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호 깼어요?”전화가 연결되고 이우범이 먼저 배인호의 상황을 물었다.병원에서 이삼일을 지키면서 계속 잠을 설치기도 했고 마음의 부담이 커서 잘 쉬지도 못했더니 나는 영혼이 쑥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배인호를 힐끔 보더니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아직이요. 오늘까지 깨어나지 못하면 상황이 심각해져요.”이우범이 내게 말했다.“네,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나도 몰라요. 기다릴 거 같은데.”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배인호가 깨어나지 않는다 해서 그를 내팽개치고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내 대답에 이우범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오늘 왜 나에게 연락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결혼식 마무리를 이우범에게 맡기긴 했지만 나도 요 며칠 내게 바람맞은 하객에게 전화를 돌리며 설명하고 사과했다.비록 결혼식이 장난 같아 보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가짜라 나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수군거리는지도 관심이 없었다.“별일 없어요. 그냥 인호 상황을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 요새 바빠서 보러 갈 시간이 없었거든요.”이우범이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를 속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뭘 속이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우리는 몇 마디 안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배인호 쪽에 명확한 결론이 나면 이우범을 찾아가 얘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결혼식 건은 정중하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전에는 그저 입으로만 감사하다고 말하며 아무런 표시가 없었지만 적어도 선물을 주든 밥을 사주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 돈을 받아준다면 바로 돈을 줄 수도 있었다.“지영아.”이때 김미애가 왔다. 지금 김미애와 배건호는 배인호 집에서 지내고 있다. 한편으로 빈이를 돌보면서 한편으로 내게 도시락을 가져다줬다. 그러면서 나에게 병원에만 있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병원 말고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나는 김미애가 가져온 도시락을 옆에 두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침대에 누운 배인호를 쳐
나는 화들짝 놀라 바로 손을 펴고는 배인호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혹시 깨어날 기미를 놓칠까 봐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아니나 다를까 그의 무명지가 살짝 움직였다. 마치 나비가 살짝 날갯짓하듯 말이다.나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기쁨을 감출 길이 없었고 모든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인호 씨, 깨어나려고 그러는 거죠?”배인호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걸 신경 쓸 새 없이 바로 그의 손을 놓고 병실에서 달려 나가 의사를 불렀다. 동시에 김미애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전했다.——의사가 병실로 달려와 배인호를 검사하더니 확실히 깨어날 기미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깬 게 아니라서 계속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의사가 나갈 때쯤 배건호와 김미애도 도착했다. 배인호가 깨어날 기미가 있다니 둘은 매우 기뻐했다. 배인호 옆에서 쉼 없이 말을 걸었고 목소리로 그를 자극해 그가 완전히 깨기를 바랐다.나는 흥분을 억지로 누르며 옆에서 조용히 배인호를 지켜봤다.“의사 선생님은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어요. 아저씨, 아주머니, 아니면 먼저 들어가실래요?”한참이 지나 나는 입을 열었다.아까는 너무 흥분해 참지 못하고 바로 두 사람에게 알렸지만 사실 배인호가 완전히 깨면 알려주는 게 더 좋았다. 아니면 기대가 커지면 실망도 커지게 된다.“괜찮아. 우리도 여기 있을 거야. 근데 지영아, 좀 쉬어야 할 사람은 너야. 지금 여기서 며칠을 지키는 거야. 들어가서 좀 쉬라고 해도 말을 안 듣고. 그러다 인호가 깼는데 네가 쓰러지겠어.”김미애가 이렇게 말하며 나를 병실 밖으로 몰아세웠다.“가서 한숨 푹 자. 내일 인호 깨면 바로 알려줄게.”“아주머니, 저는 괜찮아요. 지금 힘이 펄펄 나요. 그냥 여기서 같이 기다려요.”내가 거절했다. 김미애가 내 몸이 망가질까 봐 걱정하는 걸 알지만 배인호가 깨어날 기미가 보인다는 소리에 바로 동력이 가득 차올랐다.내가 한사코 거절하자 김미애도 그만뒀다. 셋
