 말을 끝으로 등을 곧게 펴고 도도하게 돌아선 서영은 문을 연 순간, 태현과 딱 맞닥뜨렸다.“태현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태현은 서영의 말을 무시한 채 멀리 떨어져 있는 하연에게 눈길을 주더니 무심코 물었다.“너 하연 씨랑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어?”서영은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태현 오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친하긴요. 최하연은 최씨 가문 아가씨인데, 저 같은 사람이 쳐다나 볼 수 있겠어요?”분명 겸손한 내용이었지만 들을수록 괴상야릇했다.“아하.”태현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서영도 곧바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태현을 지나쳤다.서영이 떠나자 태현은 고개를 숙여 제 핸드폰을 바라봤다. 액정에는 약 5분 정도 녹음된 녹음 파일이 있었다.태현은 어두운 눈빛으로 저장 버튼을 눌러 녹음 파일을 저장하고는 먼저 하연에게 인사했다.“하연 씨, 오랜만이네요.”태현은 오늘 여느 때처럼 하연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하연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약간 치켜 올리며 물었다.“안 교수님과는 무슨 사이예요?”태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성이 똑같다는 건 깊은 관계를 뜻하지 않겠어요? 왜요? 하연 씨도 우리 영감탱이 제자로 들어오게요? 하연 씨 이력이면 충분히 더 좋은 기회가 많을 텐데요.”하연은 이내 태현의 뜻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안형준과 안태현이 부자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렇군요.”“참, 하연 씨.”태현은 다시 하연을 불러 세웠다. 물론 지난날 자기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걸 인정하지만, 진심이 장황한 말보다 더 효과가 있다는 것쯤은 태현도 알고
상혁의 말에 하연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아니에요, 제 건 제가 직접 돌려받을게요.”하연은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서영을 빤히 바라봤다.이 시각, 서영은 환한 표정으로 업계 거물 인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심지어 멀찍이 서 있는 하연을 보더니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들었다.“한서영 씨, 안 교수님이 잠시 오라고 하십니다.”그때, 직원 한 명이 서영한테 걸어와 깍듯하게 말했다.“그래요, 바로 갈게요.”서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곧장 직원을 따라 전시장을 떠났다.그 시각, 친구들과 서영의 작품에 대해 논의하고 있던 안형준은 서영을 보자 얼른 소개했다.“내 친구 주 대표가 서영 양의 디자인에 관심이 생겨 디자인 컨셉과 계기에 대해 얘기 나누고 싶다더군.”“네, 안 교수님.”서영은 이내 옆에 있는 주태식을 바라보며 술술 설명하기 시작했다.“이 작품 주요하게 현시대 여성들의 독립을 컨셉으로 잡았고, 독립적인 여성을 표현하는 옷을 디자인하기 위해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완성했고요.”서영의 설명을 듣고 있던 주태식은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디자인 컨셉이 아주 독특하고 새롭네요. 작품도 사람의 이목을 끌고. 하지만...”주태식은 하던 말을 잠깐 멈췄다.그 모습에 서영이 다급하게 물었다.“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주태식은 깊은 고민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디자인은 별문제가 없지만 디자인 컨셉이 작품과는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제 이해가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그 말에 서영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주 대표님,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그 말씀은 제가 작품을 베끼기라도 했다는 겁니까?”주태식은 안형준의 체면을 봐서 고개를 젓더니 끝내 뜻을 굽혔다.“미안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하지만 서영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저를 의심한 사람 주 대표님이 처음은 아니에요.”이윽고 서영은 주위를
