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호 깼어요?”전화가 연결되고 이우범이 먼저 배인호의 상황을 물었다.병원에서 이삼일을 지키면서 계속 잠을 설치기도 했고 마음의 부담이 커서 잘 쉬지도 못했더니 나는 영혼이 쑥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배인호를 힐끔 보더니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아직이요. 오늘까지 깨어나지 못하면 상황이 심각해져요.”이우범이 내게 말했다.“네,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나도 몰라요. 기다릴 거 같은데.”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배인호가 깨어나지 않는다 해서 그를 내팽개치고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내 대답에 이우범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오늘 왜 나에게 연락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결혼식 마무리를 이우범에게 맡기긴 했지만 나도 요 며칠 내게 바람맞은 하객에게 전화를 돌리며 설명하고 사과했다.비록 결혼식이 장난 같아 보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가짜라 나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수군거리는지도 관심이 없었다.“별일 없어요. 그냥 인호 상황을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 요새 바빠서 보러 갈 시간이 없었거든요.”이우범이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를 속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뭘 속이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우리는 몇 마디 안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배인호 쪽에 명확한 결론이 나면 이우범을 찾아가 얘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결혼식 건은 정중하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전에는 그저 입으로만 감사하다고 말하며 아무런 표시가 없었지만 적어도 선물을 주든 밥을 사주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 돈을 받아준다면 바로 돈을 줄 수도 있었다.“지영아.”이때 김미애가 왔다. 지금 김미애와 배건호는 배인호 집에서 지내고 있다. 한편으로 빈이를 돌보면서 한편으로 내게 도시락을 가져다줬다. 그러면서 나에게 병원에만 있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병원 말고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나는 김미애가 가져온 도시락을 옆에 두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침대에 누운 배인호를 쳐
나는 화들짝 놀라 바로 손을 펴고는 배인호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혹시 깨어날 기미를 놓칠까 봐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아니나 다를까 그의 무명지가 살짝 움직였다. 마치 나비가 살짝 날갯짓하듯 말이다.나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기쁨을 감출 길이 없었고 모든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인호 씨, 깨어나려고 그러는 거죠?”배인호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걸 신경 쓸 새 없이 바로 그의 손을 놓고 병실에서 달려 나가 의사를 불렀다. 동시에 김미애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전했다.——의사가 병실로 달려와 배인호를 검사하더니 확실히 깨어날 기미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깬 게 아니라서 계속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의사가 나갈 때쯤 배건호와 김미애도 도착했다. 배인호가 깨어날 기미가 있다니 둘은 매우 기뻐했다. 배인호 옆에서 쉼 없이 말을 걸었고 목소리로 그를 자극해 그가 완전히 깨기를 바랐다.나는 흥분을 억지로 누르며 옆에서 조용히 배인호를 지켜봤다.“의사 선생님은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어요. 아저씨, 아주머니, 아니면 먼저 들어가실래요?”한참이 지나 나는 입을 열었다.아까는 너무 흥분해 참지 못하고 바로 두 사람에게 알렸지만 사실 배인호가 완전히 깨면 알려주는 게 더 좋았다. 아니면 기대가 커지면 실망도 커지게 된다.“괜찮아. 우리도 여기 있을 거야. 근데 지영아, 좀 쉬어야 할 사람은 너야. 지금 여기서 며칠을 지키는 거야. 들어가서 좀 쉬라고 해도 말을 안 듣고. 그러다 인호가 깼는데 네가 쓰러지겠어.”김미애가 이렇게 말하며 나를 병실 밖으로 몰아세웠다.“가서 한숨 푹 자. 내일 인호 깨면 바로 알려줄게.”“아주머니, 저는 괜찮아요. 지금 힘이 펄펄 나요. 그냥 여기서 같이 기다려요.”내가 거절했다. 김미애가 내 몸이 망가질까 봐 걱정하는 걸 알지만 배인호가 깨어날 기미가 보인다는 소리에 바로 동력이 가득 차올랐다.내가 한사코 거절하자 김미애도 그만뒀다. 셋