나도 가끔은 나 자신에게 왜 다시 돌아왔는지 묻곤 한다. 하지만 현재 배인호를 보면, 충분히 그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그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니 내 마음도 좋지만은 않았다. 아마 많은 사람은 내가 바보 같고, 확고하지 못하다고 욕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완전히 원상태로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도 영원히 확고할 수 없는 것이다.이것은 내가 이성적이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 과도하게 이성적인것이다. 즉, 현생의 배인호는 전생에 그가 지은 죄로 인해 속죄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서란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감정적인 부분에서 나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가 서란을 만난 뒤에도 전생처럼 나에게 그런 지독한 짓을 한적 또한 없다. 그냥 나의 일방적인 전생 기억으로 현생에 그를 심판한 것일 뿐이다.“그냥 아이 때문에 내가 이런다고 생각해요.”나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아 가장 간단하고 직설적인 이유를 찾아서 답했다.게다가 다른 많은 부부도 아이 때문에 다시 결합하는 일도 많으니, 이건 지극히 정상적인 이유이다.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 배인호는 잠시 침묵하다 그제야 답했다.“굳이 이런 나 때문에 마음 돌릴 필요 없어. 만약 네가 진짜 우범이랑 함께하게 된다면, 내가 진심으로 너희 둘 축복해 줄게. 우범이가 너랑 아이들한테 잘해주니까, 나도 거기에 대해서는 별걱정도 없고 말이야.”나는 배인호가 이토록 소탈해지고 모든 걸 놓아버렸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심지어 나와 이우범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다니. 이 축복은 예전처럼 홧김이 아닌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축복이었다.하지만 내가 원한 건 이 결과가 아니지 않는가!“인호 씨 미쳤어요?”나는 화가 났다. 지금 내가 이토록 적극적인데, 내 뜻을 눈치채지 못한 건가?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달려와 이우범과 연기까지 해가며 배인호가 혼수상태일 때 그 옆에서 지켜주기까지 했는데, 그 모든 게 나 혼자 서울로 돌아가려고 그 생쇼를 했던 건 절대 아니다.
“지영 씨, 그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저 때문에 자신을 탓하고 죄책감에 휩싸이지 마요. 제가 한 모든 건, 저 자신이 원해서 한 거니까요. 게다가 처음부터 저는 지영 씨에게 이용당하길 원한다고 분명히 말까지 했고요.”이우범은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걸 눈치채고 정중히 나에게 말했다.그는 내가 답하기도 전에 이어서 말했다.“솔직히 지영 씨가 저랑 결혼식 올리는 거로 인호 자극한다고 했을 때, 저 속으로 너무 좋았어요. 그게 가짜라 할지라도, 제가 바라던 거였으니까 저는 지영 씨랑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거든요. 물론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저 자신이 지영 씨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도 알았고요. 어쩌면 제가 떠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 거예요. 그리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해줘서 고마워요, 저는 그거로 만족해요.”나는 눈시울이 점점 더 붉어지며 그의 말에 어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있을 때쯤, 이우범은 트렁크를 들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방에서 나오더니 거실로 내려갔다.나도 이우범의 뒤를 따라 내려갔고, 계단 입구에서 그의 뒷모습을 향해 앞으로 계속하여 볼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이제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조차 없었다.엄마와 아빠도 위층에서 내려온 이우범을 보면서 그와 몇 마디를 나눴다. 그들의 표정 또한 아쉬운 듯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결과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이우범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로아와 승현이도 내키지 않는 듯 크게 울부짖으며 그를 따라가려 했다. 그는 정원에서 멈춰서더니 쭈그려 앉아 승현이를 안고는 뽀뽀를 건넸다. 그러고는 로아도 안더니 로아에게도 뽀뽀를 건넸다. 이우범의 표정에서도 두 아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아쉬움이 가득했다.“로아야, 승현아. 이리 와!”나는 아이들을 향해 크게 외쳤지만 내 목소리 또한 떨리고 있었다.이우범은 아이들을 놓아주더니 더 이상 나를 보지 않고, 트렁크를 끌며 뒤도 안