“이게 내가 디자인한 게 아니라면 증거를 내놔! 증거도 내놓지 못하면서 사람 비방하지 말고.”서영은 하연이 증거를 내놓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때문에 오히려 더 당당한 태도로 몰아붙였다. 그때 하연이 솔직하게 말했다.“확실히 실질적인 증거는 내놓을 수 없어.”“뭐야! 증거도 내놓지 못할 거면서 표절했다고 남을 모함한 거야?”“그러니까. 이건 그냥 모함이잖아.”“대단하신 최씨 가문 아가씨가 이런 사람일 줄이야.”“그건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 한서영이 예전에 최하연 시누이였잖아. 한서영한테 쌓인 게 많아 복수한 걸지도 모르지.”“헐,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서영은 여론이 제 쪽으로 기울자 배짱이 더 두둑해졌다.‘대중들 눈이 얼마나 밝은데. 최하연 내가 오늘 너 웃으면서 왔다가 울면서 돌아가게 해줄게.’“하, 증거가 없으면 나한테 사과해. 그러면 너 용서해 줄 테니까.”하연은 입가에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사과? 너한테 그럴 자격은 있고?”그 말을 들은 서영은 한순간 얼굴색이 어두워졌다.“최하연,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날 탓하지 마.”“내가 직접적인 증거는 내놓지 못하는 건 맞아. 이 작품의 원고도 없고. 네가 원고마저 훔쳐 갔으니까.”그 말에 서영은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하연에게 삿대질했다.“헛소리 지껄이지 마!”“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사실이 증명해 주겠지.”하연의 확신에 찬 말투에 사람들의 마음은 갈팡질팡했다.“설마 한서영이 정말 최하연 디자인 훔친 건 아닐까?”“그건 모르는 일이지.”“그런데 한서영이 저렇게 당당한 걸 봐서는 아닐 것 같은데.”하지만 사람들이 당당하다고 생각한 서영은 이미 당황하기 시작했다.“최하연, 헛소리 지껄이지 마. 내가 언제 네 디자인 훔쳤다고 그래?”“네가 디자인한 거라면 왜 디자인 컨셉도 제대로 설명 못 해? 이건 너무 이상하지 않아?”“누가 그래? 내가 설명하지 못했다고? 아까 분명 말했는데!”그때 옆에 있던 주태식이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제가 볼 때, 이 작품의 컨
그때, 얼굴이 흙빛이 되어버린 서영이 인정하지 못한다는 듯 끼어들었다.“최하연,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증거 있어? 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내놔! 증거도 없으면서 사람 모함하지 말고!”서영은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여전히 당당한 태도로 밀어붙이며 주변에서 의지할 사람을 찾았다.그러다 사람들 속에 있는 서준을 발견하고는 지푸라기라도 발견한 것처럼 서준한테 달려갔다.“오빠! 오빠 전처가 글쎄 나를 모함하는 거 있지! 분명 지난 일에 앙심을 품고 나한테 복수하려는 걸 거야. 사람들 앞에서 내 앞길 망치려고.”서준은 서영에게 끌려 하연의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연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그 순간 서준은 왠지 모르게 하연이 분명 앞에 서 있지만 저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런 상황에서 서영이 정말 디자인을 훔친 것이 밝혀지면 앞으로 영영 디자이너로서 이 바닥에 발을 붙이지 못할 거다. 그러면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것도 모두 물 건너갈 거고, 앞길도 한순간에 망치게 된다.서영의 오빠로서 서준은 사실이 무엇이든 하연이 서영을 망치게 둘 수 없었다.“최하연, 소란 그만 피워. 아직도 모자라?”하연은 일순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해 있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달되지 않았다.“소란? 한 대표님 눈에 제가 소란 피우는 거로 보이나 보죠? 아니면 표절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건가?”그 말을 듣는 순간 서준의 표정은 차가워졌다.“서영이 디자인 표절했다는 건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역시 예상했던 대로 서준은 서영을 감쌌다. ‘역시 가족이라는 건가?’“한 대표님, 이 세상에 오해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저...”“최하연! 너 꼭 서영의 앞날을 망쳐야겠어?”“그렇다면 어떡할 건데? 내가 부처님도 아니고 왜 계속 내가 봐줘야 하지?”서준은 이런 상황에서 하연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이내 어조를 누그러뜨렸다.“이 일은 그냥 넘어가자. 응?”하연은 이 상황이 웃음만 나왔다.‘진짜 웃기네.’