나도 가끔은 나 자신에게 왜 다시 돌아왔는지 묻곤 한다. 하지만 현재 배인호를 보면, 충분히 그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그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니 내 마음도 좋지만은 않았다. 아마 많은 사람은 내가 바보 같고, 확고하지 못하다고 욕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완전히 원상태로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도 영원히 확고할 수 없는 것이다.이것은 내가 이성적이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 과도하게 이성적인것이다. 즉, 현생의 배인호는 전생에 그가 지은 죄로 인해 속죄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서란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감정적인 부분에서 나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가 서란을 만난 뒤에도 전생처럼 나에게 그런 지독한 짓을 한적 또한 없다. 그냥 나의 일방적인 전생 기억으로 현생에 그를 심판한 것일 뿐이다.“그냥 아이 때문에 내가 이런다고 생각해요.”나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아 가장 간단하고 직설적인 이유를 찾아서 답했다.게다가 다른 많은 부부도 아이 때문에 다시 결합하는 일도 많으니, 이건 지극히 정상적인 이유이다.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 배인호는 잠시 침묵하다 그제야 답했다.“굳이 이런 나 때문에 마음 돌릴 필요 없어. 만약 네가 진짜 우범이랑 함께하게 된다면, 내가 진심으로 너희 둘 축복해 줄게. 우범이가 너랑 아이들한테 잘해주니까, 나도 거기에 대해서는 별걱정도 없고 말이야.”나는 배인호가 이토록 소탈해지고 모든 걸 놓아버렸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심지어 나와 이우범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다니. 이 축복은 예전처럼 홧김이 아닌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축복이었다.하지만 내가 원한 건 이 결과가 아니지 않는가!“인호 씨 미쳤어요?”나는 화가 났다. 지금 내가 이토록 적극적인데, 내 뜻을 눈치채지 못한 건가?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달려와 이우범과 연기까지 해가며 배인호가 혼수상태일 때 그 옆에서 지켜주기까지 했는데, 그 모든 게 나 혼자 서울로 돌아가려고 그 생쇼를 했던 건 절대 아니다.
“지영 씨, 그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저 때문에 자신을 탓하고 죄책감에 휩싸이지 마요. 제가 한 모든 건, 저 자신이 원해서 한 거니까요. 게다가 처음부터 저는 지영 씨에게 이용당하길 원한다고 분명히 말까지 했고요.”이우범은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걸 눈치채고 정중히 나에게 말했다.그는 내가 답하기도 전에 이어서 말했다.“솔직히 지영 씨가 저랑 결혼식 올리는 거로 인호 자극한다고 했을 때, 저 속으로 너무 좋았어요. 그게 가짜라 할지라도, 제가 바라던 거였으니까 저는 지영 씨랑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거든요. 물론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저 자신이 지영 씨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도 알았고요. 어쩌면 제가 떠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 거예요. 그리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해줘서 고마워요, 저는 그거로 만족해요.”나는 눈시울이 점점 더 붉어지며 그의 말에 어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있을 때쯤, 이우범은 트렁크를 들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방에서 나오더니 거실로 내려갔다.나도 이우범의 뒤를 따라 내려갔고, 계단 입구에서 그의 뒷모습을 향해 앞으로 계속하여 볼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이제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조차 없었다.엄마와 아빠도 위층에서 내려온 이우범을 보면서 그와 몇 마디를 나눴다. 그들의 표정 또한 아쉬운 듯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결과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이우범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로아와 승현이도 내키지 않는 듯 크게 울부짖으며 그를 따라가려 했다. 그는 정원에서 멈춰서더니 쭈그려 앉아 승현이를 안고는 뽀뽀를 건넸다. 그러고는 로아도 안더니 로아에게도 뽀뽀를 건넸다. 이우범의 표정에서도 두 아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아쉬움이 가득했다.“로아야, 승현아. 이리 와!”나는 아이들을 향해 크게 외쳤지만 내 목소리 또한 떨리고 있었다.이우범은 아이들을 놓아주더니 더 이상 나를 보지 않고, 트렁크를 끌며 뒤도 안