내 질문에 배인호의 부모님은 서로 눈빛을 마주하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다.나는 도저히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 또한 이미 명확히 내 의사를 밝혔고, 배인호만 자존심을 내려놓는다면 그와 모든 일을 함께 맞설 수 있는 상태였다.“지영아, 우리가 너를 안 알려주는 게 아니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고충이 있어서 그래. 인호한테 좋은 결과만 생기면 반드시 널 다시 찾아올 거야. 그러니 우릴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되겠니?”김미애가 어쩔 수 없는 듯 답했다.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대답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고, 내 태도 또한 차가워졌다.“그러면 두 분의 뜻은 만약 인호 씨가 회복이 안 되면 저 찾아오지 않을 거란 뜻인가요? 그래요?”내 대답에 그 둘은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내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를 때쯤, 빈이가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할머니. 제발 아저씨 다시 찾아줘요. 지영 아줌마는 아저씨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요!”이렇게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을 왜 배인호만 모를까?나는 배인호가 나를 믿지 못해 내 감정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배인호의 부모님이 빈이의 손을 잡더니, 빈이의 말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빈이야, 우리랑 같이 서울로 돌아갈까?”그 말에 빈이는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빈이는 여기에 남고 싶은 듯했지만, 배인호 부모님에 대한 정도 있기 때문에 아주 난감해 보였다.배인호의 부모님도 빈이의 그 고민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빈이를 입양하고 싶어 하는 거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전에는 내 조건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을 뿐이고, 배인호가 해외로 가서 빈이의 양육권을 뺏어온 거 또한 나를 위해서이다.지금은 배인호가 나를 피하며 만나려 하지 않으니, 가정부가 빈이를 돌봐줄 수밖에 없고, 빈이 또한 분명히 나를 찾아올 것이다.하여 내가 그들에게 답했다.“빈이는 그냥 여기 남겨두고 두 분은 인호 씨만 신경 쓰세요.”끝까지 견지하려 했던
“자자, 우리 지영이가 돌아온 거 격렬히 축하합니다!”정아는 신이 난 듯 술잔을 들며 나를 환영해 주었다.제주도에서 설을 쇠러 서울로 돌아온 것뿐인데, 정아는 엄청나게 오버하면서 난리도 아니었다.세희는 여전히 전처럼 커리어우먼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엄마가 된 후 눈빛이 전보다는 많이 온화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고, 모성애도 뿜어져 나오는듯했다. 이윽고 세희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자, 한잔하자고. 올해에는 나 아이 데리고 너희 집으로 세배하러 가야지. 너 봉투 두둑이 준비해 놓아.”나는 쿨하게 손을 흔들며 답했다.“당연하지. 아니면 너희들도 다 아이들 데리고 우리집으로 와.”나머지 둘도 내 이야기를 듣더니 바로 웃어 보이며 답했다.“좋아 좋아, 이거 네가 그동안 서울에 없었던 벌이니까, 돈 많이 준비해 둬.”친구들의 그런 장난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우리는 각자 결혼 후의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특히 정아는 다시 결합 후 아예 집안에서 여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정아네 시댁에서까지도 그녀를 여왕 대하듯이 대한다는 걸 보면, 이건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게다가 노성민도 자기 잘못을 완전히 뉘우치고, 가끔 자신이 전에 했던 잘못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완전히 모범 남편 납셨네.우리는 서로 술을 마시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이야기 흐름이 결국에는 나와 배인호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배인호가 나를 피한 일에 대해서 그녀들도 전부 잘 알고 있기에, 그녀들 또한 배인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게다가 정아는 더더욱 직설적으로 나에게 말했다.“이젠 그만 기다려. 너 이미 충분히 할 만큼 했어. 더 기다린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고 말이야.”그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강요하지 않고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기다리다가 이미 무감각해졌을지도 모른다.나는 그냥 웃어 보일 뿐, 그녀들의 의견에 반대도 하고 싶지 않았고, 동의 또한 하고 싶지 않았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거리는 조금 한산하지만, 이미 부근 가게에서는 곧 다가오는 새해 분위기로 가득했다. 