사람들이 하연을 닦달하자 서영은 으쓱한 듯 팔짱을 끼며 하연을 바라봤다.“사람들 말이 맞아. 최하연, 증거를 내놓지 않으면 나 신고할 거야.”서영은 핸드폰을 꺼내 흔들더니 전화할 것처럼 굴었다.서준이 옆에서 막으려 했지만 그게 서영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태현이 제 호주머니 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미리 녹음했던 걸 들려주려는 듯 하연을 바라봤다.하지만 하연은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로 마치 모든 게 손안에 있다는 듯 말했다.“한서영, 내가 정말 증거를 내놓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어떡하지? 난 항상 사전에 뭐든 준비해 놓는 습관이 있거든. 특히 내 작품에는 더더욱.”그 말을 듣는 순간 서영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뭐라고?”하연은 서영의 말을 무시한 채 사람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증거라면 있습니다. 바로 저 작품 속에.”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무슨 뜻이지? 그림은 특별한 거 없어 보이던데?”“그러니까. 그만 뜸 들이고 증거나 내놓으시죠?”“최하연 씨, 설마 그림에 워터마크라도 남겼단 말입니까?”하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네. 만약 한서영 씨가 제 작품을 대충 모방했다면 선명하지 않았을 테지만, 선 하나 빼놓지 않고 똑같이 복제했거든요. 그래서 아주 선명합니다.”말을 마친 하연은 앞으로 걸어가 그림을 손에 쥐더니 그걸 거꾸로 돌려놓은 채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여기 소매 부분 좀 보세요. 제가 디자인할 때 이곳에 표시를 남겨두는 습관이 있거든요. 여기 단추가 있는 부분에 CHY이라는 이니셜 보이시죠?”하연이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다시 보자 확실히 CHY라는 이니셜이 눈에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물론 색상이 아주 연했지만 확실히 새겨져 있었다.그 순간, 진실이 뭔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 판가름 났다.“헐, 진짜네! 어쩜 이니셜까지 똑같이 표절할 수 있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아무리 베껴도 그렇지 어쩜 이니셜까지 베껴? 정말 이것도 인재라면 인재야.”“아까 그렇게 억울
“안 교수님, 아닙니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제가 한순간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서영은 울며불며 애원했다.하지만 안형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한서영 씨, 내 제자로 대학원에 지원할 생각이라면 미리 포기하세요. 실력이 된다 해도 인간 됨됨이가 안 되는 사람은 절대 합격시켜 주지 않을 테니까.”‘어떡해, 이제 끝이야!’안형준에게 대놓고 거절을 받은 순간 서영에게는 이제 막다른 길만 놓였다. 이 바닥이 넓은 것도 아닌데, 앞으로 디자인 업계에 남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한참 동안 멍해 있던 이수애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달려 나와 사정했다.“안 교수님, 서영이 순간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반드시 노력하는 모습 보여드릴 겁니다.”그때 주태식이 끼어들었다.“됨됨이도 안 된 사람은 아무리 성적이 좋아봤자 소용없어요. 다른 전공 알아봐요.”“안 돼요! 안 교수님,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잖아요. 서영은 아직 어린데, 이대로 인생 망칠 순 없어요!”이수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애원했다.그걸 구경하고 있던 주위 사람들은 이수현 모녀에게 손가락질했고, 안형준은 아예 두 사람을 무시한 채 하연에게 걸어갔다.“하연 양이 디자이너 브랜드숍을 운영한다는 얘기는 진작 들었어요. B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라던데. 오늘 보니 역시나 헛소문이 아니네요. 디자인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앞으로 함께 손잡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교수는 하연의 침착하고 태연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태식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안 교수님!”심지어 이수애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안형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이에 이수애는 화가 난 듯 발을 굴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곧이어 주위 사람들도 안형준과 함께 흩어졌지만 오늘 있은 일은 날개라도 달린 듯 B시의 디자인 업계에 소문났
서영은 그 말에 겁을 먹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서준이 정말 이렇게 화낼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엄마...”이수애도 서준이 이토록 모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다급하게 아들을 말렸다.“아들, 너 왜 이래?”“쟤가 이런 사고 친 거 어머니 탓도 있어요. 부모가 돼서 딸자식 너무 싸고돌면 자식 인생 망쳐요.”이수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아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이미 쪽팔릴 대로 팔린 서영은 황급히 도망쳤고, 이수애는 딸이 안 좋은 선택이라도 할까 봐 얼른 뒤쫓았다.“서영아, 엄마랑 같이 가.”하연은 서준의 가족 일에 관심이 없었지만 오늘 일은 그나마 통쾌했다.그때, 상혁이 하연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주며 위로했다.“사실이 밝혀졌으니 우린 이만 가자.”“네.”상혁은 떠나기 전 서준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런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는 눈빛에 서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보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걸 보는 게 더 거슬렸다.“최하연, 목적을 이뤄 아주 의기양양하지?”서준은 한 손을 제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비아냥거렸다.그 말에 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의기양양한 것까지는 없지만 기분 꽤 좋아. 그런데 이건 다 자업자득이야.”서준은 하연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예전의 하연은 이토록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지 않았었으니 말이다.“한서영이 이렇게 된 건 자업자득이 맞지만, 그래도 자비를 베풀 수는 있었잖아.”이게 바로 서준이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기억 속의 하연은 착하기만 해서 어린 여자애의 앞날까지 망칠 정도로 모질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는지.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한씨 가문은 앞으로 이 바닥에 발붙일 수도 없을 거다.“자비?”하연은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내가 자비를 베풀면 한서영이 고맙게 받아들일 것 같아?”서영이 얼마나 사람 속을 긁는데, 자비를 베푼다 해도 뻔뻔하게 굴 게 뻔하다.그때 상혁이 하연을 보호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서준