내 질문에 배인호의 부모님은 서로 눈빛을 마주하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다.나는 도저히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 또한 이미 명확히 내 의사를 밝혔고, 배인호만 자존심을 내려놓는다면 그와 모든 일을 함께 맞설 수 있는 상태였다.“지영아, 우리가 너를 안 알려주는 게 아니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고충이 있어서 그래. 인호한테 좋은 결과만 생기면 반드시 널 다시 찾아올 거야. 그러니 우릴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되겠니?”김미애가 어쩔 수 없는 듯 답했다.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대답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고, 내 태도 또한 차가워졌다.“그러면 두 분의 뜻은 만약 인호 씨가 회복이 안 되면 저 찾아오지 않을 거란 뜻인가요? 그래요?”내 대답에 그 둘은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내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를 때쯤, 빈이가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할머니. 제발 아저씨 다시 찾아줘요. 지영 아줌마는 아저씨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요!”이렇게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을 왜 배인호만 모를까?나는 배인호가 나를 믿지 못해 내 감정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배인호의 부모님이 빈이의 손을 잡더니, 빈이의 말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빈이야, 우리랑 같이 서울로 돌아갈까?”그 말에 빈이는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빈이는 여기에 남고 싶은 듯했지만, 배인호 부모님에 대한 정도 있기 때문에 아주 난감해 보였다.배인호의 부모님도 빈이의 그 고민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빈이를 입양하고 싶어 하는 거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전에는 내 조건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을 뿐이고, 배인호가 해외로 가서 빈이의 양육권을 뺏어온 거 또한 나를 위해서이다.지금은 배인호가 나를 피하며 만나려 하지 않으니, 가정부가 빈이를 돌봐줄 수밖에 없고, 빈이 또한 분명히 나를 찾아올 것이다.하여 내가 그들에게 답했다.“빈이는 그냥 여기 남겨두고 두 분은 인호 씨만 신경 쓰세요.”끝까지 견지하려 했던
“자자, 우리 지영이가 돌아온 거 격렬히 축하합니다!”정아는 신이 난 듯 술잔을 들며 나를 환영해 주었다.제주도에서 설을 쇠러 서울로 돌아온 것뿐인데, 정아는 엄청나게 오버하면서 난리도 아니었다.세희는 여전히 전처럼 커리어우먼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엄마가 된 후 눈빛이 전보다는 많이 온화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고, 모성애도 뿜어져 나오는듯했다. 이윽고 세희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자, 한잔하자고. 올해에는 나 아이 데리고 너희 집으로 세배하러 가야지. 너 봉투 두둑이 준비해 놓아.”나는 쿨하게 손을 흔들며 답했다.“당연하지. 아니면 너희들도 다 아이들 데리고 우리집으로 와.”나머지 둘도 내 이야기를 듣더니 바로 웃어 보이며 답했다.“좋아 좋아, 이거 네가 그동안 서울에 없었던 벌이니까, 돈 많이 준비해 둬.”친구들의 그런 장난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우리는 각자 결혼 후의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특히 정아는 다시 결합 후 아예 집안에서 여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정아네 시댁에서까지도 그녀를 여왕 대하듯이 대한다는 걸 보면, 이건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게다가 노성민도 자기 잘못을 완전히 뉘우치고, 가끔 자신이 전에 했던 잘못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완전히 모범 남편 납셨네.우리는 서로 술을 마시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이야기 흐름이 결국에는 나와 배인호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배인호가 나를 피한 일에 대해서 그녀들도 전부 잘 알고 있기에, 그녀들 또한 배인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게다가 정아는 더더욱 직설적으로 나에게 말했다.“이젠 그만 기다려. 너 이미 충분히 할 만큼 했어. 더 기다린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고 말이야.”그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강요하지 않고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기다리다가 이미 무감각해졌을지도 모른다.나는 그냥 웃어 보일 뿐, 그녀들의 의견에 반대도 하고 싶지 않았고, 동의 또한 하고 싶지 않았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거리는 조금 한산하지만, 이미 부근 가게에서는 곧 다가오는 새해 분위기로 가득했다. 