나는 방금까지도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설날에는 남편이 옆에 있고, 아이들 또한 아빠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행복하고 활기찬 장면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하지만 배인호가 이렇게 빨리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게다가 몸의 건강도 잘 회복되었는데, 일단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잘 모르겠다.배인호는 운전하여 나를 우리집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시각, 시간도 이미 늦은지라 엄마와 아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바로 걸어 나와 확인했다.“지영아, 왜 이렇게 늦게야 왔어?”엄마가 걱정되는 듯 나에게 물었다.그러고는 왠지 익숙한 듯한 이 차를 바라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이윽고 배인호가 차에서 내렸고, 내 엄마와 아빠를 보았을 때의 그 표정은 다소 불안함과 죄책감이 가득해 보였다.“아저씨, 아주머니.”“배인호?”엄마는 배인호가 여기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 깜짝 놀라 하셨다.아빠도 그 뒤에 서서 입을 살짝 벌리신 채 다소 놀라신 듯 보였다.두 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뒤, 배인호에게 불친절한 태도가 아닌 오히려 웃어 보이며 그에게 물었다.“이젠 다 나았어? 나으면 된 거야. 얼른 들어와라!”그러면서 두 분은 우리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갔다.로아와 승현이는 이미 잠에 든지라 그 시각 거실은 아주 조용했다. 아빠는 소파에 앉은 채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으셨지만 바로 엄마에 의해 제지당했다. 앞서 크게 아프셨기에 현재 아빠에게 있어 담배란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이윽고 엄마는 배인호에게 뜨거운 차를 따라준 뒤 아빠 옆에 가서 앉으셨다. 그러고는 나와 배인호를 번갈아 보며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다.비록 배인호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 맞지만, 배인호가 나를 한동안 피하며 나에게 상처를 주었기에 그들은 여전히 배인호에게 의견
배인호의 말을 듣고 난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이윽고 살짝 난처해지면서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배인호는 이미 나의 손을 잡고 아이 침실에서 나와 우리가 지내는 침실로 향했다.난 배인호가 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어 짧디짧은 2분임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거침없이 콩닥거렸다.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배인호는 나를 자기 품으로 끌어안았고 그는 얼굴을 나의 어깨 쪽으로 묻었다.그러고 나서 그는 잔뜩 가라앉은 소리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지영아, 너 그거 알아?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말이야. 일 년 동안 난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어. 심지어 사람같이 붙여서 너 몰래 네 사진도 찍어오라고 지시했었어. 그래야만 짙은 이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 같았고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어. 미안해,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 미안해. 너를 행복하게 해줄 능력이 있어야만 너를 다시 안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그렇게 한참을 말하다가 배인호는 살짝 울먹이기 시작했다.이에 난 숨을 깊이 내쉬었다. 배인호가 안쓰럽기도 하고 어찌할 도리도 없었다.배인호는 나의 결심을 너무 얕잡아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난 어떻게 그를 위안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고 있다.그러다가 내가 선택한 방법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거려 주는 것이었다. 가만히 등만 토닥거리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제 막 토닥거리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온몸이 들리는 느낌이 들었고 이윽고 난 침대에 놓였는데,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인호 씨, 미쳤어요? 회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러면 어떡해요? 그러다가 또다시 척추하고 허리를 다치면 어떻게 할 거예요?”“네가 이렇게 가벼운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배인호는 웃으며 천천히 몸을 숙여 나에게로 다가왔다.우린 한 뺨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그렇게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어 갔고 방 안의 온도도 점점 올라갔다.배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