“무슨 뜻이야?”서준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태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녹음을 꺼내 들었다.“자, 이게 내가 오늘 널 부른 이유야. 이 사건의 진실이기도 하고.”녹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서준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하연 씨도 서영한테 기회를 줬어. 서영이가 그걸 차버린 것도 모자라 도발한 거야.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끝없이 용서해 주고 포용할 수는 없어.”서준은 말없이 손을 그러쥐었다.그 순간 후회가 온몸을 휘감았다.서준은 처음으로 막막한 표정을 짓더니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뒤에야 중얼거렸다.“내가 오해했네...”...“최하연 씨, 잠깐만요.”하연이 떠나려고 할 때, 웬 젊은 남자가 뒤따라 달려왔다.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 하연이 어리둥절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죠?”“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저는 안 교수님의 조교입니다.”남자는 자기소개를 하면서 금색 글씨가 씌어 있는 초대장을 앞으로 내밀었다.“하연 씨, 이건 안 교수님 저더러 특별히 하연 씨한테 주라고 한 초대장입니다.”하연은 얼른 받아 안에 있는 초대장을 확인했다.“교수님께서 오늘 전시회에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여 죄송하다고 이걸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주말에 교수님께서 따로 파티를 열 건데 특별히 하연 씨를 초대하고 싶어 하셨고요.”하연의 눈에는 놀라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B시 디자인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중 한 분이신 안형준 교수의 초대장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하연은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주말에 꼭 참석할게요.”“네, 조심히 가세요.”돌아가는 길에 하연은 초대장을 확인하며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그걸 본 상혁이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하연아, 그 초대장이 그렇게 특별해? 얼굴에 아주 꽃이 피었네?”하연은 싱긋 미소 지었다.“이거 안 교수님 초대장이거든요.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거라고요.”“오! 그러면 엄청 귀한 건가 보네?”“그럼요. 아무튼 이걸 받을 수 있다는 게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자일 뿐인데, 너무 똑똑하면 손해만 볼 뿐이에요.” 남준이 허징인에게 다가가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이제 줘야 하지 않겠어요?” 허징인은 차갑게 비웃으며 얼굴을 굳혔다. “뭐가 그렇게 겁나십니까, 상무님? 제가 약속을 어길까 봐요? 아니면... 그 물건들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요?” “그건 사모님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죠.” 남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징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고, 속으로는 분이 차올랐지만, 상황을 감안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최선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상무님. 이미 약속한 이상, 전 제 말을 반드시 지킬 겁니다.” 허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남준과 눈을 맞췄다. “상무님도 본인의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남준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가 반은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드릴게요.” “안 돼요!” 남준이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사모님한테는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허징인은 눈을 감고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절 죽이세요. 하지만 제가 죽으면 그 물건들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두세요.” “엄마!” 곁에 있던 민찬이 울먹이며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무서워요!” 허징인은 민찬을 꼭 안으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물러서면 끝장이야. 적어도 내 아이는 지켜야 해.’ “상무님,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남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묵했다. 남자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잠시 후 말했다. “죽음도 불사하다니, 사모님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
집에 돌아온 하연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침실 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하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가정부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문틈 사이로 방 안의 하연을 흘깃 바라보며 손으로 가정부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가정부가 물러난 뒤, 상혁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상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는데, 원신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그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상혁은 짧은 문장을 확인한 뒤,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우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마치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이내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하연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상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할 때 마셔.”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우유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회사에 좀 다녀올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상혁은 하연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이 밤중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하연은 살짝 의아해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자는 고개를 숙여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이 난 참 행복해.” 상혁의 눈에는 하연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이 행복이 오래가길,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하연은 상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안기며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요. 정말 행복해