나는 방금까지도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설날에는 남편이 옆에 있고, 아이들 또한 아빠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행복하고 활기찬 장면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하지만 배인호가 이렇게 빨리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게다가 몸의 건강도 잘 회복되었는데, 일단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잘 모르겠다.배인호는 운전하여 나를 우리집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시각, 시간도 이미 늦은지라 엄마와 아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바로 걸어 나와 확인했다.“지영아, 왜 이렇게 늦게야 왔어?”엄마가 걱정되는 듯 나에게 물었다.그러고는 왠지 익숙한 듯한 이 차를 바라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이윽고 배인호가 차에서 내렸고, 내 엄마와 아빠를 보았을 때의 그 표정은 다소 불안함과 죄책감이 가득해 보였다.“아저씨, 아주머니.”“배인호?”엄마는 배인호가 여기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 깜짝 놀라 하셨다.아빠도 그 뒤에 서서 입을 살짝 벌리신 채 다소 놀라신 듯 보였다.두 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뒤, 배인호에게 불친절한 태도가 아닌 오히려 웃어 보이며 그에게 물었다.“이젠 다 나았어? 나으면 된 거야. 얼른 들어와라!”그러면서 두 분은 우리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갔다.로아와 승현이는 이미 잠에 든지라 그 시각 거실은 아주 조용했다. 아빠는 소파에 앉은 채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으셨지만 바로 엄마에 의해 제지당했다. 앞서 크게 아프셨기에 현재 아빠에게 있어 담배란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이윽고 엄마는 배인호에게 뜨거운 차를 따라준 뒤 아빠 옆에 가서 앉으셨다. 그러고는 나와 배인호를 번갈아 보며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다.비록 배인호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 맞지만, 배인호가 나를 한동안 피하며 나에게 상처를 주었기에 그들은 여전히 배인호에게 의견
배인호의 말을 듣고 난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이윽고 살짝 난처해지면서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배인호는 이미 나의 손을 잡고 아이 침실에서 나와 우리가 지내는 침실로 향했다.난 배인호가 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어 짧디짧은 2분임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거침없이 콩닥거렸다.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배인호는 나를 자기 품으로 끌어안았고 그는 얼굴을 나의 어깨 쪽으로 묻었다.그러고 나서 그는 잔뜩 가라앉은 소리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지영아, 너 그거 알아?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말이야. 일 년 동안 난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어. 심지어 사람같이 붙여서 너 몰래 네 사진도 찍어오라고 지시했었어. 그래야만 짙은 이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 같았고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어. 미안해,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 미안해. 너를 행복하게 해줄 능력이 있어야만 너를 다시 안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그렇게 한참을 말하다가 배인호는 살짝 울먹이기 시작했다.이에 난 숨을 깊이 내쉬었다. 배인호가 안쓰럽기도 하고 어찌할 도리도 없었다.배인호는 나의 결심을 너무 얕잡아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난 어떻게 그를 위안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고 있다.그러다가 내가 선택한 방법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거려 주는 것이었다. 가만히 등만 토닥거리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제 막 토닥거리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온몸이 들리는 느낌이 들었고 이윽고 난 침대에 놓였는데,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인호 씨, 미쳤어요? 회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러면 어떡해요? 그러다가 또다시 척추하고 허리를 다치면 어떻게 할 거예요?”“네가 이렇게 가벼운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배인호는 웃으며 천천히 몸을 숙여 나에게로 다가왔다.우린 한 뺨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그렇게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어 갔고 방 안의 온도도 점점 올라갔다.배인호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