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혁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한 줄기 차가운 빛... 하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가려졌다. “지석 도련님 말씀대로, 형제간에는 서로 도와야 하는 법이죠.” “다만, 부씨 가문의 일을 굳이 외부인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상혁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기운에 압도된 지석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석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슬기가 먼저 나섰다. “하연 씨, 여기 메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맛이 괜찮아요? 추천 좀 해주세요.” 슬기의 말에 하연은 조용히 상혁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자, 상혁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너무 날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 별일도 아닌 걸로 걱정하는 하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상혁은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이 그제야 안심이 되어 바로 슬기에게 메뉴를 추천했다.“오리지널 맛도 괜찮고, 여러가지가 섞인 맛도 좋을 것 같아요. 둘 다 드셔보세요.” “그럼 두 가지 맛으로 각각 한 그릇씩 주세요!” 슬기는 메뉴를 탁 닫으며 밝게 말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석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그가 나가는 것을 슬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석이 자리를 떠나 자, 슬기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두 분의 오붓한 자리를 불편하게 해서요. 집안에서 주선한 선 자리를 억지로 나온 거라...” 여자의 말투에서 묘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슬기는 문득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혁은 그녀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온전히 하연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슬기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눈빛을 외면했다. “그나저나, 하연 씨.” 슬기가 화제를 돌렸다. “최근 하연 씨가 뒤로 물러나고 회사를 최하성 씨에게 맡겼다고 들었어요.”
“하연 씨, 우리 같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슬기는 예상 밖의 대답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연 씨, 이제 저 같은 ‘라이벌’에게 경계심이 풀린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제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할지?” 슬기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그러나 하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주 대표님,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으시면 옆에 있는 분 눈치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슬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 집에서 주선한 맞선일 뿐이라 별로 신경 안 써요. 첫 만남이기도 하고요.”그 순간 뒤에 있던 지한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 대표님,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부 대표님’이라는 말은, 그가 이미 상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한은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곧 혼사를 통해 막대한 사업적 결합을 이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에 지한은 적잖이 긴장했다.“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지한이 하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주슬기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지한은 그저 형식적인 맞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그때 상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SW그룹의 도련님을, 여기서 다 만나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단 한마디로 심지한의 배경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지한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부 대표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
최근 몇 년 동안 H시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번화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도시 풍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상혁은 차를 몰고 하연과 함께 요즘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유명 먹거리 거리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먹거리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양옆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상인들은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다.한참을 걷던 중, ‘10년 전통 국밥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깔끔하고 정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 인테리어는 오래된 가게답지 않게 세련되었고, 메뉴는 벽에 붙어 있어 가격이 한눈에 들어왔다.상혁이 가게를 한참 바라보는 사이, 하연은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기다릴 새도 없이 외쳤다. “사장님, 여기 대표 국밥 하나요!” 사장님은 빠르게 주문을 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못 드시는 재료 있으세요?”“짜지 않게 해주시고, 후추는 빼주세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하연이 주문을 마치자 사장님은 상혁을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뭘로 드릴까요?”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사장님의 깍듯한 존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가게의 음식 나오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국밥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어.” 상혁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상혁은 까다로운 식습관을 가진 어머니인 조진숙의 영향으로 엄격하게 관리된 음식을 먹으며 자라, 이런 길거리 음식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